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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6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14 ✦
“이 고통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요한복음 9장 1~5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한국에 다녀올 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책을 한 권 샀습니다. 장애우 아들을 둔 여성이 그 아들을 훌륭한 장애인 수영선수로 길러낸 책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장애인 세계 수영대회에 나가서 세계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세계적인 수영선수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역대 가장 최고의 선수인 박태환 선수의 기록을 넘을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그 선수의 어머니는 크리스천인데,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낸 귀한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남는 그 어머니의 한마디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제 아들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어요.” 그 장애인 아들을 태어날 때부터 돌보면서 ‘내가 없으면 아들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아들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제 마음에도 크게 와 닿았습니다.
장애우 자녀를 두신 분들은 비장애우 자녀를 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굉장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수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100%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이겨낸 그 책의 저자를 보면서 저는 ‘이건 참 귀하다.’ 하고 생각되어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고자 하심입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 마음에는 뭔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은 왜 꼭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하는가? 이런 고통이 없이도 할 수 있지 않으신가? 왜 꼭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특히 믿음생활을 잘하고 아주 신실한 분들이 가끔 엄청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어려움만으로도 굉장히 힘든데 주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합니다. 그것도 신앙과 연결을 시켜서 말합니다. “저것 봐. 저렇게 열심히 믿어도 소용이 없어. 적당히 믿어야 돼.”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도 있고 완전히 그 반대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이 잘 안 하는 중에 어려움이 생기면 “저 사람이 요즘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더니 저런 벌을 받는구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공동의회도 있기에 시간도 부족하고 해서, 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만 오늘 다루어보려 합니다.
1. 고통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1-2절)
8장 끝에 보면 예수님이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하여 성전에서 사람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피하여 성전에서 나가시는데, 가시던 길에 한 맹인을 보십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1절)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것을 요한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 중에 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시각장애인으로서 받은 천대와 수모도 제자들이 직접 목격했을 수 있습니다.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재수가 없다.’라고 하며 피해서 가거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저렇게 되었지.’라고 하며 그를 죄인 취급하고 그 부모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 당시 문화 속에서 이 맹인은 존재 자체가 거추장스러운, 저주받은 존재였습니다. ‘저런 사람은 차라리 나질 말지.’라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안에서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맹인을 함께 발견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2절)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전형적인 시각입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은 그 당시 누구나 유대 사회에서 갖고 있던 생각입니다. 이것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이 사람이 맹인이었다면 그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그 사람 본인의 죄 때문인가가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갑자기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어떤 맥락에서 질문한 것인지는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보통 고난의 원인을 죄로 돌리지 않습니까? 욥기를 보면 그것이 아주 두드러집니다.
욥이 큰 고난을 당하자 욥의 세 친구가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같이 울어주다가 욥이 이야기하기를 시작하니까 듣다 참지 못하고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이렇게 되었지.’라고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것이 욥기의 주된 내용입니다. 욥은 ‘아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게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아니다. 네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 빨리 회개해라.’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당하며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겁니까? 어떤 때 보면 머리가 붙어서 태어나는 아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고대사회 랍비들의 글을 보면 그것이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임신 중에 죄를 지은 경우 태중에 있는 아이도 일정 부분 거기에 관여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창세기 25장을 보면 에서와 야곱 쌍둥이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아이들도 태중에서부터 죄를 지을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그런 맥락에서 이것이 자기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 질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 거듭나는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바리새파이며 유대인 공회원)를 만났을 때 그렇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니고데모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다 컸는데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니까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고 한 제자들의 질문은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9장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전하려는 목적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하시는 일 (3절)
제자들의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답을 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3절)
예수님은 두 가지를 다 부인하십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어머니 배 속에서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번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에서 예수님이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5:14)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병과 죄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죄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일반화시켜서 모든 경우에 다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더 이상 ‘원인’이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원인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라고 하셨으면 무엇 때문이라고 하셔야 하는데,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이고 신선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죄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왔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있는가를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비록 죄로 인하여 고난이 세상에 들어왔고 고난의 책임은 언제나 어떤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니까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고난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 있다는 의미로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예수님을 통해 이 병이 낫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식으로 들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정말 그럴까?’입니다.
사실 이 말은 당사자에게 더 잔인한 말로 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드러낼 목적으로 처음부터 그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또 평생 비참하게 살게 하시는 그런 분이시라는 말입니까?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다.’라고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한 운명론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식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내가 잘못해서 일어나는 어려움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그냥 일어난 일들, 너무 억울한 일들, 기막힌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는데, 우리 중에 누가 그런 것을 일으켰습니까? 그런데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아프고 죽으니 억울하고 기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국에서도 가끔 굉장한 재난이 일어나는데, 최근 들어 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난이 바로 세월호 침몰 사고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정치적으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지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그때 죽은 고등학생들 중에 크리스천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말이 많은데, 분명한 대답은 ‘우리는 모른다.’입니다. 정말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정말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뭔가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죽이셨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어린 자녀를 잃고 통곡하며 슬퍼하는 그 부모들과 가족들과 함께 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해주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신데 미리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으실 수는 없었습니까?’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하지만 그 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여쭈어봐야겠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어떤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시고 그런 슬픈 상황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인간을 꼭두각시나 노리개 정도로 만드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철학 사상 또는 세계관 중에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태엽을 감아서 놓으면 태엽이 돌아가면서 시계가 갑니다. 그런 식으로 시계를 만들어 태엽을 감아놓고 자기가 알아서 가게 한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그런 식으로 만드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신론이라고 합니다. 그런 질문을 한다면 마치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보면 알아서 가게 해놓고 신경을 안 쓰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고난을 당할 때, 또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런지 정확한 답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고난의 이유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비추어진 나 자신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고난의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가? 사실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고난의 이유에 대한 답을 안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고난의 이유를 우리가 알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삶을 그냥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왜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습니까?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지 않습니까?
그것이 교회의 목적이고 목장의 목적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은 여기서 선한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이런 악한 상황을 선으로 바꾸심으로써 사탄이 좋아할 만한 상황을 사탄이 괴로워하는 상황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사랑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고 이갈렙 선교사도 그렇게 열심히 사역하셨는데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서 돌아가셨습니다. 치료만 제대로 받으셨어도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이러한 순교를 통해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한국에 순교의 피가 많이 뿌려지면서 한국에 복음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묻게 됩니다. ‘꼭 세상을 떠나는 게 하나님의 뜻인가?’ 왜 하나님이 미리미리 막아주시지 그냥 데려가셨습니까? 고난 받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은 정말 우연히 주님을 만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우연히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두드러진 것이 에스더입니다. 룻기도 그렇고 특히 에스더서를 읽어보면 정말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이 사실은 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이 사람도 우연히 주님을 만났는데, 그가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중에 부모도 오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니고 20대 청년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연한 만남처럼 보이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시력을 처음으로 찾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20여 년 동안 그가 앞을 못 보고 날 때부터 맹인으로 살아왔던 그 고통스런 세월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까?
차라리 자기 죄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다면 그것이 정말 은혜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앞을 못 보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그 오랜 시간을 고생하게 하셨다면, 물론 기쁘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억울한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애초에 이런 것이 없었으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그의 부모가 얼마나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겠습니까? ‘옆집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는데 왜 우리 아이는 날 때부터 앞이 안 보이는가?’ 얼마나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가 잘 찾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정말로 이 말씀을 믿습니다. 저도 믿고, 여러분도 이 말씀을 믿으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견디기 힘든 상황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있는데 30대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자녀를 키우면서 30년을 눈물과 땀으로 고생하며 키웠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잘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대학에 가고 직장도 좋은 데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8장 28절 말씀에 따라 이 여자 분에게 ‘합력하여 이루어진 선’은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간 것입니까? 혹시 ‘차라리 남편이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니었겠습니까?
이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세상의 복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헷갈리고 혼동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그 선은 그냥 좋은 대학에 가고 병이 낫고 오래 살고 건강하고 이런 것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때 이런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선을 이룬다’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뭘 생각합니까? 세상에서 잘 풀리는 것, 병 없이 건강한 것, 오래 사는 것, 이빨이 튼튼한 것, 세상의 오복, 돈 많이 버는 것, 성공해서 높이 올라가는 것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생각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이 맹인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고난의 문제를 다 극적으로 해결해주심으로 그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 고난 중에 출생해서 고난 중에 살다가 고난 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루는 선’은 단순히 질병에 걸리지 않고, 병이 낫고, 건강하고, 이 땅에서 고난 없이 평안하게 살고,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리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6장 29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뭐냐고 많이 묻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직접적으로 이 맹인에게 적용해보면, 그는 지금까지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지만 사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살지 못했습니다. 눈이 안 보이는 가운데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단순히 눈을 뜬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9장 뒷부분을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꿇어 경배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고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진 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해주신 것,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주신 것, 영생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단순히 눈을 뜨게 해주시고 아무 관계가 없이 그냥 가실 수도 있었지만, 그가 평생 눈을 못 뜨고 못 본 채 살아간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뒤에 바리새인들 이야기를 하시며 그것을 정확히 설명해주십니다. 생명을 얻는 것,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통과 불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 믿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잘 살게 해주고, 세상의 복을 누리게 해주고, 건강하게 해주고, 부자 되게 해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을 것이고, 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주셔서 병만 고치라고 하셨을 것이고, 부자 되는 능력을 주셔서 부자가 되게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 중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의 목적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고난을 주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겪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도 대충 짐작은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그 목적을 믿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맹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의 일, 그 당시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지던 맹인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며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눈을 떴고 구원받았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졌는데, 그 후에 무엇이 됩니까? 그 후에는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후에 하는 일을 보면 마치 그는 ‘작은 예수’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을 이 사람이 하고 예수님이 하실 만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다 허물이 많고 부족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네가 알아서 네 마음대로 살아라.’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목적을 따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명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3. 빛으로 오신 예수님 (4-5절)
이러한 목적을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비단 이 맹인에게만 그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4절)
여기서 우리가 힘주어 읽어야 할 말은 ‘우리’와 ‘하여야 하리라’입니다(we must).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우리’ 즉 제자들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빛을 영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육신적으로 어둠 속에 있었고 과거의 삶이 다 어둠에 속하는 삶이었더라도 빛이 비추어졌을 때 더 주저하지 말고 빨리 빛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이 빛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5절)
빛이 오셨기 때문에 빛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맹인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대신 보여주게 됩니다. 둘째, 이 맹인의 모습은 곧 제자들이 배워야 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맹인인데, 맹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거지였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가능합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이고,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사람처럼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를 하려고 좇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가 없이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수님을 증거하며 빛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끝이 아닙니다. ‘예수 천당’이 끝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사는 것, 소위 ‘성화’의 과정입니다. ‘받은 구원’ 다음에는 ‘받는 구원’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곧 떠난다는 것을 암시해주시는데,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기회가 늘 열려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이 가시면 누가 이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까? 바로 맹인이었다가 나음 받은 이 사람, 그리고 제자들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8장 12절에서 자신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그분이 세상의 빛이시라면 예수님이 떠나시고 세상에 안 계시는 지금은 누가 빛이고 누가 빛의 역할을 합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나중에 이 제자들, 곧 사도들이 그 역할을 감당했고, 그 후 계속 복음이 전해지고 시대가 흐르며 모든 성도들이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그 일을 감당하게 해주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이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바로 교회와 예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과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맺는 열매를 보고 세상은 주님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시면서 “너희의 착한 행실로 빛을 드러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이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이 그 장애를 가지고 이때까지 산 것은 특별히 그에게 죄가 많거나 부모에게 죄가 많아서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만 죄인이라서가 아닙니다. 또 그가 고침을 받아 남은 생애를 이제 편안하고 평탄하게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해주시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고쳐주심으로써 그가 주님을 의지하고 믿게 해주셨고, 영생으로 들어가게 해주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고,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타내기를 원하신 일이고,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비참한 일을 당하지는 않지만, 이번 선교사님 가정처럼 어렵고 슬프고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왜 그런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당사자를 통해 나타내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저 사람에게는 왜 저런 일이 일어날까? 저 사람은 뭔가 죄를 지은 게 아닐까?’ 하는 태도가 아니라, ‘나에게도 주신 사명이 있다. 나에게도 주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신 목적이 있는데 내가 그 동안 너무 잊고 살았구나. 정신을 차려야겠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결단하며 나아감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우리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