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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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1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8 ✦
“영적 지도자들을 위한 경고”
(사도행전 20장 28~38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평소에 눈물을 많이 흘리는 편이십니까? 흘린다면 언제 어느 때 흘리십니까? 지난주 중에도 살아가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배 때에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예배를 드리는데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격하고 감사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너무 졸려서 하품을 하느라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왜 웁니까?
2차 세계대전 때 악명이 높았던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라는 사람이 수용되었습니다. 그 동안 사회에서 인정받던 영광과 존경은 다 사라지고 발가벗겨진 알몸에 죄수복이 입혀졌는데, 수형번호 119번 외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앞서 그 옷을 입고 죽은 포로가 죄수복 앞주머니에 조각난 종이를 하나 넣어 놓은 것을 발견했는데, 거기엔 자신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성경 한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전심으로 사랑하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시편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줄기 빛처럼 빅터 프랭클의 생각을 확 깨워주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죽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포로수용소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죽기 위해 살아가는 곳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이라도 결코 삶의 끈을 놓아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매일 아침마다 독일군이 점호를 하면서 가스실에 넣을 사람들을 뽑아갔습니다. 그들은 포로들 중에서 눈에 초점이 없는 사람, 흐리멍텅한 사람, 얼굴에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 아무 의욕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골라 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용할 가치도 없고 노동의 가치도 없기 때문에 가차 없이 끌고 가서 죽여버린 겁니다. 매일 아침 그런 사람들을 뽑아서, 총알도 아까우니까 그냥 땅을 파서 생매장시키거나 가스실에 집어넣어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 끌려가던 첫 날,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뭔가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 즉 ‘의미 치료’라는 아주 독특한 치료법을 발견하게 되고, 전쟁이 끝나면서 풀려난 이후에 그것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죽음 외에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강한 의지나 소망이 아니라 ‘한숨과 눈물 때문에 내가 살았다.’ 하고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관찰해 보니까 삶을 포기한 사람은 갑자기 삶의 태도가 헤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괜히 히죽거리며 웃고, 독일군들이 서슬 퍼런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도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막 나갔다고 합니다. 아무 삶의 소망이 없으니까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상관없다고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노동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서 유리 조각을 열심히 주웠습니다. 그걸 호주머니에 숨기고 들어왔다가 늦은 밤중이나 이른 아침에 점호가 시작되기 전,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을 유리 조각으로 밀어 깎았습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말간 얼굴로 아침 점호를 맞아서 병사들이 보기에 그가 생기 있어 보이고,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보이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수용소 생활 동안 수많은 아침을 맞았지만, 독일군은 한 번도 가스실로 데려가는 무리에 자신을 불러내지 않았습니다. 죄수 번호 외에는 무엇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시간들로 인해 그는 밤마다 한숨과 눈물로 울었지만, 또 아침을 맞으면 유리 조각으로 수염을 밀었다고 합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흘린 눈물의 의미가 바로 그와 비슷한 차원의 눈물입니다. 절망과 괴로움과 낙심의 눈물이 아니라,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소망의 빛을 가지고 나아가는 한숨과 눈물이었습니다. 그들의 눈물의 의미를 오늘 조금 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영적 지도자의 책임과 주의할 점
1) 영적 지도자의 책임
결박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나선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8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삼가라”고 명령합니다. ‘조심하라’(keep watch)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어에서는 한 번 삼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삼가라는 명령입니다. 먼저는 에베소 장로들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삼가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온 양 떼’ 다시 말해 주님께서 부르신 교인들을 위해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또는”이라고 되어 있지만 잘못된 번역입니다.
‘삼가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프로세코)는 ‘주의하다’, ‘경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왜 먼저 주의하고 경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 그래서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졌고, 바울은 3년 동안 그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고, 장로들을 세운 사람도 바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내가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웠다’라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세웠다. 당신들은 내 밑의 사람들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그들을 에베소 교회의 감독자로 삼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독자’라는 말은 나중에 나오는 ‘장로’와도 같은 말입니다. 우리말 “감독자”로 번역된 헬라어가 ‘에피스코포스’(episkopos)인데, 이것은 ‘관리자’,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감독의 역할은 정말로 감독하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일입니다. 그것이 영적 리더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2) 앞으로 발생할 어려움에 대한 예고
그 다음에 바울은 조금 의외의 말을 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29절)
“사나운 이리(savage wolves)”는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에베소를 떠나면,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에베소를 찾아와서 성도들을 미혹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는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었지만, 자기가 떠난 뒤에 바로 그 역할을 맡을 사람들이 에베소의 이 장로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도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복음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여러분은 삼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의 장로들이 스스로 삼가야 하는 데에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0절)
지금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아니 유언의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못 보는 상황이니까 이것이 곧 ‘유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떠난 뒤에 여러분은 나를 대신하여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줄 믿습니다.’라는 식으로 덕담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헤어지는 마당에 ‘여러분이 이제 나 대신 이 사역을 잘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나보다 더 잘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떠나는 게 정상인데, 바울의 말의 내용은 아주 의외입니다.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처럼, 자기가 눈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중에서도 교인들을 미혹하여 자기 유익을 꾀하려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안다.”라고 확실히 말하는 것입니다.
‘어그러지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왜곡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살짝 틀어서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중에.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바울이 예상하고 있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 한 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분 중에서’. 이 말은 어쩌다 한 명이 실수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장로들 중에 여러 명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참 의외의 내용이고, 에베소 장로들 입장에서는 이 말을 들을 때 어땠겠습니까? ‘여러분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라고 했을 때 굉장히 당혹스럽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이 지금 ‘너희는 내가 떠나면 다 잘못될 녀석들이야. 너희는 나쁜 놈들이야. 믿을 수 없는 놈들이야.’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하며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28)고 합니다. 끊임없이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에베소 교회가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에도 이상한 리더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목회자도 그렇고 직분자도 그렇고,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파를 나눠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삼가라, 주의하라, 경계하라’고 한 것입니다.
삶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붙들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거나 왜곡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하지는 않더라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까 자기 유익을 따라서 말씀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생깁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지금 바로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될 놈들이다.’라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날마다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도 망치고 주님이 맡겨주신 양 떼도 망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생활을 하루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안 하면 내 가족이 아고, 사흘을 안 하면 모든 사람이 안다.” 물론 내가 말씀과 기도 생활을 안 한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진짜 머리로 안다는 게 아니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루를 안 하면 자기가 느낍니다. 이틀 정도 안 하다 보면 가족이나 일하는 곳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자꾸 이상한 말이 나오고 감정 컨트롤이 안 됩니다. 사흘을 안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느낄 정도가 됩니다.
물론 이것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영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항상 관계로 나옵니다. 내 감정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삼가라. 주의하라. 경계하라.’ 하고 바울이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당신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어그러진 말로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안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늘 무장되어야만 나 자신을 지키고, 또 나에게 맡기신 양 떼를 지키고, 또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과 목장식구들과 교인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3)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이처럼 바울은 밖으로는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안으로는 자기 유익을 위해 교인들을 잘못 인도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왜곡시키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늘 스스로 조심하고 삼가라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1절)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3년 동안 에베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단순히 지식만 전달한 게 아닙니다. 정말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일깨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일깨어’ 즉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영적으로 각성하여, 방종하거나 방심하지 않고 파수꾼처럼 늘 준비하고 경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아, 이 정도면 됐다. 내가 이 정도로 믿음생활을 잘하면 됐다.’라고 만족하며 안주하는 그 순간 넘어지는 겁니다. 그러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는 겁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이 늘 그렇게 깨어 있으면서, 교인들을 위해 자기처럼 살아줄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각 사람에게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나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가르치고 훈계하던 것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가 이 가르침과 다른 것이 들어오면 즉시 분별하여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2절)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에베소의 어떤 유력한 사람들 중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그들의 삶을 오직 주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온전히 맡길 것을 당부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만이 말씀으로 세움을 입어서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고, 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업’은 천국에 가서 받을 상을 의미합니다. 많은 상을 받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전한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분이신가, 사랑 그 자체이신가’ 하는 것, 즉 은혜가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는 말씀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은혜’로 인하여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 즉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감격하고 감사하며 변화가 되었습니다. 강한 질책으로 변화된 게 아니고 은혜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정의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정의가 중요합니다.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물론 이 은혜가 악용될 때가 많습니다. 뭘 하다가 안 풀리거나 정확하게 하려고 하면 ‘은혜로 합시다.’라고 합니다. 그때 그 말은 진짜 은혜로 하자는 말이 아니라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냐? 대충 하고 넘어가자.’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잘못 쓰인 경우이지만, 바울은 정의의 말씀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런가? 나는 정의를 주장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그런 것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정의를 외쳤지만 자기가 외친 그 말에 나중에 자기가 걸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유행어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막 정의를 주장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사실 은혜라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쯧쯧 해주는 마음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바울이 나누었고, 우리가 나누어야 할 말씀도 은혜의 말씀입니다.
2.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여준 모범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3절)
바울은 1세기 당시 “은이나 금이나 의복”으로 대변되던 세상의 물질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천막제조(tent making)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자비량으로 자기가 돈을 벌어가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천막을 제조하고 판매하면서, 전도에 필요한 경비를 직접 충당했던 것입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를 비롯해서 선교비를 보내준 것을 받았지만, 자기가 대부분 일을 하며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4절)
바울은 자신의 필요한 경비뿐 아니라, 동행자들의 경비까지 다 부담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바울이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다고 하는 것처럼, 에베소의 장로들도 다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헌신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5절)
사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 자체가 복음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이 복음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잘 읽지 않는 분들은 그런 말씀이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그것은 마치 ‘다 같이 유다서 2장을 읽겠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서는 1장 밖에 없는데 모르고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에 사용된 단어가 사실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여기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소스를 통해 받아서 말한 게 아니라, 그런 의미로 하신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을 요약한 핵심 정신입니다. 사실 산상설교(마태복음 5-7장) 전체가 이웃 사랑이 그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신은 이기적인 사랑(받는 것)만 추구하기를 버리고, 이타적인 이웃 사랑(주는 것)을 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듯 물질로도 약한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이 훨씬 복된 삶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참된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도 성도들 앞에서 역시 그와 같은 모본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그들을 교회의 장로로 세우신 까닭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에이, 사실은 받는 게 주는 것보다 더 좋은데. 나는 받고 싶다!’ 그런 사람은 뭘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줘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물 등 남에게 베풀어보면, 이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훨씬 복이 있는 삶입니다.
아주 큰 것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목장에서 자기 집을 오픈하여 같이 모일 때, 그것이 주는 겁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항상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는 삶입니다. 받기만 하던 초신자의 삶에서, 점점 섬김을 보고 배우는 가운데 나도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3. 작별 인사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6절)
유언을 마친 바울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기도했습니다. 의자에 앉은 편한 자세가 아니라, 여기 보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지적하신 것이 바로 그겁니다. 멋진 옷을 입고 시장 같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들고 “주여!”라고 하는데, 속으로는 ‘이렇게 해야 멋진가? 아니면 저렇게 해야 멋진가?’라고 하며 어떻게 하면 남에게 잘 보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기도를 지적하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완전히 꿇어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을 보면, 스데반도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40절에도, 무릎 꿇고 기도한 베드로를 통해 죽은 다비다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디에나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계시고, 벌써부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든지 그분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무릎이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꼭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자세가 그분 앞에 겸손히 꿇어 엎드리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앉아서 다리를 꼬고 기도하거나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근한 의미로는 좋은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는 좋지 않은 자세입니다. 어떻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다리를 꼬고서 배를 내놓거나 눈을 뜨고 가볍게 기도하겠습니까? 간절할 때는 자동으로 무릎을 꿇게 됩니다. 사람끼리도 간절히 부탁할 게 있으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릎 꿇는 것은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무릎이 괜찮은 분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좋고, 무릎이 아파서 그러지 못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정말 꿇어 엎드려 주님 앞에 기도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들이 함께 무릎 꿇고 기도드렸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자신의 유언처럼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믿음의 모본이 되어 주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 에베소의 장로들은 그 기도에 더하여서 바울의 앞길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그의 앞에 고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를 위해 간절히 주님께 맡기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7절)
‘울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일상의 슬픔을 반영하는 정도의 눈물이 아니라, 누군가 죽었을 때 울부짖는 ‘통곡’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지금 울부짖고 크게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통곡하며 차례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울었습니다. 엉엉 울면서 몇 번씩이나 계속 서로 끌어안고 우는 에베소 장로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38절)
여기서 ‘근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가 ‘깊은 슬픔에 빠져들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과의 영원한 작별, 즉 자신의 죽음을,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이미 25절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바울과 헤어진다는 것은 자신들을 그토록 사랑하고 자신들을 그토록 섬겨주고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해주던 바울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는 이제 다시 보지 못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통곡 속에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몇 번씩이나 작별의 입맞춤을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슬픔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항구로 나가, 바울이 배에 오르기까지 바울을 전송했습니다. 바울과의 영원한 작별이 이제는 정말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마침내 바울이 배를 타고 그 배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배 위의 바울도, 항구에 서서 전송하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도, 서로 바라보고 손을 흔들면서 작별인사를 또 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할 에베소 장로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점점 배가 멀어지면서 바울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 정말 큰 슬픔이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배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 후 이 밀레도로부터 30마일 떨어진 에베소로 돌아가는 동안, 아니 그들의 평생 동안, 바울이 했던 유언이 그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유언과 같은 20장 말씀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뿐만 아니라, 지금 21세기에 사는 우리의 마음에까지 울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유언이 2천 년 전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이유는, 그의 말이 멋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멋진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말씀을 전한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김연수 목사님이 오셔서 ‘사실 사람이 말한 대로 살지 않는다. 목사도 설교한 대로 살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뼈아픈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한 대로 살았습니다. 자기가 전한 대로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이 파워가 있고 그의 말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울리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압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로 유언을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31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성도들을 위해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하며 말씀을 전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라’고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산 것을 이들이 다 보고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믿음의 모본을 보여준 것처럼, 그들도 이제는 성도들을 위한 믿음의 모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남긴 유언은 그냥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멋지게 하면 거기에 혹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엄청나게 말을 잘하거나 달변이거나 어떤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말을 할 때가 있는데, 거기에 속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실망하면서, 사람이 변했다고 합니다.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냥 말만 멋지게 한 것뿐입니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말을 멋지게 하면 내가 멋지게 보이겠지?’라고 생각하면 완전 착각입니다. 말을 멋지게 해서 멋지게 보이는 게 아니고, 실제로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멋지게 보이느냐 아니냐가 결정됩니다. 실제로 사는 삶에 의해 결정됩니다.
바울의 유언은 단순히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에베소의 장로들이 3년 동안 직접 보고 듣고 겪은 그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토록 큰 감동과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던 바울의 삶의 유언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기록되어서, 지금까지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영영 작별하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길 때, 바울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각자도 예외 없이 언젠가 주위 사람들과 영원한 작별을 할 때가 옵니다. 인간의 사망률에 대해 누군가 통계 조사(?)를 해보았더니 100%랍니다. 사람은 다 죽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언을 남기시겠습니까? ‘아, 내가 그 맛있는 음식을 못 먹고 죽어서 한이다.’라는 유언을 하시겠습니까? ‘나에게 못되게 군 그 사람을 확 때려주고 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원통하다.’라는 유언을 남기시겠습니까? 지금 나의 삶에 비추어 볼 때, 나의 유언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가족들에게 어떤 무게로 전달되겠습니까?
오늘이 벌써 8월 둘째 주일입니다. 불과 4개월 여만 지나면 우리는 2019년과 영원히 작별하게 됩니다. 이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작별할 때가 옵니다. 젊은 분들도 그때가 다 옵니다. 그때 어떤 무게의 유언을 남기겠습니까?
[나가는 말]
2주 후에 직분자를 선출하는 공동의회가 있습니다. 매년 이맘때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더욱 와 닿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에 나섰던 바울은, 지중해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각지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고, 또 교회의 지도자들 즉 장로를 세웠습니다. 우리말 ‘장로’로 번역된 헬라어가 ‘프레스뷔테로스(Presbuteros)’인데, 바로 여기서 우리 장로교(Presbyterian)라고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원래는 이 말이 ‘나이 든 사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부터 나이가 있고 덕망이 높은 원로를 ‘프레스뷔테로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장로로 모셨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복음을 전한 곳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가운데 나이가 있고 덕망이 높은 연장자들을 장로로 삼아 교회를 돌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장로직은 결코 계급이나 서열이 아니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비슷하게 연장자를 장로로 모시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변질되어 계급화가 되고 서열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떠난 뒤에 그를 대신하여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영적 리더들입니다. 그들을 영적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의 외적 공격과,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는 내적 유혹으로부터 스스로 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들을 위해 했던 것처럼, 교인들을 위해 밤낮 눈물로 기도하며 권면하고, 주님의 말씀에 삶을 온전히 의탁하면서, 자기 물질을 써가면서까지 연약한 교인들을 섬기는 믿음의 모본이 되어 주기를 당부했습니다. 어떤 자격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해 지도자인 장로로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교인들을 믿음으로 섬기는 모본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것이 직분자가 할 일입니다.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 호칭은 결코 무슨 계급이나 서열이 아닙니다. 서리집사보다 안수집사가 높고, 안수집사보다 장로가 높고, 전도사보다 목사가 높은 그런 게 아닙니다. 단지 주어진 역할과 사명이 다른 것뿐입니다. 직분은 과거의 봉사에 대한 어떤 보상으로 주는 것이나 명예직도 아닙니다. 직분은 지금 현재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보다 앞으로 더더욱 교회와 교인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책임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장로, 권사, 집사가 되신 분들과 또 앞으로 되실 분들은, 오늘 바울의 유언 같은 이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자신과 성도들을 위하여, 비성경적인 외적 공격과 말씀을 왜곡하려는 내적 유혹, 자꾸 파를 만들고 자기를 따르게 만들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성도들을 위해 밤낮 눈물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또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드러나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세상의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거나, 섬기는 일에 자꾸 무엇이 유리한지 머리를 굴리며 계산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 연약한 사람들을 돕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사랑의 섬김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겠습니다. ‘사랑의 이론가’가 되지 마시고, ‘사랑의 실천자’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을 장로와 권사와 집사로 부르는 모든 교인들을 위해서 참된 믿음의 모본을 보여주십시오. 저도 저를 목사로 불러주시는 여러분의 기대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아갈 때, 교회의 직분이 계급화 되고 서열화 된 한국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직분을 무슨 계급이나 서열로 오해하게 되면,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 제도는 오히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더 깊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장해물이 될 것이고, 그런 직분제라면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오히려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아, 나는 직분자가 아니니까 다행이다’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직분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개신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등한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을 지키고 돌보아야 할 ‘프레스뷔테로스’ 즉 장로의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바울처럼 매사에 스스로 삼가면서, 나 자신 앞에서, 가족들 앞에서, 교인들 앞에서, 동료들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믿음의 모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삶을 들어 쓰셔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