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9년 11월 10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0 ✦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사도행전 24장 22~27절)
[들어가는 말]
이제 사도행전도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28장으로 분량이 적지 않지만 우리가 사도행전을 계속해서 다루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제대로 이해하면 신약성경의 반 이상, 아니 3분의 2 가까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 2년 가까이 되니까 지겨운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굉장한 영적 기회입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의 삶>을 인도하면서 그냥 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사도행전을 죽 강해설교 하면서 본문을 연구하며 <말씀의 삶>을 같이 해보니까, 더욱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굉장한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들은 그냥 아무렇게나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살펴보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나온 편지들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같이 읽을 때 바울의 서신서들이 더 이해가 잘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이런 부분과 관련된 역사책들, 로마시대의 역사라든지 성경과 관련된 역사라든지, 그런 책들이 정말 많기 때문에 함께 읽으며 나아간다면 이것이 정말 귀한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죽 살펴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바울과 같이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헌신하여 나아가는 사도가 그토록 엄청난 고난과 역경과 죽음의 위협까지 당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 고난이 정말로 나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난을 당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입니까? 예수 잘 믿다가 고난 받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떵떵 거리며 사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입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통 로토에 당첨되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몇 백 만 불짜리에 당첨되었다면 굉장히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거액의 로토에 당첨된 다음에 집안이 망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큰 액수의 로토에 당첨된 가정에서 살인사건이 났습니다.
좋은 학교 가는 것, 좋은 직장 잡는 것, 사업이 잘되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이런 것들이 정말로 좋은 일입니까? 만약 그렇게 잘되어서 그것 때문에 살인이 난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것이 정말 좋은 일인지 우리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되었다면 고난은 축복입니다. 광야 같은 삶이라도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인도하신다면 그것은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성경을 통해 내가 원하는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확인받으려고 하지 말고, 성경에서 알려주는 하나님의 가치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두 갈래 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오늘 제목을 ‘두 갈래 길’이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인생은 두 갈래 길이고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매순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교회에 오는 것만 해도 벌써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빨리빨리 오느냐, 느긋하게 오느냐? 이 길로 가느냐, 저 길로 가느냐? 일을 마저 하고 오느냐, 그냥 오느냐? 교회에 도착해서도 예배당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하느냐, 저쪽에 나가서 딴짓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 우리는 항상 두 갈래 길 앞에 있습니다.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그런 두 갈래 길 앞에서 꿋꿋이 좁지만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과, 넓지만 멸망의 길을 선택한 사람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짧지만 우리에게 굉장한 메시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 판결이 보류되다 (22-23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22-23절)
가이사랴에는 오래 전부터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 정착하여 살면서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그의 딸들은 다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이미 주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초창기부터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전하여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교회도 생겼습니다.
또한 24절에 보면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가 유대 계통이었기 때문에, 총독 벨릭스는 그리스도교(나사렛교)에 대한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총독이기 때문에 다 파악해야 했고, 그래서 정보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바울을 고발한 것은 단지 종교적 차이에서 일어난 일이지, 바울이 로마제국의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이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데리고 온 더둘로의 말도 들었고, 바울 자신의 변호도 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봐도 바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무죄인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즉시 석방시켜 주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그 자리에서 바울의 무죄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벨릭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바울에 대한 선고를 내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백부장으로 하여금 바울에게 제한된 자유를 주는 조건으로 그를 계속해서 헤롯 궁 안에 가두어놓게 됩니다. 나중에 천부장 루시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왔을 가능성도 적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그냥 잡아 놓습니다.
바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무죄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로마에서도 증언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빨리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로마까지 가서 전해야 되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바울이 벨릭스에 의해서 억울하게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 궁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사실 구금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지금 바울을 감옥에 막 쳐 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자유를 주고 로마 장교인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바울을 지켜주라고 합니다. 친구들이 와서 돌봐주는 것도 막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완전히 보호해주는 겁니다.
사실 이 상황을 그냥 보면 이처럼 억울한 상황이 없습니다. 무죄인데 계속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지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면 절대 그게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바울이 여기서 무죄 선고를 받고 즉시 석방됐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23장에서 보았듯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 40여 명이 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밖에서 있는데,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백부장에게 잘 지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소홀한 틈을 타서 암살자들이 들어와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잘 보호하라는 겁니다.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보호를 했어야 합니다.
나중에 25장을 보면 나오지만, 그때는 2년이 지나 총독도 바뀝니다. 바뀐 총독 베스도에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또 가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합시다.’ 하는 식으로 속여서 중간에 매복해 있다가 암살자들이 죽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2년 동안 이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풀려나서 나가게 되는 것이 바울에게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안에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나가면 바울이 살해당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가 될 때까지 로마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로마 군대만큼 막강한 군대가 어디 있습니까? 로마 군대보다 지금 바울을 더 강력하게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바로 이런 것이 위기에 처한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일이 안 된다고, 길이 막혔다고 불평하면서 ‘하나님,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기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럴 때 큰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정말로 나쁜 일인가 점검해볼 일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나쁜 상황인가? 혹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처한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바꾸어주시려고 잠시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지금 주님의 뜻대로 살지도 않는데 상황이 너무 잘 풀리고 돈이 잘 벌리고 성공하고 아주 잘 나갈 때, ‘아유, 하나님을 안 믿어도 잘 되네.’라고 할 게 아닙니다. 과연 이 상황이 정말로 좋은 상황인가 꼭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났는데 너무 잘된다면, 이것이 멸망의 길이 아닌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유혹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우리를 멸망의 길로 몰아가려는 길입니다.
그런데 벨릭스가 왜 이때 바울에 대한 재판을 연기하고 다시 그를 가두어놓습니까? 벨릭스가 천부장 루시아를 핑계 대며 바울에 대한 선고를 연기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 즉석에서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자기에게 오랫동안 많은 뇌물을 바쳐 온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입니다.
여기 벨릭스도 그렇고 이전에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도 그렇고, 철저히 정치적이고 철저히 자기 이득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인 것을 우리가 꼭 알고 봐야 합니다. 특히 빌라도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계속 놓아주려고 했기 때문에, 그냥 성경을 읽으면 ‘아니, 이렇게 착한 사람을 왜 우리는 예배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계속 고백하는가? 이건 불공평하지 않으냐?’ 하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철저히 정치적인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철저히 자기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나한테 이게 뭐가 이득이 있나’에 따라 결정을 하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뇌물을 바쳐온 사람들이 여기 있는데 바울을 무죄라고 놓아주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살짝 무마시키려고 가두어놓되, 밖에서는 볼 수 없으니까 안에서는 조금 편하게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두 번째 이유가 더 큰 것인데, 바울이 돈이 많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자는 마음이 있습니다. 벨릭스는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돈이 많지만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냥 돈을 계속 쌓아놓는 게 좋은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와 달리 바울이 뇌물을 안 바치니까, 벨릭스는 떠날 때까지 2년 동안이나 바울을 그냥 헤롯 궁에 가두어놓은 것입니다.
2. 두 갈래 길 앞에 선 벨릭스의 잘못된 선택 (24-27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4절)
며칠 후 총독 벨릭스가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헤롯 궁에 갇혀 있는 바울을 개인적으로 부릅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벨릭스에게는 세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드루실라는 세 번째 아내였습니다.
여기 “유대 여자 드루실라”라고 나오는데, 정확히 말하면 “유대 여자”가 아니라 헤롯 가문의 여자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드루실라는,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과 만났고 또 속은 것을 알고 베들레헴 근처의 남자 아기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던 그 헤롯(대헤롯 또는 헤롯 대왕)의 손녀입니다.
드루실라의 아버지가 또 누구냐 하면, 사도행전 12장에서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했던 헤롯, 그 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다가 주님의 천사가 쳐서 벌레에게 먹혀 죽은 헤롯이 바로 드루실라의 아버지입니다. 그 헤롯은 역사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25장 13절에 보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바뀐 총독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왔다고 나오는데, 이 아그립바 왕이 바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버니게는 그의 여동생이고, 드루실라는 그 막내동생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사람이 남매들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자녀들입니다. 나중에 더 살펴보겠지만, 젊은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가 남매 사이였는데도 동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음란한 집안이 바로 헤롯 집안이었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드루실라의 오빠와 언니였고, 드루실라는 벨릭스의 아내였습니다. 드루실라에게는 벨릭스가 두 번째 남편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드루실라는 아주 엄청난 미모를 지닌 매력적인 여성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증조할머니가 하스모니안 왕가의 마리암네였기 때문에, 그 미모가 전해내려온 것 같습니다.
벨릭스와 함께 바울을 만났을 때 드루실라는 나이가 불과 19-20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16세 정도에 시리아 쪽에 있는 작은 나라인 에메사(Emesan) 왕국의 나이 많은 아지주스(Azizus) 왕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다 야심 많은 로마의 권력가인 벨릭스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둘이 서로 눈이 맞았고, 벨릭스가 드루실라를 빼앗아 온 것입니다.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기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벨릭스는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게 됩니다. 사실 바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벨릭스가 권력자이고 그의 한마디면 자기가 풀려날 수 있는데, 벨릭스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한마디만 하면 풀려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벨릭스 총독께서는 너무 훌륭하시고, 내가 기도해보니까 이름에 ‘벨’ 자가 들어가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예언을 받았습니다.”라고 한 번만 뻥을 치면(?) 기분이 좋아져서 나가라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5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핵심을 세 단어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입니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절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없애고 자신의 삶에서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이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이 상 주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여기서 말하는 ‘의’가 벨릭스의 유명한 잔인함과 압제하던 죄와 관련된다고 봅니다. ‘절제’는 드루실라에게 이끌려 정욕으로 남의 아내를 빼앗아다가 젊은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은 잘못된 욕정에 대한 것이며, ‘장차 오는 심판’은 그들의 불의와 부도덕으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것임을 전했다고 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벨릭스에게 다 걸리는 말들입니다. 벨릭스는 전혀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절제하지 못해서 이러고 사는데 절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해석과 동시에, 여기서 말하는 의와 절제와 심판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잇는 ‘구원의 세 시제’와 통한다고 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의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 그가 로마서에서 자세히 설명한 하나님의 칭의, 즉 우리가 죄인인데 의롭다고 칭하여주신 것(justific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는 받은 구원, 영의 구원,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또 ‘절제’는 받는 구원,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살면서 구원을 받아가는 과정, 혼(지정의)의 구원, 인격의 구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은 받을 구원, 몸의 구원,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받을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핵심을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이라는 세 단어로 표현하여 설명했는데, 이 얼마나 탁월한 설명입니까? 짧은 시간에 확실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전해야 하는데, 벨릭스에게 아부해서 풀려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벨릭스에게 다 걸려서 벨릭스가 두려워할 만한 하나님의 진리의 핵심을 잡아서 설명한 것입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입장에서 보면, 회개하고 십자가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의 결정은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절)라고 합니다. 지금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너무 두려웠습니다. 믿음의 핵심이 ‘의’와 ‘절제’와 ‘심판’이라는 것을 전해 들으니까 너무 두려웠습니다. 옛날 개역한글 성경을 사용할 때 이 부분을 다루었으면 더 실감이 났을 것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벨릭스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시방은 가라” 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사투리(?)까지 씁니다. 그 정도로 두려웠습니다.
‘두려워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 ‘깜짝 놀라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벨릭스가 깜짝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인들은 권력자 앞에서 거북한 말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더둘로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벨릭스 각하여!”라고 아부하는 말을 하면서 바울을 고소하지 않았습니까?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탐할 뿐만 아니라 아내를 세 명이나 두고도 정욕에 사로잡혀 살던 불의한 벨릭스, 철저히 자기 이득에 따라 살던 이기적 인간 벨릭스에게 던진 바울의 세 단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은, 벨릭스로서는 그 중 어느 한 단어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충격을 던지는 단어들이었습니다. 평생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데 장차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단어로 나와 있지만 바울이 얼마나 자세히 이야기했겠습니까? 그랬을 때 벨릭스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두려웠으면 빨리 회개해야 했습니다. 지금 두 갈래 길입니다. 회개하느냐, 아니면 계속 그러고 사느냐? 그런데 계속 그러고 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나중에 다시 호출하겠다고 하며 빨리 돌려 보냅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6절)
벨릭스가 너무 두려워서 바울을 빨리 보냈는데, 그 두려움보다 돈에 대한 욕심이 더 컸습니다. ‘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사람이 돈이 있는 사람 같으니, 빨리 불러서 돈을 빼내야겠는데?’ 두려움보다 돈에 대한 욕심이 더 컸습니다. 이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회개와 심판과 엄청난 말씀을 들어도 그 순간뿐이지, 조금 지나면 또 욕심이 일어나는 겁니다.
벨릭스는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바울을 “더 자주” 불러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흥종교는 돈이 많습니다. 특히 지난 번 바울이 변호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24장 17절에서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가운데 ‘내가 왜 여기 왔느냐 하면, 구제금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여기 왔다가 성전에 갔고, 결례를 행했고, 양심이 거리낌 없이 살았다.’라고 죽 말하는 중에 구제금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겁니다.
그런데 벨릭스에게는 다른 말은 하나도 안 들리고 ‘구제금’ 즉 돈 밖에 안 들리면서 ‘아, 얘가 돈이 있네.’라고 생각한 겁니다. 사실 바울은 지금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제금은 이미 전달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돈을 가져왔으니 어디 숨겨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부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아무리 중요한 말을 해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말은 벨릭스로 하여금 바울에게 돈이 많다고 확신을 주었기 때문에 더 자주 호출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이야기입니까? 바울을 또 부를 때 무슨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또 같은 이야기를 한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벨릭스의 경우에는 돈을 뜯어내려고 계속 불러서 들은 것입니다.
여기에 겹치는 사람이 두 명 생각납니다. 말씀이 너무 괴롭지만 달아서 계속 들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헤롯입니다. 복음서에서 세례요한의 말을 계속 들었던 헤롯인데, 그는 헤롯 안티파스로 헤롯대왕의 또 다른 아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한 빌라도가 생각납니다.
벨릭스는 계속 뇌물을 바라면서 바울을 불러 이야기했지만, 바울이 전혀 뇌물을 바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기 때문이고, 또 있어도 바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바울을 2년 동안이나 헤롯 궁에 그냥 방치해 둡니다. 바울에게 들었던 믿음의 핵심인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은, 이제 벨릭스에게 신경 쓸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처음 들었을 때나 두려웠지, 자꾸 들으니까 ‘에이, 그냥 됐어’ 하며 넘어가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 아무리 충격적인 하나님의 말씀도 두 번,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계속 듣다 보면 ‘다 아는 얘기를 뭘 또 하나’ 하는 식으로 전혀 마음에 깨달음이 없어집니다. 자기가 정말로 그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고 맙니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27절)
2년이 지나서 벨릭스 총독은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로 소환을 당했습니다. 역사 기록에 보면, 총독의 거주지인 가이사랴에 유대인들도 있고 헬라인들도 있었는데, 로마 시민으로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주도권 장악을 위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벨릭스가 총독으로서 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여 유대인들을 제압하고 일방적으로 헬라 사람들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생명을 잃고 또 재산을 잃었습니다. 아주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헬라인들 편을 들기 위해 자기가 갖고 있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분노했고, 너무 분노해서 당시 황제였던 네로에게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그것을 본 네로가 결국 벨릭스를 소환했습니다. 소환을 당하면 끝입니다. 정치적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 것입니다.
벨릭스가 그렇게 소환당해 가고, 그 후임으로 베스도가 오게 됩니다. 벨릭스는 신임총독인 베스도를 위해 업무 인수인계를 준비하다가, ‘아, 내가 바울이라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뒀구나’ 하며 로마 시민인데도 2년 동안 그냥 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라도 벨릭스는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보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석방하고 끝내면 됩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그때도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철저히 정치적이고 철저히 자기 이득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왜 자기가 소환당했습니까? 유대인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계속 잡아둠으로써 조금이라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다시 얻고 회복해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그의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어도, 자기 이득과 상관없으면 그냥 쓰다 버리는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잡아놓았습니다.
여기서 ‘구류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결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자유를 주고 놓아두다가, 유대인들이 탄원서를 올린 것 때문에 소환을 당하면서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시 바울을 결박해서 감옥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지금 바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하면 유대인들에게 더 욕을 먹게 되니까, 그것보다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바울을 투옥시켜 두는 게 자기에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철저히 정치적이고 철저히 자기 이득을 따라 행동한 계산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교활하고도 자기소임을 다하지 못한 일입니다. 자기 때에 이것을 해결했어야 하는데, 해결하지 않고 다음 사람인 베스도에게 넘겨버린 겁니다.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베스도에게 넘겨버렸으니까, 그는 전형적으로 무책임하고 부패한 관리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선택의 결과
그러면 이 사람이 이렇게 정치적이고 자기 이득을 따라 결정하고, 두 갈래 길에서 항상 넓은 길과 좋아 보이는 길만 택해서 결국 잘되었습니까? 역사의 기록을 보면 완전히 그 반대였습니다.
지금 스스로 구원의 기회를 내버린 벨릭스는 소환당해서 불명예 퇴진을 한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 유대 출신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드루실라와의 사이에서 아그립바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로마로 가서 그 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적당히 뇌물을 바쳐가며 무마시킨 다음, 남은 재산을 다 챙겨서 그 당시 최고의 휴양지이자 문화시설이 최첨단을 달리던 폼페이(Pompeii)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폼페이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AD 79년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그러니까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아들과 함께 그곳에서 불에 타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그렇게 화산 폭발로 죽든, 물에 빠져 죽든, 전쟁터에서 죽든, 병으로 죽든, 잠을 자다 죽든, 편안하게 죽든, 다 죽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에게는 죽음이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을 그 앞에서 직접 들었던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만약 그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면, 이전에는 죄악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다가 아름답게 생애를 마감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 죽었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아름답게 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그냥 차버리고 영원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이득만 따라갔지만 결국에는 비참하게 죽고 만 겁니다. 너무 불쌍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심하면서도 불쌍한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1세기에 살았던 이 사람들만의 모습입니까?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는가, 이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살려보겠다고 “이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하며 계속 살리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왜? 정치적인 계산, 자기 이득 때문입니다. 그때 유월절이라 죄수를 하나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그때 예수가 있고 바라바가 있습니다. 바라바는 아주 요주의인물, 위험인물입니다. 로마 군인들을 죽이고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가는 또 난리가 나고, 그러면 또 가서 해결하느라 곤란을 겪고, 잘못하다가는 황제의 소환을 받아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놓아주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가 절대 아닙니다. 정치적인 계산, 자기이득입니다. ‘예수를 놓아줘야 나에게 좋다. 그래야 내가 정치적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예수를 놓아주자고 하다가 막 민란이 일어나려고 하니까 ‘아, 이젠 됐다. 가서 죽여라.’ 하며 십자가에 내어주었습니다. 철저히 자기이득, 정치적 계산입니다.
그랬을 때 그럼 그가 잘됐나? 그렇게 정치적인 계산으로 자기이득만 좇아 살았는데 잘됐나? 바로 몇 년 안 되어 소환을 당합니다. 황제에게 소환되어 끝났습니다. 그래서 전설로 전해지는 사람으로만 남았습니다. 지금 스위스에 가면 루체른(Lucerne)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 근처에 필라투스(Pilatus)라는 산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관광을 많이 가는 산입니다. 그 필라투스가 바로 빌라도의 라틴식 이름입니다. 필라투스가 빌라도입니다.
황제가 그를 소환하면서 그가 스스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황제가 ‘너는 자결하라’고 해서 죽었다는 설도 있는데, 어쨌든 그가 죽어서 그의 뼈를 로마의 테베레 강에 버렸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강이 늘 범람해서 그 사람의 뼈를 수습해서 저 멀리 스위스에 있는 어느 산 위의 호수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늘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고 용도 나타나서, 언젠가 성직자들이 거기 가서 그 호수를 메우며 예배드렸더니 다 멈췄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것이 ‘필라투스 산의 전설’입니다. 빌라도는 지금 전설로만 남아 있습니다.
벨릭스, 그리고 그 한참 전의 빌라도 모두 그렇게 정치적인 계산과 자기이득을 따라 그렇게 애를 쓰며 살았는데, 그 끝은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믿음의 핵심이 의와 절제와 심판임을 우리는 대부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대로 살고 있습니까?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까, 그렇다면 절제하는 삶, 심판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 부분에 있어서 자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젠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오셔서 엄청난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판단(judge)해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상을 줄까 판단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주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절제하는 삶이 가능하고 의로운 삶도 가능한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절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정말로 믿는 사람만이 그 날을 대비하면서 매일매일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정말 좋아 보이고 정말 갖고 싶고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절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심판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보면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언제 시험을 본다고 공고가 나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중간고사는 언제, 기말고사는 언제라고 나옵니다. 시험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학생들은 그냥 놀고 싶은 대로 놀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시험을 망칩니다. 잘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시험을 마음에 두고 받아들인 학생들은 시험 날짜를 의식하면서 그 시험 날짜에 따라 준비합니다. 지금 너무 게임 하고 싶은데 일단 제쳐 놓고 공부를 합니다. 너무 놀고 싶고, 나가서 축구도 하고 싶고, 농구도 하고 싶고, 친구를 만나고 싶고, 햄버거도 먹고 싶은데, 다 절제하고 시험공부에 전념합니다. 당연히 그런 학생들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게 됩니다. 상이 있으면 상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이 이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시험이 몇 월 며칠에 있는 것을 모르는 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광고했으니 다 압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끝내시고 종말이 있다는 것, 만약 그 전에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사람만이, 지금의 삶 가운데 절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삶 가운데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계속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뒤에 가서 슬쩍 나쁜 짓하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 심판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자꾸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벨릭스 총독 법정에서 자기변호를 하면서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15)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만 부활하는 게 아니고, 의인도 악인도 다 부활합니다. 심판을 위한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 즉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영원한 상을 받는 부활, 그리고 주님을 모른 채 거부하고 산 사람들에게는 결국 영원한 형벌을 위한 심판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정말 믿었기 때문에 권력자이며 자기를 놓아줄 수도 있었던 벨릭스 앞에서 담대하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선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갈래 길 앞에서 헤롯도, 빌라도도, 그리고 이 벨릭스도 결국은 그냥 넓어 보이는 길, 좋아 보이는 길을 선택하여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비참하고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고, 특히 그 심판은 믿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심판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4-27)
하나님의 심판을 정말 믿었던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의 엄청난 영광을 누리며 살고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날을 바라보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날을 바라보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삶으로, 여기서도 승리를 거두고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복을 누리고, 또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고 칭찬받는,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