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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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9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3 ✦
“첫 순교자와 교회를 향한 큰 박해”
(사도행전 7장 54절 ~ 8장 3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대개 호텔 방에서 잡니다. 호텔 방을 들어가면 열고 들어간 문 안쪽에 ‘비상시 주의사항’이라는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비상구 위치나 대비 방법을 써놓은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본 내용인데, 뉴질랜드의 오클랜드(Auckland)에는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스카이타워(Sky Tower)가 있고 그 옆에 스카이시티 호텔(Sky City Hotel)이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사업차 여행을 많이 하게 된 어떤 분이 출장을 가서 그 호텔에 묵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상시 주의사항’에 다른 호텔에서는 못 본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이었는데, 첫 번째는 “Do not use lift in fire”, 그러니까 “화재 발생 시 승강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어떤 건물에나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Walk, don‘t run”(뛰지 말고 걸으라)이었습니다. 서두르며 뛰다가 불 속에서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도 대다수의 호텔에 붙어 있지는 않아도, 종종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아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Do not go back”이었습니다. “되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도 호텔에서 많이 자보았지만 이런 것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 불이 났는데도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귀중한 것을 두고 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불이 난 경우에 절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재 현장에서는 불도 아주 무서운 것이지만, 유독가스 때문에 불과 1-2초 사이에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귀중하고 값비싼 것이라 해도, 생명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1초 사이에 생사가 갈리는 위급상황에서 자기 귀중품을 두고 왔다고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방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 물건보다 자기 생명이 더 하찮다고 여기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귀중한 것을 손에 넣더라도, 그것을 잡는 순간 개스를 마시고 질식해서 죽는다면 그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방에 두고 온 것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해도 결코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직 생명을 살려줄 수 있는 비상구를 향해 옆을 보지 말고 앞만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데 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비상구를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기가 자기 생각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그러나 생명을 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유일하게 생명을 살리는 비상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고 그리로 눈을 돌려서는 생명이 위급해집니다. 믿음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죽게 되고, 믿음이 있으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경을 죽 읽어보면,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토록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방에 있다고 화재가 난 위급상황에서 되돌아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을 붙잡겠다고 되돌아가는데,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귀해도 자기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되돌아가겠다고 하는 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길이기 때문에 못 가게 막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길을 택하여 나아간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1. 스데반과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보인 반응
1) 스데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스데반은 거짓 증인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산헤드린 공회에 섰습니다. 공회는 71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제사장이 의장이며, 국회와 비슷한데 종교문제만 다루는 유대인들의 기관입니다. 스데반은 그곳에 섰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 자리에 섰고, 예수님도 이 자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그 서슬 퍼런 공회 앞에 섰을 때, 스데반은 구약의 이야기를 죽 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절)라고 통렬하게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4절)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인데, 그들은 마음에 찔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회개가 아니라 증오와 살인의 마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이를 갈았다’는 것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먹이 앞에서 아주 무섭게 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짐승과 같은 증오와 분노와 미움으로 스데반에게 나아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지적을 받았을 때 대개 두 종류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겸손하고 온유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와 반대로 교만하고 거짓된 마음 때문에 자기 허물을 지적받았을 때 오히려 자기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원수처럼 여기면서,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잘못한 사람이 화를 냅니다.
사실 내용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는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와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더 뛰어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그날 3천 명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이 사람들은, 마음에 찔린 것은 같았지만, 왜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죽이게 된 것입니까?
물론 말하는 사람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회의 리더였고, 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사도가 아니었고 소위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파 유대인들, 즉 해외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통 히브리파 유대인인 베드로가 하는 말을 듣고 귀를 기울이다가 마음에 찔려 회개했는데, 스데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히브리파 본토 유대인들이고 공회원들이며 거짓 증인들도 있고 다 같은 편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본토도 아니고 헬라파로 다른 데서 온 스데반이 자기들을 가르친다고 느껴지니까 분노가 일어났고,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죽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요한과 함께 공회에 잡혀갔는데, 거기서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과 그분을 믿는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이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스데반 혼자이니까 죽여 버리게 된 것입니다.
2) 사람들에 대한 스데반의 반응
이렇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스데반은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5-56절)
스데반은 크게 네 가지로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스데반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모든 예수 믿는 사람 안에는 성령이 함께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크리스천이 다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고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순간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환경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환경이 너무 중요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조금만 상황이 좋아지면 기뻐하고, 조금만 환경이 나빠지면 좌절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 충만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재판을 받으면서 사형을 당하기 직전인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둘째,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습니다.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살기등등한 사람들이 있는데, 스데반은 그들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우리도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냥 하늘만 쳐다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땅을 보면 실망과 좌절과 막힌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며 하늘의 관점으로 내려다보면 주님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스데반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하늘을 봤습니다. ‘내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인가? 내가 죽을 것인가? 몇 년 형을 받을 것인가?’ 하면서 재판 결과에 고민하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셋재,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하늘은 sky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heaven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넷째, 스데반은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으로 무엇을 고백합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세상 끝 날까지 쉬고 계신 것이 아니라,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서 우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데반이 죽기 직전의 위기상황에서, 마치 군대가 출정식을 하며 떠나려는 것과 같은 자세로 서 계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도 그것을 보고 너무 신기해서 예수님이 서 계시다고 말한 것입니다.
2. 스데반의 순교
그런데 그러한 스데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7-58절)
그들은 짐승처럼 이를 갈고 짐승처럼 큰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일제히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신성 모독죄로 돌로 쳐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처형할 때 반드시 이렇게 성 밖으로 끌어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죄인은 부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에서 못 박아 죽였고, 스데반도 성 밖으로 끌고 나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죄인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죄인을 고발한 증인들이 가장 먼저 돌로 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증인들이 돌로 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매수한 거짓 증인들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치기 전에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드디어 사울(우리가 아는 그 사도 바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앞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곳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직접 나가서 돌로 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종하는 실제 리더였습니다.
지금 첫 번째 증인이 스데반의 머리를 돌로 쳐서 쓰러뜨리고, 두 번째 증인이 스데반의 가슴을 돌로 치고 나서, 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돌 세례를 퍼부으며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장면입니다. 사실 아이들이 작은 돌 하나만 던져도 유리창이 깨어지고 사람에게 맞으면 다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주먹 만한 돌을 있는 힘을 다해 던지니까 얼마나 아프고 치명적입니까? 그대로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장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스데반이 놀랍게도 영원한 생명의 비상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리며, 자신을 돌로 쳐 죽이며 살기등등한 짐승 같이 달려드는 저 사람들도 주님 안에서 죄 사함을 얻기를 기도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어 가면서도 스데반이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을 사울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었습니다. 어떤 말을 했습니까?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59-60절)
스데반은 마지막에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첫째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급박한 상황입니다. 돌에 맞아 피 흘리며 정신을 잃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급히 소리친 겁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상황, 피를 철철 흘리면서 머리가 깨지고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받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고난이 오면 하나님을 그냥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 주님께 자기 영혼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크게 불렀습니다.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도록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급박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두 기도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기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마디 중 두 마디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 그리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를 스데반도 죽어가는 상황에서 하고 있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까지 스데반이 죽는 순간에 이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게 무슨 사랑이냐? 원수도 사랑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한다는 개념은 인간 안에 없는 개념입니다. 여러분, 나를 돌로 치고 죽이려 드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는 개념이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떤 이단들은 죽으면 정말로 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이 아닌 것을 우리는 다 알지 않습니까? 정말 자는 것이라면 왜 시체가 썩습니까? 그러니까 죽은 겁니다. 그런데도 왜 잔다고 표현합니까? 우리의 몸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첫 번째 순교가 가져온 결과
1)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교회에 불어 닥친 큰 박해
스데반은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믿음의 승리인 순교의 순간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장 1절)
놀랍게도 순교의 결과는 큰 박해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오히려 박해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순교의 결과가 좋은 쪽으로 나오지 않고 아주 나쁜 쪽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이런 역설을 많이 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것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아주 열심히 했는데 그 결과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위험한 일도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 희생했는데, 아무 대가도 없고 보상도 없으며 오히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주님 뜻대로 살아보려 했는데 일이 더 안 풀리고, 직장에서 해고되고, 사업은 문을 닫아야 하고, 돈이 없어서 쫓겨나게 되면, 그럴 때 우리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정의와 진리를 위해 살았는데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계기로 오히려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박해나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고난과 박해 속에서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순교의 피를 흘린 곳에 오히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 이 땅에 확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도 고난 없이 자라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축복을 받으면 신앙이 잘 자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해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해주었더니 일이 잘 풀리고 돈도 잘 법니다.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 얻고, 높이 올라갑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에 발을 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바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일이 잘 풀리고 세상에서 잘되면 더 잘 믿을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은 고난을 통해 성장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그래서 축복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혹시 고난이 오더라도 이게 재앙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2) 박해를 통해 복음을 들고 흩어지게 된 성도들
무엇보다 박해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박해가 온 것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더 능력 있게 주님의 교회를 확장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흩어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적당히 편안하게 살면 된다.’라고 하는 것이 더 안 좋은 겁니다. 그렇게 안주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흩으십니다.
이때 순교 때문에 박해가 왔는데, 박해가 오니까 흩어져야 했고, 흩어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복음이 이곳저곳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안 임하셨습니까? 임하셨습니다. 권능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습니까, 안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셨는데 갈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8장 1절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고, 그 수만 명 되던 사람들이 몇 명 안 남고 나머지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안 나가니까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여기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다렸더니, 정말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기도할 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루에 3천 명이 들어오고, 그 후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오며, 교회가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내 것 네 것 없이 나눠 쓰고, 교제하고, 예배하고, 떡을 떼고, 날마다 모여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고 기적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뭘 느꼈겠습니까? ‘여기가 천국이다! 너무 좋다!’ 그런데 여기는 우리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여기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은혜 받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했지만, 예루살렘이 목표는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일단은 예루살렘에서 그 근방의 유대 지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과 원수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로 나가고, 그 다음에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땅 끝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지리적인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꾸 편한 것을 찾고 안주하려 합니다. 신앙생활이 좋고 교회가 괜찮으면 거기 안주하려 합니다. 모험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고생 끝났고 편안한데 뭘 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 가니까 하나님이 흩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주하고 편안하게 하면 하나님이 흩으실 겁니다.
8장 1절의 박해가 왜 일어났습니까? 1장 8절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1장 8절대로 하니까 그 후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구조가 1장 8절의 구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좋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는 상황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2-3절)
이 경건한 사람들은 교회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와서 스데반을 장사하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도 웁니다. 장례식에서 ‘믿음의 사람은 울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잘못된 겁니다. 감정으로는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 없는 사람 같이 울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이들도 비참하게 죽은 것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것이지,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때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사울이 아예 교회를 잔멸합니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아예 각 집에 들어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이렇게 순교도 일어나고 믿음으로 나아갔지만, 상황이 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악화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당연히 상황이 바뀌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이 환경을 변화시켜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변했는데 내가 안 변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변하면, 나를 통해서 상황이 바뀝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도의 응답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기도 응답이 안 되고 오히려 반대로 악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응답이 잘될 때도 있지만, 기도한 것의 반대로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지만, 사도 바울도 세 번이나 목숨 걸고 기도했는데 낫지 않았습니다. 기도해도 안 될 수 있습니다. 평생 병을 안고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켜주실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변화를 안 시키시고 더 악화시키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럴 때도 하나님이 그 뒤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당장 눈에 안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나를 변화시키시는 역사입니다. 이 큰 박해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성도들과 사도들이 더 놀랍게 변화되었고, 더 성숙해졌고, 더 담대해졌습니다. 더 지혜로워졌습니다.
여러분, 상황은 바뀌는데 내가 안 바뀌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바뀌면 상황이 안 바뀌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바꿔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주님, 이 상황을 통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를 변화시켜주시고 주님의 시각을 갖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4)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세워진 사도 바울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이 자리에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공회원들 70명이 있고, 거짓 증인들이 있고, 매수당한 사람들이 있고, 그 외에 바람잡이도 있어서, 최소 100여 명은 있었습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담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딱 한 명의 이름만 나오는데, 그가 바로 사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 딱 한 명만 나옵니다. 대제사장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공회원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사울의 이름은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울이 처음 등장하는 이 7장과 그가 회심하는 9장 사이에 8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스데반의 죽음이 사울이 변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여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앞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스데반의 죽음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본 사람이 사울입니다. 아마도 돌을 칠 때 그 피가 튀었을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취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맡기는 최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나중에 사도 바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내가 손해를 보고 억울하더라도 믿음의 길을 갈 때, 잘되면 좋겠는데 일이 안 풀리고 꼬이며 더 손해보고 악화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혹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그 믿음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나를 통해 사도 바울을 준비시키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그것을 모르고 죽었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마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죽었지만,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결코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을 탄생하게 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생애에서 혹시 열매를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나타나는 열매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여기서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데로 이사 가거나, 우리가 여기서 애썼던 분들이 다른 데 가서 열매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전혀 모르고 그냥 무의미한 것처럼, 손해만 본 것처럼 우리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바로 우리의 고난과 핍박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교회에는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복음의 큰 진보를 가져왔고, 특히 복음 전파를 땅 끝까지 이루는 사도 바울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역사이며, 바로 그것이 8장 이후의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