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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16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2

에베소에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사도행전 1911~22)

 

[들어가는 말]

 

한국 사람이라면 이 시구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이것은 사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조입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시샘하니

     맑은 물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들과 함께하다가 자기 아들이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한 삶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잘못된 현실과 부딪치며 싸우고 세상을 새롭게 하기보다는, 현실을 떠나 고향이나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대개 백로 같은 자신의 고고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에베소라는 도시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타락의 극치를 달리던 도시였습니다. 로마제국 4대 도시 중 하나이자 소아시아 최대 도시였던 에베소는 교통과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돈과 사치와 향락이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당시 에베소에는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아데미 신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지금도 서 있는 아테네의 그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파르테논 신전보다 길이와 폭은 두 배였고 크기는 네 배에 달하는 엄청난 신전이었습니다. 그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 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합법적으로 매춘을 하는 창기들이었고, 신전 노예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아데미 신전을 참배하려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에베소로 몰려들었고, 또 아데미 신전의 제사장들은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각종 명목을 갖다 붙이면서 금품을 뜯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신전 내부뿐 아니라 신전 주변 지역까지 치외법권 지대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범죄자이든 아데미 신전 안에만 들어오면 체포되지 않고 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넓은 아데미 신전은 항상 각종 범죄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무당들과 마법사들의 천국이기도 했던 에베소는 온갖 미신과 이상한 종교적 행위와 부적이 난무하는 아주 혼탁한 타락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와 맞먹는 타락의 도시였고, 종교적으로는 더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정몽주 어머니가 쓴 시조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 에베소는 시커먼 까마귀들, 아니 더 심한 존재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곳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더러운 곳을 멀리 떠나 외딴 곳에서 혼자 고고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에베소의 타락한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한가운데에서 주님이 주신 사역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에베소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계속 사역을 해나갔고, 주님께서는 그런 그를 통해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회개와 부흥의 역사

 

1)  바울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그렇게 악한 도시를 피해 떠나지 않고 그 한가운데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던 바울을 통해 에베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1)

 

11절의 주어는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놀라운 능력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언급한 놀라운 능력, 뒤에 보면 치유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이 손을 대기만 해도 사람들이 병에서 낫고 귀신이 쫓겨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것을 단순히 능력이라고 하지 않고 놀라운 능력이라고 묘사합니다. ‘놀라운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특별한’, ‘뛰어난’, ‘놀랄 만한’, ‘비범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전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었는데, 왜 굳이 여기서는 그냥 능력이라고 하지 않고 특별한 능력, 비범한 능력이라고 단어를 더 붙였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2)

 

저번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의 무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낮잠을 즐기던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 시간에 모두 잠을 자서 비어 있는 두란노 서원(튀란노스의 스콜레)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매일 그렇게 했다는 것을 지난번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천막제조 기술자였던 바울은, 그 이외의 시간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와 사역에 쓸 돈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2절에서 손수건은 바울이 천막을 만들면서 흐르는 땀을 닦던 천 조각을 말합니다. 앞치마는 바울이 천막을 만들 때 자기 앞에 두르던 작업용 앞가리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도 열심히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바울의 그런 땀수건과 작업용 앞가리개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으니까, 병이 떠나고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특별한 능력, 비범한 능력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매번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고 고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으로만 하셨고, 심지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다 등장하는 어떤 여인이 있는데 12년 동안이나 하혈이 멎지 않는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입니다(9, 5, 8).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접근할 수가 없어서 뒤쪽으로 간신히 돌아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옷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도 그 병이 즉시 낫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능력, 비범한 능력이었습니다.

 

사도 중 하나인 베드로도 치유 사역을 행했는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사람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들을 메고 거리로 나와서 그들을 침상과 깔판 위에 죽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가 덮이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림자에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해서까지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그것 역시 특별한 능력, 비범한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무슨 슈퍼맨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요즘 영화에 보면 어벤져스(Avengers)’라고 해서 신기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많이 나오지만, 바울은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땀으로 젖어 있고 온갖 흙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땀수건과 작업용 앞가리개는 아주 지저분하고 냄새가 날 뿐이지 거기에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얹자마자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 갑니다. 사실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자체에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이 전혀 아니지만, 에베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능력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역시 아주 특별한 능력, 비범한 능력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물건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지극히 특별하고 비범한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2천 년 전에 나온 성경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21세기에도 필요하시다면 당신의 뜻을 위하여 어떤 것을 통해서도 아주 특별한 능력, 비범한 능력을 여전히 행하고 계십니다. 특히 선교지에 가보면 우리가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을 실제로 체험한 분들도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2)  망신당하는 스게와의 아들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3)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은 헬라어 원문으로 무당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돈벌이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떠돌이 무당들이었는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인데도 무당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바울을 그대로 흉내 냅니다. 악한 영들에게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하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이전에 쓰던 개역한글 번역이 더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빙자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을 빙자해서 사기 친다는 말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진짜가 아니라 ‘....인 척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귀신을 다루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진짜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그 동안 사용해오던 어떤 주문이 있는데 자기들은 잘 안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척척 고치니까 저 예수의 이름에는 뭔가 더 신통력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해서, 자기들의 돈벌이를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시험 삼아했습니다. 성경의 주를 보면 망령되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믿지 않으면서 그냥 해본 겁니다. 이용만 한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가 과연 귀신들에게 통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4)

 

헬라어 원문에는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어떤 기록에도 대제사장 중에 스게와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무당이었던 스게와라는 사람이 자기의 권위와 이름을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에베소에서 내가 대제사장이다.’라며 스스로 거짓 선전을 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무당들은 다 쳐 죽이게 되어 있는데, 유대인 대제사장이 무당이라면 말이 됩니까? 스게와는 철저히 가짜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곱 아들들도 전부 다 무당들입니다. 그들 역시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 삼아 귀신을 다루려고 시도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5)

 

마가복음 1(24)을 보면, 가버나움의 회당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는데, 그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외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도 바울 일행이 왔을 때 보자마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16:17)라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영적 존재인 귀신들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감히 자기들이 맞설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 굴복했습니다. 본문의 귀신 역시 예수님도 알고 바울도 알고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이 능력의 주님이시며 성자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고, 그분의 종인 사도 바울도 압니다. 그러니까 악한 영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에게는 너희는 누구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는 예수와 상관 없는 자들이 아니냐?’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주문만 중얼중얼 거리며 이용하고 있음을 귀신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6)

 

귀신 들린 사람은 단 한 명이고 스게와의 아들들은 일곱 명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한 명이 일곱 명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이 한 사람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에게 점프해서 뛰어올라 그들을 마구 때리며 옷을 찢어버리면서 힘으로 제압해버립니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 골룸이라는 괴물이 나오는데, 골룸이 사람에게 달려 붙어 물어뜯고 때리는 장면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붙어서 깨물고 때리고 할퀴니까 일곱 명이 모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여 귀신 들린 사람의 집에서 급히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3)  에베소 사람들의 회개와 말씀의 부흥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건을 통해 에베소의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을 경외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7)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아데미 신전이 턱 자리 잡고 있어 온갖 미신이 판을 치던 이 에베소에는, 어떤 이름이나 주문이 신통한 능력을 일으킨다거나 용하다는 소문만 나면 사람들이 모두 그 이름이나 주문을 부르거나 외우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믿음은 없이 그 이름을 단순히 주문처럼 이용하려고 할 때 화를 입게 된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에베소 사람들은, 예수는 다른 분이라고 진심으로 경외하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8)

 

이때는 에베소를 두 번째로 다시 찾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지 최소 2년 이상 지났을 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는 매일 두란노 서원에 모이는 그리스도인들 외에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주님을 막연하게 믿던 그들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보고 주님은 정말 살아 계시구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시구나!’ 깨닫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19)

 

13절에 나오는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은 무당인 반면, 19절의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은 마법사(sorcerer)를 말합니다. 요즘은 마법사가 해리포터(Harry Potter) 같은 것 때문에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마법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진짜 마법이 아니라 눈속임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자신들이 마치 사람들의 운명을 알고 또 바꾸어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점쟁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또는 그 당시 점성술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마법사들이 그동안 애지중지하며 사용하던 마법 책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에 태워버린 겁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마법 책들은 마법사들이 돈벌이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필수 자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미련 없이 그것들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냥 마음으로만 나는 이제부터 마법을 하지 않겠다.’ 하고 결심만 한 게 아니라, 행동으로 다 불태워 버림으로써 정말로 다 끊어버렸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다 막아버린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과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 사건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보게 된 이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해온 일들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는가, 얼마나 헛된 일이었는가, 얼마나 악한 일이었는가를 깊이 뉘우치고 주님을 향해 분명하게 돌아선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돌아선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만 한 것도 아니고, 돌아갈 길을 다 막는 진짜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책값을 계산했다고 나오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도 다 놀라서 이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인지 계산까지 해본 것입니다. 얼마나 이 사건이 놀라운 일인지, 마법사들이 들고 나온 양피지나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마법 책값을 사람들이 함께 일일이 모두 더해 본 결과 은 오만이었습니다. 그렇게 다 더해 볼 정도로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은 오만이 원래는 드라크마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은화 1드라크마는 한 사람의 하루치 품삯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1데나리온이 하루치 품삯인데, 여기서는 1드라크마가 하루치 품삯에 해당하는 은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은화 5만 드라크마라면 한 사람이 5만 일을 일해야 하는 액수입니다. 한 사람이 1365일 전혀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하면, 137년이 걸려야 벌 수 있는 액수입니다. 적어도 하루는 쉬니까, 하루 쉬고 6일을 일한다고 치면 160년이 걸립니다. 1년에 대충 5만 달러를 번다고 하면 8백만 달러 정도 되는데, 대략 지금 돈으로 약 천만 달러라고 보면 그렇게 무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액수의 마법 책들이었는데, 에베소의 마법사들은 그 책들을 다 들고 나와서 모두 불살라 태워버렸습니다. 그냥 미련 없이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렇게 비싼데도 다 태워버렸습니다. 이 마법사들을 의지하던 에베소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마법사들에게 아니, 이렇게 비싼 걸 왜 다 태웁니까?’ 하고 말리지 않고, 마법사들과 한 마음이 되어서 태웁니다.

 

그들이 책값을 계산한 것은 아까워서 계산한 게 아니라, 이렇게 비싼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차 없이 다 태워버리는 결단을 보여주기 위해 계산하며 함께 그 책들을 불사른 겁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확인함으로써, 그동안 자신들의 인생을 헛되게 만들었던 마법에서 벗어나 그들의 인생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행위가 이 마법 책을 불태워버린 것이었습니다.

 

은 오만 드라크마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책을 다 합친 값이었지만, ‘은 오만드라크마가 이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은 오만드라크마라는 것입니다. ‘집착하면 눈과 귀를 잃는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집착은, ‘어느 것 하나에 마음이 쏠려 계속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다 같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순간에 여러분이 머리와 마음속으로 예배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이 설교가 지금 제대로 들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어도 예배에 집중이 될 수가 없습니다. 뭔가에 집착하고 있으면 눈과 귀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몸으로는 분명히 여기 있는데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눈과 귀를 잃게 하고 있는 우리 각자의 은 오만 드라크마가 무엇인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나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 내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은 오만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고 너무 좋아서 버리기가 참 아까운데 사실은 그것이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그것이 바로 은 오만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혹시 그런 게 있으십니까? 내 삶에 몰래 감춰놓고 즐기고 있는 그것, 사실은 이러면 안 되는데하고 알지만 나에게 기쁨과 재미를 줘서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버릴 수도 없는 것, 그런데 사실은 내게 해가 되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불에 태워버려야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에베소 사람들과 마법사들처럼, 우리의 눈과 귀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우리 각자의 은 오만 드라크마를 성령님의 불로 가차 없이, 미련 없이 불사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갉아먹고 삶을 황폐화시키는 집착에서 벗어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께 집중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0)

 

본문은 우상과 타락과 미신의 도시 에베소에서 일어난 이 생명의 역사가 바울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기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말씀이 또 흥왕했다고 말합니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권력자들과 무적의 군대들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조금만 보아도 유명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지녔던 힘은 한순간의 정점을 지나면 반드시 쇠퇴하고 패배했습니다. 아무리 막강해 보이는 힘이라도 결국은 다 허무하게 없어질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면 살수록 그 힘이 흥왕하고 증폭된다는 것입니다. 그 힘의 근원이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강한 것,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왜 더 약한 것을 붙들려고 합니까? 왜 덜 강한 것을 붙들려고 합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붙들어도, 아무리 연줄이 좋고 빽이 좋고 다른 게 좋아도, 명예와 권력과 돈이 강한 것 같아도, 주님의 말씀보다 약합니다. 그런데 왜 더 약한 것, 덜 강한 것을 붙들려고 합니까? 약한 것을 붙들면 망하지만 가장 강한 것을 붙들면 항상 이깁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지닌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힘을 믿지 못하면 누구도 말씀대로 살 수 없고 살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에게 능력이 나타난 것은 바울이 주님의 말씀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비록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사람들이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힘입어 영원히 이기는 삶을 선택하고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은 다 사라졌지만, 그의 영향력은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바울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이라고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시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가고 계십니까? 어떤 의미에서든 지금 막 피를 흘리는 상태에 있으십니까? 숨쉬기조차 고통스러운 절망 속에 계십니까?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죽음의 고통에 있습니까? 아니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모함이나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의지할 것은 결국 사람이 아닙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무조건 사람을 불신하라는 말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납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처럼 믿을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부모님도 믿을 대상이 되지 못하고, 다른 어떤 사람도 믿을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매번 예배 때마다 우리가 그냥 왔다 가는 게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뭔가?’를 찾아 그 하나를 붙들고 내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보는 겁니다. 성경을 혼자 읽을 때도 그렇습니다.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하나 붙들고 나아가는 겁니다. 큐티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이 뭔지 그 하나를 붙들고 그대로 행하기 위해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머리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갈 때, 혹시 지금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역시 바울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분명히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믿습니다.

 

 

3.   주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바울의 계획

 

이러한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후, 바울은 이후의 계획을 밝힙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1-22)

 

3년에 걸친 에베소 사역이 마무리되면, 바울은 먼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방문하려 합니다.

그리스 북부 지역인 마게도냐에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웠던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가 있고, 그리스 남부 지역인 아가야에는 아테네 교회가 있고 또 고린도 교회가 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여 3년째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은 그리스 지역의 교회들을 다시 찾아가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려는 계획을 여기서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는데, 나중에 살펴보면 거기 가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수 있는 구제헌금을 미리 마련하도록 그들을 보냈다고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먼저 보내고 바울은 에베소에 조금 더 머물러 있다가 3년이 되고 떠나갑니다. 그 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그 다음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고 선포합니다.

 

지금 우리 교우님들 중에 유럽 여행 중인 분들도 있고 갔다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로마에 다녀온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4년 전 안식월 때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로마에 가서 관광을 하겠다.’라는 말입니다. 진짜 그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내가 로마 관광 좀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제국의 심장인 수도 로마를 자신의 남은 생애의 마지막 전도지로 삼겠다고 하는 선포입니다.

 

이전에 교회를 짓밟는 데 앞장섰던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이후,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안주할 곳을 찾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오늘 본문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쉴 곳도 있었고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기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관심은 그저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었기 때문에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제국의 수도 로마를 마지막 전도지로 삼아 자신의 남은 인생을 던지겠다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게, 2차 전도여행 때 원래 자신이 처음 복음을 전했던 갈라디아 지역 정도를 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자꾸 아시아(터키)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으시고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을 향한 복음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면서 북부 마게도냐를 거쳐 핍박 때문에 남부 아가야로 내려와서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까지 갔습니다. 거기에서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당할 때 이사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납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바울이 내가 로마로 가겠다하는 비전을 품게 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야망으로 품은 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소식도 들으며 나중에 로마까지 가겠다는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성령 안에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로 가겠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터키 지역에서만 복음을 전하려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던 바울의 시야를 넓혀주셔서 유럽으로 가게 하셨고, 이제는 그리스를 넘어 로마까지 가는 비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어쩌면 퍼즐 판에 매일 퍼즐 조각들을 붙여 나가는 것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만 봐서는 이게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매일 자신의 인생 퍼즐 판에 주어진 퍼즐 조각을 성실하게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다 보면, 어느 날엔가 그 퍼즐 판을 통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큰 그림, 전체 그림, 즉 주님의 비전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비록 바울이 로마도 봐야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 방식은 바울의 계획대로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이곳저곳 다닌 것처럼 자기 발로 로마로 가게 될 것을 생각하며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따라 선포했지만, 사도행전의 이후 이야기를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반발로 뜻하지 않게 소동이 일어나 로마군이 그를 급히 체포합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옮겨져 2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유인의 몸이 아니라, 가이사에게 상소함으로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압송됩니다. 그것도 오늘 본문에서 로마도 보아야 하겠다고 선포한지 3년이나 지나서 그렇게 됩니다.

 

로마서 1528절을 보면, 로마 전도의 비전을 선포한 바울의 계획에는 서바나, 즉 지금의 스페인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스페인이 좋은 관광지이고 좋은 곳이지만, 그때는 아주 외지였습니다. 세상의 땅 끝이라고 여겨지는 곳이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까지 가겠다고 밝힙니다. 바울이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대륙의 끝자락이며 땅 끝인 스페인까지 자신의 마지막 전도 대상지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함으로써, 그의 스페인 방문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맙니다.

 

이처럼 바울의 생각과 주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로마 전도의 비전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바울은 주님의 방법에 순종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꼭 자기가 해야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주님의 이끄심에 철저히 순종하면서 주님께 맡기고, 자기 인생의 퍼즐 판에 지금 주신 조각들을 하나하나 매일 성실하게 맞춰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로마 전도와 관련한 바울의 예상과 계획은 조금 달라졌지만, 바울을 통해 로마제국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비전은 놀랍게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비전이라는 것은 어떤 망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비전이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어떤 야망도 아닙니다. 야망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관점에서 비전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그것이 성취될수록 나 자신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유익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교회의 유익, 복음의 유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의 결과로 나오는 야망은, 그것이 이루어질수록 자기는 좋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됩니다. 자기의 야망을 펼치다가 세계 역삭사 잘못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비전이나 우리의 비전이 아니라 주님의 비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통해 세상 속에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비전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세상 속에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비전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나의 목회 비전이 이것이다.’라고 하거나, 교회들이 우리의 비전은 이것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많은 경우 망상이거나 야망인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교회를 향한 주님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19-20절에 너무나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민족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여 믿으면 세례를 주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며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비전은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매일 최선을 다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나 편안함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주님의 비전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락함도 포기하고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다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매일 자신의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20여 년 만에 자신의 인생에 뚜렷이 보여주신 로마라는 주님의 비전을 보았고, 주님의 그 비전에 남은 삶을 송두리째 던짐으로 로마제국을 복음화 시키시려는 주님의 비전이 결국 성취되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지금까지 어떤 비전으로 포장한 망상이나 야망에 사로잡혀 사느라, 주님께서 정작 나에게 맡겨 주신 귀한 생명을 허비해 왔다면, 이 시간 주님의 비전이 정말로 나의 사명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의 비전이 우리의 사명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우리가 함께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주님의 비전이 나를 통해, 또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함께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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