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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5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0

예언,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사도행전 217~14)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혹시 예언기도를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예언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알려주셔서 전해주는 것입니다. 잘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잘못 가서 이단 비슷한 데로 빠지는 사람도 있고, 마치 점집을 운영하며 점을 치는 것처럼 예언기도를 하고 돈을 받으며 사업처럼 운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경우이지만, 예언이라는 것은 특별한 예언의 은사를 받아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목장에서 나눔을 하다가 어떤 지체가 아주 큰 어려움에 닥쳤을 때, 마음이 아프고 간절해지면서 하나님 앞에 속으로 하나님, 이분을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나눔을 듣는 중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심코 힘내세요.”라고 한마디 던지면서 이전에 힘들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 생각나 그것을 잠깐 나누었는데, 나중에 그분이 와서 형제님(자매님)의 그 한마디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언도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언기도라고 하면 조심할 필요도 있지만, 또 동시에 사랑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직통계시내지 은사를 받은 분들이 예언해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제 곧 우리가 가정교회 간증집회를 하는데, 이번에 오는 강사님은 평신도 사역자로 여자 목자님이십니다. 바로 그런 은사를 받은 분이셔서, 한국과 호주와 미주 등 여러 곳들의 집회에 초청을 받아 다니는 분이십니다. 물론 자기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예언이라고 내세우지 않고 상담이라고 하면서, 질문하고 기도하며 격려해주고 바른 길로 가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집회 때 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집회 때도 그런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예언의 은사를 가진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앞길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점에 대해 우리에게 잘 알려줍니다.

 

어떤 분은 그런 집회나 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아유 무서워. 내 과거를 다 알면 큰일이지.’라고 하며 나는 안 하겠다.’라고 하고, 어떤 분은 너무 좋아하면서 나는 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좋아할 것도 없고 너무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예언,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은 항상 우리를 격려합니다. 물론 책망할 때도 있지만, 책망은 우리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잘못 가니까 바로 세워주기 위한 것이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고 과거를 까발려서 창피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1.   가이사랴에서 빌립과의 만남

 

지난주에 1~6절을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일행과 함께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두로를 떠나는 날, 두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처자들을 항구까지 데리고 나가 배에 오르는 바울 일행을 마지막 순간까지 전송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헌신하여 나아가는 바울의 귀한 믿음을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7)

 

바울 일행이 두로에서 타고 떠나는 배는 그 배의 최종 목적지이자 이 두로에서부터 남쪽 20마일 정도 지점에 위치한 돌레마이(Ptolemais)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두로에서와 마찬가지로 돌레마이에서도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찾습니다. 여기서 안부를 묻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환영하다’, ‘영접하다’, ‘포옹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돌레마이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찾아 그저 형식적으로 잘 지내냐?’라고 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과 일행히 다 같이 포옹하고 깊은 교제와 인사를 나누면서 하룻밤 동안 믿음의 역사를 함께 나눈 것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8)

 

다음 날 바울은 일행과 함께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졌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이사랴로 갑니다. 돌레마이로부터 걸어서 이틀 길이었습니다. 돌레마이가 배의 마지막 목적지였기 때문에,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내려갑니다.

 

헤롯 대왕에 의해 건설된 가이사랴는,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이 거주하며 정치적 수도로 삼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도시 이름이 가이사랴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16)라고 고백한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훨씬 북쪽에 있는 산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가이사랴라는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곳입니다.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헤롯 대왕이 만든 도시입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가이사랴 빌립보도 가보았고 이 가이사랴도 방문했는데, 가이사랴 빌립보는 산지에 있는 도시이고 이 가이사랴는 바닷가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닷물이 정말 깨끗하고 여러 고대 건물 유적들이 아직도 육지와 바닷물 속에 흔적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빌립의 집을 숙소로 정하여 머물게 됩니다. 나중에 이 가이사랴에 바울이 잡힌 몸으로 오게 되는데, 이때는 거기 살고 있던 빌립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빌립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 빌립은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뽑은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빌립입니다. 본문에서 빌립을 전도자라고 묘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사도 빌립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840절을 보면, 20년 전에 빌립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 가이사랴에 와 정착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빌립이 사라졌는데 이때 다시 나옵니다.

 

7장에서 교회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 죽고, 8장 초반부에는 당시 사울로 불리던 바울이 교회를 잔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감옥에 넘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큰 박해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다 흩어집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약간 북쪽인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후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광야로 나가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집으로 가던 것을 만나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전도자 빌립이 교회 역사상 최초의 집사로 선출된 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로 그때, 바울은 살기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감옥에 쳐 넣는 일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던 박해자요 폭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빌립과 바울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원래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이 두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주님 안에서 교제를 해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를 방문한 바울이 여러 명의 일행과 함께 아무 스스럼없이 빌립의 집에 불쑥 찾아와서 여기서 잡시다하며 숙소로 삼을 정도로, 이때 바울과 빌립은 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또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도행전은 빌립의 자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9)

 

빌립이 가이사랴에 정착한 후 세월이 흘러 20년 정도 되었는데, 그 사이 그의 가족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전에도 자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에게는 딸 넷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처녀였고 예언자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면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자기 자녀가 영적으로 은사를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부모인 빌립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자녀를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녀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하면 좋아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새로운 영어권 교역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교회들마나 영어권 교역자가 없어서 찾느라고 난리들입니다. 한국어권 목회자들은 차고 넘치고 교회 사역 자리는 별로 없는데, 영어권은 찾는 교회가 많은 반면 영어권 교역자는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자녀들은 다 영어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아들이나 내 딸이 아빠 엄마, 나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될래요.”라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좋아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영어권 교역자를 찾고 있는데 정작 내 아들은 안 되고 내 딸은 안 된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영어권 교역자를 모실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갑자기 내 자녀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목회자나 선교사는 무슨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물론 목회자나 선교사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목회자나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왜 그런 데 시간을 보내냐? 공부해라.’라고 하는 부모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쓰려고 하실 때 기꺼이 내 아들이, 내 딸이 주님께 쓰임을 받다니 너무 감사하다.’ 하며 내어줄 것인지 미리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고, 평신도로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억지로 부담이 되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천국에 상급을 쌓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입니다. 가장 복된 일을 하겠다는데 막고 말리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히려 더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며 하라고 서포트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아가보의 예언과 그에 대한 해석

 

1)  아가보의 예언과 사람들의 만류

 

바울과 그의 일행이 정확하게 얼마나 오랫동안 가이사랴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 머물렀던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0)

 

바울과 그 일행은 오래 머물며 빌립과 그의 딸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이때 빌립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라서 잘 모르고 있었던 자신과 스데반의 이야기, 또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 특히 내 것 네 것 없이 다 나눠 쓰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던 모습들을 자세히 말해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그 자리에 누가 같이 있었습니까? 바로 누가가 같이 있었습니다. 누가가 그것을 듣고 메모해놓았다가 나중에 사도행전 6~8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머물고 있던 이 빌립의 집에 선지가 아가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아가보는 11장에서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황제 때 대흉년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예언했던 사람입니다(11:28). 그런 능력 있는 아가보가 빌립의 집에 나타나서 일종의 무언극 형식으로 예언을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1)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지고 오게 해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한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고발로 로마군대의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성령님께서 선지자 아가보를 통해 빌립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2)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자신을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빌립과 그의 네 딸들을 가리킵니다. 그 유명한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하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자 바울과 함께 하고 있던 누가를 비롯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아시아에서 온 각 교회 대표들, 즉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전해주기 위해 함께 가고 있던 그들도, 또 빌립 가족들도 모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들이 말로만 말린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은 모두 함께 울면서 말렸습니다. 우리말 권하다’(12)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가 원문에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바울 일행과 빌립 가족들이 울면서 계속하여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에게 몇 명의 자녀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례적으로 빌립에게 네 명의 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9절에서 처녀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의 딸 네 명은 모두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이고 네 명 모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선지자 아가보가 그 집에 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1장에 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여러 선지자들이 왔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이 아가보였고, 그는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일어날 대흉년을 안디옥에서 정확하게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예언자 아가보가 왜 이때 빌립의 집을 방문했겠습니까? 아가보는 바울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기 있었는지 알지도 못했을지 모릅니다.

 

11장에서 아가보가 안디옥으로 온 것을 보면, 바울과 아가보는 그때 처음 만났다고 볼 수 있는데, 그 후에 그들이 서로 교제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볼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언의 은사를 받아 사역하던 선지자 아가보는, 역시 예언의 은사를 받은 빌립의 네 딸들과 평소에 친분을 맺고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날도 아가보는 가이사랴를 방문한 길에 자기가 평소에 친분이 있는 빌립의 네 딸들을 만나러 빌립의 집에 왔다가, 마침 거기 머물고 있던 바울과 일행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을 만나자마자 성령님이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긴 천으로 된 띠)를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손과 발을 묶은 다음에 이 띠의 임자즉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이고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청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그렇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데 누가 빨리 가라고 하겠습니까? 안 가는 좋겠다고, 가지 말라고 말리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예루살렘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지금까지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간청하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살펴보았던 두로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렸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실제로 바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눈물로 바울을 말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울이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바울의 동역자들이 눈물로 바울을 말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전도자 빌립과 그의 네 딸들과 함께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말립니다.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빌립의 네 딸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길을 말리니까, 그들의 아버지인 빌립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함께 생명을 걸고 여행해 온 바울의 동역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만약 빌립의 네 딸들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나 두로의 제자들처럼 예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그 네 명의 처녀들이 아무리 말렸어도 바울 일행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받은 빌립의 네 딸들과 이전 예언이 정확하게 맞은 아가보가 예언하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바울을 말리니까, 생명까지 나눈 바울의 동역자들도 함께 바울을 말리게 되었습니다



2)  바울의 사명 선언 13-14

 

그때 바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3)

 

자기 일행과 빌립 가족들의 거듭된 눈물의 만류에 바울이 도리어 그들에게 반문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이 말이 <새번역> 성경에는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무 우니까 바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동역자들과 빌립 가족들의 거듭되는 눈물의 요청을 보며, 바울의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이 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역자들마저 울면서 자신을 말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믿음에 관한 한 바울보다 대선배인 전도자 빌립마저 네 딸들과 함께 눈물로 말리고 있습니다. 전도자로 불리는 빌립이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려고 하는 바울의 앞길을 가로막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전도자인데 전도자를 말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간절했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성령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예언을 주셔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바울이 황소고집(요즘 전문용어(?)똥고집’)을 피우면서 나는 그래도 간다.’라고 하는 겁니까? 객기를 부리고 혈기를 부리는 겁니까? ‘왜 이렇게 울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라고 화를 내는 겁니까? 두로에서도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4) 바울을 말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고집을 피우며 떠났고, 여기서도 아가보가 예언하고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나는 예루살렘에 기필코 간다.’라고 우기며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잘 보시면 그것이 아닙니다. 아가보가 뭐라고 합니까? 그는 단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당하여 로마군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한 것뿐입니다. 로마군이라고 이야기는 안 했지만 이방인이 로마군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게 넘겨질 것이라고 사실을 예언한 것뿐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된다거나 가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 개인 의견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투옥을 당할 것이라고, 이전에 이미 성령님이 바울에게 여러 성들을 거칠 때마다 알려주셨던 똑같은 내용을 아가보는 그대로 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언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예언은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아무리 예언을 받아도 제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제대로 해석하며 나아갈 때 정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지난번 16장을 보았을 때, 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은 원래 1차 때 전했던 갈라디아(지금의 터키 중부) 지역 중심으로 계속 복음을 전하고, 이미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들을 돌보는 것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계속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다른 데로 가려고 하면 막고 또 다른 데로 가려고 하면 막고, 그렇게 막히고 막히다 도착한 곳이 드로아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아시아(터키)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드로아에 왔는데, 거기서 그날 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 당시 선교 팀은 예루살렘에서 온 실라, 루스드라에서 합류한 디모데, 또 드로아에서 합류한 누가, 그리고 바울까지 네 명입니다. 바울은 선교 팀과 함께 그것을 나눕니다. 거기도 우리가라고 나옵니다. 주님께서 자기들을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로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석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바울의 동역자들과 빌립과 딸들이 모두 눈물로 바울을 말리는 이 장면은 아주 가슴 뭉클하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누가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것을 말리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그들이 얼마나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꼈으면, 바울이 이제 가면 고난을 당한다니까 울면서까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거듭하여 요청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의 사명을 망칠 뿐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비록 지금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위험한 길이라도, 그 길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순종할 때 바울을 통해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몰랐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거쳐 나중에는 로마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해서 이때 안 갔으면 어떻게 됩니까? 유대인들에게 잡힐 일도 없고, 잡힐 일이 없으면 나중에 로마까지 가는 계획이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막히는 겁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좋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말씀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만 것입니다. ‘이 띠의 임자가 결박당하고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실인데 그들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그러니까 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 입장에서 사실 자신을 눈물로 말려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질타하며 단호히 선언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 이 선언은 주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긴 바울의 굳은 결심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앞길을 결코 막아서는 안 될 자신의 동역자들과 빌립에 대한 질타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결박과 환난을 뛰어넘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자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려고만 하느냐?’ 하고 야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예루살렘에 가면 무슨 돈이 나옵니까? 권력이 나옵니까?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됩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하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며 성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무모하게 자기가 죽겠다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것이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사는 게 낫지, 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자꾸 죽겠다고 하는가?’ 그런데 이것은 이전에 그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장에서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마지막 유언으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4)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게 사명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사명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마게도냐와 드로아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기까지, 각 성을 거칠 때마다 성령님이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계속 알려주셨습니다.

 

그럼 바울이 그런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서 , 이것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아주시려는 주님의 뜻이구나. 가지 말라는 거구나. 가면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하시는구나.’라고 해석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성령님의 말씀을, 오히려 모든 사람이 가기를 꺼려하는 그 길,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자신을 부르시는 사명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달려갈 길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그렇지. 예루살렘으로 가면 위험하지.’ 하고 안 갔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지금 성경에 어떻게 기록이 되었겠습니까?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겠습니까? ‘자기가 살려고 꽁무니를 뺐다.’라는 식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죽음마저 각오할 정도로 완수하려고 했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복음이 키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정말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를 불러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실 구원해주신 것만도 충분한데, 사도로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 앞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이 사랑 앞에 나는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도 좋다. 결박은 당연한 것이고, 죽을 것도 각오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눈물로 자기를 만류하고 있는 동역자들과 빌립과 그의 네 딸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라고 한 바울의 용기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교회를 짓밟던 바울에게 사실 사도가 될 자격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은혜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사실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나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해주셨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감사함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4)

 

여기서 우리는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바울의 예루살렘 길을 눈물로 말리던 빌립과 그의 네 딸들과 바울의 동역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의 눈물의 요청에도 설득을 당하지 않으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바울을 말리기를 그칩니다.

 

이슬람에서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까 할 때 인샬라알라의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의 뜻대로 된다는 이 말은 그냥 입에 붙은 형식적인 말입니다. 진짜로 신이 해줄 거라는 말이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인샬라.’라는 의미로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또 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말을 안 들으니까 기분이 나빠서 에이, 알아서 해, 그럼!’이라는 식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인 축복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그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가는 말]

 

이번에 유럽에 다녀온 분들이 계신데, 원래 프랑스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의해서 결국 프랑스 문화부가 2014년부터 자국 내 모든 미술관과 유적지에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게 결정했습니다. 파리에는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과 오랑주리(Musee de l’Orangerie)라는 작은 미술관이 있습니다. 오랑주리에는 모네의 <수련(Water Lilies)>이 있습니다. 오르세에 가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에서 어릴 때 학창시절 배웠던 미술교과서에 나온 그림들이 거기 다 있는 겁니다. 고흐의 <자화상>, <이삭줍기>, <만종> 등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르세와 오랑주리는 사진을 못 찍게 했습니다. 당시 오르세 미술관 공식 사이트에는 미술관 내에서 사진 및 영상을 찍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는 관람객 편의 도모와 미술 작품 보존을 위해서입니다.”라고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꿋꿋하게 자기들의 철학을 밀고 나가던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는데, 마침 제가 안식월을 얻어 파리를 방문했던 2015년에 너무나도 다행하게 금지령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 찍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금지령이 풀린 데에는 놀랍게도 우리 한국과 연결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출신의 프랑스 입양자 한 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이라는 여자 장관 때문입니다. 한국계 입양아 출신입니다플뢰르 펠르랭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6개월 만에 프랑스에 입양을 가게 됩니다. 이후 프랑스 정치 엘리트가 거쳐야 할 모든 명문학교를 다 졸업하게 되는데, 프랑스 엘리트들과의 경쟁을 뚫고 초고속 승진을 함으로써 정계에 진출하여, 그 당시 대통령이던 프랑수아 올랑드의 오른팔이 되어 문화부 장관에 임명됩니다. 유럽을 통틀어서 최초의 한국계 장관입니다. 물론 속은 다 프랑스 사람이지만 겉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펠르랭이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153(제가 간 게 6월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린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특별전>에 초청됩니다. 문제가 터진 게 바로 그날 밤인데, 플뢰르 펠르랭의 공식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그날 찍은 작품 사진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사이트들이 막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장관은 되고 왜 우리는 안 되냐? 장관은 찍어서 올리고 왜 우리는 못 찍게 하느냐?’ 하며 막 비난이 올라왔습니다. ‘일반 방문객은 못 찍고 장관은 찍어 올리니 특혜다.’라고 하니까, 결국은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도 이제 찍어도 좋다고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 찍어왔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제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6개월 만에 어느 프랑스 부부의 양녀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에서 프랑스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노력으로 그 신분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부부가 그녀를 입양함으로써 한국인이었던 그 아이에게 새로운 신분이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거저 주어진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이 아이가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조금만 자라면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데, 얼굴 모양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자기가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을 했기 때문에 신분이 주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분이 주어진 다음에, 거기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신분이 주어져서, 그 뒤에 열심히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젊은 나이에 강대국 중 하나인 프랑스의 장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어느 버려진 어린 아기가 프랑스의 장관으로 신분이 바뀐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신분의 수직 상승입니다


이 세상 어느 나라든 장관의 신분을 얻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지만, 길어야 몇 년 하고 나서 그냥 다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새로운 신분은 몇 년 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무슨 제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무슨 시효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은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된 우리의 신분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 신분을 얻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입양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입양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그 은혜의 신분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안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이것을 바울이 깊이 깨달았습니다. ‘내 힘으로 바뀔 수 없는 신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내가 이렇게 바뀌고 이 신분을 얻었다라고 아주 깊이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바울은,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하다 죽어도 괜찮다. 오직 주 예수를 위하여, 그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다 죽어도 괜찮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로 이 바울처럼 은혜로 그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우리가 살 책임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처럼, 우리도 그를 본받아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죽으면 오히려 삽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지금 나의 삶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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