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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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1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6 ✦
“복음을 위하여 결연히 나아가는 인생”
(사도행전 20장 13~16절)
[들어가는 말]
지난주 설교 때 상습적으로 조는 것과 상습적으로 늦게 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늦은 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어쩌다가도 한두 번씩 늦게 오거나 조는 일이 없이, 한두 주 반짝하다 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조는 것은 어쩌다 한 번씩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상습적으로 졸거나 늦게 오는 것은 지금 내가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다는 표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영적으로 깨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긴 거리를 걸어본 경험이 언제이셨습니까? 저는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 고향에 갔을 때 리에서 읍까지 걸어간 기억이 있습니다. 한 시간 이상 걸어서 언덕을 넘어 갔습니다. 또 제가 3-4학년 때 반포에서 봉천동으로 잠시 이사를 갔었는데, 그때 학교를 옮기지 않고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노량진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봉천동까지 갔는데, 하루는 버스표를 분실해서 노량진에서부터 봉천동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Presbyterian Youth Triennium에 참가했던 제 아들이 말하기를, 매일 하루 평균 8마일 정도를 걸었다고 합니다. 기숙사에서 전체 모임 장소로 가고 또 강의실로 가고 하면서, 8마일이라는 상당히 먼 거리를 매일 걸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런 먼 거리를, 그것도 아주 힘든 몸으로 걸어간 것을 봅니다. 운동으로 걷는 것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만, 이렇게 먼 거리를 걸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여러 지명이 나오는데,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할까 하다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고 의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곳들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나중에 ‘말씀의 삶’을 들으시기 바랍니다(간접광고였습니다 ^^).
1.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어가는 바울
지난주 본문에서 봤듯이, 7일 동안 드로아에 머물렀던 바울과 그의 일행은, 주일 밤 드로아의 형제자매들과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나서 월요일 아침에 드로아를 떠납니다. 그 후 그들은 어디로 향해서 갑니까?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3절)
드로아를 출발한 바울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드로아 남쪽에 위치한 앗소라는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앗소로 향하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됩니다. 지금은 3차 전도여행 중인데, 2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은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 혼자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외에는 바울이 아무 일행 없이 혼자 여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일행이 있을 때에는, 걸어가든지 배를 타고 가든지, 바울은 언제나 자기 일행과 함께 다녔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의사 누가인데, 누가가 13절에서 또 다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또 다시 시작된 ‘우리-단락’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국말에는 ‘우리’라는 말이 많이 안 나오지만, 헬라어 원어와 영어로 보면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이때 ‘우리’라고 불리는 선교 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포함해서, 흉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가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각 지역 교회 대표들이 바로 그 팀원들이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뢰아 교회의 소바더, 데살로니가 교회의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교회의 가이오, 루스드라 교회의 디모데, 에베소 교회의 두기고와 드로비모입니다. 거기에 안디옥 출신인 의사 누가도 있습니다.
바울과 다른 선교팀원들의 목적지는 앗소였는데,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이 배를 타고 먼저 앗소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육로로 걸어가 그곳에서 선교 팀과 다시 만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은 혼자 걸어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함께 배를 타고 갔다는 것은 바울이 “그렇게 정하여 준 것”(13)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바울과 다른 팀원들은 바울이 명령하고 그들이 복종하는 상하관계이거나 바울이 최고 보스이고 나머지는 밑에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평등한 동역자 관계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 자신은 앗소까지 걸어가고 다른 형제들은 배를 타고 가도록 여기서 바울이 ‘명령’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1세기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볼 때, 바울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지난번의 유두고와 같이 14-15세가 어린 나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그 당시로는 청년에 해당되는 나이였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사도가 된 이후부터 여러 차례 채찍질을 당하고, 부상도 당하고, 배가 파선되는 사고도 몇 번씩 겪으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몸이 아주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나이도 많습니다. 그런 바울이 자기들과 떨어져 먼 길을 혼자 걸어가겠다고 하는데, 다른 형제들이 즉시 ‘좋은 생각입니다. 오케이!’ 하면서 자신들만 편하게 배를 타고 가려 했겠습니까?
지난주에 총회에서 일하시는 한국 목사님이 미국장로교의 한국어 웹사이트를 관리하시는데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한국어 웹사이트에 교회 탐방을 넣었는데, 총회 본부가 있는 루이빌 교회를 1호로 했고, 2호로는 우리 교회를 하고 싶다고 하여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 소개하려고 하다 보니까 연령층이 어떤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에 나오는 교우님들 가운데 연령층이 골고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0대, 30대, 40대, 50대까지 거의 비슷하고, 60대가 약간 적고, 70대에서 조금 더 적었다가, 80대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아집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는 연령층이 다양한 교회입니다. 이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요즘 많은 교회들이 20대보다 80대가 더 많은 상황입니다. 노년층이 점점 더 늘어가는 것이 미국장로교의 현실이고, 오래 된 한인 교회들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최고 어르신이 80대이신데, 만약 80대 어르신 한 분이 “우리 콜럼버스 다운타운에 갑시다.”라고 하시면서 “그런데 여러분은 차를 타고 가시고 나는 걸어가겠습니다.”라고 하신다면 “아, 좋은 생각입니다. 오케이!” 하며 우리는 차를 타고 가고 어르신은 걸어가시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유, 무슨 말씀이십니까? 같이 가셔야죠!”라고 하며 오히려 가장 좋은 자리에 편안히 앉으시라고 하면서 모시고 갈 겁니다.
지금 노쇠하고 심히 연약한 바울에게 이 형제들은 배를 타고 같이 가자고 권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그 약한 몸으로 어딜 걸어갑니까? 그것도 혼자 위험한데 어떻게 갑니까? 같이 갑시다. 배를 타고 갑시다.’라고 했을 텐데, 그런데도 바울이 ‘아니다, 나는 걸어가야 한다.’라고 계속 고집했다면, 이 형제들은 당연히 ‘그럼 우리도 걸어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들은 주님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생명까지 나눈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혼자 걸어가고 이들은 배를 타고 갔다면, 바울이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는 앗소까지 혼자 걸어갈 테니, 형제들은 배를 타고 먼저 앗소에 도착하여 거기서 기다리라고 단호하게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굳이 형제들과 헤어져 자기 혼자 앗소까지 길을 갔다는 것은, 바울의 굳은 의지와 결단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거리가 약 40마일 정도 됩니다. 40마일이면 웬만한 사람이 걷기에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든 바울에게는 걸어서 최소 이틀 이상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 길을 걷다가 이틀이 걸렸으면 하루를 어디서 자야 하고, 3일이 걸렸으면 2박을 해야 합니다. 당시 그 길에는 여관도 있었지만 아주 허름했고, 강도들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위험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편안히 가면 되는데도 바울은 기력이 떨어진 인생의 노년기에, 그것도 지병이 있는 쇠약한 몸으로 혼자만 걸어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다음번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가서 형제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밀레도에 도착한 다음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남긴 마지막 유언과 같은 설교 속에 그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2-23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디로 가야 자기에게 유익한지, 또는 어디로 가면 자기에게 해가 될지를 스스로 판단하면서 그것에 따라 갈 곳을 정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만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2차 전도여행 때 원래는 갈라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아시아에서만 복음을 전하려고 하던 것을 성령님이 이리로 가도 막으시고 저리로 가도 막으실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뜻으로 순종하여 건너갔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계획하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3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는 원래 겐그레아에서 배를 타고 자신을 파송한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3). 수리아, 즉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에 타면 유대인들이 자객을 동원해서 자기를 쥐도 새로 모르게 죽일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렇게 그들이 공모한 것을 알고 바울은 그리스 남부 고린도에서 북부 마게도냐까지 육로로 걸어 올라가, 빌립보의 외항인 네압볼리에서 배를 타고 에게 해를 건너 지금의 터키 서해안에 있는 동쪽의 드로아로 갔습니다.
그 후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혼자 걸어갔고, 결국 밀레도에 이르는데(15), 거기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 하고 말합니다. ‘나는 성령에 매여 수리아로 간다’고 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원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려고 계획했었는데, 왜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까? 마게도냐로 돌아가는 그 먼 길을 거치면서, 3차 전도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1차, 2차 때처럼 원래 파송한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에 가서 교회 성도들과 같이 머물려고 했던 것에서부터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그리스 남부 고린도에서 북부 마게도냐로 걸어 돌아가게 되면서, 자신이 오래 전 복음을 전했고 바로 얼마 전에도 들러 말씀을 나누었던(1-2) 마게도냐의 베뢰아, 데살로니가, 빌립보 교회를 다시 들른 다음, 배를 타고 드로아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들을 거쳐 갈 때마다 성령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너를 기다리는 것은 상이나 영광이 아니라 결박과 환난이다.’라고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바른 믿음생활은 올바른 해석을 하며 나아가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건을 놓고도 믿음 안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막 애를 썼는데 성령님이 막으셨습니다. 이리로 가도 막으시고 저리로 가도 막으시니까 ‘아, 주님이 이젠 더 이상 나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구다.’라고 해석하고 복음 사역을 중단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면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게 된 빌립보를 비롯해서 그리스 북부의 마게도냐에 교회가 설 수도 없었을 것이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박해 때문에 배를 타고 남부의 아테네로 갔는데, 그 위대한 도시 아테네와 당시 아주 중요한 도시였던 고린도에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자꾸 막으셨던 주님의 뜻은 바울이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꾸 아시아에서만 전하려고 하니까 그러지 말고 시야를 넓혀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저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환상을 보고 깨닫고, 그렇게 해석을 하고서 건너간 것입니다. 아주 해석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해석을 완전히 잘못한 대표적 인물이, 바울과 히브리식 이름이 같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입니다. 사울이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금방 불순종해서 악한 길로 들어서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버리시고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시는데, 다윗을 질투해서 자기 사위인데도 불구하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다윗이 30세가 되기 전 황금 같은 시간에 도망자가 됩니다.
그래서 도망 다닐 때 사울이 다윗을 거의 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울이 상황을 뭐라고 해석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내 손에 붙이셨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이 와서 다윗이 여기에 숨어 있다고 알려주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아라!’ 합니다. 그것이 어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일이고, 그것이 어디 하나님이 자기에게 다윗을 붙이신 일입니까? 자기는 악을 행하면서 거기에 엉뚱하게 하나님을 갖다 붙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다니는 어떤 자매가 있는데, 주님을 믿지 않는 어떤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자매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고 집안에 돈이 별로 없는데, 그 부잣집 아들이 이상하게 자기를 좋다고 따라다니고 시부모 되실 분들도 자기를 너무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시면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려서 결국 그 집에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 더 이상 교회에 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맞는데, 결혼하면 교회에 나갈 수가 없는 이 상황이 그럼 무슨 뜻입니까?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 동안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힘들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신앙을 포기하는 대신에 사고 싶은 것 다 사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인생을 누리면서 위로 받고 살라고 형통한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석하면 맞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어떻게 신앙을 포기하더라도 떵떵 거리며 살라는 것이 주님의 뜻일 수가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의 성공을 선택하라고 말씀하는 데가 없습니다. 해석이 잘못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집안과는 절대 결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안 믿는 남편과 시집 식구들이 자기로 인하여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주님께서 선교사로 그 집안에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실화입니다. 아주 가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제가 아는 자매님 중에 실제로 그렇게 되어서 아주 지혜롭게 함으로써 온 집안이 다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 분이 있습니다.
마게도냐의 각 성을 지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던 바울에게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결박과 환난이라고 알려주셨을 때, 바울은 자기로 하여금 그토록 위험한 예루살렘에 가지 않게 막아주시는 주님의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 내가 이렇게 위험을 당하니까 미리 막아주시는구나. 미리 알려주셔서 내가 안 가도록 하시는구나. 할렐루야!’ 하면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는 원래 계획이 맞는다고 하며 ‘나의 안전이 주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그저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님의 음성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면 그가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가 나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4절)
바울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자기를 기다리는 결박과 환난도 기꺼이 당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쳐 온 각 성에서 성령님은 바울에게 ‘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네가 잡혀서 감옥에 갇힐 것이고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알려주셨고, 바울은 그것을 알고서도 ‘내 생명까지 바치겠습니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음성과 바울의 결단 사이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바울이 혼자 걸어간 그 길이 있습니다. 왜 바울은 형제들에게 배를 타고 먼저 앗소에 가서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자기는 40마일 거리의 그 먼 길을 홀로 걸어갔겠습니까? 그는 혼자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지금까지 성령께서 알려주신 결박과 환난에 대해 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주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어떠한 위험도 담대하게 맞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주님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제 곧 십자가의 무시무시한 고통과 환난을 당하실 것을 잘 아시고도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신 것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바울은 이미 고난이 올 것을 알려주셔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제가 이것을 주님 안에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라고 구하면서 마음을 준비하며 나아갔던 것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걷는 동안 오직 하나님과 홀로 동행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사명의 길로 끝까지 나아가겠다는 헌신과 결심을 다짐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바울이 걸어갔던 터키의 옛길을 저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걸어가면서 오른쪽(서쪽)을 보면 에게 해 너머의 유럽 대륙이 보인다고 합니다. 소아시아 땅을 걷고 있는 바울에게, 에게 해 너머의 저 유럽 대륙은 자신의 생명을 던져야 할 로마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게도냐를 너머 저 뒤에는 로마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묵상하고 에게 해 너머의 유럽을 바라보고 걸으면서 앗소를 향해 가던 바울은, 홀로 주님과 동행하며 끊임없이 기도로 대화를 나누면서 갔을 것입니다.
‘주님, 제 앞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거듭 알려주시는 것은, 이 길을 피하라고 하시는 뜻이 아님을 제가 잘 압니다. 교회를 짓밟는 박해자였고 폭도였던 저를,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주시고 주님의 도구로 불러주셨습니다. 주님, 저를 믿어주시고,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들이 꺼려하며 가기를 원치 않는 이 결박과 환난의 길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결박과 환난이 있어도, 반드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가겠습니다. 저를 영원토록 살게 해주시는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제 생명은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님, 끝까지 저를 붙들어주시고 사용해주십시오.’
이 길을 걸으며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했던 이것이, 바로 24절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했던 유언과 같은 설교에 나온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에게 우리는 빚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복음이 온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제 앗소에 바울이 도착한 후 바울 일행은 어떻게 합니까?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4절)
앗소는 어디이고 미둘레네는 어디인지 고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터키 서쪽 어디엔가 있다는 정도만 아시면 됩니다. 마침내 드로아에서부터 혼자 걸어서 앗소에 도착한 바울은, 배를 타고 먼저 도착하여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형제들을 만납니다. 고대시대 때 에게 해 연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던 이 앗소는, 철학자 플라톤이 이상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참 놀라운 곳입니다. 또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기 전인 BC 348~345년에 직접 앗소에서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철학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앗소의 바다는 물이 맑고 깨끗해서 속이 그냥 들여다보일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바울은 그렇게 아름다운 앗소를 둘러보고 싶어하며 관광하거나, 위대한 철학자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지적 유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고 하며 둘러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행과 함께 곧장 배를 타고 앗소 남쪽의 미둘레네로 갑니다.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5절)
여기서 앗소와 미둘레네와 밀레도는 도시 이름이고, 기오와 사모는 섬 이름입니다. 그렇게 죽 지나며 밀레도에 도착해서 어떻게 합니까?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6절)
바울 일행이 도착한 밀레도라는 곳은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20마일 지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무려 3년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2년 이상 가르쳤고, 그 전에도 가르쳤고, 그 후에도 조금 더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마술 책들을 불태우는 엄청난 역사, 또 아데미 신전 때문에 은장색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등, 많은 역사가 일어났던 곳입니다.
3년 동안 정들었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그 에베소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바울이 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겠습니까? 1절에서 에베소를 떠났던 바울이 이때 밀레도에 온 것은 대략 1년 정도 지난 후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1년 동안 못 본 에베소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배를 타고 오면서 바로 앞에 있었고 거기서 가장 유력한 도시인 에베소를 그냥 지나치고 에베소 남쪽에 위치한 밀레도로 가는데,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갑니다.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 바울은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서둘러 에베소 남쪽에 있는 이 밀레도로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이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애굽에서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다음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서 ‘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또 유월절로부터 7주가 지났다고 해서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7일이 7주). 그리고 마침 그때가 보리나 밀을 거두는 수확의 시기라서 우리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맥추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6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7일 동안의 무교절을 빌립보에 머물며 지키고 드로아로 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배를 타고 가는 데 5일이 걸렸고, 드로아에서 7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드로아를 떠날 때 유월절로부터 3주 가까이(정확히는 19일)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갈 때 최소 이틀이 걸렸다고 치고, 15절 말씀처럼 앗소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에 도착할 때까지 4일이 걸린 것을 다 합치면, 바울이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가는 데 최소 6일이 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날들을 다 합치면, 빌립보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낸 바울이 밀레도에 도착할 때까지 총 25일이 걸렸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 50일인데, 그 50일 중 반이 지나가고, 이때부터 오순절까지도 똑같이 절반인 25일이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밀레도에서 예루살렘까지 가야 하는 거리가, 지난 25일 동안 빌립보에서 밀레도까지 온 거리보다 두 배나 넘습니다. 물론 드로아에 오래 머물기도 했지만, 혹시 지중해에서 폭풍이라도 만나게 되면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것이 힘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하여, 3년 동안 목회하며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와 말씀을 나누었던 에베소를 바로 앞에 두고도 그냥 지나치고 갔던 것입니다. 에베소에 들르게 되면, 드로아에서 일주일 머물렀던 것 이상으로 더 긴 시간을 형제자매들과 보내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순절 전까지 예루살렘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때 바울이 왜 굳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합니까? 그 후에 가도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그 당시 흉년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 형제자매들에게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이 모은 사랑의 구제헌금을 전달해줌으로써,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명절을 잘 지키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명절인데 빈털터리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비참합니까?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습니다.
또 오순절이 되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그때가 바울에게 아주 좋은 복음 전도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순절이 어떤 날입니까?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성령님이 내려오신 아주 뜻깊은 날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바울에게 오순절은 예루살렘 모 교회 성도들과 함께, 그동안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선교팀원들로부터 떨어져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걸어가는 그 시간을 통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이 3차 전도여행의 최종목적지라고 분명하게 확인되었기에, 바울은 잠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주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로 계속해서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를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바울이 계획한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자신의 목회 현장이었으며 자신을 파송한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에 의해 예루살렘이 최종목적지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어떤 결박과 환난을 당할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의 뜻에 따라 곧장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바울에게는 지금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어떤 물질적인 이익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거기 가면 미래를 위해 편안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출세나 성공의 길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아주 위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결박과 환난의 길에 자신의 생명을 던지며 잠시도 지체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신의 목적은 자기가 잘되고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크게 쓰신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항상 무엇을 생각합니까? 항상 저 영원을 생각합니다. 영원을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언제나 그 판단 기준은 ‘어떻게 해야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어떻게 해야 나에게 유익이고, 어떻게 해야 내가 편안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될지, 어떻게 하면 내 이웃에게 유익을 끼칠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은 항상 지금 당장만을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이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 이 사람이 내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보고, 유익이 되면 사귀고 그렇지 못한 것 같으면 관계를 끊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지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만나서도 좋은 관계로, 헤어질 때도 좋은 관계로 헤어져야 합니다.
[나가는 말]
바울은 이미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고 테러를 당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 끔직한 경험을 한두 번만 당해도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온몸으로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기억을 합니다. 경험은 소중한 것이지만, 때로는 경험이 공포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안 좋은 경험 때문에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가려는 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 끔직한 투옥과 매질과 테러를 또 당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런 고난에 대해 경험이 많은 바울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 길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던집니다.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누는 교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참된 용기와 지혜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하나님이 어떤 것을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지,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아주 애매한 것 외에는 대부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기보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길을 자꾸만 가려고 합니까? 진리를 따라야 함을 알면서도, 왜 자꾸 거짓과 타협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욕심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갈 때 당할지 모르는 불이익과 불편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거짓의 길을 선택하여 더 많은 유익을 누리고 편안하게 살려는 욕심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욕심은 우리 힘으로는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와 지혜로만 가능하고, 그 용기와 지혜는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격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혼자 있을 때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고, 또 어떻게든 함께 모이기에 힘쓰며 함께 교제하고 예배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채우는 데에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느라 무의미하게 자기 인생을 낭비해 버립니다. 자신의 시간을 게으름이나 쾌락으로 허비해 버리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것에 시간을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다 끝날 것들에만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시간을 썩어져 없어질 것에 허비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항상 저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영원하신 주님께서 지금 하라고 주신 그 사명에 집중하여 이 땅에서도 아주 충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각자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24시간을 무의미한 것에 허비해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에 자신의 시간을 잘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과 100년을 살아도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인생이 있고, 바울처럼 나중에 로마에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어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서 지금도 우리에게까지 또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인생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고 있는가, 그리고 함께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예배하고 기도하고 격려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나아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실 줄로 압니다. 스마트폰 시대에는 손안에 세계가 다 들어 있습니다.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서 손으로 쓱쓱 하면 세계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다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온갖 뉴스와 정보가 ‘바로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아무리 최첨단 기기라 할지라도, 배터리가 다 되면 무용지물입니다. 중요한 때 배터리가 꺼져서 연락이 안 되어 낭패를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계속 충전을 받아야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충전 없이는 절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계속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시지만, 우리가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방전됩니다. 그냥 꺼져버립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스마트폰이 있으면서도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서 쓸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겉은 멋지고 멀쩡한데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영적 전원을 켜서 영적 파워를 충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 파워를 지속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 영원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유한하게 죽을 수밖에 없고 이 땅에서 죽고 끝나는 존재가 영원한 존재로 되었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평범한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나에게 가정에서, 생업에서, 교회에서 주어진 모든 일들에 최선을 다하여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내가 하는 일들 중에 나의 죽음과 함께 그냥 끝나버리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까지 나와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며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시간을 무의미한 것에 날려버림으로써 허무한 인생이 되지 않고, 바울처럼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1분 1초를 영원히 남을 것에 사용하며 오직 복음을 위해 결연히 나아가는 인생이 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칭찬받는 주님의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