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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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3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9 ✦
“부활의 소망에 대한 변호”
(사도행전 24장 10~21절)
[들어가는 말: 어려운 순간일수록 말을 주의하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바로 우리의 믿음이 정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는 평소에 좋을 때가 아니라 힘들 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일이 내 맘대로 안 풀릴 때, 사방이 막힌 것 같고 절망적일 때,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정말로 드러나는데 그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주로 말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 말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가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삶이 어려워지다 보니까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 “예수 믿어도 소용없네.” “기도해도 소용없네.” “믿음이 밥 먹여 주냐?” 이런 류의 말을 안 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 끝장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 <말씀의 삶>을 공부하면서 100일 안에 성경 전체를 통독하는데, 빨리 읽다 보니까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집트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실 때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 후 홍해가 막혀 우왕좌왕 아우성쳤지만 하나님이 바닷길을 내셔서 바다를 잘 건넜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조금 가니까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또 조금 가니까 먹을 게 없다고 불평하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집트에서는 고기도 먹고 부추와 채소 등 온갖 메뉴를 좍 읊으면서 이런 것도 못 먹고 광야에서 죽이려고 데려왔느냐고 불평합니다.
그들은 ‘괜히 이집트에서 죽으면 좋았을 것을 광야로 데려와서 우리도 죽고 어린 것들도 죽게 생겼다.’ 하면서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들으셨습니다. 다 들으시고 ‘너희가 죽겠다고 한 너희 아이들은 다 살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소원대로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즉 아이들에 대해 한 말은 맞지 않고 그들을 살리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남 유다 히스기야 왕 때,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앗시리아)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열왕기하와 이사야에 나오는데, 산헤립의 군대장관이 와서 유대말로 외칩니다. “우리 군대로부터 구해준 신이 어디 있느냐? 히스기야가 하나님이 구해준다고 한 말을 믿지 말라.”고 하며 조롱하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 하룻밤에 앗시리아의 18만 5천 명이 몰살당합니다. 학자들은 그때 전염병이 돌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룻밤에 다 죽었습니다. “어느 신이 우리 군대로부터 구해주겠느냐?”는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어서 뭐 하냐?” “믿어도 소용없다.” “기도해도 소용없다.” “왜 우리를 광야로 데려와서 죽이느냐?” “어느 신이 우리 군대로부터 구해주겠느냐?”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팍 상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슬슬 솜씨를 보여주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 정말 큰일 납니다.
우리는 어려울수록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말을 아주 조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이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욥처럼 고난당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이나 어떤 사람도 욥처럼 그런 고난은 아닙니다. 그런데 욥은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내가 와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했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은 여자 같이 말하는가?” 하며 오히려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모습이 다르고 예수님과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어렵지만 평안하고, 어렵지만 괜찮습니다. 어렵지 않은 게 아닙니다. 힘듭니다. 아주 극심한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안 믿고 적당히 했으면 그런 고난을 안 당할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 중에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바울이 당한 것처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도로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했지만, 일이 술술 풀린 게 아닙니다. 여러 끔찍한 일들을 당했고,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번 넘겼으며, 특히 억울한 고소를 당하고 골치 아픈 법정 다툼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바울이 이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배우기 원합니다.
1. 고발한 자들의 거짓말을 지적하다 (10~13절)
지난 본문에서 본 것처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고용된 웅변가 더둘로는, 의뢰인들의 요구에 따라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에 대한 사형선고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수사학과 웅변학을 사용해서 바울이 로마제국의 법을 어기고 가는 곳마다 폭동과 반란과 심지어 무장봉기까지 꾀하는 정치범인 것처럼 그를 몰아가면서 고발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더둘로의 그러한 거짓 고발에 대해 바울이 반박하고 변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0절)
“말하라”고 되어 있는데, 더둘로의 말이 끝난 다음에 총독 벨릭스가 바울을 보면서 ‘말하라’고 한 게 아니라 머리만 까딱한 겁니다. 은근히 자기 권위를 나타내려는 행동입니다. 교만한 벨릭스가 자신의 총독으로서의 권위를 한껏 과시한 행동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나타내려 합니다. 바울이 그것을 보았을 때 상당히 우스웠을 것 같습니다.
더둘로는 총독 벨릭스가 백성에게 태평성세를 가져다준 위대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말로 자기변호를 시작합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이때가 총독으로 있은 지 6년째쯤 되는 때인데, 몇 년 전부터 재판장으로 있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겁니다. 없는 것을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사실 벨릭스는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기로 유명한, 아주 불의한 총독이었습니다. 그런 벨릭스에게 바울은, 재판장답게 정의롭고 바른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1절)
바울이 벨릭스 총독의 법정에 선 그날은, 그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12일 정도 된 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야고보서의 저자, 예수님의 동생)를 만났고, 그 다음 날부터 야고보와 리더들의 권면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결례를 시작하여 7일째 되는 날 마쳤습니다. 바로 그날 마치고 나오다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에서 보고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왔다고 하며 실제가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바울을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모르는 로마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잡아서 로마군 안토니오 요새 안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후 채찍질을 하려고 했는데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천부장은 두려워하면서 8일째 되는 날 바울을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회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9일째 되는 날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암살 음모를 바울의 조카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즉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65마일 정도 떨어진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로 보냅니다. 그 다음 날인 10일째 되는 날 가아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그날부터 헤롯 궁에 갇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난 지 5일 만인 13일째 되는 날 총독의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렇게 예루살렘에 온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급박하게 진행된 그 12일 동안 자기가 로마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어떤 폭동이나 반란을 계획하는 것은 시간상으로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주일만 예루살렘에 있다가 잡혀서 이리로 왔는데, 그 일주일 동안 어떻게 로마를 반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획책하겠느냐며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합리적인 논증입니다. 더둘로가 고발한 내용이 정황으로 보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누가 들어도 바울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엉터리로 며칠만에 계획을 세워서 하는 반란이 성공하겠습니까? 누가 목숨을 내놓고 그렇게 엉터리 반란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바울의 논증은 전문적 변사로서 바울을 거짓으로 고발한 더둘로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봅니다. 더둘로가 8절에서 바울을 심문하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바울도 총독이 심문하면 정말 사실이 뭔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무엇이 사실인지 조목조목 사실을 짚어 보자는 말입니다.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2-13절)
바울을 고발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중에 바울이 성전에서 이단 사상을 전하며 논쟁을 벌였다거나, 회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을 거짓으로 고발한 자들은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성전에 예배하러 간 종교적 이유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만약 자기가 소요나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갔다면, 성전에서 누구를 만나 논쟁을 벌이거나 회당 또는 거리에서 백성을 선동하는 것을 여러 명이 다 봤을 것이고 총독이나 천부장에게 고발했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법정에서도 그 증거를 내세우면 될 텐데, 아무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바울의 결백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고발을 다 잘못된 것이고, 자신의 문제는 철저히 유대 종교의 문제에 관련된 것이라고 여기서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는 로마 법정의 고발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울도 잘 알고 총독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의 소망을 선포하다 (14~16절)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4-15절)
바울이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를 것입니다.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사흘째 되는 날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셨습니다. 15절에서 바울이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이야기하면서 부활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부활이 아니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 (요 5:28-29, 새)
부활의 주님을 믿는 바울에게 인간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을 거부한 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심판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죽고 나면 다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부활이냐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회사상으로, 죽으면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죽으면 끝이지 뭐가 있느냐? 죽으면 그냥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 다 끝난다.’라고 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데, 천국에서 또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셋 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 수도 없고, 또 누가 경험을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으면 끝난다고 해도, 안 죽어봤는데 끝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증명될 수 없고,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는 것도 증명될 수가 없습니다. 죽으면 천국 가든지 지옥 가든지 한다는 성경의 말씀도 증명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죽음에 대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가 하는 믿음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믿기로 결정하느냐 입니다. 죽으면 끝난다는 것도 자기 믿음이고, 죽으면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는 것도 자기 믿음이고,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린다는 것도 자기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죽었다 부활하신 분이므로 죽음 이후에 대해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도 증명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증거들을 보고 그 증거들 중 60~70% 정도 맞는 것 같다고 판단되면 ‘믿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믿기로 결정해서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옛날에 세종대왕이 계셨다는 것, 이순신 장군이 계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보셨습니까? 그때 거기 가서 직접 눈으로 봤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이야기해준 것을 내가 사실이라고 믿기로 결정해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지금도 사실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다 증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지구가 네모라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사실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렇게 믿기로 결정한 겁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다 증명이 되었는데,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믿을 만한 분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것을 믿기로 결정해서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조작이라고 하면 믿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믿음의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런데 성경은 아주 강력하게 말합니다. ‘죽은 후에는 영생으로 부활하는 사람도 있고 영벌로 부활하는 사람도 있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래서 이것을 내가 과연 믿고 선택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 장로교에서는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믿도록 도와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으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유는,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외친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가 아니라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메시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또 온 인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흔히 구원의 종교라고 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죄 사함을 받고 천당 가는 티켓을 받는 수준으로만 구원을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구원도 세 차원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맞습니다. 영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받은 구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학용어로 ‘성화’라고 합니다. 그것은 ‘받는 구원’ 우리의 혼, ‘지정의(知情意)’ 즉 인격이 구원을 받아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면 드디어 ‘받을 구원’, ‘몸의 구원’을 받아 우리의 몸까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예수님의 몸처럼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그러니까 그냥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간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15절처럼 신자나 불신자나, 의인이나 악인이나 다 부활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부활이냐가 관건입니다. 어떤 부활이냐? 부활은 의인과 악인 모두가 겪게 될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바울도 여기서 말하는 내용을 고린도후서와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10)
선을 행하면 영생의 부활이고 악을 행하면 영벌의 부활이라고 할 때, 선과 악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착한 일 조금 하는 도덕적 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느냐 아니냐입니다. 성경에서는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거절하며 사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2장 5절에서도 바울이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앞의 사도행전 21장에서도 ‘죽은 자 모두의 부활’이라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마지막 때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에 심판대가 있는데 그 앞에 생명책이 펼쳐 있습니다. 그 앞에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죽은 자들이 서서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계 20:12).
그 행위는 단순히 착한 일을 조금 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따르며 살았는가 하는 믿음의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의인과 악인 모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20:13). 바울도 그것을 알았고, 사도 요한도 계시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 같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부활을 믿는 우리의 관심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의인으로서의 부활입니다. 악인도 부활하지만 그들은 영으로 영원한 형벌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의인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며 엄청난 영광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려고 힘썼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16절)
바울은 자기가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복음을 붙들고 살아온 것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 것이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입니다. 예배는 집에서도 할 수 있고, 가족과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도 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주일(주님의 날)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차원은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공 예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차원만 있는 게 아니라, 이웃 사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서로를 배려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함께 말씀을 듣습니다. 결단합니다. 그리고 한 교회로서 하나 되어 하나님 뜻을 같이 이루어 나가겠다고 결단합니다.
이것이 주일예배, 공 예배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나아겠다고 결단하는 귀한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잘 오셨습니다.
3. 무죄를 증거하다 (17~21절)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7-18절)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가, 큰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사람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 그리스도인들의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주변 유대인들에게도 구제하도록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중심으로 유대 땅에 있는 본토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고 들어오고, 또 그 다음에 5천 명이 들어오면서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교회를 대부분 먹여 살린 사람들은 헬라파, 즉 해외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이 있었습니다. 흩어져 살면서 재산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 중 바나바 같이 밭을 팔아 바친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토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돈이 없고 가난했습니다. 교육적으로도 본토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교육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고, 해외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교육 수준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 봤듯이, 사도들이 교회의 행정 등 모든 것을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은 헬라파가 냈는데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자꾸 빠지니까 거기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랬을 때 교회가 얼마나 성숙했습니까? 일곱 명의 지도자들을 뽑으면서 전원 헬라파로 했습니다. 4:3이나 5:2로 하자고 할 수 있었는데, 전원 헬라파로 뽑아서 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성숙합니까?
그랬는데 그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까지 당하니까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여 세워진 저 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와 아가야(고린도, 아테네) 교회들로부터 구제헌금을 걷어서 예루살렘에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야고보의 권유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7일 동안 결례를 행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이단아라고 오해하니까 ‘아니다. 나는 정통 유대인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전에서 의식을 행하게 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쳐 죽이려 했는데 그것은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3년 동안 아시아의 중심지인 에베소에 있으면서 두란노 학당이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는 이미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다 돈입니다. 엄청난 돈이 들어왔습니다.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 에베소였고, 그래서 수많은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 신전을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팔던 은장색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에베소에서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전한다고 하여,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격분해서 바울을 그냥 둘 수 없다고 하며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 했고, 그때 바울을 배교자로 여기고 있던 에베소의 유대인들도 그들과 합세해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에베소의 유대인들 가운데 오순절을 맞아서 본토인 예루살렘으로 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어떻게 모함하고,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어떻게 선동했었는지는 지난 2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거기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에베소 출신 드로비모라는 사람과 함께 시내를 다니며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 바울이 성전에 결례를 행하러 왔는데, 시내에서 드로비모를 본 사람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서 시내에서 바울과 드로비모가 같이 있었으니까 지금 성전에도 바울이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흥분하며 잡아 죽이겠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드로비모는 거기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바울만 와서 한 것인데, 저쪽에서 봤다고 여기에도 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고 말이 안 되는 거짓 고소입니다. 그래서 그때 예루살렘을 방문한 에베소 유대인들이 성전에 갔다가 막 결례를 마치고 나오는 바울을 붙들어서, 이방인을 데려와 성전을 모독했다고 하며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잡아다 가둔 것입니다.
그 당시 성전모독죄는 아주 큰 죄였습니다. 그때 라틴어로도 경고문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방인의 뜰을 넘어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려오지도 않았는데 데려왔다고 흥분했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죽이자고 붙들며 난리를 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에베소 이방인 드로비모와 함께 시내에 있었던 것이지 성전에 데려온 것이 아닌데, 성전에 데려왔다고 하며 난리를 친 겁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며 그들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변증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19-21절)
만약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를 성전으로 끌어들인 것을 정말로 보았다면, 당연히 그들은 총독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해서 바울을 직접 고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총독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총독의 법정에 나와 있는 대제사장들은 며칠 전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을 심문했던 바로 그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나니아와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바울에게서 로마제국 법을 어겼다고 확인했다면, 총독 법정에서 그들 자신이 증인으로 바울을 고발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도 증인으로 안 나오고, 그냥 자기들이 고용한 더둘로라는 웅변가만 내세우고서 바울을 고발하게 합니다. 정말 자기들이 봤다면 증인이 될 수가 있는데 증인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야기하는 앞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아 아니니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원래 바울을 심문하려 했던 것도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유대인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고 증언한 이유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이유라는 것입니다. 총독에게 와서 재판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웅변가 더둘로를 내세워서 정치범으로 몰아 사형판결을 얻어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변증을 통해 사실을 밝힌 바울 앞에서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온 다음에 세 번째로 자기 변증 또는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서 쳐 죽이려 했을 때, 천부장이 출동해서 이전에 소요를 일으켰던 이집트 사람인가 하여 잡아가려고 할 때, 층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고급 헬라어로 하니까 천부장이 깜짝 놀랐고, 유대인들 앞에서는 히브리어가 변형된 아람어 방언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치기도 전에 유대인들이 소리 지르며 ‘저 놈 죽여라!’ 하니까 천부장이 빨리 데리고 들어갔고, 로마 시민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 다음 날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해서 천부장이 그리로 데리고 갑니다. 그때 두 번째로 자기 변증을 합니다.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 왔다고 할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입을 쳐라” 하고 명령합니다. 유대인에게 입을 치는 것은 인격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기 때문에, “율법대로 나를 재판한다고 잡아와놓고는 율법대로 하지 않는 이것이 말이 되느냐?”라고 저항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에게 어떻게 그렇게 욕을 하느냐?”라고 해서 “나는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세 번째로 여기 총독 법정에서 자기 변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유대인들이 아무리 바울을 고발하려 했어도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잡아넣을 거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무죄였습니다. 그렇다면 총독 벨릭스는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이기 때문에, 로마 시민인 바울이 무죄이므로 풀어주어야 마땅합니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즉각 석방을 시켜주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2년 동안이나 더 잡아둡니다.
바울은 총독의 법정에서 진실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않고 2년 동안이나 거기에 더 갇힌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고 기가 막힌 일입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충분히 원망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지금까지 복음을 얼마나 열심히 전했는데, 그러면 나가서 복음을 더 전하게 하셔야지 왜 죄가 없다고 밝혀졌는데도 가두어 두십니까?’라고 원망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이 억울해했다는 말도 없고 절망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는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진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 누가 자기를 고발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무죄라서 나갈 수 있지만 계속 잡혀 있는 이 상황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그는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지금 뭘 하려고 하실까’를 헤아리면서,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갇혀 있는 시간이 오히려 그에게는 귀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결백이 밝혀지고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그것이 늘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그건 그거고. 그럼 저건 어떠냐?’ 하면서 또 다른 것으로 옮겨갑니다. 해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명히 진실인데도 해결이 안 됩니다. 나의 진실이 그렇게 묵살당하거나 묻혀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이게 진리라고 외치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아무리 진실을 외쳐도, 별로 신경도 안 씁니다. 들어주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때로 억울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도 않았는데 나 보고 했다고 하고, 나는 좋은 생각으로 했는데도 악하게 했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가 아니라, ‘하나님, 이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해보십시오. 억울함, 절망, 원망,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기대감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아, 지금 하나님이 뭔가를 분명히 하려고 하시는구나. 그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다 몰라줘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묵살하고 왜곡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에 분명히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주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정말 최선을 다해 기도했는데, 상황이 안 바뀌고 오히려 더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기도를 안 들어주십니까? 두 사람이 똑같은 병에 걸렸는데, 기도하니까 한 사람은 낫고 한 사람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저 사람은 살았는데,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정확한 답을 다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조차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그런 하나님이 나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무 힘들고, 이런 일을 당해서 너무 괴로운데, 이것이 정말로 최악의 상황인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안 되고 만약 내가 원했던 대로 되었다면, 그것이 더 나은 것이고 이것이 정말로 최악일까? 혹시 힘들지만 이것이 최선이고 그것이 오히려 나쁜 길이 아니었을까?’ 이 눈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큰 그림이 보입니다. 요즘 많이 유행하는 말들 중 하나가 ‘빅 픽처(big picture)’ 아닙니까? 큰 그림,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을 보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큰 그림을 볼 때는 이해가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이 최악의 상황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최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위로와 보호와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며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같은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에도 일어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매일매일 따라가며, 그래서 ‘하나님이 과연 오늘 나의 삶에서 무엇을 이루어주실까’ 기대감을 가지고 나아갈 때,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고 하늘 복을 받으며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