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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28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7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5~11)

 

1.   바울 시대의 고린도로 여행해본다면

 

우리가 2천 년 전 1세기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을 한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에 다양성의 상징인 한 도시가 있습니다. 도시 서쪽에는 로마 사람들이 살고, 동쪽에는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내 한복판에는 토박이 그리스(헬라) 사람들이 터를 잡고 있었습니다. 지역마다 고유한 문화적 특성과 자기들만의 관습과 언어가 있었는데, 동쪽 지역의 경우에는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도시가 사도 바울이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고린도였습니다. 이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 엄청난 어려움들이 굉장히 많았고, 사도 바울에게 끊임없이 골칫거리를 안겨주었던, 아주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사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 중에 이 고린도 교회 때문에 바울이 굉장히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에 왜 그렇게 문제가 많았는지를 알려면 그 도시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두 주 전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는 바다와 바다 사이에 자리 잡은 이른바 지협(바다가 양쪽을 파고들어 잘록해진 지형)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시면 고린도의 사진과 지도가 많이 나옵니다. 그 고린도 양편의 바다를 직선으로 연결하면 5마일 정도도 안 됩니다. 그 좁은 땅 사이에 세워진 도시가 바로 고린도입니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있는 에게 해와 맞닿은 동쪽에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고,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 해와 마주한 서쪽은 레케움(Lechaeum) 항구가 있었습니다. 그 사이가 바로 남부 그리스의 중심도시이자 아가야 주의 수도인 고린도였습니다.

 

날마다 서쪽에서 수많은 배들이 레케움에 들어왔는데, 이탈리아 브룬디시움(Brundisium: 지금의 브린디시 Brindisi)에서 떠났던 배들이었습니다. 동쪽에서 오는 배들은 겐그레아에 닻을 내렸습니다. 두 항구 사이에 있는 도시 고린도에 시장이 발달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온갖 상품과 물자와 문화가 고린도에 들어왔고, 하루 24시간 동안 거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불야성을 이루었습니다. 성 안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말 그대로 동방과 서방이라는 두 세계가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이 고린도였습니다.

 

이처럼 뜨거운 분위기에는 레케움과 겐그레아를 잇는 트롤리(수레)도 단단히 한몫했습니다. 노예들이 육지에 깔린 선로인 디올코스(Diolkos)를 따라 배를 끌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운하를 팠습니다. 그것이 1893년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운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땅 위로 배를 올려 수레로 끌었습니다. 아드리아 해(레케움)에서 에게 해(겐그레아), 또 그 반대로 배를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는 커다란 상선들이 육지 위를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 세계에 하나뿐인 도시였을 것입니다. 다소 원시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위험천만한 말레아 곶(Cape of Malea)을 지나는 것보다 훨씬 안전했습니다. 시간도 최소 3일 이상 절약되었으니까, 동쪽과 서쪽을 잇는 배들이 이리로 다녔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발전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린도가 혼란스럽고 방탕하다는 소문은 세상 곳곳에서 다 알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고팔다보니까 속고 속이는 사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또 얼마나 다툼이 많았겠습니까? 그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분쟁과 소송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그처럼 온갖 언어와 문화와 인종이 뒤섞여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양쪽 항구로 들어온 배가 부두에 내린 짐은 대부분 고린도로 들어갔는데, 배를 옮기는 노예들을 사납게 몰아쳐 가며 내지르는 고함 소리와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맞아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늘 들렸습니다. 물주들은 그렇게 노예들을 사납게 몰아쳐 가며 배를 육지로 끌어올렸다가 다시 바다로 보냈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수레에 이런 저런 물건을 가득 싣고 고린도 성 안팎으로 나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때로는 나귀가 날랐고 때로는 노예들이 짐차를 끌었습니다.

 

고린도 시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갖가지 언어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아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주로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이집트어가 많이 들렸고, 그 밖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관광지에 가보시면 여러 언어들이 많이 들리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언어들이 뒤섞여 있던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그래서 상인들마저도 통역을 세우고 물건을 팔았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손님들이나 상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온 그리스를 통틀어 빼어난 건축물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옛날 공부하신 것이 생각나실지 모르겠지만, 도리아 식, 이오니아 식, 고린도 식 건축양식이 있는데, 그 고린도가 바로 이 고린도입니다. 아고라(시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지만, 그 복잡한 시장 뒤에는 아주 가난한 극빈층이 모여 사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앞에는 화려한데 뒷골목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듯이, 당시 고린도는 더 심했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고라(시장)에서 잠을 잤는데, 돌이 깔린 길바닥에 그냥 눕기도 하고 남의 집 문간이나 들판에 나가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집이라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신세들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추우니까 곳곳에 피워 놓은 조그만 모닥불들은 밤낮없이 타올랐는데, 거지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몸을 녹이고 얼마 안 되는 끼니거리를 덥히는 불이었습니다. 그들이 입은 옷은 옷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으로, 낡은 천 조각을 기워 붙인 누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평생 한 벌로 버티는 단벌인생이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날마다 밤새 숨진 사람들의 시체를 거두어 들녘에서 불태웠습니다. 그 냄새가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대다수가 헐벗고, 병에 걸리고, 굶어서 죽은 극빈층 사람들의 시체였습니다.

 

성 안에 들어서는 나그네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대목은 무려 30-40개씩이나 되는 와인샵(포도주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경입니다. 상점의 주 고객은 며칠 머물고 떠나는 나그네들이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동네가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가 술독에 빠진 도시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잠시 거쳐 가는 장사꾼들과 뱃사람들이 고린도를 성매매의 도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몸 파는 젊은 여성들을 일컬어 로마제국 전역에서 고린도 아가씨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고린도는 성적으로 문란하고 방탕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아폴로 신전, 제우스 신전이 있었고, 곳곳에 헤르메스(Hermes), 헤라클레스(Hercules), 포세이돈(Poseidon), 비너스(Venus), 포르투나(Fortuna), 아테나(Athena) 같은 신들을 위한 사원들이 있었습니다. 시장 서쪽 끝에는 판테온(Pantheon)을 세워서 수없이 많은 신들을 한꺼번에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또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에게 바치는 신전도 있어서, 로마제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광경들도 많았습니다.

 

고린도에는 로마와 아테네 정도를 빼고는 세상 어느 도시보다 많은 우상들과 신에게 바치는 제단이 있어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제물로 올라오는 고기를 다 처리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신관들은 돈을 받고 남아도는 고기들을 규모가 큰 푸줏간에 넘겼고, 그렇게 흘러나온 고기들은 다시 시장으로 팔려나갔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8)를 보면 바울이 이방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고기) 때문에 실족하는 성도들이 나오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다른 편지에는 그런 말이 없는데 고린도전서에 나온다는 것은, 고린도에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도시의 분위기 속에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는 온갖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뒤섞여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 2, 3장에서 바울은 그들이 파를 나눈 것을 굉장히 질책합니다. 그런데 그런 파가 나뉜 배경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파를 나눈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로마 사람들, 유대 사람들, 헬라 사람들이 각각 선호하는 리더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말 많은 문제들이 있었던 교회였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런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도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유지된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같으면 금방 갈라지자고 하며 나뉠 수 있는데, 그래도 그런 교회가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2.   귀한 복음의 열매와 동역자들을 얻은 고린도 사역

 

1)  말씀에 붙잡혀 복음 전파에 집중하는 바울

 

 a)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

 

바로 그런 복잡하고 타락한 도시 고린도에 바울이 왔고, 이제는 실라와 디모데도 옵니다. 바울을 따라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 대륙의 마게도냐 땅으로 건너갔던 실라와 디모데는 함께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현지의 유대인들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해서 바울을 해치려 하자,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베뢰아로 바울 일행을 한밤중에 피신시켰습니다. 그것이 17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접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50마일이나 떨어진 베뢰아까지 원정을 가서 현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해치려 합니다. 그러자 베뢰아 형제들 몇이 바울을 안전한 아가야 땅 아테네까지 직접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급한 와중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그대로 남아 있게 했는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는 빌립보에 두어 돕게 했고, 베뢰아에는 실라와 디모데를 두고 바울은 혼자 아테네로 갔습니다. 금방 믿게 된 그곳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돕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게도냐 땅 베뢰아에서 아가야 땅 아테네까지는 뱃길로 300마일이었는데, 배를 타고 나흘 걸리는 그 길을 배 타고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을 아테네까지 데려다주고 되돌아가는 베뢰아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베뢰아에 도착하는 즉시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아테네로 오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마게도냐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배로 나흘 걸려 베뢰아로 되돌아간 믿음의 형제들로부터 바울의 말을 전해들은 실라와 디모데 역시 또 나흘이 걸려서 아테네로 온 겁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는 유대인들이 여전히 설치고 있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의 상황을 바울에게 보고해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아테네에서 다시 마게도냐로 보냅니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굳게 지켜 주기 위함입니다.

 

그 후 아테네에서 전도 사역을 마친 바울은 혼자 타락의 도시 고린도를 향해 갑니다. 고린도가 타락한 도시이지만, 아주 중요한 도시이며 특히 아가야 주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평생 동역자가 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되고, 마침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주중에는 함께 천막을 만들어 판매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그 집에 머물렀고, 안식일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온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객지를 누비고, 또 복음 때문에 객지에서 서로 흩어졌다가, 복음으로 인해 객지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세 사람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저번에 많은 연구와 더불어 상상력을 동원해서 진 에드워즈가 쓴 <디도의 일기><디모데의 일기>를 읽어보면 바로 이런 장면들이 굉장히 실감나게 나옵니다. 아주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주 감동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5)


여기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전에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바울이 평소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헤어져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내려와 그들과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보고, 17장에서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두고 자기 혼자만 남쪽의 아테네로 갔는데, 그때 베뢰아에 머물던 실라와 디모데가 이때 고린도로 와서 바울과 재회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것이 안 나오지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쓴 고린도후서 119절을 보면, 이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바울에게 보내는 선교헌금을 들고 고린도로 왔습니다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3)를 보아도, 아테네로 일단 실라와 디모데가 베뢰아에서 왔다가, 바울이 아테네에서 다시 실라와 디모데를 저 북쪽 마게도냐로 보냈습니다. 디모데와 실라를 각각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로 보냈고 또 실라는 빌립보까지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을 각각 보내고 혼자 아테네에서 서쪽인 고린도로 왔는데, 북쪽으로 갔던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내려와서 이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을 같이 읽을 때 당시 상황을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그냥 온 게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들이 바울의 선교 사역에 쓰라고 선교헌금을 보낸 것을 받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였든지 상관없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며 스스로 돈을 벌어 복음 사역을 하던 바울에게는 아주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의 사랑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다 이제 금방 믿은 사람들입니다. 빌립보이든 데살로니가이든 베뢰아이든 다 초신자들인데, 정말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에 빚진 마음으로, 또 복음이 전해지기를 강렬히 원하는 마음으로 선교헌금을 바울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바울에게는 굉장한 힘이 되었습니다. 또 자기보다 젊은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합류했으니까, 일을 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 바울이 선교헌금을 받아 돈이 생기고, 또 사람들도 와서 힘이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사로잡히게 되었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지 돈이 생기고 일하는 데 일꾼들이 더 와서 바울이 기뻐하며 더욱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울의 영적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이 주도하는 전도 팀에 있어 어쩌다 얹혀진 단순한 멤버 정도가 아니고, 그들은 바울에게 너무나 귀한 영적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생명을 나누는 형제들이었습니다. 정말 가족이었습니다. 말년의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된 디모데에게 쓴 디모데후서를 죽 읽어보십시오. 이런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읽어보면 느낌이 다릅니다. 1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를 할 때에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그대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대를 만나 봄으로 나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딤후 1:3-4, 새번역)

 

디모데후서는 말년의 바울이 참수당하기 전 로마의 감옥 속에서 이 땅에 남긴 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사형을 눈앞에 둔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기도할 때마다 다른 교회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지만, 특히 자신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했고, 디모데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나에게 오라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디모데를 만나기만 하면 바울에게 언제나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 행복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디모데는 나이 든 바울에게 그 정도로 중요한 영적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그 디모데의 이름과 함께 실라의 이름도 자신의 편지에서 세 번이나 언급합니다. ‘실라라고도 하고 로마식 이름인 실루아노라고도 합니다. 실라 역시 바울에게는 디모데처럼 소중한 영적 동역자였습니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영적인 기쁨이 충만했고, 서로 얼굴만 보아도 영적인 힘과 격려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며, 또 눈빛만으로도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단순한 인간적 친분이 아니라 이런 영적 동역자 관계, 주님 안에서 생명을 나눈 가족의 관계였기 때문에, 고린도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바울은 영적으로 새로운 힘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사로잡혀서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의 이런 관계가 바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영적 동역자의 관계가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들어오실 때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십니까? 교회에 들어올 때 다른 성도들을 보면서 이런 기쁨이 충만한 곳이 교회입니다. 만약 내가 들어오면서 다른 사람을 보았을 때 휙 고개를 돌렸다면 이런 관계가 아닌 겁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장에 오자마자 얼마나 반갑고 좋습니까? 그런데 별로 기쁘지 않고, 눈을 돌리고, 가고 싶지 않다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겁니다.

 

교회는 결코 피상적인 만남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에 우리는 함께 있지만 서로 간에 교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잠깐 예배의 자리에 함께 있다가 끝나면 나가서 테이블 별로 앉아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뒤에 헤어져서, 일주일 동안 서로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따로따로 살다가 또 일주일이 지나 교회에 다시 모이는, 그런 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삶을 나누고 생명까지 나누는, 진정한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주중에 예배로도 함께 모이고 목장으로도 모이고, 또 떨어져 있을 때에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같은 하나님 앞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지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점검해야겠습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적으로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남을 실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살다가 다른 사람에 대해 해를 끼치면 고소를 당하거나 범죄를 저질렀을 때 잡혀서 세상 법정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영적으로 해를 끼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별 문제는 없이 살지만 그저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묶어주신 그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영적인 힘과 격려를 얻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와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바울처럼 나를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사로잡혀 살게 되도록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저 형제자매를 만났기 때문에 힘을 얻게 되고 기쁨이 충만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더욱 복음을 전하는 그런 관계가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처럼 말씀의 증인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 세 사람 각자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우리의 입으로만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과 우리의 삶 전체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b) 유대인들의 대적과 비방에 대한 바울의 자세

 

이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온 때부터 예수님만 그리스도시라고 더욱 밝히 증언했습합니다(5).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6)

 

바울이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만 그리스도이시라고 전할 때,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며 비방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하기 전에도 바울에게 심히 적대적이었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더욱 조직적으로 바울을 괴롭히며 집요하게 배척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적하다’, ‘비방하다라는 단어가 아주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조직적으로 방해하면서 끈질기게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을 더욱 반대하며 괴롭히는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그들 앞에서 옷을 털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게 되면, 그 지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옷과 발에 묻은 이방 지역의 먼지를 다 털어 낸 뒤에 자신들의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방 지역의 부정한 먼지를 그대로 묻혀 오지 않겠다는 일종의 성별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자기 옷의 먼지를 털었다는 것은 유대인의 성별의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똑같은 고린도 땅 아닙니까. 누가복음 95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묶어 전도여행에 보내시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 땅은 저주받은 땅이니까 저주나 받아라.’ 하고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며, 자신을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집요하게 반대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옷의 먼지를 털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겠다.’라는 공개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한 말을 합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라고 합니다. 그냥 보면 은근히 책임을 회피하면서 너희가 다 저주를 받고, 나는 아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이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전한 생명의 복음을 너희가 거부해서 결국 너희들이 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선택한 너희들의 책임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다. 나는 나의 책임을 다했지만 너희들이 거부했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에스겔이라든지 성경 곳곳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 여기 안 믿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충분히 초청도 할 수 있고 기도하며 섬겨서 주님께 나오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습니다. 그럼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지 않은 나의 책임입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주님께로 데려오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섬기기도 하고 복음도 전하고 사랑도 베풀며 열심히 했는데도 끝까지 싫습니다. 나는 안 합니다.’라고 했다면, 최소한 내 책임은 아닙니다. 나는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결국 본인이 그렇게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게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가서 너희는 그냥 심판 받고 저주 받고 지옥에 가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여러분이 거부하니까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는 선언으로 말을 마칩니다. 이제부터 유대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쓴 로마서를 읽어보면, 얼마나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을 향해 절절한 마음을 고백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민족이 꼭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라는 마음이 아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상종도 안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복음을 듣기 원하고 갈급해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후로 바울은 더욱 이방인 사역에 주력하게 됩니다.

 

 

2)  고린도의 새로운 열매들

 

바울이 그렇게 한 결과가 어땠습니까?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7)


유대인 회당에서 배척당하고 옷의 먼지를 턴 바울은, 마침 회당 바로 옆집인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 사람은 하필 회당 옆에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당신의 집 좀 씁시다.’ 하고 무작정 그 집으로 들어갔을 리가 없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배척당한 바울이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은, 집주인인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이 바울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거부를 당하니까 그럼 우리 집에 오셔서 가르쳐주시고 복음을 전해주십시오.’라고 한 겁니다.

 

디도 유스도(새번역: 디디오 유스도 / 영어성경 NIV: Titius Justus)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라틴어 발음은 티티우스 유스투스입니다. 즉 디도 유스도는 로마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유대인도 있고 그리스 사람도 있고 로마 사람도 있고 다른 인종도 많았는데, 로마 사람들 중 하나가 디도 유스도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고 소개합니다. 이런 표현은 당시 이방인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아직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이방인들(God-fearers)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사람은 마침 자기 옆집인 유대인 회당에 다니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유대인 회당을 다니는데 언제부터인가 바울이라는 사람이 회당에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가만히 듣는데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바울을 반대하면서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디도 유스도의 귀에는 복음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한 바울을 자기 집으로 모셔들인 겁니다. 이 얼마나 대조되는 일입니까?

 

이처럼 참된 신앙은 결코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생명의 복음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는가, 즉 믿음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이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회당에서 배척당하고서 잠시 그 집에 들러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동안 유대인 회당을 복음 전도의 중심지로 삼았던 바울이, 이때부터는 디도 유스도의 집을 사역의 장소로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 디도 유스도의 집이 놀랍게도 고린도에서 주님을 위한 첫 번째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8)


놀랍게도 회당장인 그리스보가 자신의 온 가족 친지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보라고 하니까 그리스도와 사촌인가 할 수 있는데 크리스포스(Crispus)라는 이름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만 아니라 자기 가족친지들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회당장이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유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회당장은 자신이 맡은 회당을 책임져야 했고, 또 회당장 간에는 은근히 경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에는 유대인들이 많았는데, 유대인 남자 열 명만 있으면 회당 하나를 세울 수 있었고, 거기에는 유대인 남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회당도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보가 디도 유스도 옆집인 회당의 회당장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른 회당의 회당장인데,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회당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다가 드디어 믿게 되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그리스보라는 사람이 얼마나 오픈된 사람이었고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은 다 이방인들(헬라 사람들)이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믿다라는 동사와 세례 받다라는 동사가 모두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미완료라는 것은 끝나지 않은 동작, 즉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그러니까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이 한두 번 하다가 그친 게 아니라,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계속 이어졌다는 말입니다. 고린도가 당시 로마제국에서 성적으로 가장 타락한 도시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런 역사는 너무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회당 옆집에 있던 디도 유스도의 집이 고린도의 첫 번째 교회가 되었고, 다른 회당의 회당장인 유대인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고린도의 수많은 이방인들이 계속해서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이 저 영원하신 주님, 참된 생명의 강이신 주님으로부터 그 생명수를 받아 이 세상에서 자기도 그 생명수를 흘려주는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생명수를 가지고서 나는 이제 영생을 얻었다.’라고 하며 끝난 게 아니라, 이렇게 핍박이 있어도, 심지어 자기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저 먼 곳까지 가서 생명수를 흘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지금도 계속되는 선교 사역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수를 나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주변에도 흘리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로 응답해주셨습니다.

 

 

3)  주님의 격려에 힘입어 장기화 된 고린도 사역

 

그 후 바울에게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9)

 

여기 잘 보면 세 마디 명령을 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의 순서에 따르면, 첫째 두려워하지 말라’, 둘째 계속 말하라’, 셋째 침묵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시 바울의 상황을 짐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바울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계속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바울이 더 이상 복음을 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 침묵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울이 지금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고린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디도 유스도가 자기 집을 오픈해서 예배당으로 삼아,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통해 심지어 다른 회당의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주님을 믿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어서 세례를 받는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더욱 신이 나서 더 복음을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아니 이렇게 신이 나는 상황에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사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계속 말하라. 침묵하지 말라.’ 주님이 지금 바울의 상황을 잘 모르시고 그런 명령을 주신 게 아닙니다. 너무 잘 아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복음을 전한 곳이 회당인데,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 그리스도(구세주/메시야)이시라고 증언하는 바울을 심히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조직적으로 괴롭히며 집요하게 배척했는데, 지금 유대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났거나, 아니면 고린도에서 계속 복음을 전했어도 그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방해하며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계속 배척을 당하고 있는 바울이 로마 사람인 디도 유스도의 집, 그것도 회당 옆집에 가서 그곳을 예배당으로 삼아 계속 복음을 전하는데, 심지어 다른 회당의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이 와서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또 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는 고린도 사람들이 계속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그 집이 사람들로 계속 미어터지는 겁니다. 그럼 옆집인 회당에서 그것을 볼 때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아무리 괴롭혀도 결과가 더 좋으니까 얼마나 더 화가 나겠습니까? 그럼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이전에 비시디아 안디옥이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들은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 바울을 괴롭히며 아예 고린도에서 쫓아내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면 암살단을 고용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자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1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수법이 통하지 않자 마침내 바울을 고린도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소까지 합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2천 년 전 고린도로 가 옆에서 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낮이면 디도 유스도의 집을 거점 삼아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는 이방인들이 매일 이어집니다. 그 이방인들을 볼 때마다 바울은 속에서 새로운 힘이 더 솟아납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과 똑같이 유대인들의 분노는 더욱더 올라갑니다. 그래서 더 괴롭히고 더 몹쓸 짓을 합니다.

 

똑같은 유대인들로부터 날이 갈수록 더 심한 공격을 당하다 보니까 이제 바울도 지칩니다. 버티는 데도 한계가 옵니다. 해가 저물어 숙소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으로 돌아가니까 정말 힘이 쭉 빠지면서 속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도 악랄하게 자신을 괴롭히던 험상궂은 유대인들이 심지어 너 조심해. 이제 얼마 못 가서 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야.’라고 위협하고 협박하는 말을 떠올리니까 갑자기 두려움이 생깁니다. ‘, 이제 고린도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면 안 되겠구나. 그럼 내가 이제 조용히 있다가 다른 데로 가야지. 주님의 뜻이 다른 데로 가서 하라고 하시나 보다. 침묵해야지.’라고 다짐합니다.

 

이것이 바로 2천 년 전 고린도의 어느 날 밤에 바울이 처해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축 지쳐서 , 이젠 조용히 입 닫고 빨리 떠나서 다른 데로 가야지.’라고 하고 있던 바로 그날 밤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계속 복음을 전하라. 침묵하지 말라.”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1)

 

주님의 뜻은 바울이 1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날 밤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이제 그만 접으려는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계속 말하라. 침묵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바울에게 명령만 하신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명령만 하셨으면, 바울이 다른 곳에 가서도 어느 날 밤 또 다시 두려움 속에 주님의 뜻과는 다른 길로 가기로 결정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하신 다음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0)


주님은 여기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바울아, 내가 너의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침묵하지 말아라. 계속 복음을 전해라. 왜냐하면 너의 주인인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성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데, 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며 또 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그런 말씀을 들은 바울은 ,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며 그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결단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날 밤 잠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스러운 문제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사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도 두려워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그래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확인시켜주심으로써, 주님께서 뜻하신 기간 동안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계속 남아 있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해보겠다고 하다가, 상황이 힘들어지고 여러 사람의 공격을 받고 여기저기서 힘든 일이 생기면 아닌가 보다. 주님의 뜻은 뭔가 다른 데 있나 보다.’ 하고 사역을 접거나, 침묵하거나, 다른 데로 가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계속 하라. 침묵하지 말라.”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내가 그 뜻을 알지 못해서 주님은 1년 반 동안 계속 하기를 원하셨는데 금방 떠나버리는 실수를 한다면 어떡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에는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앞으로도 구원해야 할 주님의 백성이 여전히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이제는 유대인들이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바울을 악랄하게 괴롭히고 끈질기게 죽이려 하고 협박을 하더라도, 바울이 결코 무너지지 않도록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붙들어 주겠다.’라고 하신 약속입니다. ‘비록 지금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든 것을 통해, 너의 헌신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나중에 보면 실제로 그러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 4:8-9, )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괴로워서 이제 그만 해야겠다. 떠나야겠다. 침묵해야 되겠다.’라고 할 그때 나타나신 주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에 회복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의 바탕은 두말할 것 없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하는 것을 그날 밤 고린도에서 재확인받은 바울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때 18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말로도 전했고 삶으로도 전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그 18개월 동안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모두 고린도에서 기록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신약성경의 1/4에 해당하는 바울서신에 의해 기독교 신학의 체계가 확립되었는데,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고린도에서 기록함으로써 타락의 도시 고린도가 오히려 기독교 신학의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게 만든 놀라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뭐가 잘된다고 교만해서는 안 되고, 지금 너무 안 된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신실하게 살고 있기만 하면, 우리가 서로 복음의 동역자로 섬기며 나아가기만 하면, 나머지 결과는 주님께서 책임져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아직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우리가 이 시점을 돌아보면서 깜짝 놀라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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