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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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9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6 ✦
“지시하시는 성령님과 순종하는 빌립”
(사도행전 8장 26~40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영화 하면 영화제인데, 그 중 미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열릴 때면 전 세계의 팬들이 열광합니다. 요즘은 이 나라 저 나라의 영화제들이 하도 많아서 그 의미가 조금 퇴색했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상은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입니다.
시상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등입니다. 한 부문당 5명 정도의 후보가 있지만 오직 한 명만 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하여 당사자와 가족과 친구들 모두 발표할 때까지 긴장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영광과 명예를 주는 상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는 시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시상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님이 “성경을 드라마로 보면 또 다른 시각이 열린다.”라고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성경은 드라마로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같은 책은 드라마적 요소가 곳곳에 보입니다.
사도행전 드라마 시상식을 하게 된다면, 여기에 많은 사도들과 교회에 대한 이야기, 또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누구에게 상을 주겠습니까? 오늘 특별히 “사도행전 8장 26-40절”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우주연상 후보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빌립을 광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계획
1) 이해가 안 가는 명령을 받을 때에도 순종하라
그들 중 가장 첫 번째는 빌립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6절)
빌립에게 주의 사자(천사)가 나타나 갑자기 남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천사라고 봐도 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다고 봐도 되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남쪽으로 가라!”
예루살렘에서 가사(지금의 가자 지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놓았습니다. “그 길을 광야라.” 뜨거운 모래바람과 뜨거운 태양밖에 없어서 숨 쉬고 서 있기도 힘든 곳, 독사와 전갈이 있는 곳, 아무것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8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빌립은 사마리아로 와서 전도했고, 거기에 많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많은 역사와 기적을 일으키며 전도를 하는데 그것을 멈추게 하시고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싱하지 않습니까? 전혀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과도 맞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광야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고, 또 지금 거기에 가도 거기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엄청난 전도의 열매가 일어나고 있고, 기적이 일어나고 있고, 병 고침과 귀신이 쫓겨 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있는 곳에서, 사역을 엄청나게 잘하고 있는 빌립을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보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도 의아했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부흥을 성공시켰으면, 적어도 그보다 더 좋은 대도시로 옮겨주셔야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가라고 하시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할 수도 있고 서운할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가라고도 설명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가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빌립이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바로 광야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빌립이 이때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빌립이 그때 떠나지 않고 ‘하나님, 광야는 아무도 없고,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질질 끌거나, ‘가긴 갈 텐데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내일 가겠습니다.’라고 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귀한 순간을 스스로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타이밍을 놓치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그때가 바로 순종을 해야 되는 타이밍입니다. 내가 혼자 말씀을 읽으며 큐티하거나 통독을 할 때 확 깨달아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때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겠습니까? 지금 그것을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지금 설교를 듣다가도 ‘아, 이게 이거였구나!’ 하고 탁 깨달아지고 마음에 와 닿았다면, 그것을 왜 지금 깨닫게 해주셨겠습니까? 성경을 좀 읽어보면 숨겨 있고 특별한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웬만큼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에 그 말씀이 탁 깨달아졌다면, 그 말씀을 지금 행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가 없어도, 내가 조금 더 안 좋은 데로 가는 것 같고 비효율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뭔가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면 일단은 한 번 순종하고 보십시오. 그곳이 광야라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가라니까 가보았는데, 뜻밖에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뭔가 말씀을 주셨다면, 오늘 뭔가 깨닫게 해주셨다면, 오늘 뭔가 마음에 큰 감동과 은혜를 주셨다면, 은혜 받고 끝나지 마시고 바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말고 즉시 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교회가 쇠퇴한다고는 하지만, 이 시대에 여전히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많은데도 왜 하나님의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영적인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너무 상식적입니다. 사실 상식 이하도 많습니다. 우리가 비상식이나 몰상식하면 안 되겠지만, 상식에만 머무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는 너무나 합리적인 결정만 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광야로 가라”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말인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으니까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라고 하지 않으셨는데 가서 이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턱대로 말이 안 되는 것을 하는 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을 때는 이해가 안 가도 해야 됩니다.
특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때 별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열매도 없는데 계속 하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결정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것, 사람 마음에 흡족한 것, 누가 봐도 좋아 보이는 일, 누가 봐도 결과가 좋은 일에만 투자하려고 합니다.
교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인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효율적인가? 우리의 땀과 수고에 비해서 열매를 얻는 일인가?’ 이런 것만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맞는 일에만 힘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고 그저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결정만 내리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너무 영리하고 계산적이기 때문에 힘든 일은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피하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전혀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상식과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좁은 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넓은 문만 찾고 편한 길만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능력도 없고 삶도 변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계속 주신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주고 계십니다. 이 예배가 끝나고 나가도 계속 주십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끊임없이 잘못된 결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떠나면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해줄 수 없고 이 세상에서만 가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 이 세상을 떠나도 하늘나라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일을 하도록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일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하는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만 하는 결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정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결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제대로 된 결정을 하도록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신데, 우리는 끊임없이 잘못된 결정을 계속 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고집과 경험과 상식과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을 씁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곳으로 가라는 음성이 들릴 때 ‘저 같은 게 뭘 하겠습니까’ 또는 ‘하기 싫습니다’가 아니라, 담대하게 순종을 하는 겁니다. ‘하라고 하셨으니까 도와주시겠지’ 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높다’는 이사야의 말씀(사 55:9)을 정말 믿기 때문입니다.
2)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난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7-28절)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립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갔는데, 사실 빌립이 다 이해하고 갔겠습니까? 의아하지만 가라고 하셨으니까 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수레를 타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시’였고, ‘에디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고위층 관리였고, 요즘 한국으로 치면 재경부 장관내지 금융위원장쯤 되고, 미국으로 치면 연방준비제도 이사회(the Federal Reserve) 의장 정도 되는 아주 높고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스가 돈을 맡기는 사람은 가장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게다가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서 성경을 읽는데, 그것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는 에티오피아 사람이었음에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간다게(Candace)’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나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에티오피아 왕의 칭호였습니다. 빌립이 만난 이 간다게의 신하는 에티오피아의 고위 관리이긴 했지만 내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존재 자체는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마주 대하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라면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이방인이고, 또 에티오피아란 말 자체가 ‘검은 피부’를 의미하는 것처럼 에티오피아 사람은 그 당시 이방인들 중에서도 더 큰 경멸의 대상이었던 흑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에티오피아는 히브리어로 ‘쿠쉬’이고 우리말로는 구스인데, 구스 사람들은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저주받은 함의 후예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내시였는데, 내시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고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고자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으로 간주하여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사람은 빌립이 친절하게 대해줄 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 다시 말해 결코 사람으로 불릴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이 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열두 제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훈련하셨던 것처럼, 이 내시 한 사람을 위해서 사마리아 도시 전체를 섬기던 사역을 잠시 보류하게 하시고 빌립을 광야 길로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는 순례자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방을 향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교회에서 찾아야 할 사람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 제대로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찾아서 주님께로 인도해야겠습니다.
이 사람이 그래도 국가의 고위관리인데, 자기 나라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이런 높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행을 왔고, 그것도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레를 타고 남쪽 광야 길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이 중요했습니다.
사마리아는 더 북쪽의 중부지역이고, 예루살렘은 거기서 남쪽입니다. 수레가 사람 발보다 빠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빌립이 즉시 순종하고 사마리아로부터 광야 길까지 달려올 시간과, 이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그 지점을 통과할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셔서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내시가 떠나기 전부터 성령께서 빌립에게 가라고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타이밍에는 우연이란 게 없습니다. 어쩌다 어디서 갑자기 누구를 만나거나 어디서 전화가 갑자기 온다면,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건물 안에만 머물며 유연함과 민첩함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즉각적인 순종, 민첩함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음성을 들려주셨다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그 음성이 지금 내 삶에서 잘되고 있는 일을 버리고 광야 길로 가라고 하시는 이상한 말씀이라고 해도, 우리는 낙담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길이 축복의 길이 아니라 아주 좁고 힘든 길이라 해도 우리는 순종하며 갈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주 의외의 기회, 아주 축복된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순종하는 전도자 빌립
1)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만남
사마리아에서부터 빌립을 광야로 이끌어 오신 성령께서는, 에디오피아 내시의 행렬을 보며 와 하며 놀라고 있는 빌립을 재촉하십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29-30절)
사실 수레를 따라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하십니다(29). 뛰어서 마차에 따라 붙으라는 것입니다. 이때 그런 성령님의 음성에 대해 빌립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달려갔습니다(30).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을 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왔는데, 또 보니까 가라고 하셔서 가고, 그것도 천천히 간 게 아니라 빨리 뛰어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런 메시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순종을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할 때 혹시 이렇게 기도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음성을 들려주시든지 순종할 각오가 없다면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실 수도 있고 저렇게 하라고 하실 수도 있고 하지 말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뭐라고 말씀하시든 제가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음성만 들려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성이면 따라가고 내가 안 좋아하는 내용이면 안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싫으면서 그 음성은 듣고 싶어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순종하려면 빌립처럼 하는 것입니다. 가라고 하실 때 천천히 마지못해 가는 게 아니라, 즉시 순종하며 빠르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부지런하며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빌립이 광야 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보았을 때 놀랐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피가 반쯤 섞인 사마리아 지역에서 전도하는 것도 빌립으로서는 모험이고 그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이방 나라인 에디오피아 사람, 그것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니까 내심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인종적 선입관을 단번에 뛰어넘으라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빌립을 사용하셨습니다. 빌립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셨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라는 로마사람 백부장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사건이 있는데, 베드로는 사도들 중에도 리더이고 정통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빌립은 헬라지역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는 많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말씀하셨을 때 바로 순종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항상 내가 익숙하고 쉬운 방향으로만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놀라운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에디오피아의 고위관리를 유대 광야에서 만났을 때, 빌립은 ‘이게 정말 놀라운 우연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갔고, 가보니까 거기 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 주님께서 나를 통해 뭔가를 하려고 하시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라고 하셨을 때 즉시 달려서 갔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 놀랍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자기 발로 찾아온 게 아닙니까? 에디오피아까지 가서 전도하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까지 왔다 돌아가는 길입니다.
요즘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는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한다는 것이 굉장히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드는 일이니다. 또 그 나라의 말을 배워야 하고, 문화를 배워야 하고, 적응을 해야 되는 등, 엄청난 시간과 지원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난민이나 이민으로 옵니다. 한국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즘 외국인 대상으로 사역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조금만 돌아보면 많은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땅 끝으로 가야 하는데 땅 끝이 우리에게로 온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2) 우연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1-33절)
전도할 때 첫 번째 접촉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빌립이 내시를 보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냥 가라고 하셔서 간 것입니다. 특히 이런 외국인 고위층 관리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라고 하셔서 가까이 가보니까 너무 놀랍게도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66장이나 되니까 얼마나 깁니까? 그런데 하필 그 중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다룬 부분입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필 이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고, 그것도 이사야를 읽고 있고, 그 중에서도 하필 메시야에 대한 예언 부분을 읽고 있습니까? 정말 너무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더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아, 정말 성령님이 나를 완전히 이끌고 계시구나.’ 하고 더 확신을 가지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합니까?”라고 물어보자, 내시는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말씀을 혼자 읽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영적 스승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을 열어주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잘 안 깨달아지시면 삶 공부도 들으시고 큐티나 개인적인 공부도 해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고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썼습니다(롬 10:17).
내시가 빌립을 보는 순간, 특히 빌립이 “읽는 것을 깨닫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내시는 ‘아, 이 사람은 뭔가를 아는 사람이다.’ 하고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자기 수레 위로 올라오게 초청하여 본격적인 말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 내시는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고위관리였지만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겸손하지 않았다면 ‘네가 뭔데 왜 그래? 빨리 꺼져!’라고 했을 텐데, 아주 평범해 보이는 빌립이었지만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좋은 영적 스승을 만나면 이 내시처럼 적극적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또 빌립의 전도 과정을 보면, 전도는 내가 설득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택하시고 준비해놓으신 사람을 나는 데려오는 것뿐입니다.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저도 어릴 때부터 전도하라고 하면 굉장히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려고 하니까 부담이 되는 겁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내가 가서 전하고, 내가 데려오고, 내가 주님을 믿도록 영접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부담스럽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준비해놓으신 사람을 만나서 주님께로 데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고 오히려 큰 기대가 됩니다. 그러니까 전도할 때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이미 충분히 작업해놓으신 사람에게 가는 겁니다. ‘고구마 전도법’도 있지 않습니까? 찔러서 아직 딱딱하거나 익지 않은 고구마가 아니라 잘 익은 고구마를 찍어서 먹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많이 열린 분들을 모셔 와야 합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멀리 있고, ‘기독교’나 ‘교회’의 ㄱ 자만 나와도 거품을 물고 욕하며 비난하는 사람을 기를 쓰고 전도하려면 힘듭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며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멀리 있는 분들만 모셔오려고 하니 참 힘듭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보면 아주 마음이 열린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업을 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탁 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믿는 경우는 우리가 처음부터 시작해서 믿는 게 아닙니다. 어디선가 다 그렇게 마음이 열려서 오신 분들이 우리가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했을 때 믿는 것입니다.
내시가 읽던 성경구절이 이사야서 53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미리 예언한 말씀입니다. 빌립이 전도하는 이때로부터 무려 7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7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이 말씀을 하필 이때 이 사람이 읽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메시아 예언입니다.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어가는 중에 특별히 이 부분에서 눈이 탁 멈췄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고민하던 시점에 빌립과 탁 만났다는 것은 얼마나 기가 막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3)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4-35절)
“이 사람이 과연 누구냐? Who is he?” 내시의 질문은 상당히 예리합니다. “이분이 누구냐?” 이 질문이야말로 구원으로 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세상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럴 때 우리는 바른 대답을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빌립은 내시의 이런 좋은 질문을 받아서, 바로 이 말씀으로 시작하여 성경에 예언된 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얘기할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면 됩니다. 빌립은 어느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훈련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니까 내시가 믿게 되어 반응을 보이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6절)
이렇게 복음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빌립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이 내시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을 한 것입니다. 물이 있으니까 바로 세례를 받겠다고 나옵니다. ‘아무도 내가 세례 받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즉 세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표시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적극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 본문을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을 때 다 잘하셨습니다. 37절에서 “없음”이라고 읽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에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37절이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말하기를 ‘당신이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습니다.’” 이 사람은 세례문답을 아주 확실히 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받기 전에 반드시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간증하고 공식적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이 국가의 최고위층이었으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를 따라온 수많은 부하들과 수행원들이 있는데 당연히 그들 대부분은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온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이런 대가를 치르는 결단입니다. 대가를 치렀으면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3. 복음의 열매
이렇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내린 믿음의 결단은 자신의 조국 에디오피아에 복음이 들어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에디오피아 지역에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이 에디오피아 내시 같은 국가 고위층 사람이 그 앞의 오아시스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믿음의 결단을 하기만 하면 그 즉시 어디에서나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예식이 있고 질서를 위해서 목회자가 세례를 교회에서 베풀게 되어 있지만, 이때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어디서든지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38-39절)
세례 받은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계속 기뻐하고 찬미하며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내시에게는 진정한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춤을 추며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열심히 섬겨서 한 분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정말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목장에서 열심히 섬겨서 몇 년 만에 세례를 받을 때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분은 자기를 그 동안 섬겨준 분들에 대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면 서로 더욱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갈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빌립을 향해 그런 마음이었을 텐데 빌립은 그 자리에서 바로 사라집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제 네 일은 여기서 끝났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 하고 성령께서 빌립을 끌어 다른 데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끌어갔다’라는 말은 확 낚아채서 다른 데로 보내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때 헤어져서 서로 다시는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간 내시는 에디오피아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자기가 전도한 그 열매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또 하게 됩니다.
우리도, 내가 열심히 했는데 내가 그 열매를 못 본다 해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립도 그 열매를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 후 수단과 이디오피아 지역에 얼마나 많은 열매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흘린 땀의 열매를 보면 감사하고 좋지만, 못 보아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면 되는 겁니다.
결국은 주님 안에서 우리가 거두던 누가 거두던, 그 열매를 거두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뿌린 것을 꼭 우리가 거둘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뿌렸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거두든지 어쨌든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면 감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40절)
아소도는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쫓아갔던 지점에서 몇 십 마일나 떨어진 곳입니다. 성령께서 엘리야에게 주셨던 것과 비슷한 공간이동 능력을 주셨는지, 순식간에 이동한 것입니다.
빌립은 거기서부터 여러 성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해안도시였고 로마 총독이 머물던 가이사랴까지 이르게 됩니다. 거리상으로 따지면 거의 60마일이나 되는 먼 길입니다. 요즘처럼 길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빌립은 멈추지 않고 달려서 그곳까지 갔습니다. 나중에 보면 사도 바울이 거기서 빌립의 집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사실 에디오피아 내시 같이 높은 사람을 전도했다는 것이 사실은 감사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뿌듯한 일입니까? 내가 전도한 사람이 우리나라의 장관이라면 얼마나 뿌듯합니까? ‘저 사람을 내가 전도했어.’라고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빌립은 거기에 취하지 않고 머물지도 않고, 계속 복음 전파의 길을 갑니다.
[나가는 말: 누가 주연상을 받아야 하는가?]
이렇게 볼 때 남우주연상은 누가 받아야 하겠습니까? LA에 가면 헐리우드(Hollywood)가 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홀리우드(Holy Wood)입니다. 홀리우드에서 상을 누가 받아야 합니까?
첫 번째 후보는 빌립입니다. 8장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며 사마리아에 있다가 광야까지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에 아주 민감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에디오피아 내시입니다. 빌립을 초청해서 복음을 듣고 믿자마자 세례를 받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셋째,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내시와 함께 있던 병거의 운전기사나 수행원들도 있습니다. 거기서 복음을 들었을 것이고, 집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이 계십니다. 본문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것은 빌립이 아니라 사실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남우주연상을 타야 합니까?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배우는... 빌립입니다! 왜냐하면 감독상이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상은 성령님, 빌립은 최우수남우주연상, 그리고 에디오피아 내시는 조연상입니다. 성령님은 지시하시고, 빌립은 성령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따랐고 온전히 순종을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고, 이 예수님을 믿어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런 힘과 능력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듣는 사람의 자격을 따지거나 제한을 두지 않으시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유명하지도 않고, 신문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안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일꾼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변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 가고,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자살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회복되고 치유된다면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빌립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보내셨듯이 우리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내게 지금 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미루지 마시고, 바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탄이 자꾸 미루게 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주님, 나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나를 보내주십시오!” 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