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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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0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7 ✦
“그 이름을 위해 능욕 받음을 기뻐하라”
(사도행전 5장 33~42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소프트 파워(soft power)’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 개념은 1980년대 후반에 나온 것입니다. 하버드(Harvard) 대학교의 케네디(Kennedy) 행정대학 학장을 역임한 조세프 나이(Joseph S. Nye) 교수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Hard Power, 즉 강하고 딱딱한 힘이고, 다른 하나는 Soft Power, 즉 부드러운 힘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드 파워라는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가지고는 상대의 마음까지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해서 적들을 제압했지만, 패배한 쪽에서는 복수심을 가지고 테러를 했습니다. 복수는 계속 복수를 낳습니다. 그래서 하드 파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프트 파워입니다.
예를 들어, 제3세계 출신 엘리트들이 미국의 대학에 유학 와서 공부하며 미국적인 가치관을 배워서 본국으로 돌아가면, 소프트 파워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미국이 뒤에서 많은 일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들, 특히 이슬람권 아랍 국가들에게 쿼터를 줘서 이민을 받습니다.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유학생들도 데려와 학비까지 지원해주면서 공부하게 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친미 세력을 심는 겁니다. 소프트 파워의 능력을 간파한 미국 정부가 하는 일입니다.
컴퓨터도 몇 천 불짜리 최신형을 사면 뭐 하겠습니까?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거기에 들어 있는 소프트웨어가 아무것도 없으면 그저 깡통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조세프 나이 교수는 특히 이 시대의 소프트 파워가 ‘스토리(story)’라고 했습니다. 요즘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갈 때, 또 청년들이 직장을 잡을 때, 소위 ‘스펙’을 쌓는다고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스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토리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스토리가 있는가? 요즘 좋은 대학이나 회사들은 좋은 스토리를 가진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첨단 IT기술의 발전으로 인터넷, 휴대전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서 돈도 별로 들지 않고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퍼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힘이 소프트 파워입니다. 그것 때문에 바로 몇 년 전 튀니지와 이집트나 리비아 같은 나라를 비롯한 독재 정권들이 붕괴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군사력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국민들에게 스토리가 퍼져서 자기들에게도 민주주의를 달라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북한은 더합니다. 탈북한 전직 북한 고위층에 의하면, 북한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의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필사적으로 통제하며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파워는 무엇입니까? 하드 파워에 있지 않고 소프트 파워에 있습니다. 교회의 힘은 스토리에 있습니다. 교회의 능력의 핵심은 복음이며, 그 스토리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야말로 우리의 능력의 근원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스토리가 교회를 움직이는 능력의 핵심이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핵심입니다.
1. 공회의 반응
1) 종교지도자들의 분노와 가말리엘의 조언
이것을 벌써부터 간파한 사도들이 바로 그 스토리를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담대히 선포한 것에 대한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3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의 메시지를 듣고 심히 분노했습니다. 이전에 똑같은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똑같은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크게 노했습니다. 나중에 7장에 가면 스데반도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아예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사실 설교자로서 별로였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누가 제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당신을 죽이겠소.’라고 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다른 이단적인 가르침을 한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는데 종교지도자들이 왜 그렇게 격분했습니까?
먼저, 자기들은 의롭기 때문에 회개할 것도 없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도 필요 없다는 강퍅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출석하고 종교적인 의식에 잘 참석하고 성경 지식이 있고 직분이 있어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가치관이 세상적이라면 성령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뒤에 마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탄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악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냥 화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려 했다는 것은 그들 뒤에 마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미움의 영이고 살인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일을 대적하고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을 선동했던 사탄이 이제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들을 아예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순간에 의외의 일이 발생합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4-35절)
이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누가 그 말을 하는가입니다. 똑같은 말도 별 것 아닌 사람이 하는 것과 중요한 사람이 하는 것이 무게가 달리 느껴집니다. 짧고 간단한 말인데도 중요한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듣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가말리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이었고 ‘율법교사’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구약성경 연구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바리새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율법교사, 즉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의 학적인 면에서 두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힐렐 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샴마이 학파입니다. 샴마이 학파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학파였고, 힐렐 학파는 개혁적인 학파였습니다. 이 힐렐 학파를 이끌던 대학자가 바로 가말리엘이었고, 사도행전 뒷부분이나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생, 즉 제자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 바울의 원래 선생님이었습니다.
또 여기 보면 그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학파에게만, 바리새파에게만 존경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두개파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다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단순히 성경 지식만 갖춘 학자가 아니라, 인품이 훌륭하고 지혜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말리엘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율법이 영광이 떠났다. 깨끗함과 거룩함이 죽었다.”라고 슬퍼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자였습니다.
사도들을 없애버리겠다고 흥분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냉정을 되찾도록 해준 사람이 가말리엘이었습니다. 그가 지혜로운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밖으로 잠시 나가게 합니다. 그 자리에 두고 말한 게 아니라 당사자들을 밖에 나가게 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합니다. 단순히 밖으로 내보낸 게 아니라 한 템포를 쉬고 간 겁니다.
우리가 부부싸움을 할 때나 자녀와의 관계에서 화가 나 소리를 지를 만한 때에 한 템포를 끊어주면 화가 누그러집니다. 그런데 끊지 않고 계속 가면 별로 좋지 않은 관계가 됩니다. 흥분되고 화가 날수록 한 템포를 죽이고 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가말리엘은 다들 화가 나서 죽이겠다고 날뛰던 그때에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자기 마음을 유지한, 아주 지혜롭고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말리엘은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6-37절)
이 두 사건은 1세기 초반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특히 드다라는 사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드다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고 그 이름으로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말리엘은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만 보는 게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을 금방 생각해내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드다와 유다 사건에서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것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말리엘은 지금 종교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두려움이 뭔지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자체도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워하던 것은 교회의 영향력이 자기들보다 더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말리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 한창 기세가 올라가고 있는 예수 운동인데, 괜히 사도들을 죽이면 자극하게 된다. 벌집을 괜히 쑤시는 꼴이 된다. 왜 이 일을 그냥 놔두면 되는데 더 큰 문제로 만드느냐? 그냥 두면 자연히 사그러질 것이다.’ 그러면서 굉장히 중요한 말을 결론으로 말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38-39절)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까? 얼마나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냥 놔두면 된다. 이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무너뜨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된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2) 영원의 관점으로 보라
그런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적인 말입니까? 당연히 성경에 있으니까 성경적인 말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처방(prescription)이 있고 묘사(description)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뭡니까? ‘처방’은 우리가 따라야 할 원리, 원칙이고 반드시 해야 할 것인데, 이 말은 묘사입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이지, 곧 성경적인 교훈이나 원칙이나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말이 굉장히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100% 맞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만 맞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사람에게서 났으면 결국 무너지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에서 난 일이라고 해도 단시간에 다 망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보지 않습니까? 불합리한 일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악한 사람이 오히려 더 오래 살고, 몸에 안 좋다는 것은 다 먹고 다 하는 사람이 오히려 병도 안 걸리며 오래 살고, 그렇게 나쁜 짓과 못된 짓을 하며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나는 착하게 살며 남을 도우려 하지만 잘 살지 못하는 등의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단기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판단하려는 말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일이 영원히 설 것이고 인간적인 일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일, 심지어 악한 일이라도 단기간에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봐도 그런 게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며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일이라고 다 안 되고 하나님의 일이면 다 잘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 말이 정말 100% 사실이라면, 종파 중에 가장 성공한 종파는 이단 종파입니다. 통일교 같은 데를 보면 얼마나 사람이 많고 돈 많이 벌고 잘되고 있습니까? 추종자도 많고, 돈도 많고, 일도 많이 하고... 그럼 눈에 보이는 성공만으로 그 일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가? 그것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드다나 갈릴리 유다 같은 사람은 봉기의 주동자들이었습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임꺽정 같은 사람들인데, 가말리엘이 그들을 예수님과 비교해서 말하니까 말이 안 되는 논리를 펴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란의 주동자나 핵심쯤으로 취급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 눈으로 보기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것을 보며, 잘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신다고 말하고 잘 안 된다고 해서 인간적인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항상 모든 것을 단기적으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일이 잘 풀리면 ‘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잘된다.’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막 쫓아다녔습니다. 의로운 다윗이고 자기 사위인데도 라이벌로 생각하고 죽이려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다윗에 대한 정보를 잘 안 주는 사람들에게는 욕을 하고, 다윗이 어디 있다고 정보를 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지어다.’라고 축복을 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그런 식으로 단기적인 눈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기적인 눈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의 관점으로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의 인간적인 욕심에서 나온 일인가?’ 이것을 우리가 잘 판단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하는데, 사도들은 바로 영원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 가말리엘의 옛 제자였던 사도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5)
‘때가 이르기 전,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지금 당장 눈앞에서 잘되고 안 되고 하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말과 가말리엘의 주장이 다른 점입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같은데, 왜 그렇게 하는지 그 목적이 다릅니다. 가말리엘은 ‘그냥 놔두어서 망하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성공하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판단하실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공과 실패가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날, 종말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 최종 판단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의 기준으로 보면 사도들이야말로 다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다 복음을 전하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을 빼고는 다 처참하게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그런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일이 안 풀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일이 잘되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잘되고 못 되고를 통해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눈으로 판단하고 계십니까? 지금 내 삶에 일이 잘 안 되고 있다면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고 계십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잘하고 있는데도 안 된다면 ‘이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전혀 원치 않으시는 방식으로 마구 살아가는데도 일이 잘 될 때 ‘괜찮은가보다.’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꼭 자기 자신을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의 판단기준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의 이런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이때 사도들이 다 죽지 않도록 막아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이렇게 당신의 자녀가 아닌 세상의 권력자나 지혜로운 사람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보호해주기도 하십니다.
2. 위기 상황에서 사도들이 보인 반응
1) 담대한 사도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0절)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제사장들이 주류였던 사두개인들도 가말리엘의 조언에 공감하면서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놔주면 다 인정해주는 꼴이 되니까 그냥 놔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기록된 형벌인 40에서 한 대 감한 39대의 채찍질을 사도들에게 가합니다.
여기는 너무 간단히 채찍질해서 금하고 놓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자비한 채찍질입니다. 끝에 짐승의 뼛조각과 쇳조각이 달려 있는 채찍으로 무지막지한 군인들이 휘둘러대는 채찍질을 39대나 때리고 놓아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대로 걸어갈 수도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고문입니다. 지금 등이 다 찢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인데, 사도들은 뭐라고 합니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1절)
너무 놀랍습니다. 지금 등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너덜너덜하고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인데 오히려 기뻐했다는 겁니다. 그냥 보면 완전히 미친 사람들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처참하게 맞고도 웃습니까? 한 대만 맞아도 아픈데 39대를 맞았으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아마 종교지도자들이 39대를 때린 다음에 속으로 ‘이것들이 이제 정신을 차렸겠지’ 하고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흐흐흐’ 하고 웃으며 기뻐합니다. 굉장히 공포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12)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했으니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주부터 축구 팬들이 기다리던 월드컵이 러시아에서 시작됩니다. 한국 팀이 이번에도 나갔는데 최약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약체이긴 하지만 한국에는 손흥민이라는 아주 뛰어난 선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가전을 할 때 보면 유럽의 강팀이라고 해도 그 선수를 전담으로 밀착 마크하는 선수가 붙거나 두세 명이 겹을 싸서 막으려고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이 선수가 요즘 전성기로 아주 잘하고 있고 영국 프로축구에서도 득점 10위 안에 들어가는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알려져서 한국 팀과 붙는 상대 팀은 그를 전담 마크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뭡니까? 더 달려들고 악착같이 전담해서 막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그 선수 입장에서는 ‘왜 내게 이렇게 달려들지? 귀찮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야, 내가 이렇게 세계적인 수준이 된 것을 상대방도 인정을 해주는구나.’라고 생각할 일입니다. 인정을 받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면, 사도들처럼 39대를 맞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손해 보고 고난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했다면, 괴로워하거나 낙심할 게 아닙니다. ‘대충 타협을 해야 하나?’라고 할 일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뿌듯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되었구나. 사탄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핍박이 점점 강해진다면, 우리의 수준도 점점 성장해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2)
이런 모든 핍박을 다 겪었고 이 순간 그런 핍박 속에 있었던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면서 권면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제대로 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예수님을 깊이 느끼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됩니다. 세상도, 마귀도 인정해주는 사람이 된 게 아닙니까? 마귀도 떨 정도의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42절)
풀려난 사도들은 즉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떠나오자마자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아주 심플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책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크리스토스’인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도들의 메시지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르쳤고 전도했습니다. 여기서 ‘전도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하는 전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설교와 같은 ‘선포’(proclamation)입니다. 그런데 가르친다는 것은 teaching입니다. 선포된 복음이 정확히 이해되도록 설명해주고 적용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주일에 와서 설교를 듣는 것으로만 신앙생활을 다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포만 듣고 가서는 안 됩니다. 듣고 가서 실행할 뿐 아니라,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삶 공부가 있습니다.
예배드리며 설교를 들을 때 그 초점은 은혜 받는 게 아니라,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삶 공부에서는 말씀의 내용을 더 자세히 배우고 그것을 행하도록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균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복음을 “날마다” 전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날마다 전했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것 외에 나머지는 전부 다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장소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성전 안에도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집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며 자세히 가르치는 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2장과 4장에서도 보았듯이, 이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금방 만 명이 넘어갔습니다. 처음에 3천 명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왔으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건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함께 모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모였고, 우리의 목장처럼 가정교회들로 모였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정마다 모이는 모임들을 돌아다니면서 초대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기존의 성도들도 잘 가르치면서 성장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2) 변화된 사도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도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사람들은 원래 자기들만 알던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고 모시면서도,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시는 동안 그들은 뒤에서 누가 크냐고 싸웠습니다.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에 가서 왕이 되시는 줄 알고 따랐는데, 왕이 되시면 누가 2인자가 될 것인가로 싸웠습니다.
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꿈꾸던 것이 다 틀렸구나’ 하고 다 도망갔던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심문 받으신 대제사장 집에서 사람들이 물어볼 때, 그것도 조그만 여자아이가 ‘당신도 그 사람의 제자이지요?’라고 물을 때 무서워서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또 나중에는 아예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순간에는 그냥 입을 싹 닫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육체적으로 직접적인 해가 오지 않았을 때도 겁을 먹고 두려워 도망가고 주님을 배신한 사람들이었다면, 지금 감옥에 갇히고 무서운 채찍질을 당하고 유대 최고 종교지도자들의 협박까지 받는 지금은 예수님의 ‘예’ 자도 꺼내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 숨어 있어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비겁한 겁쟁이였고 배신자였던 사람들이 지금 유대 최고 종교지도자들이 구체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때리기까지 하며 이것을 절대로 전하지 말라고 살기등등하여 위협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선포하며 가르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것이 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 이전에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사도들에게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을 통해 자기 욕망을 이루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내가 한 자리 하기 위해서,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내가 떵떵거리는 위치에 올라가보기 위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을 때 도망간 겁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버렸던 그 예수님이 놀랍게도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그리스도’셨다는 것입니다. 42절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했다’고 되어 있는데, 원문으로 보면 ‘예수는 바로 그 그리스도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그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하여 방언을 했을 때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성전 미문 앞에서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다음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도,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산헤드린 공회에 소환되었을 때에도, 또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투옥되고 채찍질까지 당하고 위협을 당했을 때에도, 그들의 말은 항상 똑같았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다. 한마디로 예수가 그 그리스도다. 우리는 이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가는 말]
비록 이때 사도들이 놀랍게 복음을 선포했지만, 교회 역사를 보면 마귀는 여기서 결코 끝내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교회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후 1세기 중후반 네로의 치하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바울도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후 제2의 네로라고 불리던 잔인한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 아래에서 억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요한은 밧모 섬으로 유배되고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철학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kus Aurelius)는 기독교가 위험스럽고 부도덕하다고 하며, 폭도들의 맹렬한 폭력이 지방에서 막 일어나 크리스천들이 많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모른 체했습니다.
3세기에 들어서서 핍박이 조직적으로 체계를 갖추었는데, 데시우스(Desius) 황제 아래에서는 로마의 감독 파비아누스(Fabian)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크리스천들이 황제의 이름에 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했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가 회심하기 전 최후로 박해를 가한 황제가 디오플레티아누스(Diopletinan)였는데, 그는 기독교를 근절시키겠다고 네 가지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교회를 불태우라. 성경을 압수하라. 성직자들을 고문하라. 그리스도인 공무원은 시민권을 박탈하고, 완강하게 뉘우치지 않으면 처형시켜라.’
지금도 몇몇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는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지금도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래 가지고는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 시대 당시 초대교회 교부였고 감독이었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에게 말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를 죽이시오. 우리를 고문하시오. 우리를 정죄하시오. 우리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버리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소탕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자랄 것이요. 그 씨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피입니다.” 1979년 2월 우간다의 페스토 키펜기어(Festo Kivengere)라는 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 흘림 없이 교회는 복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핍박은 교회를 연단시키고 훈련시키지, 파괴를 시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 박해가 기도와 찬양으로 또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더 하나가 되고 더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이끌게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우리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의 이름으로 능욕을 받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참 많습니다. 이번에 LA를 가보니까 한 상가 건물 안에도 여러 교회가 같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정말 예수님만을 전하고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찾아나서는 교회,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고 가르치는 교회가 너무나 적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해야 되는 것은 알지만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고 자나 깨나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만을 전하며 사는 진짜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그런 진짜 크리스천, 진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만 항상 생각하고 예수님만 이야기하고 예수님만 전하는 진짜 크리스천, 진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때문에 흥분하고 기뻐하며 비록 그 이름을 위해 능욕을 당할지라도 기뻐하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주님의 큰 부흥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