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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JB98Qro7vQE?t=1938

 

 

2021523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15

왜 이런 기이한 치유 방식인가

(요한복음 96~12)

 

[들어가는 말]

 

어릴 때 모기에게 물리면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물린 곳에 바릅니다. 그러면 잘 낫습니까? 전혀 낫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벌레에 물리면 침을 바릅니다. 의학적으로 안 좋다고 하는데도 그렇게 합니다. 또 아이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정할 때 손바닥에 침을 뱉은 후 다른 손으로 탁 쳐서 튀는 방향으로 가도록 결정하기도 합니다.

 

건강한 성인의 입 안에는 하루에 1리터에서 1.5리터의 침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침은 입속 세균을 죽여 입 안을 보호하고 음식을 부드럽게 만들어 소화를 돕는 기능을 합니다. 치아 표면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씻어 내거나 입 안을 산성에서 중성으로 만들어 충치를 예방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잘 때 입을 벌리고 자면 침이 말라서 치아가 썩게 되니까 되도록 입을 벌리고 자지 않도록 애써야겠습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침이 많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청소 역할이 미흡해서 입안에 박테리아가 늘어나고 냄새가 나는 겁니다.

 

침이 부족해서 입이 마르면 입 속의 점막이 위축되고 혀에 백태가 많이 끼게 되어, 염증이 잘 생기면서 입안 점막에 궤양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침이 부족한 증상이 구강건조증인데, 그것이 심해지면 정확한 발음도 어려워지고 미각을 잃어버리는 부작용까지 생길 수 있다고 하니까, 침은 건강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긴 해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침은 더럽게 느껴집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사람들이 침을 칵 퉤 뱉는 경우가 있는데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 중에 침 뱉는 장면을 자주 보는데(특히 야구) 그것도 더럽게 느껴집니다. 또 사람들이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상대방을 경멸하고 모욕을 주는 의미로 그러는 건데, 그것 역시 더럽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침은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맹인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기이한 방식, 비위생적인 방식, 더러운 방식으로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까?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뜻 (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6-7)

 

이 말씀이라는 것은 5절에 나오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 말씀을 하신 후 땅에 침을 뱉으시고 그것으로 진흙을 이겨서 이 사람의 눈에 붙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실 때 침을 사용하신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귀가 안 들리고 혀가 어눌한 사람을 고치시면서 손가락에 침을 바르신 다음 그 손가락을 그 사람의 혀에 대며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7:33). 또 다른 맹인을 고치실 때는 직접 눈에 침을 뱉어서 고치신 적도 있습니다(8:23).

 

물론 고대시대에는 침이 꼭 더러운 의미보다는 뭔가 신기한 효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신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들을 포함해서 오늘 본문의 경우에도 침이 무슨 약처럼 사용되었거나, 주님의 침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어서 신비로운 것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옛날 부흥사 목사님들이 농담 삼아 자주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부흥회에서 여러분, 앞자리에 앉으세요. 설교자가 설교할 때 침이 튀는 것은 은혜의 침입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침을 많이 맞아야 은혜를 많이 받고 복도 받고 병도 고침을 받습니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로운 게 아니라 더러운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만으로도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에게 눈 떠라.’ 하면 안 고쳐지겠습니까? ‘얘야, 눈을 떠라.’ 하시면 당연히 고쳐집니다.

 

이때 예수님이 맨땅에 침을 뱉어 눈에 바를 정도의 진흙을 만들 정도라면 침을 얼마나 많이 뱉어야 합니까? 한두 번 조금 뱉어서는 진흙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굉장히 많이 뱉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막 쥐어 짜내면서 뱉으셨을 것이고, 침을 뱉은 후 다시 고일 때까지 기다렸다 또 뱉어야 하셨을 테니까 시간도 꽤 걸렸을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맹인은 이 장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은 청각이 발달했으니까 예수님이 침을 칵 퉤 하며 뱉는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이상했겠습니까? 그 소리가 얼마나 더럽게 들렸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정말 엽기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침을 뱉어 만든 흙 반죽을 이 맹인의 눈에 바르십니다.

 

침을 뱉고 진흙을 만들고 그것을 눈에 붙여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이 흙에 웬만큼 강한 접착력이 있지 않고서는 진흙의 무게 때문에 또는 마르기 때문에 그것이 몇 십 분 동안 계속 얼굴에 붙어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침이 요즘의 강력 접착제(Super Glue)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흙이 흘러내렸을 텐데, 그러니까 맹인이 두 손으로 붙잡고 가거나 아니면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상태에서 가야 하니까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실로암 못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이 지점이 어디인지를 모르니까 얼마나 걸려서 가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걸어서 어디까지 가야 한다면 아주 불편합니다. 눈의 진흙을 붙들고 가면 지팡이를 못 짚으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인도해주어야 하고, 아니면 뒤로 젖히고 가야 하니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붙여 주신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 떼어주시면서 이제 눈을 떠라.’라고 하시면 되는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라고 하시니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십니까? 그런 것 필요 없이 말로도 고칠 수 있지 않으십니까?

 

바로 얼마 전 오병이어의 기적 때 어디서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냥 축사하시고 나누어주니까 음식이 늘어났습니다. 별 행동은 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그냥 나아라.’ 하시면 되는 건데, 아니면 붙여주신 다음 떼어주시면 되는 건데, 굳이 실로암 못까지 가서 자기가 씻으라고 하시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환자들을 치유해주실 때 다른 방법들을 쓰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 방법을 쓰셨다는 것은 뭔가 이 사람에게만 특이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안 하셨는데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셨다는 것은 이 사람에게 뭔가가 필요했던 겁니다.

 

여기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게 뭡니까?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먼저 배를 타고 가게 하시고, 제자들이 물결로 고생하니까 물 위를 걸어서 그들을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유령이다하며 무서워하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니 두려워 말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나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인데, 이것이 바로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듣던 말입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신 분의 이름이 뭐냐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라고 했을 때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꾼 것이 바로 에고 에이미나다.’입니다. 이렇게 하신 적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 아닙니까?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은 우리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과 사람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창조주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서 그를 낫게 해주시는 것도 예수님이 맹인의 눈만 뜨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단지 이 맹인의 눈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새 창조물로 새롭게 만드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어 세운 사람들이 세 종류가 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예언자)입니다.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의 종으로 임명했는데, 예수님은 여기서 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게 아니라 진흙을 만들어서 그의 눈에 붙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제 이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일을 할 하나님의 종으로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흙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이제는 흙을 이겨서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단순히 눈만 뜨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셔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고자 하시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가 단지 날 때부터 못 보던 눈이 열리는 게 아니라, 영적인 눈이 열려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사명 가운데 살아갈 것을 암시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 다 해주시는 게 아니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사람을 향한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지만, 그것을 그냥 다 해주시거나 로봇처럼 조종하시는 게 아니라 네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네가 가서 눈을 씻어라.’ 하시며 실로암으로 보내십니다.

 

실로암이란 말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실로암이 남성 동사인데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성이니까 보냄을 받은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냄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의 자기소개입니다.

 

지난 번 본문의 4절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자신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고(4:34), 자신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만 할 뿐이며(5:30, 6:38),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만 말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번 병자를 고쳐주신 베데스다도 있고 강도 있고 시냇물도 있는데 왜 굳이 실로암 못으로 보내셨을까? 그 이름이 보냄을 받은 자또는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가진 실로암으로 보내신 이유는, 바로 이 사람을 예수님이 보내신다는 겁니다. 이제 이 사람이 예수님의 보내신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전하는 일꾼으로 사용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보내는 자다. 네가 이 사명을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면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것을 처음부터 다 깨달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약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뒤에 보면 이 사람이 놀라운 증언들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맹인이 찾게 된 것은 사실 시력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단순히 눈만 뜬 게 아니라 사명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사람 입장에서 거기 가는 게 얼마나 불편합니까? 얼마나 짜증납니까? ‘그냥 고쳐주시지 왜 굳이 거기 가서 씻으라고 하나? 씻으면 낫겠나?’ 의심도 들었을 것이고 짜증도 날 만한 상황인데 그는 순종해서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112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특권)을 주셨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미 약속해주신 대로 이 사람은 다시 태어난 겁니다. 새 생명을 얻은 겁니다.

 

눈에 진흙을 붙인 채로 실로암까지 가서 씻는 일은 아주 불편하고 힘든 일이었겠지만, 여기에 순종하며 나아갔을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또 그분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를 증거하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방법으로만 인도해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형통하고 잘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오하이오 주지사가 이번 수요일부터 일주일에 한 명씩 추첨을 해서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에게 백만 불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에 되게 해주십시오.’ 이왕이면 하나님이 확 주셔서 크게 되고 잘 살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보통 원하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입니다. 원하지 않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발표된 이후에 오하이오 백신 접종이 18%가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들 기대하는 게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고 내가 하고 싶은 방향과 방식으로 인도해주시면 좋은데,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침을 뱉어서 진흙을 만들고 그것을 눈에 바르는 것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방식인데, 이렇게 이해가 안 가는 방식, 짜증나는 방식, 어렵고 불편한 방식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 한마디로 눈 뜨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아주 불편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하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것을 하실 때 분명히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하시는 게 아니라 뭔가 뜻이 있습니다. 확실한 뭔가가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아주 극적인 방법도 있고, 어떨 때는 아주 평범한 방법도 있습니다. 화가 날 만큼 바보스러워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신뢰와 순종입니다.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도를 우리가 100% 다 이해하지 못하니까 짜증이 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알면 , 그렇구나.’ 하며 감사하고 순종을 금방 할 텐데, 그것을 모르니까 짜증내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그 뜻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요구한 적이 없는 불편한 일을 이 맹인에게 요구하셔서 믿음이라는 것은 순종의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혹시 이해가 안 가고 어렵고 불편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사명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맹인에게 주어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신 순종의 요구는 주님께서 그를 통해 세상에 뭔가를 이루시기 위한 특별한 사명에의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의 반응 (8-12)

 

이 맹인이 눈을 뜨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8-9)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지금 두 눈으로 이 사람을 똑똑히 보고도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맞나?’ ‘아냐, 비슷한 사람이야.’라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이 구걸하며 살아가던 모습을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보았습니다. 이웃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나니까 실제로 못 알아보았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들의 이러한 반응은 진짜 몰 알아보았다기보다는 못 믿겠다는 반응으로 보는 게 더 맞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분들은 눈을 떠도 뭔가 초점이 안 맞고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의 그를 기억했는데 지금 쌩쌩한 모습으로 오니까 못 알아보는 게 무리가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이 사람이 그 사람 맞나?’라는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달라졌지?’라고 하는 것이 맞는 반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사람 별로 변한 게 없네. 똑같네. 하는 짓도 똑같고, 생각도 똑같고, 성향도 똑같네.’라고 하면 문제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지?’라고 하는 게 정상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새 창조의 비밀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예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기쁨, 예수님께 매여 살며 종이 되는 기쁨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것이 정상입니다. 믿은 후나 믿기 전이나 그저 성경을 들고 교회 예배에 오는 것 밖에 달라진 것이 없다면 그럴듯한 종교 하나 가지게 된 것 외에 무슨 다른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면,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을 바꾸어 가십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정말 믿었는지 체크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순간에 이 세상과 구별된 새로운 백성으로 살아갈 힘을 얻고, 또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변화가 되어 갑니다.

 

이렇게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뜬 것을 사람들이 보고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와 비슷한 반응들이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면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분은 메시아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어떻게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나오느냐? 믿을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된 이 사람도 지금 예수님과 비슷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여러 가지 이상한 반응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 사람도 바로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앞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대표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가 한 대답이 이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이런 말을 막 쓴 게 아니고 다 의도가 있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니까 그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라”(내가 그 사람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헬라어로 뭔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에고 에이미’(나는 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다라는 단어가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그 맹인이었고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이에요. 내가 그 사람 맞는다니까요!’라고 한 번만 말한 게 아니라 계속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이상한 반응을 보이니까 내가 그 사람 맞는다니까요. 내가 그 사람이에요. 내가 그 맹인이에요. 내가 그 걸인 맞아요.’라고 계속 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이상입니다. 8장에서 예수님이 세 번이나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뭡니까? 맹인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이 사람도 예수님이 하신 그 사명을 그가 받아서 할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 암시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는데, 맹인이었던 사람도 이제 눈을 뜨고 예수님이 빛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새롭게 되어 새로운 사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 그를 추궁합니다. ‘어떻게그런 일이 벌어졌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0-12)

 

이 사람은 벌어진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쳐준 분이 예수라는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고, 그 동안 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남들 앞에서 제대로 말할 기회도 갖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한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파문시키겠다.”라고 했고 나중에는 잡아들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새롭게 하신 이는 예수님이시다.”라고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하고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 사람이 이처럼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까?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 그의 인격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다고 전부 다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가다가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 명 중 아홉 명은 자기 길을 가고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시합니다. 그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인데 그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는데, ‘이것들이 괘씸하고 배은망덕하게 은혜를 모르네?’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이 그 아홉 명을 가리키셨는가 하면 왜 이 사람밖에 나와의 관계를 세우는 데 관심이 없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의 병인 나병에서 놓임을 받았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까? 병이 나았다고 된 게 아닙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몸만 낫고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안타까움을 이야기하신 것이지 배은망덕하다고 하신 게 아닙니다. ‘몸만 낫고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하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나가는 말]

 

사회학자이자 목사이며 여러 책들을 쓴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라는 분이 있는데, 필라델피아 근교의 이스턴 대학교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쓴 책 중에 <당신이 이제껏 들어온 모든 것은 틀렸습니다>(Everything You've Heard Is Wrong)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못 다 이룬 자기 사업이나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는 자를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내가 돈을 좀 더 못 벌었다’, ‘좀 더 큰 사업을 이루지 못했다’, ‘더 높은 직책에 오르지 못했다하면서 후회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봤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죽기 전에 무엇을 후회합니까? 바른 삶을 살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후회합니다. 미워해서는 안 될 사람을 미워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했던 것, 즉 사랑하는 자녀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어주지 못했음을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과 인격적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의 인격 앞에 내 인격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하는 아픔과 고난은 결코 불행일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닥친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난 일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격적으로 나를 만나주시고 사귀어주시려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무엇을 후회할 것 같으십니까? 우리도 대부분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후회할 것은 대부분 더 사랑하지 못한 것, 남을 미워한 것 등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깨어날 텐데, 그런 후회를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못해서 후회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살았기에 이런 후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한 명이라도 더 영혼 구원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더 제자로 자라고 남들도 제자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이웃을 사랑했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우리 생이 끝나야지 내가 제대로 못해서 안타깝다.’라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사람에게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것은 큰 아픔이며 고통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사랑과 신뢰와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비밀을 깨달은 미국인 신앙 선배가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 여사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 처방으로 6개월 만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앞을 못 보고 살았고,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찬송시에 담았습니다. 그분의 찬송시가 우리 찬송가에도 여러 곡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가 좋아하는 곡들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고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고 칭찬받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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