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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8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8 ✦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
(요한복음 4장 43~54절)
[들어가는 말]
아주 오래 전인 1859년 6월 30일, 프랑스의 줄타기 곡예사 샤를 블론딘(Charles Blondin)이라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건너가는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수면에서 48미터나 되는 높이에 설치된 외줄을 타고 장대 하나로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335미터 길이의 밧줄 위를 걸어간 것입니다.
40파운드 무게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던 블론딘이 마침내 맞은편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러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수많은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습니다. 블론딘은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에 보답이라도 하듯, 또 다시 뒤로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건너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자유자재로 오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모든 묘기를 마친 블론딘은 지켜보던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누군가를 등에 업고도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수가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관중들은 “그럼요. 믿습니다!” 하고 열광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딘은 다시 외쳤습니다. “그럼 누가 제 등에 업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제 등에 업혀서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관중들이 침묵에 빠졌습니다. 혹시라도 블론딘과 눈이 마주칠까봐 애써 시선도 외면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블론딘은 관중 가운데 있던 한 남자에게 “당신은 날 믿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지목받은 사람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히겠습니다.” 하며 그에게 업혔습니다. 그 남자를 등에 업은 블론딘은 이전 어느 순간보다 더 신중하게 로프에 올라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등에 업고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넜습니다.
이것을 본 관중들은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더욱 뜨겁게 환호하고 박수 치며 열광했는데, 그때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같이 건넌 사람이 해리 콜코드(Harry Colcord)라는 사람인데, 그는 다름 아닌 블론딘의 매니저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말이나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관중들은 그의 묘기를 직접 자기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믿는다고 큰소리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등에 업혀서 같이 폭포를 건너갈 마음은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럼 오십시오.” 그러나 아무도 안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업힌 그의 매니저, 블론딘의 질문 앞에 믿는다고 대답하며 그의 등에 업히고 같이 건넜던 콜코드만이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진짜로 그를 믿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크리스천’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believer)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곧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말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너는 나를 진짜로 믿느냐?” 우리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오늘 점검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진짜 믿음을 갖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1.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 (43~45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3절)
지난번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이틀을 더 머무시면서 그들과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그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갈릴리로 떠나가십니다.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던(3) 원래 계획대로, 사마리아에 잠시 머무셨다가 갈릴리를 향해 가십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등장합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4절)
친히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떠돌던 격언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인데, 다른 복음서에도 이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세상에서 예수님이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향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오해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뜻밖의 환대를 뒤로 하고 고향인 갈릴리로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배척과 거절이라는 선지자의 길, 사실은 선지자보다 위대하신 메시아의 길을 걸어가기 위함입니다. 외면과 거절이 기다리더라도 그들 역시 복음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제가 책에서 읽은 것인데, 오래 전 어느 목사님이 고등학생 때 이민을 와서 고등부와 대학부 때 어느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갔는데, 마침 자기 모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불렀습니다. 그 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풀타임 부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마침 1년 동안 안식년을 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시였지만 졸지에 26살의 나이로 담임목사 사역을 했다는 겁니다. 주일예배 설교, 수요예배 설교, 새벽기도, 성경공부 등을 모두 인도했습니다. 맡은 첫 주일에 주일 설교를 했는데 예배 후 성도들이 예배당을 나가면서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평소에 잘 아는 집사님이 손을 꼭 붙잡으시더니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가 아니라 “제법인데.”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 교회에서 자란 분이니까 어른이신 집사님이 젊은 목회자에게 나름대로 잘한다고 칭찬을 한 겁니다. 그때 이분이 느꼈다고 합니다. ‘아,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니 진짜구나.’ 하고 실감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영어권 목사님도 자기가 자라난 교회에 부목사로 갔는데 자기를 목회자가 아니라 아이 취급을 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어릴 때 개구쟁이 시절부터 자랐으니까 어른들은 자기를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아, 예수, 걔, 내가 잘 알지.’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정말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법이 없다.’라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44절 맨 앞에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나와 있는 단어가 있다는 겁니다. 44절 첫 부분에 ‘가르’(gar)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for’(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43-44절을 직역하면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이상한 논리 아닙니까?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는데, 왜냐하면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게 말이 안 됩니다. ‘갈릴리로 가셨다. 왜냐하면 환영을 받기 때문이다.’가 되어야지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이상합니다. 사마리아에서 환대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다시 배척을 받는 선지자의 자리로 가기 위해 환영해 주지 않을 고향으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갈릴리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과는 반대 되는 반응을 보입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5절)
갈릴리에 들어서니까 예수님 일행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절기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하신 일들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 외에도 병 고치는 일과 귀신 쫓아내는 일들을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으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 사람들에게 존경보다는 배척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뜻밖에도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로 환영한 것입니까? 실제로는 그게 아닙니다. 4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갈릴리 사람들이 겉으로는 예수님을 환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진짜로 환영한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짜로 환영한 게 아니라, 자기들 식으로 환영한 겁니다. 환영한 건 맞는데, 자기들 식으로 환영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메시아(구원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 즉 성전 청결과 기적 등을 보니까 참 놀라운 분이라고 여기고 환영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으로부터 수탈을 많이 당한 지역입니다. 어디서 쳐들어오면 항상 북쪽부터 오기 때문에 이방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중앙정부의 힘이 잘 미치지 않는 변방입니다. 그래서 항상 반역적인 기질이 다분한 곳이 갈릴리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습니다. 시골 촌사람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도 자기들과 같은 시골 촌사람인데 예루살렘에 가서 그 오만한 종교지도자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으니까 막 박수를 치고 환영하면서 ‘잘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또 뭡니까? 예수님이 자기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그러한 이기적인 믿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43-45절은 앞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 사건과 뒷부분인 왕의 신하의 아들 사건을 아주 잘 연결하는 내용입니다.
2. 아픈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요청 (46-48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6절)
오늘 예수님께 나온 사람은 왕의 신하인데, 그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 보면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하면서 2장 1-12절 사건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54절)
첫 번째 표적은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표적이었고, 두 번째는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2장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기적과 오늘 본문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기적은 모두 갈릴리 가나라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건을 모두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헬라어로는 ‘세메이온’, 영어로는 ‘sign’)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miracle이 아니라 sign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나서 놀랍다는 것이 아니라, 이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게 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을 보라는 사인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미러클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초반부에 예수님이 일으키신 두 가지 기적이 ‘표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예수님은 그것을 충분히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그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그런데 여기 두 번째까지는 숫자를 세고 세 번째부터는 숫자를 세지 않습니다. 각자 알아서 세라는 것입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왕의 신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 ‘왕’은 그 당시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래서 이 신하는 그를 섬기는 고관이거나 왕족 일가였을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나중에 세례요한을 죽이는 사람이고, 헤로디아와 결혼한 사람입니다. 헤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분봉왕’이라고 하니까 무슨 양봉업자(?)인가 하는데, 그게 아니라 분할해서 봉건제도를 갖추고 다스리는 왕이라고 해서 한자어로 ‘분봉왕’(Tetrarch)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역을 몇 개로 나누어서, 유대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다스리고, 나머지는 헤롯 일가에게 다스리게 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역과 요단강 동쪽의 베레아(Perea)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이 왕의 신하는 분봉왕 헤롯을 섬기는 신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아주 고관인데, 당연히 재물이 많고 부유하며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즘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고위층 비리들이 많고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그 옛날은 민주주의 사회도 아니고 봉건사회이며 왕의 마음대로 했습니다. 왕이 주고 싶으면 주고 빼앗고 싶으면 빼앗는 겁니다.
이 사람은 왕에게 잘 보여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눈앞에서 아들이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권력이 있고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높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헤롯 왕실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헤롯 왕실은 로마가 임명했기 때문에 로마와도 연줄이 있습니다. 사회에도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돈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자리도 아니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살아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헤롯이 이것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로마 총독이 해줄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 동안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의사들을 찾아갔겠습니까? 이 사람이 의사에게 안 가고 예수님에게 직접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녔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엄청난 돈을 들였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권력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사람들을 오게 하고 가게 하고 심부름 시키고 아무리 해봐야 아들이 낫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정말 잘한 결정입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에게는 재산이 많았고 권력도 있었지만, 막상 문제가 닥치니까 그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지금도 계층을 자꾸 나누고 ‘너와 나는 다르다.’라고 하고, 저번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는 당신들은 상종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인종 간, 계층 간에 얼마나 갈등이 많습니까? 나라 간에도 그렇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민족끼리 인종 청소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다 살인 아닙니까?
조금 다르다고 그렇게 서로 죽이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인데, 그렇게 나누면서 ‘너는 저 밑이고 나는 이 위다. 너는 가난하고 나는 부자다.’ 하고 아무리 나누어봐야, 이런 문제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똑같이 닥칩니다. 조금 의료 혜택을 더 보느냐 덜 보느냐의 차이지, 문제는 똑같이 누구에게나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돈이 있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어도,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이 사람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이러한 슬픔과 염려의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도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젊은이든, 어르신이든, 중년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다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 어려움이 오느냐이지, 오느냐 안 오느냐가 아닙니다. 다 옵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관건은, 어차피 문제가 오기 때문에 안 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떤 문제가 닥쳐올 때 어떻게 반응하겠는가를 평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 왕의 신하는 그때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예수라는 분이 유대에 갔다가 자기가 있던 가버나움에서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가나라는 곳에 왔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그분을 만나야 되겠다고 하고 이곳에 달려온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7절)
그의 아들이 무슨 병인지에 대해서 요한복음에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죽을 병이라는 겁니다. 지금 자기 아들의 생명을 위해서 그는 예수님께 간절히 애원합니다. ‘청했다’는 말이 아주 애원했다는 말입니다. 간절히 애원합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초라한 행색이 아니었겠습니까? 떠돌이(?) 랍비이니까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얼마나 화려한 옷을 업었겠습니까? 왕의 신하이고 고관인데 같이 온 사람들도 그렇고 아주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고 보기만 해도 부티가 흐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이 체면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 앞에 막 꿇어 엎드리는 겁니다. 지금 이것이 체면을 구기는 일인지, 옷이 더러워지는지 상관없이 예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향한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꼭 어떤 어려운 문제가 닥쳐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곤 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가 9.11 테러사태 20주년이 되는 해인데, 그때 비행기로 테러 공격을 하려고 테러리스트들이 시도할 때 승객들이 협력해서 대항하는 바람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비행기에 있던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그때 ‘내가 숨겨놓은 게 있는데 못해서 억울하다.’라고 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하며 서로 눈물로 마지막 통화를 했다는 겁니다. 모두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그 마지막 순간에 찾은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것들을 깨달아도 늦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처럼 주님을 붙들 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바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응답해주시기는 하지만,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응답을 주시더라도 여기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말씀하시는 않으십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8절)
아니, 예수님이 왜 이렇게 이상하고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까? 왜 바로 고쳐주지 않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가슴이 너무 아프고 한시가 급해서 찾아온 이 사람에게 무슨 엉뚱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마치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몰라주고 아주 냉정하고 차갑고 매몰차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적이 또 있으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역에 가셨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찾아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온 것이지 이방인들을 위에서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하셨는데, 그 여인은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네 믿음이 크다.’라고 하시며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매몰차게 대하시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기적만 맛보고 병 고침을 받고 그냥 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주님과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정말 구주로, 주인으로 만나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게 가장 중요하지, 병만 낫고 가면 또 병이 날 수도 있고 또 무슨 일이 벌어지면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절대로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거나 기분 나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때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그러셨고, 지금 이 왕의 신하에게도 그러시고, ‘네가 갖고 있는 믿음은 뭔가 기적이 일어나고 기사를 보는 그 정도 수준이다. 그것 갖고는 안 된다. 진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것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로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여기서 ‘너’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라고 하시면서 2인칭 복수를 쓰시는데, 그러니까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기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지만 갈릴리 사람들도 같이 있지 않습니까?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왜 환영했습니까?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니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너희는 도대체 믿지를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즉, ‘너희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해주어야 너희가 믿지, 너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너희들은 관심이 없고 믿지 않는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수준의 믿음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나와의 관계가 세워져야 한다. 그 믿음으로 들어가라.’ 하고 지금 여기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진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시는 예수님 (49-54절)
그것을 왕의 신하가 약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49절)
이 사람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더 매달립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이 확실히 연약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처음에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47)라고 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내 아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가버나움에 나와 같이 가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49절에서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여’라고 했지만 Lord가 아니라 ‘선생님’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히 예수님이 고쳐주실 수 있다고는 믿었지만, 예수님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아들의 병이 낫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같이 가서 고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굉장히 한정 짓고 있습니다. ‘요렇게만 해주십시오.’ 예수님은 더 크게 해주려고 하시는데 ‘요렇게만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 처음 기도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닌데, 기도해도 잘 안 되고 엉뚱하게 상황이 진행되면 계속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이 사람이 그래도 훌륭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기도해도 잘 안 된다고 할 때,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가 얼마나 기도를 합니까? 그러므로 그럴 때가 더 기도할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 예수님이 이 사람의 아들을 바로 고쳐주지 않고 왜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까? 단지 그 아이의 육체적인 병만 고쳐주어서는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을 지금 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너의 아들의 육체만이 아니고 너와 너의 가족들의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한다. 너희가 나와의 관계를 세우기 원한다. 너희가 하나님과의 진짜 관계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몸만 낫고 영혼은 계속 병들어 있거나 죽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가끔 아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간절히 기도합니다. 급해서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제목이 있으면 중보기도실에 중보기도 카드를 내십시오. 창피한 게 아닙니다. 같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급한 기도제목이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기도해주십시오.’ ‘가족이 병이 났는데 고쳐주기를 기도해주십시오.’ ‘내가 병에 걸렸는데 고쳐주시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물론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당연히 기도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 병이 낫고 그 다음이 뭔가 하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병이 나아서 건강한 몸으로 이상한 데 가서 이상한 짓을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게 중요한 겁니다. 병이 나음으로써 내 병을 낫게 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그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같이 기도했을 때 응답받고 문제가 해결된 후 믿음의 길을 떠나서 마음대로 살아가는 일이 종종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0절)
이제 드디어 아이의 아버지가 온 마음으로 간절히 듣기를 원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가도 좋다. 네 아들은 죽지 않았다. 사랑하는 너의 아들이 지금 살아났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왕의 신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기도를 거부하신 것도 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이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이 병들어서 앓고 있는 가버나움으로 자기와 같이 가서 고쳐달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방법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방법으로 해주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지만 그의 방법에 대해서는 거절하신 겁니다. 아들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거절하셨습니까? ‘예수님, 제 아들이 앓고 있는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고쳐주십시오.’ ‘아니다, 너와 함께 그리로 가지 않겠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네 아들은 나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말이니까 믿고 돌아가라.’ 여기에 또 다른 믿음의 도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믿고 갈 것이냐, 아니면 ‘그래도 그러면 안 되죠.’라고 하며 붙들고 매달릴 것이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달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믿기로 결단하면 보입니다. ‘보여 다오. 그럼 믿겠다.’라고 하면 안 보입니다. 그런데 믿기로 결단하면 보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갔는데(50), 이 말이 뭡니까? 진짜 믿음이 생긴 겁니다. 진짜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제발 나랑 같이 가 달라니까요!’ 하고 끝까지 매달렸을 겁니다. 그런데 ‘아, 정말 살아났겠구나. 저분이 저렇게 말씀하시니 나았겠다.’ 하며 믿음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보지 않은 것도 보이는 겁니다.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나 텍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라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믿고 간 것입니다. 그냥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은 대로 실천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는 것을 믿습니까?’ ‘예!’ ‘그럼 당신이 나와 같이 갑시다.’ ‘아니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예. 같이 가겠습니다.’로 된 겁니다. 그래서 그는 군말 없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이 이야기가 뜻밖의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1-53절)
언제 이 사람의 아들이 나았습니까? 여기 보면 “어제 일곱 시”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뭡니까? 예수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셨을 때, 이 사람이 즉시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루를 있다가 그 다음 날 갔다는 게 아닙니까? 예수님이 “너의 아들이 살았고 병도 나았다.”라고 하시자, 그는 그날 밤을 가나에서 보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즉시로 빨리 집으로 달려가서 진짜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를 보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갔을 텐데, 말을 몰고 갔으면 저녁까지 갔을 겁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 ‘일곱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1시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말을 타고 달리면 저녁까지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한 시부터 계속 거기 머물다 가나에서 그 밤을 보내고 그 다음 날 아침에 길을 나선 겁니다. 종들도 이 소식을 알리러 가나로 오고 있었고, 중간에 만난 겁니다. 그래서 확증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진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아들의 병이 언제 나았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어제 오후 1시에 나았습니다.’ 이때 이 왕의 신하의 표정이 어땠겠습니까? ‘아, 아’ 하고 미소를 지으며 감동하는 표정이 아니었겠습니까? ‘정말 맞았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때를 기억해보니까 분명히 오후 1시였고, 그래서 집에 가면 몇 시에 아이가 나았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마침 종들이 와서 바로 그때 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아들이 나았다고 하셨는데 그가 어떻게 하룻밤을 가나에서 묵을 수 있었습니까? 그토록 급하고 절박하게 왔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친히 하신 약속을 지킬 능력도 있으실 뿐 아니라, 약속을 지키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병만 낫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 겁니다. 이제는 병이 낫는 능력만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게 된 겁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이 그가 바라던 대로 집에 와서 아이를 만져줌으로써 고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말씀 한마디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요청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게 해주셨습니다. 일부러 가서 하는 수고 없이 바로 고쳐주셨습니다. 더 좋은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이 고치시는 방식을 자기가 제한합니까? 이렇게 놀라운 방법이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불안과 초조에 빠져 있는 이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과는 안 맞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제가 지금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이것은 꼭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주님이 역사하실 방식까지 아예 정해드립니다. ‘요렇게만 해주세요.’ 그래서 주님이 참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더 좋게 해주려고 했더니 왜 요렇게 해달라고 하나? 이만한 걸 주려고 하는데 왜 요만한 것을 달라고 하나?’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아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그 다음에 들어가야 하는 게 뭡니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내가 보기에는 이게 좋은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해주십시오.’
[나가는 말]
여러분, 이제 코로나 사태가 1년이 지나고 백신이 보급되면서 점점 출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아직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행복이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평안이 깨지고 삶의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혹시 어려움이 왔을 때 괴롭고 힘들고 불안하고 두려우십니까? 바로 그럴 때가 더욱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붙들 때입니다. 주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설 때입니다.
행복한 시간이 영원한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시간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행복한 상황이든지 어려운 상황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해결되고 안 되고 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통하여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세워져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급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재정의 문제입니까? 가정의 문제입니까? 자녀의 문제입니까?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입니까? 관계의 문제입니까? 진로의 문제입니까? 건강의 문제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도 혹시 이렇게 물어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시면 정말 믿음의 길로 가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믿으면 보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믿는 게 아니고, 믿으면 보입니다.
믿음의 발걸음을 약간만 옮기면 하나님이 정말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그 길이 최고의 인생이고 최고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믿음의 역사로 충만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