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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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4일 주일예배
✦ 추수감사절 메시지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한 사람”
(누가복음 17장 11~19절)
[들어가는 말]
신약의 복음서들을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도 <말씀의 삶>을 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얼마 전 복음서들을 읽으면서, 그렇게 병자들이 많았나 할 정도로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그렇게 많았나 할 정도로 귀신을 많이 쫓아내주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병들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특히 구약에 보면, 특이한 병들의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나병(=한센병, 옛날에는 문둥병)은 병자가 부정하게 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아주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 밖에 나가서 살아야 했습니다(민 5장). 영화 <벤허>에도 보면 나병에 걸린 어머니와 여동생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는 장면을 봅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언제나 자기 아랫입술을 손으로 가리면서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레 13). 이것은 ‘나는 더러운 인간입니다. 빨리 떠나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혹시 나병에서 낫게 되는 경우에는, 그 나은 사람이 이제 정결하게 되어서 다시 사회로 돌아가도 좋다는 제사장의 확인 절차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레 14:23). 그 당시 제사장들은 별 걸 다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극한직업’입니다.
1. 열 명의 나병환자의 치유 (11-14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1절)
여기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를 지나가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북부인 갈릴리의 가장 남쪽, 중부인 사마리아의 북쪽 어딘가를 지나고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거기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함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열 명이 다 같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한 촌에 몰려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문둥병(나병/한센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으니까 저런 병에 걸린다고 여겨졌습니다. 요즘은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얼마나 끔찍합니까.
저도 아주 어릴 때 살던 동네 근처에서 구걸하던 나병환자가 저의 집까지 쫓아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겁을 하며 혼비백산 도망갔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아이인 제가 보기에도 너무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멀리 도망가야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어땠겠습니까?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걸리고 싶어서 걸렸겠습니까? ‘내가 나병에 걸린 것이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인가?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나? 왜 하필 나인가? 이럴 수가 있나?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그 중에는 종교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끔찍한 병에 걸렸을 때 자기 인생을 저주하고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희망이 없고 스스로도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나타나기만 하면 돌을 던지며 침을 뱉습니다. ‘어디 감히 나병환자가 돌아다니느냐?’ 하며 모욕을 합니다. 저주의 말을 퍼부어 댑니다. 재수 없다고 손가락질하며 돌을 던져 오지 못하게 합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들과도 접촉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살아야 할 가치가 있습니까? 절망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이들의 극심한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을 누가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절망 속에 살아가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2-13절)
이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멀리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 당시 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최소한 50야드(45미터) 이상 떨어져야 했습니다. Football 경기장 전체가 100야드인데, 그 경기장의 반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멀기 때문에 크게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것은, 상황이 급할 때 느긋하게 있지 말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급한데 어떻게 소리를 안 지르겠습니까? 물에 빠져서 죽게 되었는데 점잖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 살려’ 하고 크고 급하게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상황이 급할 때는 하나님께 기도도 급하게 소리를 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축복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눅 5)에 한 나병환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고치시는 데 있어서 이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대. 그것도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손으로 만지기까지 하며 고쳐주셨대.’ ‘어, 그래? 와, 정말 놀라운 분이네. 그럼 우리도 고쳐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막 찾다가 만난 것인지 아니면 우연찮게 만난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13). 이 단어는 영어로 ‘teacher’가 아니라 “Master”이며, 누가복음에서만 쓰인 단어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이것은 “최고 사령관, 최고 지휘관”이란 뜻입니다. 단순한 랍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질병이나 심지어 죽음에 대해서도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최고 사령관이며 최고 지휘관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도와주실 수 있는 이 Master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에 대해 뭐라고 응답하십니까?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4절)
여기 잘 보시면, 14절의 첫 번째 단어가 “보시고”입니다. 가만히 있다가 저쪽에서 소리를 지르니까 뭔가 하고 우연찮게 본 것이 아니라, 일부러 주목해서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하자 먼저 그들을 주목해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보통 사람은 ‘아유 끔찍해. 어떻게 저런 나병환자들이 돌아다녀?’ 하면서 돌을 던지든지 피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시는 순간 뜨거운 것이 속에서 올라옵니다. 너무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저렇게 비참하게 되었는가?’ 안타깝게 여기시는 사랑의 마음, 연민의 마음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그 심각한 질병을 고치셔서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인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처럼 먼저 보는 것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보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집중해서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요즘에는 웬만한 사람 다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소위 골라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골라 보십니까? 내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른 손에는 따뜻하고 값비싼 에스프레소 드링크를 들었을 때 얼마나 좋고 행복합니까? 그런데 만약 바로 저 앞에 돈이 없어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무얼 보고 있습니까? 그쪽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나에게 집중이 되어서 그냥 내가 원하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가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기회는 항상 있습니다. 꼭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같은 교회 성도들 가운데에도,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주변 이웃들 가운데에도 사실은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다 있는데, 그들은 보이지 않고 내 것만 보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골라서 보며, 여러 가지 중에서 재미없으면 바로 넘기지 않습니까?
모든 게 전부 자기에게 집중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먼저는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면, 먼저는 봐야 합니다. 그런데 뭘 봅니까?
직장생활 하시는 분이라면, 매일 만나는 사람들 중에 깐깐한 사람, 굉장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으실 겁니다. 별로 관계도 없는데 나를 힘들게 하거나 곱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보통은 ‘왜 저러나?’ 하며 피하거나, 높은 사람이면 눈치를 봐야 하고 비슷한 사람이면 뭐라고 하든지 피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뭘 보아야 하는가? 저 사람이 왜 저럴까? 혹시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면 건강 문제나 가정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더 강한 척하는지도 모릅니다.
내 주변에 불친절하게 행동하고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 뭐가 보입니까? 불친절하고 시비 거는 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마음의 상처가 있어 너무 괴로워서 남들에게 그렇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굉장히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서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읽고 모든 사람의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조금만 더 민감해질 수 있다면, 조금만 그 속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삶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못 먹어서 걱정이었는데 요즘은 너무 먹을 게 많아서 걱정이지 않습니까? 너무 살이 쪄서 살 빼는 게 걱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이어트도 하고, 음식도 남으면 버립니다. 요즘은 건강이 중요하기 때문에 음식이 조금만 상한 것 같으면 버리지, 상할랑 말랑 하는 것을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순간에도, 이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권 2세들이 하는 말 중에 “I’m starv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고파 죽겠다”는 말입니다. 한국말로도 “배고파 죽겠네.”라고 하는데, 우리는 배고파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먹을 게 넘쳐서 걱정입니다. 감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날씨가 안 좋아서 ‘나가야 되는데 왜 날씨가 안 좋아?’ 하고 짜증을 낼 때가 있다면, 지금 내가 일어나서 맞이한 이 새 날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꼭 보고 싶었던 그 하루였는데 못 보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봤습니다. 그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짜증낼 일이 아닙니다.
혹시 내 눈앞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내 눈앞에 내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라도 보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축복입니다.
지금 무릎이 아프고 팔이 아프고 목이 아프고 몸의 어딘가가 아프다면, ‘아유, 난 왜 이렇게 아파?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고 불평하며 원망하기보다는, 그래도 사지를 멀쩡하게 가지고 산다는 사실로 감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실 나병은 고통을 못 느끼는 병입니다. 그래서 귀가 떨어져 나가도 아프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가 아프면 고통을 느낍니다. 아픈데 아픈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실 좀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나 자기 것에만 꽉 매여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 자신, 내 가족, 내 아이들, 내 부모님, 내 사업, 내 돈, 내 자동차, 내 집, 또 교회도 내 교회 등등.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단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입니다. 특히 내 눈에 띄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속마음이 어떤지 서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귀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빌 2:4, 새)
지금 자기가 감옥에 갇혀서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주라고 합니다. 또 다른 구절에서는 “기뻐하라”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기뻐하라고 권면을 합니까? 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섬기며 도와줄 때 그것은 참 감사하고 좋은 일인데, 그렇게 하고 나서 보통 어떻게 됩니까? 뭔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뭔가 보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이렇게 해줬는데 당연히 감사하다고 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열 명을 고쳐주시는데 그 중 한 명만 돌아와서 감사할 것을 예수님이 과연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당연히 아셨습니다. 그런데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에 모두 다 고쳐주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당연히 ‘너, 너, 너, 너는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얘 한 사람만 내가 고쳐주겠다.’라고 했을 텐데, 예수님은 다 고쳐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버릴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 중에 있었을 때, ‘너만 빼고 다른 애들 발만 씻겨주겠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 씻겨주셨습니다. 아시고도 그러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의 도움을 베풀었을 때 분명히 감사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90%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10%만 감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사랑을 베풀 때 대부분 감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1860년 9월 폭풍우가 몰아친 어느 밤, 시카고 근처의 미시건 호수에서 여객선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면서 무려 287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시카고 근교의 명문대인 노스웨스턴(Northwestern)대학교 수영 선수였던 에드워드 스펜서(Edward Spencer)는 자기가 있던 곳에서 0.5마일 정도 떨어진 여객선 침몰 현장을 보고, 그곳을 16차례나 헤엄쳐 왔다 갔다 하며 있는 힘을 다해 17명의 생명을 구출해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탈진해 쓰러졌고 그 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여 그때부터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연일 매스컴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을 구한 그의 영웅적인 행동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후 토레이(R. A. Torrey) 목사가 LA에서 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말씀을 전하던 중에 바로 그 사건을 예화로 들었습니다. 그 미시건 호수의 침몰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그때 여러 사람을 구했던 젊은 에드워드 스펜서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노년이 된 그 스펜서가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토레이 목사는 설교가 끝난 뒤 스펜서가 실제로 이 집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목숨을 구해준 17명 중에서 몇 명이 감사를 표시했습니까?” 내심 다 했겠지 하는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이제 노인이 된 스펜서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예, 한 명이요. 그것도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제게 감사카드와 선물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말로 감사하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악해서 그런 게 아니더라도 바쁘거나 다른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신세를 졌는데 마땅히 감사해야 하지만 혹시 감사하기를 잊어버린 대상이 있습니까? 오늘이라도 빨리 감사를 표현하며 사랑의 빚을 갚으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내가 뭘 해줬는데 나에게 당연히 표시해야 할 감사를 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화가 납니다. 그러나 화를 내서는 안 되고, 화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됩니다. 사실 당연히 기대하는데 안 할 때 실망하고 화가 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가?’ 예, 인간이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다. 동물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개가 얼마나 충직한지, 조금만 귀여워해주면 막 따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해줘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니까 그런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뭘 해주었을 때 막 친절하게 나오고 너무 감사하다고 계속 감사를 표현한다면 오히려 놀라야 합니다. ‘아니, 인간이 저럴 수가!’ 원래 인간은 하나도 안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해주는지 깜짝 놀라야 합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큰 자비를 베풀고도 감사하다는 말을 못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실망하고 화내고 저주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우리가 왜 꼭 사랑을 베풀고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겠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겠다.’라고 왜 꼭 그래야겠습니까?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사랑을 베푸는 겁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감사하다고 하면 그게 감사한 일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기억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그것이 다 하늘에 상급으로 쌓이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꾸 기대하니까 실망이 커지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기대를 접으면 됩니다. 기대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베풀면, 주님이 누리셨던 평안과 자유함을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2.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 (15-16절)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가다가 놀랍게도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14).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에게로 갔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래, 이리 와라. 내가 너희를 고쳐주겠다.’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전에 어떤 사람을 고치신 것처럼 만지면서 ‘내가 원하노니 나으라.’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가라.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그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 저래? 왜 우리를 고쳐주지 않지? 분명히 다른 나병환자는 심지어 만지면서 고쳐주었다던데, 왜 우리는 만지기는커녕 말로도 안 고쳐주지? 에이, 관둬라 관둬.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제사장들에게 가냐? 나아야 가지.’ 이러면서 그냥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놀랍게도 순종해서 갑니다. 그리고 도중에 나았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굉장한 믿음입니다. 순종함으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점은 그들이 치유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그들이 치유가 일어난 다음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5-16절)
열 명 중에서 한 명이 돌아왔는데, 유대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인간 취급도 못 받던 사람들입니다. 다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섞였다고 생각되어 천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거기 끼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성전 제사도 못 드리게 금지시켜버렸습니다.
그렇게 인간 취급도 못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는데, 왜 그가 예수님께 돌아왔습니까?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15). 이 사람도 봤습니다. 다른 아홉 명도 다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못 봤습니까?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못 봤습니까? 아니오, 자기 몸이 나은 것은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는 사실을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한 사람(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는 것을 확실히 봤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필요를 보신 것처럼, 그도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다고 외치면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15).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감사했습니다. 이 표현은, 급히 달려와 자기 몸을 내던지듯이 그대로 꿇어 엎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치유를 받은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이 한 사마리아 사람 한 명과 나머지 아홉 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홉 명 중 몇 명이 유대인이고 몇 명이 사마리아인인 것은 모릅니다. 어쨌든 이 아홉 명과 한 명의 차이가 뭡니까?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그리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간 것을 보면 믿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엇이 차이입니까?
그 아홉 명은 기적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 사마리아 사람은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아홉 명은 기적 자체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한 명은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감격하고 감사하고 흥분했습니다. 아홉 명은 기적 자체에 감동하며 흥분했고, 이 한 명은 기적을 주신 분에게 감격했습니다. 이 차이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좋은 것입니까?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하나님이 해주신 것을 따라다니면 이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 관계보다 해주시는 선물에 집중하다 보면 아홉 명처럼 되는 겁니다. 감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없이 그냥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좋아서 하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사실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 같으면, ‘믿어도 소용없네. 기도해도 소용없네.’라면서 신앙의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나? 내가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다니나? 하나님이 주신 어떤 복이 좋아서 따라다니는 건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따라다니는 건가?’ 여러분,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좋아서 하십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하십니까? 이것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물론 축복이나 기적을 좋아할 것이 아니라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에게 집중해야겠습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그분을 우리가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좋은 일이 일어날 때 감사할 확률은 9/10이고, 그 좋은 일을 해주신 분에게 감사하며 나아갈 확률은 1/10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9/10에 속합니까, 1/10에 속합니까?
우리가 이 두 가지 질문을 꼭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첫째,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 삶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현상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았다면 둘째, ‘나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여러분,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정말 보이십니까? 그것이 보였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하십니까? 주님의 은혜에 대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별로 없는 것 같아도 생각해보면 받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사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오늘 자기 발로 예배당에 예배하러 왔다는 것도 엄청난 일입니다. 자기 발로 못 오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교회가 있고, 그것도 건물이 있고..., 모드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앞뒤와 좌우에 앉아 있는 성도님을 보십시오. 서로 인사할 때 재빨리 “하늘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1초 만에(?) 끝내지만, 사실은 진짜 축복을 해드려야 할 분들입니다. 얼마나 귀한 선물입니까?
지금 우리가 왜 이 시간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예배는 교인의 의무니까 어쩔 수 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읽고 왜 기도를 해야 합니까? 그것도 종교인으로 해야 되니까 그런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내가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그렇다면 주님의 뜻이 뭔지 알고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안 믿는 분들은 그럽니다. ‘왜 시간과 돈까지 바쳐가며 그렇게 나가냐?’ 왜 생명 같은 돈을 내면서 헌금합니까?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되니까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무슨 우리 시간이 필요하시고 돈이 필요하시고 재능이 필요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그것이 감사해서 내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어떠셨습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조금 있으면 성탄주일, 봄이 되면 부활주일이 있고 항상 특별헌금이 있습니다. 봉투까지 미리 인쇄되어 있습니다. ‘아, 추수감사절 헌금을 해야 하고, 한 달만 있으면 또 성탄절 헌금을 해야 하고...’ 그래서 여기는 몇 퍼센트, 저기는 몇 퍼센트 미리 계산합니다. 여러분, 그게 감사입니까? 감사한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돈을 써보면 알지만, 내가 정말 감사한 사람에게 돈을 쓰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 아깝습니까? 사랑하지 않을 때입니다. 사랑하지도 않고 쓸 데 없다고 생각될 때 내 시간을 쓰고 돈을 쓰는 것이 정말 아깝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이십니까?
내 삶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을 정말 보았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한없는 사랑이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것을 보면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찬송가를 부를 때도 ‘끝나는 줄 알았는데 5절이 또 있네?’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감사하고 너무 하나님을 높이고 싶은데 어떻게 ‘아니, 5절도 있고 6절도 있네?’라고 되겠습니까? 오히려 ‘야, 한 절 더 찬양할 기회가 있네. 감사하다!’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3.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17-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8절)
사마리아인이 돌아온 다음에 예수님은 세 개의 질문을 연속으로 하십니다.
첫째,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둘째,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셋째,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아직 나은 것도 아닌데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들에게 간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들을 보면,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감사를 동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함이 없는 믿음, 감사함을 표현할 줄 모르는 믿음이 과연 믿음일까요?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참 귀한 태도입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도 사실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또 많은 경우에 문제가 잘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가 문제입니다. 감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금 감사하다가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연이겠지. 어쩌다 보니까 되었겠지. 원래 될 일인데 됐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잘 풀렸다고 깨닫기는 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그냥 넘어갑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만 마무리 되면 제가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지금보다 덜 바빠지면 봉사를 하겠습니다.” “사업이 안정되고 돈을 많이 벌고 나면 선교헌금도 하고 구제도 하고 십일조도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지금까지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말한 다음에 지킨 사람을 거의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 명도 못 보았습니다. “죽어도 그것만은 안 할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죽어도 안 한다던 그것을 하게 되었을 때, 약속대로 죽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 말이 사실이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라고 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발견되었어도 장을 지지는 것도 못 봤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성을 간다.”라고 하고는 성 가는 것도 못 봤습니다.
지금 하지 않는 것을 나중에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 하는 사람이 나중에도 합니다. 지금 안 하는 사람이 나중에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나중에 감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중에 할 수 있다고, 미래가 있다고 그렇게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4장에서도 미래에 대해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며 그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그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또 다른 욕망을 따라 다닙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주셨는데,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른 욕망을 따라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우리 같지 않으셔서 ‘저런 배은망덕한!’ 하시면서 다 끊어버리실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계속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기, 비, 물 같은 것을 다 끊어버리시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주십니다. 계속 베풀어주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도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너무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성공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느냐,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라갔느냐, 얼마나 원하는 것을 성취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는가, 그리고 거기에 감사함으로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성공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 다 끝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성공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 계속됩니다.
미국의 어느 의사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먹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건강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는 너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 존 자웽이라는 사람이 발표한 감사 기도의 효능이 세 가지였습니다. 식사 때마다 감사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첫째, 질병을 예방해주고 면역 기능을 향상시켜주는 신비한 백신이 나온다는 겁니다. 둘째, 질병의 진행을 억제시켜주고 병균의 침입을 막아주는 요소가 생깁니다. 셋째, 일종의 방부제 성분으로서 위장 내에 있는 음식물이 부패하거나 발효하는 것을 억제시켜주는 성분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감사하며 음식을 먹을 때 우리 몸이 먼저 반응하여 유익한 것들을 생산해낸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감사하지 않고 먹는 진수성찬보다, 반찬이 김치 하나라도 감사하며 맛있게 먹을 때 이것이 우리 몸에 더 보약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의 능력이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여러 차례 부유하면서 다투는 집안보다, 가난하지만 서로 위하고 사랑해주는 집안이 더 낫다고 계속 말씀하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는 의무가 아닙니다. 사실 감사는 나 자신을 위해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만 체험하여 아는 기적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9절)
‘내가 네 나병을 고쳐주었으니까 내 종이 되어서 평생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간단히 말씀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믿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제 확실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몸만 낫고 가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과의 관계가 맺어졌으니, 삶으로 돌아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베푸시는 분을 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분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하며, 입을 열어 감사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놀라운 기적들이 더 많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기적이고 진짜 축복입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이 축복을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감사의 백성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