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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4 ✦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다”
(사도행전 17장 16~21절)
[들어가는 말: 아덴은 어떤 곳인가]
제가 안식월을 가졌던 것이 벌써 4년이 되어 갑니다. 그때 유명한 곳들을 많이 가보았는데, 원래 계획에 없었던 그리스의 아테네도 가보았습니다. 그때 원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마치고 서유럽으로 가는 계획이었는데, 그 당시 12살이었던 제 아들이 그리스 신화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리스를 꼭 가야 한다고 해서, 이미 짜인 일정 중에 짧게나마 2박 3일로 아테네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가보니까 정말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덕분에 드디어 오늘부터 제가 가본 곳들이 등장합니다. 이전에 복음서를 설교할 때는 “제가 여기 가보았는데...”라고 했는데, 그 후에는 그 말을 못하다가 드디어 “제가 여기를 가보았는데...”를 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가보니까 본문이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옵니다.
헬라 지역에서 자란 바울은 소년 시절부터 아덴(아테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아덴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덴은 BC 5세기 이래로 가장 중요한 도시국가였습니다. 심지어 그곳이 로마제국에 합병되고 난 다음에도 그 도시는 당당한 지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자유도시가 되었습니다.
아테네는 그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어받은 풍부한 철학적 전통이 있었고, 그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 또 인간의 자유를 위해 주목할 만한 업적들을 이루고 유산을 남긴 아주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비록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 아테네는 로마에 합병되어서 그 당시 살던 ‘현재’보다는 늘 위대한 과거를 생각하며 자랑하고 있었지만, 또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아테네는 로마제국의 지적 중심지로서 비교할 상대가 없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로마제국이지만, 지적으로는 헬라 특히 아테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급히 베뢰아에서 피신하여 북쪽으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그가 그처럼 귀가 닳도록 들어 왔던 아덴을 처음으로 방문합니다. 베뢰아에서부터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그와 동행해주었던 믿음의 형제들은 이제 떠났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뱃길로 300마일 거리, 즉 그 당시 배로 나흘 길을 오는 동안 배 위에서 바울이 아테네를 향하며 무슨 생각을 하면서 타고 왔겠습니까?
전혀 계획에 없었는데 유럽 대륙에 있는 그리스 북부의 마게도냐를 목적지로 삼아서 에게 해를 건너 유럽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테네까지 배를 타고 가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이 참 오묘하고 신비롭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가 계획한대로 되지 않았지만, 자기가 계획한 것보다 더 놀라운 계획을 하나님은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살다가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서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까? 내 계획이 너무 시시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더욱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어릴 때부터 헬라어로 고등교육을 받았던 바울은 그리스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철학과 문학에도 밝았던 바울은, 아테네의 유명한 철학자들과 당당하게 논쟁을 벌일 정도로 지성인이었습니다. 또 바울은 헬라어로 신약성경 4분의 1 이상을 혼자 기록했습니다. 그 모든 문장은 그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바울이 배를 타고 아덴으로 향할 때 그의 심장이 뛰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테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의 지혜와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에서 나왔습니다. 아테나 여신을 수호신으로 삼은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2천 년 전 아테네를 방문할 때의 아테네 역시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핵심 리더 역할을 하던 최전성기의 영광은 이미 지난지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위대한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무대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네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존경받으며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책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를 배출했습니다. 그가 쓴 <역사> 책을 몇 년 전에 저도 한 권 샀는데, 베고 자기에 아주 좋습니다. 아주 두껍습니다. 벽돌 같은 책입니다. 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도 아테네 출신입니다. 또 연극의 발상지답게 3대 비극 시인들과 희극 시인들도 많았고, 파르테논 신전을 설계한 건축가, 파르테논 신전과 제우스 신전을 조각한 사람 모두 아테네 시민이었습니다.
그들의 작품과 사상과 예술은 수백 년을 지나 바울 시대에도, 아니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된 아테네가 비록 정치적인 영향력은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문학, 철학, 문화, 예술에서의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지성인들에게 아테네는 평생에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을 정도로 동경하는 도시였습니다. 바로 그 대단한 아테네를 향해, 헬라어로 교육받은 지성인 바울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세계의 문화적 수도인 아덴에서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고립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덴은 세속적 사상과 종교가 지배하고 있는 도시, 겉으로는 너무나 멋지고 화려하고 웅장하며 문화적으로 세련된 도시였지만, 도덕적으로는 아주 퇴폐적이고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도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1세기 아덴만 그랬던 게 아니라, 지금 21세기의 우리도 바로 그런 도시,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도시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과연 어떤 것이 되어야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에게서 바로 그런 도시 속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의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네 가지가 나옵니다. 바울은 보았고, 분을 느꼈고, 행동했고, 말했습니다.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아덴에서 그런 네 가지 일을 했는데, 그 중에 앞의 세 가지를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1. 바울은 보았다
가장 먼저 바울이 한 일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 도시에 가득 차 있는 우상들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6절)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8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실라와 디모데를 빨리 보내라고 한 말을 들은 베뢰아 사람들이 베뢰아로 다시 가는 데 나흘, 그 말을 들은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이 있는 아덴으로 오는 데 또 나흘, 그러니까 최소 8일은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동역자들을 기다리면서 그 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아테네를 직접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아테네는 오늘날처럼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을 것입니다. 저번에 가보니까 관광객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특히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중심으로 해서 얼마나 멋진 건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 언덕에 올라가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에는 도시마다 높은 언덕의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웬만한 도시 중심에 있는 언덕을 다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렀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가장 유명한 것은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둥만 남아 있는 파르테논신전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제1호입니다. 유네스코의 심벌 마크가 될 정도로, 2천 년 전 파르테논 신전은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세워져서 보수 공사를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그 웅장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안에는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거대한 아테나 여신상이 서 있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2미터나 되었으니까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기 있던 수많은 유물들은 지금 거기에 없습니다. 깨지는 것을 방지하고 잘 보관하기 위해 다른 박물관에 옮겨 놓은 것도 있고, 세계대전들을 지나면서 강한 나라들에게 그 유물들을 다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나 여신상도 사실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가면 오히려 보존된 것들이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다시 말해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광장 위에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었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 신전 외에도 니케(Nike) 신전, 아테나 여신의 야외 조각상,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 그리고 아테나 제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많이 남아 있어서 그때 영어로 해주는 현지 투어가이드에게 투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을 때 제 아들에게 포크를 들고 찍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전이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이키 신발을 들고 찍으라고 해서 왜 그러냐 했더니 니케(나이키) 신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신전들이 그 위에 많이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남쪽에는 아테네가 연극의 발상지라는 것을 보여주듯, 최대 만 7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웅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극장이 남아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아래로는 동남쪽에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기둥만 100개가 넘고 그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습니다. BC 6세기 아테네의 통치자에 의해 착공된 제우스 신전은, 8세기가 지난 AD 2세기 로마제국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에 의해서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속에서 아테네를 방문한 바울은 100개가 넘는 기둥으로 이루어진 제우스 신전의 형태는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테네에는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신전들이 있었고, 아고라는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 온갖 신상들과 제단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적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가보면 ‘와, 대단하다. 아름답다. 웅장하다.’ 하는 느낌이 그대로 듭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엇보다 먼저 본 것은 그 도시의 아름다움도 아니었고, 그 도시에 넘쳐나는 철학이나 지혜도 아니었고, 우상 숭배였습니다.
여기서 ‘우상이 가득하다’라고 표현했는데, ‘가득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원어는 신약 다른 곳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헬라 문헌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특이한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과 한국어 번역은 ‘우상이 가득 찬’이라고 번역하지만, 그 단어가 나타내는 개념은 그 도시가 우상들 ‘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상들이 꽉 차 있고 그 도시가 그 밑에 건설됐다는 말입니다. ‘우상들로 완전히 뒤덮였다’는 뜻입니다. 또는 그것들에 ‘푹 잠겨 있다’, 그 도시 자체가 ‘우상들의 숲이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22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아테네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크세노폰(Xenophon)은 아덴을 ‘하나의 거대한 제단, 하나의 거대한 제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덴에는 그 나라의 나머지 모든 지역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보다 신을 발견하기가 더 쉽다’고 말한 로마 풍자시 작가들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겁니다. 수많은 신전들, 사당들, 신상들, 제단들이 어디를 가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조잡하면 누가 눈길을 주겠습니까? 그 모든 신상들은 아주 우아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고 웅장해도 바울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하나님이 아덴 사람들에게 주신 예술적 창조성이 우상 숭배에 사용되는 것으로 인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본 것입니다. 온갖 우상들에 잠긴 한 도시를 보았습니다. 찬란한 문화적, 철학적 중심지를 본 게 아니라, 우상들에 잠긴 한 도시를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탄할 만큼 아름답게 꾸며진 신상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바울은 그런 것들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신상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장엄해도, 아무리 웅장해도, 바울의 마음에는 별로 감동이 없었습니다.
이 아덴이 어떤 도시입니까? 지성과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너무나 역설적이고 이상한 현상 중의 하나는, 사실 이 아덴과 똑같습니다. 요즘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하고 있습니까? 아주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과학기술이 아주 발전하는 곳에 미신과 우상숭배가 더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기가 더 높아집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 중에 일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현지 공장을 세워서 만들어내는 자동차들도 많고, 전자제품도 일본제가 많습니다. 일본이 기술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까? 미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수백만 종류의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부모도 돌아가시면 신이 되고, 조부모, 그들의 부모, 또 그들의 부모, 그러니까 조상이 다 신입니다. 집, 신발, 젓가락, 물고기도 전부 다 신입니다.
미국은 어떻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성경적 신앙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그런 식의 우상보다는 물질주의, 명예욕, 성적 쾌락, 성공 같은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심심치 않게 점쟁이(psychics)들이 많습니다. 또 palm reader도 있는데, 저번까지 있다가 제가 예수 이름으로 없어지라고 기도하며 다녔더니 없어졌습니다. 다른 데로 이사 간 것 같습니다. 또 파티와 쾌락의 영, 성적인 산업의 번창, 게다가 요즘은 미국도 입시 비리문제가 나왔습니다. 성공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옛날부터 샤머니즘이 강했습니다. 항공사에서 새로 비행기를 구입해서 들여올 때, 또는 회사에서 엄청난 고성능 기계를 들여올 때 무엇을 합니까? 멋진 양복을 잘 차려입고 최고급 옷을 입은 회장과 사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사원들이 나와서 돼지머리와 과일을 갖다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시작할 때도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이 하는 게 그런 겁니다.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많은 회사들이 돼지머리를 갖다 놓고 같은 일을 합니다. 돼지가 웃고 있으면 값이 더 비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웃어야 재수가 좋다’는 미신을 믿고 있는 겁니다. 말로는 ‘그걸 믿는 건 아니고 전통이니까 한다.’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 은근히 의지하는 게 있고, 사실은 그것을 의지한다기보다는 뭔가 꺼림직 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은 믿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부적을 붙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부적을 파는 게 오히려 더 성행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점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한 번 부적을 붙이면 떼기를 무서워하며 벌벌 떱니다. 이전 교회에서 어느 젊은 가정이 미국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부모님이 와서 집에 부적을 붙여 놓고 가셨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것을 과감히 떼었습니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잘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난리를 쳤는데, 그때 초신자였는데 감사하게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나아갔고, 결국 더 좋은 직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귀신이 장난을 치는 건데 거기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데 귀신은 믿는 현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안 믿으면서 점쟁이의 말은 믿습니다. 제가 저번 안식월에 한국에 갔을 때, 종로 2가와 3가 사이 파고다 공원 옆 낙원상가 앞에 작게 해놓은 집 같기도 하고 천막 같기도 한 것들이 죽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타로 점집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엄청 많이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우상과 미신은 미개한 부족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저기 무슨 식인종이나 대충 가리고 사는 사람들만 미신이 있는 게 아니고, 최고의 과학을 접하고 사는 21세기 사람들, 최고의 지성인들에게도 다 해당이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타락했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타락한 존재이고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상황을 바울이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냥 보고 ‘야, 재미있겠네. 근데 나는 저런 거 안 해.’ 하는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같은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분별력과 눈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2. 바울은 격분했다
두 번째로, 아덴에 우상이 가득 찬 것을 보자마자 바울은 마음에 격분합니다(16). 이 “격분”이라는 단어는 원래 헬라어로 ‘화가 났다’, ‘고난을 당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파록쉬노’(paroxyno)라는 헬라어 동사입니다. 여기에서 ‘발작’(paroxysm)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의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졸도나 간질병 발작에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보며 느끼셨던 감정입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되어 있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그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역’ 성경입니다.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인데,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해 분노하실 때마다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 ‘파록쉬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나중에 바알 신과 관련해서 엄청난 우상 숭배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사마리아에서 제사를 위해 금송아지를 또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다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시고 품으신 마음에 대한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아테네가 그 어떤 도시보다 아름답고 대단한 도시이지만 그러나 더 심한 우상의 도시라는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바울이 ‘마음에 격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 NIV에는 약간 다르게 되어 있어서 ‘심하게 괴로웠다(greatly distressed)’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를 보면 ‘바울의 속에 있는 그의 영이 격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이거나 육체적인 분노나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화를 내는 분노가 아니라, 영적인 분노, 거룩한 분노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느낀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보며 분을 느낍니다. 괴로워합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분노하고, 우상에 대해 분노하고, 그 뒤에 숨어있는 사탄에게 분노합니다. 참되신 하나님께 돌려져야 마땅한 영광과 찬송과 경배가, 실재하지도 않는 만들어낸 신들에게 돌려지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하며 분노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이런 사탄의 속임수를 볼 때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겠습니다. 바울과 같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노는 쉽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이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냥 내 감정대로 화내는 것을 의로운 분노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악이 판치는 모습을 볼 때, 악한 자들이 활개 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답답해합니다. 화가 납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노까지 가는 경우는 사실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별로 직접적인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손해가 오면 막 격분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가 안 오면, 그보다 더 심하고 악한 일이라 해도 별로 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죄에 대해서 또 너무 관용적입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는 관용해야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게 아닙니다. 죄인에 대해서는 관용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관용이 아닙니다. 죄인데도 문화적인 현상이라고 하며 그냥 넘기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너무 많아졌습니다. 요즘은 아예 공식적으로 남성과 여성 외에도 제3의 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는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관용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은 온 우주에서 가장 교활한 존재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존재가 사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잘하면 주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사탄을 닮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항상 속삭입니다. ‘괜찮아. 남들도 다 하는 건데 뭘 그래?’
로마서 1장에도 나오지만, 자기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해야 하는데 옆을 보니까 남들도 다 합니다. 그래서 괜찮은가 보다 하는 것을 사탄이 자꾸 부추기는 겁니다. ‘봐봐. 남들도 다 해. 지금 이 세상이 다 그래. 왜 너만 유별나게 그래? 그냥 살아. 네가 이것을 반대하면 편협한 사람이 되는 거야. 왜 그렇게 관용적이지를 못해? 시대에 뒤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잠자코 넘어가면 돼.’라는 식으로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인데도 그런 것들을 관용하고 포용하면 오픈 된 사람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보수적이고 편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무조건 보수적이어야 하고 무조건 다 정죄해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죄는 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도 나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맞는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악인데도 괜찮다고 넘어가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죄라고, 악을 악이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우리가 같이 포용하고 사랑하고 용납하고 품어주고 돌보아주는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미워하고 분노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죄는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삶과 죽음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죄를 지은 사람)은 포용하고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3. 바울은 믿음을 행동에 옮겼다
우상숭배를 보고 마음에 분을 느낀 바울은, 이제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7절)
매주 회당에 가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는 변론하고, 또 시장에 가서는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합니다. 바울은 회당과 장터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여기의 ‘회당’은 당연히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아테네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고, 거기에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또 유대인들과 함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그리고 개종은 안 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회당을 찾아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또 함께 토론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장터’는 ‘아고라’입니다. 그 당시 아고라는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뿐 아니라 집회와 재판 기능 그리고 자유토론까지 가능한 공개 광장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아크로폴리스 밑으로 집들도 있지만 시장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바울이 변론을 한 겁니다. 바울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그곳에서 강론하고 논쟁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이 유명한 철학 학파들을 만납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8절)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무신론자들인데, 인간의 최고의 목표는 쾌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쾌락을 추구하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다신론자들로서, 운명에 대한 복종과 고난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무신론, 스토아는 다신론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들을 대표하는 두 개의 학파였습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여러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게 모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바울의 능력입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아는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장터(아고라)에서는 보통 시민들에게, 또 아레오바고에서는 최고의 지성인인 철학자들에게 다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지금도 상황은 그때와 매우 비슷합니다. 회당과 같이 교회 내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있고, 초신자도 있고, 또 아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며, 특히 안 믿는 분들이 믿고 말씀 안에서 훈련을 받아 주님 안에서 잘 자라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로 만들어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또 시장과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휴양지, 공원, 길거리, 가게, 쇼핑몰, 그로서리 스토어, 식당, 카페, 나이트클럽, 술집, 크루즈 등에 모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마음의 휴식을 얻고자 그런 데서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보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대부분 믿는 사람들이나 교회에서 얻는데, 믿는 사람들이나 교회의 모습이 안 좋을 때가 참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말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 삶이 신실한 삶인 것을 보여줄 때 마음이 열립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뭔가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모범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 생활 속의 전도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19절)
아고라(장터)에서 바울과 논쟁을 벌이던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갑니다. 여기를 제가 가봤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꼭대기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오면 아레오바고가 있습니다.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바위로 되어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상당히 위가 넓은데, 바로 저쪽에 파르테논 신전이 보이고, 그 맞은편 아래쪽으로는 바울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아고라(장터)가 있습니다. 2천 년 전 본문 속의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아래로 아고라 주위의 온갖 신전들, 심지어는 대장장이를 위한 신전과 도박꾼을 위한 신전도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 초창기에는 귀족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라고 하면 곧 ‘회의’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정치적 상황에 따라 바뀌기는 했지만, 아테네가 로마제국에 정복당할 때까지 아레오바고에서는 늘 크고 작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본래 아레오바고라는 이름은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레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전쟁의 신입니다.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이고, 아레스는 전쟁의 남신입니다. 어느 날 아레스의 딸 알키페가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에게 겁탈을 당하니까, 거기에 격노한 아레스는 할리로티오스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살인행위에 대하여 아테네의 바위언덕에서 올림포스 신들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신화의 토대 위에서 아레스가 재판을 받았다 하는 그 바위언덕을, ‘아레스’라는 이름에 언덕을 뜻하는 헬라어 ‘파고스’를 붙여서 아레오바고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그 이후 아레오바고는 재판 장소로 사용되면서 ‘법정’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이 아레오바고에서 재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속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로 간 것은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을 재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0절)
본문 속의 철학자들에게 ‘예수와 부활’은 모두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헬라어로 예수는 ‘예수스(Iesous)’이고 부활은 ‘아나스타시스(Anastasis)’인데, 둘 다 ‘스’로 끝나니까 무슨 신의 이름인가 한 겁니다. 제우스도 헤르메스도 다 이름이 ‘스’로 끝나니까 예수스와 아나스타시스도 신의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특히 ‘부활’은 그들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그 한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죄가 사함을 받고, 그 한 사람이 부활함으로 모든 사람이 영생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부활’에 대해서 바울로부터 조금 더 자세하게 듣기 위해 바울을 복잡하고 시끄러운 시장에서 저 위에 있는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간 겁니다.
지금 아레오바고를 가보면 높지는 않지만 조금 올라가서 언덕 맨 위 한가운데에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을 나타내는 표시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레오바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정면 계단 오른쪽에는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한 내용이자 오늘의 본문의 다음 본문인 22절부터 31절까지가 새겨진 동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논쟁을 벌이던 철학자들이 바울이 전한 ‘예수와 부활’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듣기 위해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다고 해서, 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기 위함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1절)
2천 년 전 아테네 사람들의 가장 크고 주된 관심사는 뭔가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 혹은 주장을 듣고 논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위대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주전 5세기 아테네의 정치가 클레온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새로운 것이라고 하면 금방 속아 넘어가는 인간들이구나!” 하고 비난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부활’이 자기들의 이성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었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새롭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조금 더 들어보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새것에 대한 그들의 지적인 호기심, 지적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뭐든지 새롭기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또 우리를 바르게 세워 줍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바르게 세워 주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언제나 참된 것, 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아덴으로 대표되는 모든 도시들의 특징 하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대표적 도시인 뉴욕이나 유럽의 파리나 런던이나 로마, 또 아시아의 토쿄나 베이징이나 서울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대도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 특징 중 하나는 이상한 것들에 대해 관심이 높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뭔가 특이한 것, 이상한 것,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도시를 보십시오. 항상 새로운 유행이 등장합니다. 새로운 옷, 새로운 헤어스타일, 화장법, 화장품, 디자인, 구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새로운 단어인 ‘신상’까지 나왔습니다. ‘새로운 상품’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보면 다 똑같은 것 같은데 다 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은 옛날에 했던 것을 디시 끄집어내어서 유행을 시키기도 하는데, 그런 게 복고풍입니다. 그러니까 뭐 하나를 가지고 30년만 버티고 있으면 그것도 또 새로운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새 것을 제시하지 못하면 도시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첨단 유행을 좋아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겁니다. 허하다는 겁니다. 마음이 꽉 차 있는 사람은 그런 것을 쫓아다니지 않습니다. 허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보고 만족을 못하고 저것을 해보고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비어 있고,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뭔가 새 것, 색다른 것, 독특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뭔가 새로운 것이 나왔다 하면 쫓아다니십니까? 가끔 그런 경향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레스토랑 하나가 열었다 하면 열기 무섭게 가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뉴욕의 애플스토어 같은 데를 보면, 뭐 하나 나온다고 하면 줄을 서서 사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뭔가를 찾고 있는 겁니다. 채워지지를 않으니까 자꾸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보겠다는 겁니다. 갈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허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매일 만나며 살고 있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또는 운전하다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없다면 그들의 마음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에도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셔서 뭔가 그런 것을 계속 찾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만나야만 그것이 채워집니다. 이 세상의 억만금을 갖다 넣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으로만 그 공간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들고 나아가서 사랑으로 섬기며 전해야 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런 영혼 구원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 하나님께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