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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18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9

두로에서의 귀한 만남

(사도행전 211~6)

 

[들어가는 말]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쁘게 만나는가 하면 슬프게 헤어지고, 또 기쁘게 만났다가 헤어집니다.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작별은 언제였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마도 미국에 이민 올 때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때는 1986년으로 아주 오래 전입니다. 그때는 김포공항에서 떠났는데, 가족 이민으로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떠나던 날,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배웅을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제 가면 언제 보냐? 살아서 볼 수 있을까?’라고 하던 때였습니다.

 

정말 슬펐지만 공항에서 친구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 타서 제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하려고 활주로를 가고 있을 때, 꼭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라고 주었던 제 친구의 편지를 보고 정말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 ‘지금 네 마음은 두 가지일 것 같다. 미국에 가서 산다는 기대감도 있을 것이고, 또 고국을 떠나는 안타까움도 있을 거다. 잘 가라. 건강하고 행복해라. 언젠가 또 보자.’

 

그때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언제 친구들을 또 볼 수 있을지 너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헤어졌는데, 바로 몇 년 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어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여행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그때는 천국 가서 보자라고 하며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정말 민망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의 이별은 정말 슬픈 이별이었습니다. 고대사회 당시,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볼지 기약할 수 없는, 실제로도 보지 못했던,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마지막 작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바울은 계속해서 또 다른 성도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1.   밀레도에서 두로까지의 여정

 

1)  유명한 곳들을 거쳐가다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1)

 

20장 마지막 부분에 밀레도라는 곳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눈물의 작별을 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밀레도 남쪽 40마일이 넘는 거리에 위치한 섬인 고스(Kos)로 갔습니다. 그 당시 무역의 중심지였던 고스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유명한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cretes)의 고향이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고스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사로부터 육체의 질병을 고치기 원하는 병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고스를 찾았습니다.

 

이처럼 의학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스에는, 그리스 신화에 의술의 신으로 등장하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 신전도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궁중화가였던 아펠레스(Apelles)가 그 신전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아프로디테(Aphrodite Anadyomene)>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고대세계의 명화로 꼽혔습니다. 2000년 전 바울이 고스 섬에 도착했을 때,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는 바로 그 그림이 계속 전시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고스는 의학의 섬이자 무역의 섬이자 예술의 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것에도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날이 밝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배로 고스를 출발하여, 동남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유명한 섬인 로도로 갑니다. 영어로 Rhodes인 이 섬은 지금도 유명한데, 헬리어로는 로도스입니다. 소아시아 반도 해안의 섬들 중 가장 큰 섬인 로도는 장미의 섬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태양의 일조량이 많아서 가는 곳마다 화려한 장미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서를 연결하는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로도스에는 수사학과 웅변으로 유명한 대학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도 섬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헬리오스 콜로서스(Helios Colossus)’라는 것이었습니다. ‘헬리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이고, ‘콜로서스거대한 조각상입니다. BC 305년 마케도니아의 공격을 막아 낸 로도 시민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청동으로 헬리오스 콜로서스를 만들어 세웠는데, 그 높이가 무려 36미터(118피트)나 되었습니다. 이 헬리오스 콜로서스는 완공과 동시에, 전에 살펴보았던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과 함께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렸습니다.

 

그런 로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탄 바울 일행은 동쪽으로 약 53마일에 떨어져 있는 바다라로 갑니다. 고스와 로도는 섬이고, 바다라는 항구도시입니다. 당시 중요한 무역 항구도시였던 바다라는, 그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수백 척의 상선들이 거쳐 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리스 본토의 델피 신전에 필적하는 아폴로 신전이 있어서 유명했습니다.

 

이처럼 밀레도를 출발한 바울이 거친 곳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곳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처음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이 고스나 로도라고 하면 , 유명한 데 갔네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모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해안에서 중요한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훌륭한 장소들을 단지 거쳐만 갔습니다. 어느 곳에도 집착하거나, 둘러보거나,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2)

 

바울 일행은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바다라에서 지중해를 횡단하여 팔레스타인의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베니게는 역사의 페니키아로, 지금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수리아 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다라에서 이 베니게까지는 뱃길로 약 400마일이었는데, 당시 약 일주일 정도 걸려야 갈 수 있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가기 위해서는 작은 배가 아니라 큰 배라야 했습니다. 밀레도에서 작은 연안선으로 고스와 로도스를 거친 바울은, 당시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바다라에 도착해서 지중해를 횡단하여 베니게로 직행하는 큰 상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가게 됩니다.

 

 

2)  구브로를 바라보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3)

 

지금도 터키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큰 섬이 사이프러스(구브로)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지중해를 횡단하여 화물을 풀기 위해 베니게의 두로에 정박합니다. 그런데 그 배가 지중해를 횡단하는 동안에, 바울이 구브로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청하게 보고 있던 게 아니라 주목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라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원래 나타나다는 뜻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섬들이 앞에 굉장히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금방 나타났다가 옆으로 스치며 지나가지 않습니까?

 

본문은 그런 상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니게를 향해 지중해를 헤치고 나아가는 바울이 승선하고 있는 배 앞으로 구브로 섬이 나타났습니다. 구브로 섬, 즉 동서로 120마일 길이로 뻗어 있는 섬이 배 왼편으로 나타나 계속 보였습니다. 구브로를 왼편에 두고 배가 항해를 했다는 겁니다. 120마일이나 되는 섬을 완전히 지나가려면 하루 이상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배 위에서 그 섬을 하루 이상 계속 볼 수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뭔가 생각을 가지고 구브로 섬을 하루 이상 보면서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지금의 터키 즉 소아시아 반도와 접하고 있는 에게 해와 지중해 연안에는 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지도를 찾아보시면 섬들이 아주 많은데 대부분 그리스에 속한 섬들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탄 배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 섬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쪽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섬이 산토리니(Santorini)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를 정말 아는 사람들은 다른 섬을 갑니다.

 

어쨌든 그렇게 많은 지중해의 섬들 중에, 성경이 지금까지 이름을 밝힌 섬은 20:15절의 기오(키오스)와 사모(사모스) 외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사이프러스) 섬이 바울 앞에 나타났고, 바울이 구브로를 계속 바라보았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120마일이나 되는 그 섬이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기 때문에 계속 바라보았겠습니까? 아니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바울이 바라보았다고 썼겠습니까?

 

구브로 섬이 어떤 섬입니까? 1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곳이었습니다.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3년 정도에 걸친 세 번의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이 시점에, 바울 앞에 자기가 제일 처음 전도여행을 갔던 곳, 첫 번째 목적지였던 그곳이 탁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13년 만에 전도여행의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상륙하지는 않고 지나가면서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배 위에서 하루 이상 그 섬을 바라보면서, 바나바와 마가와 같이 갔던 1차 전도여행 때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며 회상에 젖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의 히브리식 이름이 사울 아닙니까. 그런데 로마 세계에 나와 보니까,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헬라식 또는 라틴식(로마식) 이름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총독 이름이 서기오 바울이었고, 그는 , 나도 바울인데?’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려면, 로마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식 이름인 사울보다는 바울이 더 좋겠다.’라고 하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바나바와 사울로서 바나바가 리더였는데, 그 섬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라고 되면서 자기가 리더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뜻깊은 곳이 바로 이 구브로입니다. 그러니까 구브로 섬을 보며 경관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바로 저곳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를 해주셨지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13년이 흘렀는데, 마침 자기가 1차 전도여행 때 갔던 그 섬을 지나가면서 지금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 가서 잡힐 것이고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며 가고 있는 길입니다. 비장한 각오로 가는 그 배 위에서 자기가 첫 번째로 갔던 구브로 섬을 보며, 하나님이 13년 전에도 신실하게 역사해주셨고, 지난 13년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지켜주시고 예루살렘까지 나를 인도하고 계시다.‘ 하는 감회에 젖어서, 큰 은혜와 감동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두로에서 일어난 일

 

1)  두로에서 제자들을 만나다

 

바울이 탄 배는 약 일주일 만에 지중해를 횡단하여, 화물을 풀기 위해 베니게의 두로에 정박하게 됩니다. 거기서 배의 짐을 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두로가 나옵니다. 항상 두로와 시돈이라고 같이 나오는데, 두로는 그 지역에서 최대의 해양 도시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두로 왕이 이스라엘과 우호조약을 맺고, 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백향목들과 기술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서 짓는 것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주전 65년 로마제국의 자유무역 도시로 편입된 이후에 두로는 로마제국의 번영과 더불어 더 큰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해지는 동시에 타락했습니다. 인간은 돈이 많아지면 타락하고 이상한 데에 돈을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해지면 부해질수록 더 타락하는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4)

 

나중에 7절에서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타고 온 배의 최종 목적지는 두로 남쪽의 돌레마이였다는 1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2016절에서 본 것처럼, 바울이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급히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라에서 두로까지 직행하는 배를 탄 바울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계속 작은 배를 바꾸어 타면서 두로에 가는 것보다 훨씬 시간을 벌면서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타고 온 배가 두로에서 화물을 내리고 새 화물을 싣고 돌레마이로 갈 때까지 이레 동안 두로에서 머물기로 합니다. 그렇다고 편안하게 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함께 타락의 도시, 두로에 살고 있는 제자들, 즉 크리스천들을 찾아 나섭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이 바로 이 두로를 방문하셨습니다. 그곳의 귀신 들린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두로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북쪽 수리아 안디옥으로부터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중간에 있는 두로를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로에서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부귀영화가 넘치지만 타락의 도시인 두로에 살고 있던 그들의 믿음을 격려해줍니다. 또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1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갈라디아 지역에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는가를 그들과 나누며 간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오늘의 본문에서 두로에 잠시 머물게 된 바울은, 10년 정도 만에 그때의 그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7일 동안 머물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두로의 제자들이 위대하신 사도 바울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다.’라며 예상하고 있었겠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텍스트나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혀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바울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찾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로의 제자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뜻밖에 이 귀한 분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기뻤냐 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준 사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려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믿음을 북돋워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그들에게 사기를 치고 떠났었는데 이제 나타났다면, 그들의 반응이 기뻐한 것이었겠습니까? 물론 기뻐했을 겁니다. ‘, 잘 만났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의미의 기쁨입니다. 10년 만에 나타난 바울이 그들에게 이전에 해를 끼치고 떠났다면, 이번에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거나, 문전박대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치를 떨면서 몰려왔든지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10년 전쯤에 서로 헤어졌던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10년 후인 지금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너 잘 만났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주 감격스러워하고 기뻐하며 만나시겠습니까? 내가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인 2029년에 누군가를 어디서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만났을 때, 그 사람과의 만남을 진심으로 기뻐할 것인가, 슬쩍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치를 떨며 이를 갈 것인가? 이것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제 내 삶의 결과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의 결과는 내일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헤어짐을 잘해야 합니다. 이제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까 탁 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시 안 볼지 어떻게 압니까? 10년 후에 어디서 탁 만날지 어떻게 압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선수를 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소에 잘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기쁘고 감사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고 이상하게 끝나버리면 그것이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고, 항상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함께 있는 동안 사랑하라고 함께 있게 해주시는 겁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서로 격려해주고 북돋워주는 우리 관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로의 제자들이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다

 

4절을 다시 보면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두로의 제자들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권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명령을 하는 겁니다. 성령님께서 두로의 제자들에게도, 바울이 가려는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이라고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성령님이 알려주셨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라도 바울이 가는데 성령님께서 바울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면 붙들고 애원하지 않았겠습니까?

 

10년 전에 바울을 잠깐 만나서 교제했던 이들이니까 바울과 친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계속적인 교류가 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서 위대한 사도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마음은 에베소의 장로들과 성도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으니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바울이 안 갈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로의 제자들 앞에서도 자신의 굳은 결심을 분명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똑같이 말했을 텐데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때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2-24)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바울이 이런 믿음의 고백과 선포를 할 때, 두로의 제자들이 어떻게 계속 그에게 가지 말라고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5)

 

마침내 7일이 지나고 배가 다시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여기 보면 두로의 제자들도 성문 밖까지 나와서 바울 일행을 전송합니다. 항구까지 따라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최대의 해운도시였던 두로의 항구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특히 이렇게 큰 상선이 출항하는 시간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물건을 싣고 내리고 작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할 때처럼,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두로의 제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바닷가에서 기도했습니다.

 

서로 무슨 기도를 해주었겠습니까?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그가 거기서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도록 축복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고린도도 그랬고 에베소도 그랬지만, 그에 못지않은 타락의 도시 두로, 구약에서부터 악명이 높았던 두로는 바로 구약의 최대 악녀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타락의 도시였던 두로에서 제자들이 악한 영향에 놓이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승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5)라는 표현입니다. 다른 데서는 처자와 함께 다 나와 전송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일하게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 전송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로에 있는 남자 제자들(형제들)만 항구까지 바울 일행을 따라 나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데리고 함께 항구까지 나가서 바울을 전송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자들과 함께 바닷가에 무릎을 꿇고 바울 일행과 기도했습니다. 자기들만 기도한 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어떻게 보면 두로 교회 전체가 다 함께 모여 기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처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는 바울 일행을 끝까지 전송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이렇게 중요한 현장에 처자들을 다 동원하여 같이 나왔다는 것은 여기에 유일하게 나옵니다. 그 정도로 두로의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다 데리고 항구까지 나가서 바울을 전송했다는 것은, 지난 7일 동안 온 가족 즉 아내와 자녀들이 다 함께 모여서 부흥회를 했다는 겁니다. 집회를 하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두로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거듭하여 바울을 말렸지만, 그렇게 말릴 때도 그들의 처자들이 함께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을 끝까지 갑니다. 내 사명을 다함에 있어서는 내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는 귀한 선포를 가족들이 다 같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말보다도 자녀들에게 큰 영적 교훈을 주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 교육이었습니다.

 

이제 7일이 지나고 바울이 두로를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과 헤어지면 살아서 다시 바울을 못 볼 가능성이 거의 100%입니다. 그래서 두로의 제자들은 처자들을 다 데리고 항구로 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바울과 영원히 작별하는 그 마지막 현장을 자기들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가족들까지 다 함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과 작별하는 마지막 현장을 지금 아내와 자녀와 함께 지켜봄으로써, 두로의 제자들 자신들이 먼저 바울과 같이 저런 헌신과 믿음을 본받고, 사랑하는 가족들 역시 저런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며 함께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로의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 모두 바닷가에서 바울과 또 그의 일행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계속 우리라고 나오니까 누가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도 바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함께 무릎을 꿇고 바닷가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때 두로의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얼마나 큰 은혜와 도전과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6)

 

서로 작별을 나누고, 마침내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에 오릅니다. 바울이 지금 크루즈를 타는 게 아닙니다. 결국은 죽음으로 끝날 결박과 환난의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얼굴 표정은 일그러졌을 리가 없습니다. 아주 평안했습니다. 바울의 그 얼굴은 두로의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또 자녀들의 마음속에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는 분명한 그림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처럼 그들도 바울 일행이 탄 배가 떠날 때 손을 흔들고,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면서 평안히 가라고 하며 주님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하고 계속 기도하고 축복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배가 안 보이게 되었을 때 뒤를 돌아 자기 집으로 가면서 가족들끼리 무슨 대화를 했겠습니까? ‘, 이제 우리 어디 가서 회식할까? 뭐 먹을까? 짜장면? 짬뽕?’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에 큰 감동과 은혜가 있었겠습니까?

 

부부끼리는 서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여보, 내가 그 동안 너무 잘못 살았어. 바울 선생님을 보니까 내가 정말 제대로 살아야겠어.’라고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부모는 자녀에게 얘야, 내가 그 동안 너에게 너무 믿음의 본을 잘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는 저 바울 선생님처럼 나도 복음을 위해 살겠다.’ 하고 이야기해주었을 것입니다. 또 자녀는 부모에게 아빠, 엄마, 바울 선생님과 만나는 자리에 나를 데려와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나도 바울 선생님처럼 저렇게 살래요.’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역사나 성경에 일일이 다 나오지 않아도, 무명의 크리스천들의 헌신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 저희까지 다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과 헤어지는 마지막 작별 현장에 아내와 자녀까지 다 데리고 온 이 형제들의 결단이 참 귀한 결단입니다.

 

여러분, 항상 영적인 곳,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자리에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주님과 함께 하며 가장 좋은 곳,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복된 그 자리에 피곤하니까 안 데려오고, 바쁘니까 안 데려오고, 나는 내 할 일 하고 너는 네 할 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복된 자리에 배우자도 자녀도 다 데려오고 부모님도 다 모시고 와서 함께 해야 하는데, 조금 바쁘다고 하면 안 와도 된다 하고 다른 일이 있으면 그리 가도 되고 그러다 보니까, 세상 복은 조금 받을지 모르겠는데 진짜 복, 하나님의 복은 다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복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다 끝나 버립니다. 길어야 100년이면 다 끝납니다. 그런데 100, 200, 300년이 아니라 영원,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그 영원히 함께 하는 그 복,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릴 수 있는 그 자리로 우리 가족을, 자녀를 데리고 와야만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 동안 무엇을 주었습니까? 또 앞으로 무엇을 남겨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참 안타까운 경우가 많은데, 오래 전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옆 사람과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주라고 했습니다. 거기 한 중년 부부가 있었고 옆에 청년이 있어서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었습니다. 그 남편은 대기업의 임원이었고, 평소에 많은 교인들이 존경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내놓은 기도제목이 뭐였냐 하면, 자기들의 외아들이 군대 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40일 작정기도 중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부부의 아들이 신체검사에서 체중 미달로 불합격 판정을 받기 위해 굶식(?) 또는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제목을 들은 몇몇 교우들이 기도하는 시늉은 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를 더 이상 존경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바른 기도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결국 그 부부의 아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군 입대를 면제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또래보다 당시에 3년 더 빨리 사회에 합법적으로진출했습니다. 그 후 20년 정도 지났는데, 그 가정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아들은 홀로 남은 어머니를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40일 작정기도까지 군 입대 면제를 위해 하면서 그 외아들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무엇이었겠습니까? ‘, 부모님은 나를 정말 사랑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철저한 이기심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머니에게 그냥 되돌아가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토록 정성을 다해 심어준 것,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기심이었던 것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자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아들은 자기가 자녀를 낳으면 또 자녀에게 어떤 대우를 받겠습니까? 또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철저히 자기 위주로 사는 사람들, 자기에게 유익이 될 것 같으면 끌어안고 유익이 없는 것 같으면 쳐내는 사람들, 그렇게 철저히 자기만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사실 세상에서 더 빨리 출세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될 수 있고,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불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만을 심어주는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일들이 분명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세상에서는 떵떵 거리고 높이 올라가고 돈 많이 벌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이 되고 맙니다. 정말 안타까운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지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을 슬쩍 제쳐놓고 저리로 가라고 합니다. 당장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비극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자기의 처자와 함께 바울이 떠나는 곳까지 갔던 두로의 제자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도 가족들과 함께 했던 두로의 제자들의 선택은 정말 영적으로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들이라고 안 바빴겠습니까? 배우자에게 다른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자녀가 공부를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일을 하든지 다른 일이 있어서 그래, 피곤할 테니 쉬어라.’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배우자와 자녀를 다 데리고 바울이 떠날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을 본받기 원합니다. 두로의 제자들처럼, 특별히 그들이 본을 받아 따랐던 바울처럼,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에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바울의 믿음을 우리가 본받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손에 나 자신을 맡기고 내 가족을 맡기는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나 자신과 내 가족과 이웃을 정말 사랑하고 위하는 참된 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일어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이 매일매일 상황은 각자 다 다르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상관없이 바로 이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로 나아가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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