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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3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3 ✦
“에베소에서 발생한 폭동”
(사도행전 19장 23~41절)
[들어가는 말]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인가 찾아보니까 2001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화제의 영상’이라고 하며 한국 뉴스에도 나왔는데, 뉴질랜드의 한 광고 영상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서로 폭력을 행사하며, 밀치고 당기고 멱살 잡고 붙들고, 상대방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밀고 당기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딘가 했더니 두 군데였습니다. 하나는 대만의 국회였고 또 하나는 한국의 국회였습니다.
그런데 대만과 한국의 국회에서 싸우는 장면이 뉴질랜드의 뉴스가 아니라 광고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광고인가 봤더니 ‘와이셔츠 광고’였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나오고 현장음인 욕설과 고성만 나오다가 화면에 “2 for $50”라고 나오면서 ‘우리 셔츠는 이렇게 튼튼합니다. 저렇게 밀고 당겨도 절대 찢어지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였습니다.
그때 그렇게 서로를 죽일 듯 싸우며 난장법석을 떤 그 국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도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많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계속 잘 가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싸웠으면 끝장이 났을 법도 한데, 아직도 건재하고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싸우던 분들이 본인들이 받는 돈을 올리는 데에는 아주 하나가 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그렇게 싸웠으면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 때문에 피 터지게 싸웠을 텐데, 왜 그렇게 싸웠는지 아무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싸웠으면 뭔가 역사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서로 밀고 당기고 폭력을 쓰며 싸웠습니까? 자기 당이 원하는 것을 통과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쪽은 통과시키려고 하고 다른 쪽은 막으려고 하면서, 국민의 이익이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당이 원하는 방향대로 되기를 원했던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폭력 사태였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난리를 치고도 나라와 국민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상처와 씁쓸함만 남기고 세계적인 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때 뉴질랜드 한국 대사관에서 한국의 국격을 떨어뜨린다고 하며 광고를 중단하는 소송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 기각되었습니다. 이미 뉴스에 다 보도가 되어 새로울 게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엄청나 보이고 거대해 보이고 대단한 소동처럼 보여도, 그 결말은 아무것도 아니며 허무한 것이 됩니다. 바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1. 폭동의 발단: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1) 아데미 여신과 신전이 지배하던 에베소
19장 8절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를 다시 찾고는 ‘석 달 동안’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19장 10절을 보면 그 후 ‘두 해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장 31절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체류한 기간이 총 ‘삼 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고 나서(22) “얼마 동안” 에베소에 더 머물러 있었는데, 그 기간이 약 9개월 정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와 아시아의 각 지역에 조금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3절)
바로 그 즈음에 에베소에 “적지 않은 소동”, 즉 아주 큰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한 “도”, 즉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4절)
그 당시 에베소에는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네 배나 큰 엄청난 신전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데미 신전이 없어졌습니다. 당시에는 5월 한 달 동안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신을 숭상하는 제사가 열렸습니다.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로마제국 식민지 국가에 해당하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아데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한 달 내내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아데미 신은 건강과 풍요를 주는 여신이었고, 그래서 아데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여신을 숭배할 때 건강과 다산과 물질적 풍요가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아르테미스(Artemis)를 가리킵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로 ‘달의 신’과 ‘수렵의 신’으로 일컬어지던 아데미는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애나(Diana)’입니다.
아데미가 에베소에서 태어났다고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에베소에 아데미 신전이 세워지고 이 신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것들을 숭배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로마의 정신과, 부와 건강을 약속하는 아데미 여신은 서로 아주 잘 조화가 되어 에베소에서 아주 크게 융성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매년 5월이 되면 아데미 신전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는데, 그래서 에베소에는 무려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지역 경제도 아데미 여신 숭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에베소 시민들이 매일 와서 신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그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이 기념품을 팔았습니다. 발달된 세공 기술을 이용해서 아데미 신의 모양을 축소한, 은으로 된 조형물을 만들었는데, 건강과 부를 상징한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 머릿수대로 이 조형물을 사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납골당에 안치하듯이 자기들의 함이 있고 벽에 구멍을 파서 그곳에 안치해놓거나, 두세 개씩 사서 집안에 분향소를 차리듯 제단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건강과 부를 위해 집에서 빌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데미 신상과 또 연관된 기념품을 파는 일은 엄청난 사업이고 대단한 돈벌이였습니다.
신전 안에 은행도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에베소 경제에 대한 아데미 신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둬들이는 엄청난 돈을 관리할 수가 없어서 은행을 설립하고 고리대금 방식으로 서민들을 착취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건강과 부를 준다는 눈앞의 사실에 눈이 멀어서 이런 거짓된 우상 숭배에 다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아데미가 무슨 건강과 풍요를 주었겠습니까?
2) 폭동의 진짜 원인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장사가 잘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3년이나 있으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진짜 신이 아니다!’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선포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이 여기에 3년이나 머물러 있었고, 또 오늘 이런 사건 때문에 바울이 나중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인 에베소서에서 다른 편지에는 쓰지 않은 영적전쟁 이야기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5-26절)
여기 나오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은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상인조합의 회장쯤 되는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신전과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을 충동질합니다. 여기 보면 ‘영업하는 사람들’ 즉 상인들이 있고, 그 밑에서 이것을 만드는 ‘직공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의 말에서 바울이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26)는 것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동업자들에게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26)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 선포를 어디 숨어서 비밀리에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아데미 여신상과 신전 모형 제작 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서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아데미 신전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에베소입니다. 아데미 신전과 여신 숭배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고 정치와 모든 것이 맞물려 있는 에베소가 아닙니까? 바울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바울도 그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아데미 여신상은 금속이나 돌덩이에 불과하며 신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게 되면, 아데미 여신과 신전 때문에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너무나 분명한 일이 아닙니까? 폭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의 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우상의 어둠에 눈먼 에베소 사람들의 눈을 밝혀 줄 수 있는 빛의 도였기 때문입니다. ‘이 도’를 전했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의 진정한 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소동들을 보십시오. 폭력 사태가 일어나거나, 엄청난 시위가 일어나거나 할 때, 대부분의 소동은 탐욕이라는 우상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탐욕이라는 우상숭배 앞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눈이 멀고, 심지어 돈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자매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서 싸우고 법정 다툼까지 벌이는 일들을 심심치 않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 소동이 돈 때문에, 아니 사실은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며, 그것은 결단코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도를 따른다는 것, 정말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탐욕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던 우리가 변화되어 세상의 어둠과 거짓의 노예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소동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바른 태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선포하면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나오고 자기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아데미 신전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그러한 선포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7절)
데메드리오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 때문에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 것이다.’라고 동업자들을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이 말만 따로 보면, 데메드리오가 진심으로 아데미 여신을 위하고 신전을 걱정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명분이었을 뿐입니다. 자기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데메드리오의 본심은 앞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본심은, 바울 때문에 자신들의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못 벌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25절을 다시 보면 그의 진짜 마음이 확실히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데메드리오가 말한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라는 것은, 그 동안 아데미 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팔아오며 자신들이 누려오던 그 ‘풍족한 생활’이 위협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데메드리오의 본심입니다.
사실 바울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이들의 수업이 조금 떨어졌다고 해도 자기들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과장하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데미 여신의 명예나 위엄이 아니라, 자기들의 ‘풍족한 생활’을 보장해주던 자신들의 사업이 축소될 위험을 가장 염려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족한 생활’로 번역된 헬라어가 ‘부’와 ‘번영’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죽음 이후를 책임져줄 수 없는 풍족한 생활(부와 번영)을 위해, 자신들을 영원히 살려주실 수 있는 주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풍족한 생활의 근원으로 떠받들던 아데미 신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로부터 200년 정도 후에 철저하게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부와 번영이라는 우상을 섬기던 그들 또한 2천 년 전 에베소의 흙먼지로 허망하게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삶의 목적으로 섬기던 풍족한 생활, 부와 번영이라는 우상에게는, 그들의 호흡이 멎는 순간 그들의 생명을 살려줄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 넓은 문과 좁은 문 사이에서의 선택
그런데 돈이라는 것이 이 시대에도 최대의 우상입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머니(돈)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삶에서 돈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풍족한 생활이 인간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풍족한 생활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누리며 사치하고 화려한 생활을 말합니다. 돈을 조금 덜 벌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 풍족한 생활에 대한 탐욕이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겉으로 여러 가지 좋은 명분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 하나님의 은혜, 사랑 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는 있는데, 실제로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주님께서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정말로 주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실까, 아니면 혹시라도 풍족한 생활, 부와 번영, 사치와 화려한 생활에 대한 탐욕이 그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을까, 참 두려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풍족한 생활처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는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리 크고 아름답고 대단해 보이더라도, 아데미 여신상처럼 모양은 있지만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없습니다. 아데미 여신이 가슴이 24개나 달린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기를 낳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눈과 귀의 모양만 있지, 진짜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어그러진 인간의 삶을 새롭게 빚어줄 수 있는 창조력도 아데미 여신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 크고 많고 아름다운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화려한 삶과 풍족한 생활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그렇게 하면 할수록 눈과 귀가 더 막히게 되고 자만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멸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마저 우상으로 섬기던 ‘풍족한 생활’, 부와 번영, 결국은 멸망으로 끝날 그 길을 삶의 목적으로 선택하고 나가는 것을 가리켜 “넓은 문”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우리 앞에는 항상 두 문이 열려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생활에 이 두 가지 문 사이에서 결정하도록 우리 앞에 항상 이 두 문이 열려 있습니다. 한쪽 문은 눈에 보이는 풍족한 생활, 부와 번영과 화려하고 사치한 삶을 우상으로 섬기는 멸망의 ‘넓은 문’이고, 또 다른 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삼고 나아가는 ‘좁은 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삼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결정을 하며 나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매일매일 어느 쪽 문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는 내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로봇처럼 우리를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당연히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하고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결국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넓은 문은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좁은 문은 결국은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직접 보여주셨고,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와 사도행전을 통해 바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길을 걸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2. 폭동의 과정: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1) 점점 위험해지는 소요 사태
데메드리오에게 선동당한 에베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28-29절)
데메드리오에게 아주 간단하게 선동당한 에베소의 은 세공장이들은 분노에 차서 아데미 여신의 이름을 연호합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고 계속 외치며 가는 겁니다. 그렇게 막 외치면서 바울을 잡자고 나가다가, 바울을 발견하지 못하고 바울 대신 그의 동역자인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그들을 붙들고 야외극장으로 끌고 갑니다. 일종의 즉석 인민재판을 벌이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아데미를 빙자한 거짓 명분으로 내세워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군중이 폭도로 돌변한 것입니다. 폭력을 쓰고 있습니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격분한 직공들은 거리로 뛰어들어 아데미를 외쳤는데, 원문을 보면 길로 뛰어나와 외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의 주요 통로였던 아카디안 대로(Arcardian Way)입니다. 아카디안 대로는 폭이 11미터 정도 되고,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가로수가 늘어서 있었고, 도로 양편에는 에베소 최고의 상점들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상가’를 뜻하는 ‘아케이드(arcade)’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에베소에는 아카디안 대로의 일부가 옛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아데미의 이름을 외치면서 바울을 붙잡기 위해 아카디안 대로로 쏟아져 나왔는데, 그 대로는 상가가 밀집한 에베소의 중심 대로인데다, 또 원근각처에서 온 아데미 참배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인파로 가득한 길이었습니다. 그 인파 속에서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발견한 은 직공들은, 그 두 사람을 무력으로 붙들고 아카디안 대로를 따라 야외극장으로 끌고 간 겁니다. 에베소의 중심부인 아카디안 대로에서 난리가 난 것입니다.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0절)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지금 폭도들에게 붙잡혀 야외극장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바울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자기 때문에 동역자들이 끌려갔다는데 가만히 있을 바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즉각 폭도들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간 야외극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에베소의 제자들이 바울을 말립니다. 바울은 들어가겠다고 하고, 제자들은 계속 그를 말린 것입니다. 여기 ‘말리고’라는 단어는 그들이 계속 말렸다는 뜻입니다.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1절)
‘아시아 관리’라고 되어 있는 사람들은 지도자들로서, 아시아 주 의회의 저명한 일원들이었습니다. 특히 그 의회의 연례 의장들과 전 의장들, 또는 그 도시를 위해 일하는 도시의 대의원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또 다른 뜻도 있는데, 이들이 주 의회에서 임명한 대제사장의 관리 하에 있었던 여러 황제 숭배 신전들의 관리자들내지 제관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어쨌든 높은 위치에 있던 종교관리들 또는 행정관리들이었습니다.
그런 높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과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 중에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야외극장의 폭도들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소식을 보내왔고, 그들의 말을 듣고서야 바울은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2) 엄청난 것 같으나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야외극장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2절)
지금 원형 그대로 발굴되어 있는 에베소의 야외극장은 약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극장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보통 도시들이 그 도시 인구의 1/10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야외극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당시 에베소 인구가 약 25만 명 정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야외집회 장소가 여러 군데 있었는데,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무력으로 붙들어서 끌고 간 장소가 2만 5천 명이 들어가는 야외극장이었다는 것은, 그때 모였던 사람들이 그 정도 숫자였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고 외치며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군중심리에 이끌려서 함께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고, 그 함성 소리에 더 많은 인파가 합세하며 몰려들었고, 야외극장으로 몰려들면서 그들이 외치는 함성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는 겁니다.
그런데 모여서 외치다 보니까 내용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이 사람은 이 말을 하고 저 사람은 저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크다 에베소여!’ 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아데미여!’ 하고 있고, 조금씩 다른 겁니다.
여기 ‘태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굉장히 ‘많은 수’를 의미합니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2만 5천 명이 들어가는 야외극장에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서 엄청난 함성을 질러대니까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다 같이 ‘와’ 하고 소리를 질러도 아주 클 텐데, 2만 명이 소리를 지르면 굉장히 큰 소리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평소에 화가 나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 합세해서 화풀이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마음이 심란한데 와서 소리를 지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한심한 상황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32절에서 “이 사람들이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알다’로 번역된 원래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보다’입니다. 보니까 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야외극장에 모여 소리를 질러 댄 군중들은 자기들이 왜 여기 모여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내가 왜 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가? 이게 뭔가?’
그러니까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보지 못하는 시각적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이 상황이 뭔지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눈으로 다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모여 소리를 지르는 것도 다 봅니다. 그러나 진짜 뭔지를 정말로 보고 있지는 못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이사야 같은 곳을 보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한다.’는 표현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분명히 보긴 보는데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눈을 하나만 주신 것도 아니고 두 개나 주셨는데, 하나님이 주신 두 눈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잘 보면서 ‘아,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인도해주고 계시는구나.’라며 영적으로 잘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뭔지 잘 깨닫지도 못하고 그냥 세상의 선동에 휩쓸려서 남들이 가는대로 그냥 따라가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만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3-34절)
에베소 사람들도 로마제국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을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유대인들 가운데 야외극장으로 몰려 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은 세공업자들이거나 혹은 은 세공업자들에게 은과 구리를 판매하는 상인들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가 불러 모은 동업자들 속에 유대인들도 끼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야외극장으로 끌고 갈 때 이 유대인들이 어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바울과 같이 있던 사람들이다.’ 하고 지목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붙잡아 끌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은 에베소 야외극장에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일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모여 있는 군중들을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왜 여기 모여 있는지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인지도 모르고 소리만 지르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말만 떠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유대인들이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도 유대인이었지만, 그들을 끌고 오는 데 도움을 준 유대인들이 볼 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같은 유대인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입니다. 바울과 함께 하며 자기들이 싫어하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크리스천들입니다. 이 유대인들도 그런 돈벌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자기들의 풍족한 생활을 위협하는 나사렛 이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르고 야외극장에 모인 사람들이 은 직공들에게 끌려온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보니까 그들의 외모는 자기들이 꺼려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유대인들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와 같은 패로 몰려서 자기들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중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내세워 군중들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하고 이 소요사태가 자기들에게 해를 미치지 않도록 방지하려고 나선 겁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굳이 나올 필요가 없는데 나와 있습니다. 그냥 ‘한 사람을 내세워’라고 하면 되는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알렉산더라는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콕 집어서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나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자신이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쓴 디모데후서입니다. 그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서 자신을 괴롭힌 인물 중에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과 오늘 본문의 알렉산더가 동일인물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렉산더를 억지로 내세우면서까지 군중 앞에서 해명하도록 한 것은, 그만큼 자기들까지 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컸고, 또 알렉산더가 굉장히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외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외모와 옷차림을 볼 때 그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계속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두 시간을 외치면서 데모를 한 겁니다. 이것도 참 놀라운 장면입니다. 영화로 찍으면 굉장한 장면일 것입니다.
3. 폭동의 종료: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1) 폭동의 허무한 결말
바로 그때 에베소의 서기장이 야외극장에 나타납니다.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5-36절)
이 “서기장”은 총독을 보좌하여 법령을 입안하고, 각종 기금을 관리하며, 또 여러 집회들을 관장하는 ‘행정관리’를 의미합니다. 그는 많은 무장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35절에서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라고 말하는 것이 뭔가 하면, 당시 에베소에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제우스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신이라고 하며 아데미 신전에 모셔 두고 아데미 여신과 함께 섬겼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들은 에베소가 아데미 신전의 신전지기라는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노련한 이 행정관리는 먼저 에베소 사람들의 그 자부심을 추켜 세워줍니다. ‘그것은 다 안다. 누가 그것을 모르겠느냐?’ 그리고 야외극장에서 무려 두 시간이나 아데미 여신을 소리친 군중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전지기의 자부심에 걸맞게 행동할 것을 주문합니다.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37-41절)
이 시의 서기장은 분명히 아주 지혜롭고 대중 통제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35절부터 40절 사이에서 네 가지 사항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로, ‘누구나 에베소가 아데미 신당과 신상을 모신 수호자임을 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아데미 숭배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합니다(35-36).
둘째로, ‘이 사람들 즉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신성한 것을 더럽히지 않았다. 즉 신전을 약탈한 사람들이 아니다. 신성모독, 즉 아데미 여신을 욕한 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37).
셋째로,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에게 ‘너희들은 법적 절차들을 잘 알고 있다. 만일 그들에게 개인적인 불만이 있다면 지방 총독이 여는 재판에 소송을 신청하라. 더구나 그 소송 사건이 공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합법적인 의회(민회)에 조회시켜야 한다.’라고 합니다(38-39). ‘합법적 의회’라는 말은 ‘데모스’(dēmos) 또는 시 의회의 한 달에 세 번 정기적으로 모이는 공식 모임을 나타내는 정확한 전문용어입니다. 그것을 누가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굉장히 박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로, 에베소 시민들 자신이 소요죄로 문책 받을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기들이 왜 그랬는지 자신들의 행위를 해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40).
야외극장에 몰려든 군중 대부분은 자기들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를 모르고 그냥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장은 이 소요 사태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 행정관은 세공장이들로 인해 일어난 야외극장의 소요사태(폭동)를 ‘불법 집회’라고 결론적으로 판정합니다. 그리고 그 모임을 흩어지게 만듭니다(41).
영문도 모른 채 야외극장으로 몰려가 소리만 지르던 군중들이, 서기장의 설명을 들어보니까 자기들의 집회가 불법이라고 하고 그래서 자기에게 해가 될 것 같으니까 빨리 흩어지고 맙니다. 더 이상 거기 있으면 안 됩니다. 괜히 있다가 잡히면 자기만 곤란하니까,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던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방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허무한 결말입니까?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이것이 보통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서 나온 소동의 허무한 결말입니다.
2) 주님의 진정한 교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정확히 구별이 안 되어 있는데, 39절에서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라고 합니다. 교회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가 ‘엑클레시아(ekklesia)’입니다. 그런데 여기 ‘민회’도 ‘엑클레시아’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민회’는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던 시의회로서, 도시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행정적, 사법적으로 논의하는 ‘엑클레시아’였습니다.
또 41절에서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에서 ‘그 모임’ 역시 헬라어 원문로 ‘엑클레시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엑클레시아’는 은 직공들과 데메드리오와 영업하는 사람들과 또 그들을 따라가 야외극장에서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기가 왜 여기 와 있는지도 알지 못하던 모든 군중을 포함한 모임(엑클레시아)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엑클레시아’가 있습니다. 여기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바울과, 그를 만류한 제자들과, 에베소의 성도들과,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포함한 주님의 진정한 교회인 ‘엑클레시아’입니다.
‘엑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밖으로’라는 뜻의 ‘에크’와 ‘부르다’라는 뜻의 동사 ‘칼레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원래는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교회라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것이 교회, ‘엑클레시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은 이 예배당 안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흩어진 이후 우리 삶 속에서 판가름 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지금 예배를 드리고 일상의 삶으로 흩어진 다음에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소요를 일으키는 일에만 부름 받는다면, 우리의 엑클레시아는 그저 그런 ‘모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판단하고 저렇게 판단하는 것만 하고 있다면 ‘민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엑클레시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예배당에서 지금 예배를 드리고 일상의 삶으로 각자 흩어져,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에 우리를 불러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매순간 주님이 원하시는 좁은 길을 선택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주님의 교회를 이루었던 제자들처럼,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처럼,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진정한 교회, 진정한 ‘엑클레시아’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매주일 예배당으로 부르셔서 예배하게 하는 것도 우리를 예배당 안에 묶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영적 에너지를 채워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일주일 동안 이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주님의 진정한 교회(엑클레시아)로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의 그 은혜를 의지하며, 우리 일상의 삶을 이 어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는 주님의 참된 교회로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