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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7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사도행전 2325~35)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해서 역사하실 때가 많습니다미국 시민권자인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국 시민권을 받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더 어려워졌다고 하고 또 신청비용도 이전에 비하면 아주 비싸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마 지금까지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 중에서 저처럼 신비스럽게 시민권자가 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시 신학생이던 저는 제가 다니던 학교와 자매결연이 되어 있는 한국의 신학대학원으로 가을학기부터 1년간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 공부하러 나가려면 시민권을 받고 나가는 게 좋다고 하여, 당시 저는 이민 온 지 5년이 지나서 시민권을 신청해둔 상태였는데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8월 말에 한국으로 가야 하는데 봄 학기가 끝나는 5월 초가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학기 후에 남은 학생들끼리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저보다 한 학년 위인 미국인 남학생의 약혼녀가 있었는데, 이전에도 학교에 가끔 방문을 오다가 그날도 와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가야 하는데 시민권 신청했지만 아무 연락이 없고, 곧 한국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약혼녀 자매가 마침 자기 오빠의 와이프(올케 언니)가 애틀랜타 다운타운에 있는 이민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한 번 알아봐줄까?” 하고 물어봐서 저는 이게 웬 일이냐 하며 그래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안 이민국에서 전혀 소식이 없었는데 바로 며칠 후 그분에게서 전화가 와서 이민국 인터뷰 날짜도 잡아주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8월 초였습니다.

 

약속된 날이 되어 제가 애틀랜타 다운타운의 정부 건물에 있는 사무실로 갔더니, 딱 양복 입은 남자 두 사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조금 후 선서하라고 하고 악수를 건네면서 축하한다. 너는 이제 미국 시민이 됐다.’라고 해주었습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는 딱 저 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로 시민권을 주겠다고 사진 가져온 것을 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날 사진을 가져오라고 해서 일어나자마자 부스스한 모습에 머리도 안 깎아서 장발인 채로 찍어서 가져갔는데, 그 사진이 지금까지도 제 시민권 증서에 붙어 있습니다. 8월 말에 한국으로 나가야 했는데 82일에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마침 제가 살던 그곳에는 이민국도 있었고 여권국도 있었고 한국 영사관도 있어서, 여권도 내고 비자도 받는 등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8월 말에 한국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인터뷰한 두 사람이 저 한테 물어보기를 , 한국에 군대 간다며?’라고 해서 저는 군대 아닌데? 교환학생인데?’라고 하니까 이상하다. 군대 가는 줄 알고 우리가 빨리 해준 건데?’ ‘군대 아니라 교환학생으로 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여간에 축하한다. 잘 가라!’라고 했습니다. 저처럼 신기하게 시민권 받으신 분은 여기 안 계실 겁니다. 만약 제가 영주권으로 나갔으면 결혼하고 초청하는 데에도 몇 년 걸릴 수 있었는데, 제가 시민권자가 된 덕분에 몇 달 안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후 공부하고 사역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고 우연 같지만, 어떻게 우연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났겠습니까? 오래 전 영국국교회 대주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를 하면 우연한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우연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그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해주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지금도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 바로 바울에게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1.   천부장이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 (25~30)

 

우리가 지난번 본문에서 본 것처럼, 바울의 조카로부터 유대인 암살단이 바울을 암살하려 한다는 음모를 천부장이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바울의 조카에게 전해진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높은 천부장 앞에까지 가서 보고한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중간에 막았으면 못 가는 건데 술술 풀렸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날 밤 9시에 예루살렘에서 약 60마일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극비리에 이송하기로 결정합니다. 거기 그냥 있었을 수도 있고 다음 날 유대인들이 보자고 한 곳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그 한밤중에 그런 결정을 내리고 바로 이송합니다. 그리고 백부장들에게 명령하여 그것도 중무장한 보병 200, 기병 70, 창병 200명 등 총 470명이나 되는 로마 정예 군사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이송합니다. 이게 우연이겠습니까?

 

천부장이 바울이라는 미결수 한 사람을 위해 그 한밤중에 무려 470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고, 또 미결수에게 타고 갈 짐승()까지 제공했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천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것은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아니라면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편지를 써서 군인 편에 보내게 됩니다.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5-26)

 

천부장은 바울을 호송하는 군인들 편에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Felix)는 주후(AD) 52년부터 59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그의 형 팔라스(Pallas) 덕분이었는데, 이들은 원래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벨릭스가 노예 출신으로 총독까지 된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팔라스는 먼저 글라우디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고, 그 후에는 네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동생 벨릭스도 출세하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아주 무자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노예 출신으로 그렇게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니까, 그 중간에 삶이 얼마나 힘들고 험난했겠습니까? 그 치열한 로마제국의 권력 암투 속에서 살아남아 높은 데까지 올라갔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총독 벨릭스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한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였습니다. 글라우디오(Claudius)는 로마식 이름이고, 루시아(Lysias)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천부장은 2228절에서 바울과 대화하는 가운데, ‘나는 돈을 많이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하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원래 헬라(그리스) 사람이었던 루시아가 로마제국의 군인이 된 다음에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돈을 많이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원래 이름인 루시아 앞에 로마식(라틴어) 이름이자 당시 황제 이름인 글라우디오를 붙인 것으로 보아, 황제와 연관되어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배경을 지닌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의 편지는 일종의 서면 보고서인데, 이것을 통해 그가 출세지향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로마 사람이 아니니까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 얼마나 많은 애를 썼겠습니까? 출세지향적인 사람은 평소에는 괜찮은데, 결정적일 때 진실하지 못하고, 자기 야망 때문에 허세와 과장과 자기포장과 과시와 거짓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에게 보여준 호의를 보면, 이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고 의외로 신사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아주 진실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편지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유대인들에 의해 죽게 된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자기가 먼저 알고 군사를 동원하여 구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7)

 

이것이 사실입니까? 거짓말입니다. 물론 반은 사실입니다. 큰 소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현장에 출동했던 루시아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돌로 치고 때려죽이려 하는지 사실을 파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바울이 4천 명의 칼잡이를 동원하여 소요를 일으켰던 이집트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부하들을 시켜 쇠사슬로 바울을 결박한 다음 요새로 끌고 가 채찍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채찍질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줄 끝에 짐승 뼛조각이나 쇳조각이 달려 있어서 한 대만 맞아도 살이 찢어지고 파이고 몸에 박히는 공포의 채찍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채찍질을 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죄수인지 뭔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죄도 확정되지 않은 로마 시민을 함부로 채찍질할 수 있느냐는 바울의 항의를 백부장에게서 전해 듣고서야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천부장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을 재판절차도 없이 쇠사슬로 결박하고 채찍질하려 한 것을 만약 바울이 조금이라도 문제 삼게 되면, 천부장은 더 이상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바울이 천부장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음으로, 그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바울에게 더 호의를 베풀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천부장은 로마 시민인 바울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을 자기가 먼저 알고 달려가서 유대인들로부터 로마 시민인 바울을 구해냈다는 식으로 거짓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만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나서 군대를 동원하여 구해낸 것이 아니라, 일단 구해놓고 채찍질 하려다가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멈추었던 것인데, 살짝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총독 벨릭스에게 자기가 로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봐달라고 과시하며 인정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은,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고발하는지 알기 위해 유대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해 보았더니, 그들의 율법에 관한 문제일 뿐이었고 로마제국의 법에 위반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28-29)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천부장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예루살렘의 치안 책임자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그가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권한으로 바울을 무죄 석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가 풀어준 로마 시민 바울이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서 유대인 암살단원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아무도 모르게 바울을 자기 관할지역(예루살렘) 밖으로 호송해주고 내보내어 자기 길을 가도록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인 470명을 동원하면서까지 바울을 한밤중에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냥 풀어주면 되는 것을 왜 이렇게 470명이나 동원해서 6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로 가게 합니까?

 

로마 시민인 바울의 케이스를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머리가 비상합니다. 건수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활용하려는 데에는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 지금 로마 시민인 바울이 걸렸으니, 로마 시민에 대한 재판권을 지닌 총독에게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중에도 평소에 참 인격도 좋고 착하고 부드럽고 합리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 믿는 사람들보다 인격이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특히 자기의 이익이 걸린 순간에는 살짝 바뀌거나 돌변하거나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바울에 대한 암살 모의가 알려져서 바울을 총독에게 이송하며 바울의 고발자들에게도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도록 자기가 말해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30)

 

이것도 반만 사실입니다. 출세지향적인 사람은 항상 정확한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자기에게 유리한 식으로 살짝 틀어서 말합니다. 그는 바울의 조카로부터 유대인들의 바울 암살 계획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아무도 모르게 바울을 가이사랴로 이송시키게 됩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암살단원들에게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몰래 한밤중에 이송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부장이 총독에게 이 편지를 쓰던 그 시간은 아직 바울을 데리고 떠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떠나는 군인 편에 편지를 보내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바울이 아직 여기 있고, 바울을 고발한 사람들이 아직 그러한 천부장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로 다 자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천부장은 바울의 고발자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시간 전에 바울을 총독 앞에서 고소해도 좋다고 자기가 이미 통보해놓은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분명히 날이 밝고 나서야 이야기했을 텐데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하고 이미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은 어떻게든 총독 벨릭스에게 로마 시민 바울을 통해서 잘 보여서 자신의 공을 인정받고자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자기포장을 하여 진실이 아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사실 이것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데, 반만 진실인 편지를 보냅니다.

 

사실 항상 100% 거짓말은 없습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100% 거짓말이라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금 하는 거짓말이 항상 문제입니다. 그런 것 역시 세상에서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성경에 안 나오니까 알 수는 없지만, 이 거짓 보고서를 보낸 천부장이 총독 벨릭스에게 잘 보여서, 그 후에 승진했을 수도 있습니다. 상을 받았을 수도 있고, 돈을 받았을 수도 있고, 높이 올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가 계속 잘나가면서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몇 십 년 살다 죽었을 텐데, 허위 보고로 아무리 자기포장을 잘하고 과시하고 높아졌다 해도, 인정을 받았다 해도, 그에게 결국 돌아간 것은 고작 몇 년의 성공 후에 그저 한줌 흙이 되어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허망한 죽음뿐이었습니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벨릭스가 기껏해야 거기 7년 있었는데, 벨릭스에게 줄을 섰다가 그 사람이 떠나면서 그냥 끝났을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천부장이 얼마나 귀한 기회를 얻은 사람입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묻고는 대답도 안 듣고 그냥 나가버린 당시 유대 총독 빌라도처럼, 이 천부장도 2천 년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로 여겨지는 바울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한 번 만난 게 아니라 바울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바울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변증을 하는 것을 두 번이나 직접 들었습니다. 바울의 언행에 감동도 받았습니다. 바울에 대한 호감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삶을 본받거나 바울이 증거하는 주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보다는, 오히려 로마 시민인 바울이 자기에게 걸렸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끝까지 자신의 성공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과시와 자기포장과 허위로 가득 찬 어리석은 인간으로 사도행전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도 구원과 주님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그 기회를 내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굳이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쓰면서 특히 이름까지 여기서 밝히는 것은, 1세기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아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인생이 허망하게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기 기록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허세와 자기포장과 왜곡과 과장으로 나아갔을 때,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분명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냥 허망한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고, 이것을 우리가 꼭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가끔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할 때는 있겠지만, 이렇게 의도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하여 진실을 살짝 틀거나, 사실은 사실인데 반만 사실이거나, 순서를 바꾸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다른 삶,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가이사랴로 안전하게 호송되는 바울 (31~35)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470명의 로마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가게 된 것은, 그냥 유대인 암살단이 몰래 죽이려 했는데 거기에서 벗어나 살아났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살려주셨구나. 참 좋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로마군 요새의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의 곁에서 바울에게 이미 약속해주셨습니다(11). 바울이 잡힌 그 날 밤에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마지막 생명을 던져야 할 최종 목적지는 지금 여기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중심인 로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루살렘을 출발한 바울은 단순히 로마 군인 470명의 호위를 받으며 가이사랴로 가서 나 이제 살았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언약하신 그 로마를 향해 가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제 살았다. 끝났다.’가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로마로 가는 길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그날 밤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그것도 470명의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감격을 느꼈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감사했겠습니까? 이미 인생말년에 접어들었고, 여러 번 고문을 당하고 배가 파선하고 물에 빠지고 죽을 위기를 여러 번 넘긴 바울입니다. 이제 인생의 말년이 되어 건강도 몹시 좋지 않은 바울인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런 자기를 계속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그것도 로마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사용해주시겠다는 것에 얼마나 큰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해주시다니! 이런 상태에 있는 나를 사용해주시다니!’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계속해서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성경 말씀이 단순히 글자를 기록하여 인쇄해놓은 책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의 삶을 이끌고 인도해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느라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면 당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일들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계속 말씀을 붙들고 그 길로 나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해주시는 것,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체험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길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1-32)

 

바울을 호송하는 470명의 군인들은 밤새도록 행군하여 이튿날,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35마일 떨어진 안디바드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것은 생소한 지명인데, 구약에서는 아벡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말을 타지 않은 보병 200명과 창병 200명이 하룻밤에 35마일을 도보로 행군했다면 아주 강행군이었습니다.

 

이 안디바드리에서 보병 200명과 창병 200명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부터는 기병 70명만 바울을 호송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35마일 떨어진 안디바드리라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암살단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24절에서 바울을 위해 짐승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는데, 말을 타고 가는 기병인데 다른 느린 짐승을 탔을 리가 없습니다. 바울도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기병 70명과 보조를 맞추어 또 거기서부터 북서쪽으로 20~25마일 정도 떨어진 가이사랴로 달려갑니다.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3)

 

가이사랴에 다시 들어갔는데, 가이사랴가 어떤 곳입니까? 오늘 제목도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라고 했습니다. 다시입니까? 가이사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전에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고, 그곳 성도들과 교제도 나누었고, 그러다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특히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 자기 손발을 묶고, ‘바로 이 허리띠의 주인이 이렇게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던 곳입니다(21:10-11). 그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 다시 바울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가이사랴에 다시 왔을 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뜨거웠겠습니까?

 

그곳을 떠날 때는 다들 말렸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다. 가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 하면서 떠났는데, 아무 상함 없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감격과 감동의 장면입니까?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가이사랴의 빌립과 그의 딸들과 그곳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이제 가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로마 군대의 호송을 받으면서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게 다시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제 가이사랴에 도착한 기병들은 총독 벨릭스에게 천부장의 편지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웁니다. 그러니까 총독의 법정에 바울을 미결수 신분으로 세웠다는 말입니다.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4)

 

총독은 이때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의 편지를 받아서 읽은 겁니다. 조금 전에 본 것처럼, 천부장이 쓴 편지는 자기 포장도 있고 과시도 있고 허위도 있는 거짓 보고서였습니다. 그런데 총독이 그 편지만 읽고서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총독 벨릭스는 평소에 아주 뇌물을 밝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밑의 사람들 중에 누가 의로운지, 누가 정직한지, 누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지를 헤아릴 능력도 없었고 판단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뇌물을 바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벨릭스였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벨릭스가 바울로부터 돈을 좀 받을까 해서 바울을 자꾸 불러냈다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도 자기 위치를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불의한 방법을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몇 년 못 갑니다. 벨릭스도 유대 총독을 그저 7년 정도 하고 나서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가 있다면 그것을 맡기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위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고 사회적 위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청지기다.’ 하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

 

이제 천부장의 편지를 읽은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 어느 영지 출신인지 물어봅니다. 바울이 누구의 관할지에 속한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는 수도 로마처럼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데도 있고, 또 원로원이 관할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런 데 출신이라면 자신의 총독으로서의 관할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총독 벨릭스는 그곳으로 바울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침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그때 유대 총독 벨릭스는 당시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의 대리대사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하니까 내가 재판을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35)

 

총독 벨릭스는 바울의 고발자들(유대인 고소인들)이 오면 재판을 열기로 하고, 부하들에게 바울을 헤롯 궁에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이 헤롯 궁은 그 유명한 헤롯대왕이 지중해 연안 도시인 가이사랴에 자신을 위해 건축한 궁전이었습니다. 가이사랴도 헤롯이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황제를 위해 지은 도시였습니다. ‘가이사시저의 이름을 넣고 지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유대 지방의 행정수도가 예루살렘에서 해상교통이 편리한 가이사랴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궁은 유대 총독의 관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에서 유대로 파견된 총독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도 평소에는 이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에서 살다가, 유월절이나 유대인들의 명절 같이 특별한 경비가 필요할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그때 마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와서 재판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 궁전에는 지하실에 감옥이 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가 부하들에게 바울을 헤롯 궁에 지키라하고 명령한 것은 헤롯 궁의 지하 감옥에 그를 가운 것일 수도 있고, 2423절에 나오는 것처럼 미결수인 바울이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궁전의 한 방에 넣어서 거기 있으라고 하며 감금시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감옥일 수도 있고 방 중의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헤롯 궁 안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의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군인 470명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를 향해 첫 발을 내디딘 바울에게, 가이사랴는 중간 경유지입니다. 거쳐 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 대한 재판이 속히 열려서 바울이 하루라도 빨리 가이사랴를 떠나 로마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상황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됩니다.

 

나중에 24장에 보면 총독 벨릭스는 보통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흔히 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즉 돈을 자기에게 바치면 죄가 있어도 무죄이고 돈을 안 바치면 죄가 없어도 유죄라고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벨릭스였습니다. 그러니 돈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심지어 바울에게까지도 돈을 좀 받을까 해서 불러냈습니다. 사실 바울은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데 그를 신흥종교의 우두머리로 생각해서, 신흥종교는 돈이 많으니까 바울도 돈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서 불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안 나오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무려 2년 동안이나 그냥 가두어놓았습니다.

 

벨릭스 때문에 로마로 빨리 가야 할 바울이 2년 동안이나 별 할 일 없이 가이사랴의 헤롯 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지금 바울이 개인적으로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로마에서 그가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도 해주셨는데, 그렇다면 빨리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빨리 가이사랴를 떠나서 로마에 가야 하는데, 부패한 관리인 총독 벨릭스의 뜻에 막혀서 2년 동안이나 가이사랴에서 그냥 있었습니다. 일종의 허송세월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아무 뜻도 없이 별 이유도 없이 헤롯 궁에 갇혀서 2년 동안 지냈지만 그것은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세 차례나 오랜 기간 동안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시아(터키) 쪽으로, 그 다음에는 그리스까지 갔습니다. 심지어 저쪽 멀리 지금의 크로아티아까지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부분 걸어 다녔고 배를 타기도 했는데, 배 멀미가 얼마나 심합니까? 그러니까 고생고생하면서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 사이에 매질도 당하고,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도 하고, 바다에서 배가 파선해서 정말 죽을 뻔하고, 물에 빠져 물도 많이 먹고, 채찍질을 당해서 등이 다 찢어지고, 거기에 바닷물이 들어가고 균도 들어가고, 또 강도의 위험, 광야의 위험, 동족의 위험, 가난, 추위, 굶주림 등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가만히 있으면서, 2년 동안 육체의 휴식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몸만 가만히 쉰 것이 아니라, 2년 동안 주님과 깊고 친밀한 대화의 시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아주 귀한 시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2년이라는,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 같은 시간을 주셨겠습니까? 바울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몸도 나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지금까지 가본 어떤 데보다도 영적으로 강력한 저항이 있는 곳입니다. 마귀가 꽉 잡고 있는 곳입니다. 이런 영적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에 가기 전에, 몸도 회복되고 영적으로도 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통해 준비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로마로 가도록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실 헤롯 궁은 건축광이라고도 했던 헤롯 대왕이 자기를 위해 건축한 궁전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바울 당시 예루살렘 성전도, 바벨론 포로를 다녀와서 스룹바벨이 다시 세운 아주 초라한 성전을 헤롯대왕이 금도 입히며 굉장히 화려하고 웅장하게 개축한 성전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궁전도 가이사랴에 짓고 가이사랴 도시 자체를 아예 로마 황제를 위해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헤롯대왕은 자기가 만든 그 좋은 궁전에서 별로 오래 살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그 후에 후손들이 살아서 이었지만 그들의 차지가 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총독이 그 궁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기껏 만들어놓은 게 남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물론 그 궁전도, 가이사랴도 다 유적만 조금 남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헤롯 궁전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했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의 헛됨을 보여주는 상징일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러한 인생의 헛됨을 보여주는 헤롯 궁에서 2년 동안이나 바울이 준비되도록 주님께서 이끌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합니까? 헤롯대왕이 자기 이름을 내고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고 또 자기 편리와 화려함을 위해 만들어놓은 이 궁전이, 놀랍게도 바울이 로마에서의 영적전쟁을 준비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벨릭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2년 동안 헤롯 궁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갇혀 있던 그 2년이라는 기간은 놀라운 은혜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잘 준비된 바울은 로마로 가서, 거기서도 감옥에 갇혔지만 복음을 전하고,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 잡혀와 로마에서 마침내 순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서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이, 그리스 북부의 마게도냐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인데 옥중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4)

 

나중에 로마 감옥에 갇혀서 이 말을 쓴 바울은, 지금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에 갇혀서도 똑같은 말을 성도들에게 했을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라고 한 이런 말씀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의 영적 경험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 삶 속에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지금 아무 불의를 행하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잡힌 그 상태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시는 기간으로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따라,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다 보면, 의외로 잘되고 복 받는 게 아니라 억울하게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깨지고,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감옥이 되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직장에서 잘리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거나, 자녀가 말을 안 듣거나, 다른 사람과 관계가 나빠지거나, 부모님과 관계가 틀어지거나, 이웃 또는 형제자매와 틀어지거나, 교회생활이 복잡하게 되거나, 마치 감옥에 갇혔다고 할 만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감옥이 아닙니다. 왜 그런 어려운 상황을 주십니까? 영적으로 육적으로 회복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섬세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의 삶의 이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잘 살펴서, 마침내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라고 하신 사명, 나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어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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