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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1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1~10)

 

[들어가는 말]

 

여러분께서 기도해주셔서 한인총회에 잘 참석하고 돌아왔고, 휴가도 잘 보내고 왔습니다. 이번 한인총회에 아주 오랜만에 참석했는데, 이전과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한인총회의 핵심 순서는 사무총회 즉 회의였지만, 여러 예배들과 경건회와 주제 강연을 통해서 귀한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제 마음에 와 닿았던 내용은, 한국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 목사님이 오셔서 주제 강연 중에 언급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이 한국교회 130여 년의 역사에서 최초로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원인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외부적인 요인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요인입니다. 외부적으로는 반기독교 세력의 공격이 강하고 반기독교적인 미디어의 영향의 원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외부적인 공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내부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여기도 다르지 않겠지만, 대다수의 교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평소에는 전혀 기도나 말씀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성경공부도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보지 않으니까, 사는 것이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가는 것 외에는 교회에 안 다니며 믿지 않는 사람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내부적으로부터 무너지고 점점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1990년대 중반부터 교회 성장이 멈추었고 정체가 시작되었습니다. 대형교회들이 많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꼈을 뿐이지, 21세기 들어서 실제적으로 교인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요즘 들어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이번 휴가를 갔을 때 제 조카들이 다니는 한인 교회에 부모님과 동생네와 함께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카고에 있는 한인 교회들의 주된 연령층이 노년층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희가 방문한 교회도 저희보다 약간 더 큰 교회였는데, 예배당에 앉아 있는 분들의 80% 이상이 60, 70, 80대가 되어 보였습니다. 가끔 젊은 분들이 있었는데 예배 후 가까이서 보니 주름이 많고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특히 Memorial Day Weekend라서 더더욱 젊은 사람들이 야외로 나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연령층이 골고루 있습니다. 그러나 미주 한인 교회들이 점점 노년층이 많고 젊은층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단에서 가장 큰 한인 교회 중 하나인 교회에서 분석을 해보니까, 지금 80대보다 20대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방 교인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주된 원인이 과연 무엇입니까? 단순히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까? 사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위주로만 교회를 돌리다보니까, 믿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과 행사만 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안 믿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관심을 가질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듭니다. 심하게 말하면, 교회들이 믿는 사람들을 놓고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 가운데는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 교인들이 그 주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믿기는 믿는 것 같은데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오늘 이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1세기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을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

 

1)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의 영적 상태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18장 뒷부분에서 시작했습니다. 여기 윗지방이라고 되어 있는데, 1823절에 나오는 것처럼 갈라디아와 브루기아(터키 중부 지역)를 가리킵니다. 거기를 통과한 후 터키 서해안에 있는 에베소에 도착한 것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이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거쳐 에베소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처음 가서 복음을 전했던 도시인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같은 도시들을 2차 전도여행 때도 방문했고, 이번 3차 때도 똑같이 방문했다는 말입니다. 2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잠시 방문했던 바울은, 주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던 자신의 약속대로 에베소를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지난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전에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라는 사람이 에베소로 와서 말씀을 전하다가, 바울이 그곳에 남겨 두고 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아볼로는 온전한 복음을 전수받습니다.

 

그 후 아볼로는 고린도로 건너갔고, 그 전에 1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간 바울의 공백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메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에베소를 다시 찾은 바울은 2031절에 나오는 것처럼,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인 에베소에서 3년이나 머물며 복음을 더 많이 더 깊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남으로써 문제가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말할 때는 정관사를 붙여 그 제자(the disciples)’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어떤 제자들(some disciples)’라고 하며 제자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만난 제자가 누구의 제자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볼로의 제자인지, 베드로의 제자인지, 사도 요한의 제자인지, 세례요한의 제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2-3)

 

이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어떤 제자라는 단어를 쓸 때 그 앞에 정관사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들을 만나서 사도 바울이 질문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우리 중에 혹시 오순절이나 순복음 계통에서 신앙생활을 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이 본문을 너희가 믿을 때에가 아니라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사본에는 믿을 때에믿은 후에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뜨거워지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도 자주 빠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뜨겁게 되고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가리켜 오순절 계통 교회에서는 성령 세례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를 믿는다면 그렇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성령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 가운데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다들 지적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확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열심히 교제도 하고, 방언이나 다른 은사들을 받는 일들도 생깁니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그런 것을 가리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믿기는 믿었는데 성령 세례를 못 받고 있다가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성령 세례를 받는 건 아니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방언과 은사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는 훈련도 시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론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믿은 다음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근거가 바로 오늘 본문의 2절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 입장도 많습니다. 사실 더 많습니다. 믿다받다의 시제가 같다는 것입니다. 믿은 후에 받는 게 아니라 믿을 때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계의 중요한 논쟁입니다우리는 장로교회인데, 장로교를 포함한 개혁주의에서는 너희가 믿을 때받았느냐의 시제는 같은 시제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헬라어 원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을 때에 받았느냐?’ 그러니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이 임하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에베소에 3년간 머물면서 이 기간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가 고린도전서와 후서입니다. 첫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3, 새번역)

 

, 약간 희미하고 신통치 않고 미지근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며 주인이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이십니다.’라고 믿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면, 그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안 믿는 분들은 그 안에 성령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이 쉬운 고백을 못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게 사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의 힘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에 이 쉬운 것 같이 보이는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로는 될지 모르지만 진심으로는 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성령 받았는가?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질문들은 사실 다 같은 질문입니다. ‘구원 받았는가? 영생을 얻었는가? 천국에 들어가는가?’도 다 같은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이미 성령이 들어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거하신다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 성령의 내주(內住)’라고 하는데,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이미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처음 만난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제자라고 부르긴 했지만,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을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화와 삶을 통해 같이 지내며 보니까 그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 같지 않았다고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너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너희들 속에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계실 텐데, 왜 너희의 말과 행동에서 성령님이 계시다는 표시가 나오지 않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삶을 보면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행동만 보고 남이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자기는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성령님이 안에 계시다면 그 결과로 삶과 말과 행동 속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예수를 믿어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한 일도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단순히 아니라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하고 대답합니다. ‘성령, 그게 뭐예요?’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다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물었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18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문의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던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복음의 완성을 못 보고 죽었습니다.

 

그가 순교한 뒤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사방으로 흩어져 예수님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알던 예수님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초기에 한정된 예수님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죽음 때까지 본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복음은 복음의 일부일 뿐, 온전한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볼로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요한의 세례를 받은 본문의 어떤 제자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온전한 복음을 전수받기 이전의 아볼로로부터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듣고 배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4-5)

 

요한의 세례를 받고 부분적인 지식으로 제한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 사람들이 이제 온전한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는데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겠다고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6-7)

 

바울이 안수하며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은사가 나타납니다. 특별히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오순절 교회 사람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이런 놀라운 기적과 은사가 함께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또 하나의 세례로 성령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근거로서 이 본문을 제시합니다. 물 세례가 있고 성령 세례가 따로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믿은 다음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맞는데,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냐, 예수님을 믿을 때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냐 하는 것에서 갈리는 겁니다. 오순절 계통은 믿은 다음에 따로 성령 세례를 받고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고, 장로교를 포함한 개혁주의 신학은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한 구원의 역사,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 강림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냥 요한의 세례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바울이 세례를 주며 안수를 하니까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는 것은, 이방 땅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을 통하여 온전히 임했고 시작됐다는 것을 알리는 사인(sign)으로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여기 말고도 사도행전에서 두 군데 더 나옵니다. 첫째로 8장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10장에서 고넬료의 집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고,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에 공통적인 일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고넬료와 또 오늘 본문의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모두 다 세례요한의 세례까지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불완전한 믿음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확증해주는 차원에서 은사가 동반된 성령 강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순절에 일어났던 사건이, 여기 에베소의 이 사람들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니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바로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리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순간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 순간 성령이 나에게 임하시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었다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내주하심이 곧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에는 물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즉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그 사인과 증거로 물 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임재와 함께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 끝났습니까? ‘나는 예수님 믿고 성령님을 받았으니 다 됐다.’라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중에 감옥에 갇혔을 때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썼을 수도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 세례를 받았으면, 구원받고 성령님이 영원히 함께 해주시면, 그 다음 단계인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라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입니다. 한 번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었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매일 매순간 계속 받아야 하는,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교회 안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예배당을 수십 년 드나들었는데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고 알지를 못하는 이름뿐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서 영혼 구원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가서 제자를 삼아라(만들어라)” 하셨습니다. 제자를 만드는 것은 영혼 구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들에게 가서 제자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여 믿으면 그 표시로 세례를 주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여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 구원까지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지에서도 이것이 참 고민입니다. 영혼 구원까지는 어떻게 되었는데 그 다음에 제자로 성장이 안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던 신앙의 수준은 항상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오실 때를 준비하는 세례요한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바로 자기 뒤에 오실 분(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온전한 구원의 역사를 이끌고 계시고, 이방 땅에도 복음의 빛을 밝히기 위해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셨고 고넬료의 집에서도 역사하셨으며, 에베소에 있는 세례 요한의 어떤 제자들에게도 역사하셨습니다.

 

저처럼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인이거나 몇 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아직도 지식적 한계에 붙잡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정말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자녀들 중에 교회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꽤 많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지식적으로는 다 아는데, 정말 예수님의 생명을 뜨겁게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교회의 중직자들 중에도 성경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중에 내가 이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라고 황당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들이 교회 안에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말씀을 읽다가 은혜를 받고, 또 요즘 인터넷만 보면 좋은 설교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것 듣고 저것 듣고 하면서 조각조각 단편적인 지식은 너무 많은데, 그런 것들이 통합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되면 어떤 말씀 내용은 생각나는데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대충 기억은 하겠는데 이게 뭔지,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통독이 필요하고, 큐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는 것 중요합니다. 성경 지식을 쌓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냥 귀에 듣기 좋은 게 은혜가 아닙니다. 요즘음 감동적인 영화를 봐도 사람들이 은혜롭다고 합니다. 누가 잘생겨도 은혜롭게 생겼다고 하는 등, 은혜가 막 사용되고 있습니다. 귀에 듣기 좋거나, 자기 사정과 딱 맞아 떨어지며 바로 이거다하는 게 은혜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기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령의 임하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에 이 생명을 맛본 경험이 없는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확실히 영접하여서 참 생명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바울의 에베소 말씀 사역

 

사도 바울이 온 에베소는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데, 우리 가운데에도 거기에 가본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상 바로 이 에베소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시작이 됩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8)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이 관례에 따라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갑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3개월 동안이나 말씀을 전합니다. 에베소 회당이 3개월이나 시간을 준 것을 보면,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개월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같지만, 요즘과 같은 대학교 학기제로 보면, 집중적인 인텐시브 코스(intensive course)로 유대인과 또 함께 온 경건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증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9-10)

 

에베소에서 진행된 사도 바울의 말씀 사역은 3개월 동안 열심히 했지만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반응이 안 좋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듣는 이들의 심령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본문에 마음이 굳어져서 순종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처음에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들 앞에서 이 도를 비방했습니다. 점점 더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굳었는데,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가다가, 아예 훼방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굳어졌다라는 표현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과,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할 때의 그 완악함입니다. 복음서들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그 중 길 가는 뿌리자마자 새가 먹어버리는 땅인데, 사람들이 밟아 굳어진 밭 사이의 길이었습니다. 말씀이 뿌리내릴 새도 없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즉시 빼앗아 가는 땅입니다. 에베소 회당의 사람들은 바로 그 길 가와 같은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았고, 거부했고, 훼방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웁니다.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한국의 유명한 출판사가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회당에서 3개월, 두란노 서원에서 2년을 사역했는데, 전체적으로는 3년 동안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스스로도 20장에 가면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나중에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합니다(20:31-32).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문 것은, 자신의 전도여행들을 통틀어 한 도시에서 가장 오래 머문 기간이었습니다. 에베소 다음으로 사도 바울이 오래 머물렀던 곳은 고린도로, 16개월을 머물렀습니다. 에베소에서 3년의 시간 동안을 그냥 보면 사도 바울의 사역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되지만, 뜻밖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오래 머물러야 했던 이유는 방해와 훼방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로 이 에베소에서 써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이때 바울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지금 나는,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러서 여러분을 만나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얼마 동안 여러분과 함께 머무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나에게 큰 문이 활짝 열려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방해를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고전 16:7-9, 새번역)

 

이것이 바로 그 당시 바울의 마음입니다. 뜻밖에 에베소는 처음에는 괜찮다가 점점 더 사도 바울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고린도보다 더 지독하고 강렬하게 그를 반대하고 죽이려는 계획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에 이렇게 오래 머물렀겠습니까?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큰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에 자기가 더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반대하는 자도 많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왕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아데미(Artemis) 여신을 섬기는 엄청난 신전이 에베소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저번에 말한 아테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보다 훨씬 더 큰 신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수천 명의 성전 창기들,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 거기에 빌붙어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방 종교에 우상숭배, 또 갖가지 마술과 주술과 사술 같은 것들이 막 엉켜 있는 곳이 아데미 신전이었고,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에베소였습니다. 그러니까 경제도 바로 이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큰 신전이 있으니까 돈이 많이 들어오고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전체를 쥐고 흔들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곳이 아데미 신전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가장 분하고 안타까웠던 것은, 이보다 더한 타락은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망가진,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거짓 철학자와 우상숭배자와 거짓 교사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못지않게 타락한 도시가 에베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선교를 영적으로 거대한 사탄의 세력과 하나님 나라와의 대결인 영적 전쟁의 구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편지에는 사도 바울이 영적 전쟁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데, 에베소서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며 그래서 영적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회당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웠는데, ‘따로 세운 제자들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던 바울이 잠시 방문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 그들을 위해 바울이 에베소에 남겨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여 에베소를 다시 온 바울을 통해 새롭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 에베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에는 이미 주님을 영접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힘을 합쳐, 회당에서 자신을 배척한 복음의 방해자들과 맞서지 않았습니다. 그런 복음의 방해자들을 떠나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따로세워 제자를 만들었습니다. 따로 세워서 말씀으로 집중 제자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새롭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날마다 강론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바울은 2년 동안이나 그렇게 했다고 나옵니다.

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렇게 사역을 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서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스콜레인데, 바로 이 단어에서 학교를 뜻하는 영어 스쿨(school)’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학교가 아니라, 토론이나 논쟁도 벌어지고, 강연도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와서 여가를 즐기기도 하는 다목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도서관 유적이 남아 있는데, 바로 거기가 두란노 서원이 아니었나 추정되는 곳입니다.

 

고대 로마제국에는 바로 이런 스콜레가 여기저기 도시마다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울이 2년 동안 날마다 예배와 말씀 공부를 위해서 같은 서원(스콜레)을 계속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계속 한군데를 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 언급된 두란노 서원에서 두란노라는 것이 튀란노스(Tyrannus)’라는 말인데, ‘압제자, 독재자라는 뜻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별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에베소에 살고 있는 튀란노스라는 사람의 스콜레였습니다. 베자 사본(Codex Bezae)에 의하면, 오전에는 주인인 튀란노스가 자신의 스콜레를 사용했기 때문에,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튀란노스가 사용하지 않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의 스콜레를 이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왜 하필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인가? 지금도 터키나 중동 지역에 가보시면 11시부터 4시까지가 아주 덥습니다. 그래서 날씨가 무더운 그 지역에서 사람들은 일을 멈추고 점심식사를 한 다음에 소위 시에스타(siesta)’라고 하는 낮잠을 자는 시간인 겁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없는데, 보니까 11시부터 4시가 빕니다. 사람들이 자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는 동안, 그 시간에 비어 있는 튀란노스의 스콜레에서 날마다 모여 바울이 말씀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공부한 것입니다.

 

무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것은, 자연환경에 자신의 신체 리듬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밤에는 잘 안 자도 낮에는 꼭 잡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도 그곳의 무더운 기후 속에서 자신의 신체 리듬을 맞추며 살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이들도 자야 하는 겁니다. 자기들도 자야 하는데 육체를 위해 낮잠을 자기보다는, 그 시간을 활용해서 그 시간에 비어 있는 튀란노스의 스콜레에서 날마다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이런 헌신, 그리고 몸이 쉬는 것을 희생해가면서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에, 나중에 11절 이후에 보시면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이 에베소에 일어납니다. 그냥 갑자기, 괜히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이런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구별하여 따로 세워서 열심히 말씀을 공부했는데, 이들이 어디 산속 수도원에 가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 또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던 당시의 에베소는 대표적인 우상의 도시이며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타락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세상 사람들과 자신들을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구별하여 따로 세움으로써, 남들이 다 자는 그 시간에 헌신하고 희생하여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도리어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주님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 시대 교회의 최대 문제가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 교인들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남습니다. 요즘은 희생, 헌신이라고 하면 아이, 그런 거 말고라고 하며 편안한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우리도 의자가 얼마나 푹신하고 편안합니까? 그런데 교회마다 어떻게든 편안하고 안락하게 시설을 갖춰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흔한 말 중에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땀을 흘리지 않으면 결실하지 못하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땀 흘리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는 게 없고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 믿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면, 아무리 우리가 수십 년을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해도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 원어가 에클레시아(ekklesia)’입니다. 이것은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밖으로를 뜻을 가진 에크(ek)’부르다라는 의미의 칼레오(kale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 밖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동시에 세상 밖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로 유명해진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은 그 전에 <목적이 이끄는 교회(The Purpose Driven Church)>를 썼는데, 거기서 굉장히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seating capacity(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예배당에 앉아 예배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sending capacity(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제자답게 사느냐, 세상의 선교사답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거기에 교회의 건강이 달려 있다.’라고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회의를 다녀보고 해도, 수많은 교회들은 seating capacity(얼마나 많이 모이고 있느냐)에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가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왜 우리를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우리를 불러내셨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따라가는 그 길로 가는 게 아니라, 그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가게 된다면, 우리도 결국은 공동묘지에 묻히고 끝나는, 그 이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는 멸망으로 가는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한 사람들, 주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는 뭐 하다 왔니?’ 하고 물으실 때 대답할 말이 준비되어 있으십니까? ‘저는 그냥 편안~~하게 살다 왔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드디어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에 온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려 하시는데 닦아주실 눈물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데, 혼자서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바로 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구별하여 세상 밖으로 불러주신 주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시고, 벌써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시고, 그러한 우리를 이렇게 하나로 묶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얼마든지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로서, 정말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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