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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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9 ✦
“천사의 얼굴을 지닌 사람”
(사도행전 6장 8~15절)
[들어가는 말]
어느 부부들이 모인 모임에서 강사가 각 부부에게 질문했습니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옆에 누워 있는 배우자의 얼굴을 탁 보는 순간 무엇을 느끼십니까?” 강사가 기대하던 대답은 ‘사랑스럽다’, ‘안아주고 싶다’ 같은 것이었습니다. 맨 앞에 있던 부부에게 물어보니까 남편은 “에휴”라고 했고, 아내는 “얼굴에 기름이 좔좔 흐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굴은 사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에 자신의 사람됨이 가장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의 얼굴은 인격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어떤 민족보다도 얼굴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것이 한국의 전통문화입니다. 한국말에 얼굴과 관련된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다.’ ‘얼굴이 안 선다.’ ‘면목이 없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 ‘내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라.’ ‘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눈감아주십시오.’ 이렇게 우리의 행동을 표현하는 말에 얼굴과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사람들 중에 아마 가장 이상하게 생겼으면서도 가장 위대하게 된 사람을 꼽으라면 에이브러햄 링컨을 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링컨의 위대함이 그 얼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의 사진을 보면 결코 잘생긴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못생긴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못 생긴 얼굴을 가리려고 수염을 길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마를 보면 그렇게 번들번들하지도 않고 좁지도 않은, 아주 시원한 모습입니다. 또 링컨의 눈은 깊숙하고 알맞게 자리를 잘 잡고 있고, 그의 높고 두툼하면서도 쭉 뻗은 코는 아주 시원합니다. 게다가 보기 좋게 늘어진 인중과 그 밑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절묘한 입술도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귀도 있고, 필요 없는 살이 하나도 없는 광대뼈도 특이합니다.
링컨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단순합니다. 촌스러우면서도 범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을 가진 얼굴처럼 느껴집니다. 단호하면서도 입만 열면 유머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이 바로 링컨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보는 사람들은 링컨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얼굴을 타고 났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결과론입니다. 그 사람이 잘됐으니까 그렇게 평가하지, 잘 안 됐으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링컨 자신은 소위 그러한 ‘얼굴 운명론’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얼굴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얼굴에 있는 많은 굴곡은 그 동안 겪은 고난과 시련을 말해주는 것이고, 내 얼굴에 나타난 우스운 모습들은 고난을 극복한 내 지혜의 결과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얼굴은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이 빚어내는 예술품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기게 태어났나 하며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있으십니까? 잘생기고 못 생기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품과 인격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표정이 우리 얼굴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 표정은 마음에 따라서 나옵니다. 결국 우리 마음에 따라 우리 얼굴이 빚어지는 겁니다.
아름다운 마음과 태도는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고, 슬픈 마음은 슬픈 얼굴을 빚어내며, 불만과 불평과 원망과 분노의 마음은 일그러지고 추한 얼굴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놀랍게도 ‘천사의 얼굴을 지닌 사람’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얼마나 그 사람이 천사 같았으면 그 얼굴이 천사 같았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온전히 따랐던 모범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 스데반입니다. 그는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있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6장 앞부분에서 살펴본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일꾼들 중 하나였던 스데반이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8절)
그리스도인의 한 모델인 스데반은, 첫째로, 신앙과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고, 인격과 능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곱 명의 일꾼들을 뽑을 때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3)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사람들을 뽑았을 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5)과 다른 여섯 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8절에서는 스데반을 가리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성령, 지혜, 믿음, 은혜,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은 무엇 하나를 잘하면 다른 면을 잘 못합니다. 다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영성과 능력과 지혜와 행정과 리더십 등 모든 것을 다 갖춘, 아주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것을 봅니다.
두 번째로, 스데반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8절에서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나옵니다. 교회 내에서만 행한 게 아니고 지역사회에서도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교회 내에서도 행하고 밖에 나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행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영적 능력이 스데반에게 있었습니다.
또한 셋째, 스데반은 일곱 일꾼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교회의 구제, 재정, 행정, 사역들을 실제로 수행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적인 수준이 아주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7장에서 설교하는 내용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논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영성과 행정력과 리더십과 지적인 면을 다 갖춘,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표현은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고, 그런 일들을 사도들이 이어받아 행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아닌 스데반도 똑같은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닌데, 스데반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스데반은 다른 대부분의 사도들 같은 갈릴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초기부터 주님을 따라다니며 믿은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120명이 기도하다 성령을 받고 3천 명이 들어오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6장 당시는 첫 번째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때가 아닙니다. 스데반이 정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스데반은 ‘초신자’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몇 년씩 교회를 다녀도 교회에서 함께 뭘 하자고 하면 ‘저는 초신자라서 못 합니다.’라고 핑계를 대는데, 초신자였던 스데반에게 놀라운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 사도들을 통해 나타났던 기사와 표적이, 신앙 경력도 별로 없던 스데반을 통해서 똑같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 내용을 보면, 베드로가 2장과 3장에서 사람들에게 또 성전에서 했던 설교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뛰어나고 월등한 내용입니다. 사실 신앙의 연륜으로 따지면 어떻게 사도들에 비하겠습니까?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스데반이 어떻게 사도들의 연륜을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나 영적, 지적 수준에 있어서 스데반은 사도들과 비슷하거나 더 우위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곱 명의 일꾼들을 세울 때 ‘일꾼’이 ‘디아코노스(diskonos)’라는 단어인데, 원래 의미는 ‘종’ 또는 ‘하인’입니다.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확 다가오는 단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일곱 명을 뽑으라고 해서 뽑은 겁니다. 그렇게 신앙 경력이 별로 없던 스데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의 하인으로, 주님의 종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인’입니다. 우리 가운데 모태신앙인들도 계시고, 어릴 때부터 몇 십 년 동안 또는 평생 교회를 다닌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고 축복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반드시 믿음이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또 믿은 지 얼마 안 되었고 초신자라고 믿음의 수준이 낮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마음을 다해서 내가 주님의 종으로 사느냐, 주님이 원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2.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
1)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스데반
그러한 스데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 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9-10절)
로마제국이 정복을 하면서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구레네(북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이집트), 길리기아와 아시아(터키) 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출신 지역별로 모이는 회당이 있었는데, 다른 번역에서는 ‘리버디노 회당’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길리기아가 바로 사도 바울의 고향입니다. 그는 길리기아의 다소라는 도시 출신인데, 여기에 사도 바울(당시 사울이라는 청년)도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울과 다른 북아프리카와 터키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슨 논쟁을 벌였을까 여기에 안 나와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스데반이 먼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구약에 예언되었고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다.’라고 전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유대교 신봉자들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그러면 스데반이 다시 구약을 인용하며 맞는다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데반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로 주장을 한 것이고, 스데반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진리를 기초해서 논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기 생각대로 하는 논쟁과 진리에 근거한 논쟁은 수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스데반이 그렇게 말씀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말했을 뿐 아니라, 헬라 철학이나 여러 종교들을 믿는 사람들과 논쟁할 정도로 지적 수준이 뛰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일을 말했을 뿐 아니라, ‘지혜’ 즉 헬라 철학과 종교와 역사의 지식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던 지성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지식을 가진 스데반이었지만 자기 지식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고 예수만을 선포했습니다.
2) 거짓으로 고소하는 사람들과 거기에 합세한 사람들
그랬을 때 유대인들이 다른 방법을 쓰게 됩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1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스데반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사람들을 매수해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모함합니다. 신성 모독으로 몰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합법적으로 스데반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해서 스데반을 끌어다가 공회에 세웁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2절)
처음에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던 자유인의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서 잡아 공회로 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종교지도자들, 특히 제사장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전하고 부활을 전하니까, 자기들의 기득권이 타격을 입을 것이 염려되어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굉장히 핍박한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단어는 ‘백성’입니다. 이제는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합세해서 스데반을 잡아 공회로 끌고 갔다는 말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백성까지도 가담을 하며, 또 그들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3-14절)
이제는 거짓 증인들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예수님께서 모세가 준 규례를 폐하고 헐어버릴 것을 설교했다고 위증을 합니다. “이곳” 즉 예루살렘 성전을 헐 것이라고 설교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여기에 백성이 다 합세를 합니다. 백성이 누구인지 이름이 안 나와 모르지만 그냥 다수, 즉 거기 있던 일반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인 그들이,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며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말도 안 되는 말, 도저히 믿기 힘든 이런 말에 흥분하며 달려들었겠습니까? 이들이 깊은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독을 당하시면 안 된다고 하며 스데반을 끌고 난리를 쳤겠습니까?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울처럼 자기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칠 정도로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왜 스데반을 제거하려 듭니까? 성전을 지키겠다는 그럴 듯한 명목 하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그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즘 예루살렘만 보아도 거기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안식월을 얻어 성지순례를 갖다 온 게 3년이 되었습니다. 그때 성지순례로 이스라엘을 가서 예루살렘에 가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고 하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에 예수님이 쓰러지셨던 대로 번호를 붙여놓았습니다. 저는 가기 전에 그 길이 아주 거룩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길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갔는데, 이건 무슨 남대문 시장 같았습니다. 길옆으로 전부 가게들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는 가게가 자리 잡을 수 없는데, 거기까지 상인들이 와서 물건을 사라고 호객 행위를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들을 그냥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장소들을 다 헐어 버리거나 폐쇄하려고 한다면, 자기들이 유대인이라고 예수에 대한 유적지를 다 없애겠다고 이스라엘 정부가 결정을 내린다면, 거기에 가장 반발할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상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입니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귀한 것들을 없애면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가 누구이고 예수가 도대체 뭔가에 대해서는 하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 허물어 버린다고 하면 반발할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돈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없애버리면 성지순례를 오는 그 많은 크리스천들이 안 오니까, 매년 수백만 명이 오는데 그들이 다 끊어지면 어떻게 돈을 벌겠습니까? 뭘 먹고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들의 돈주머니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보다 격렬하게 항의할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런 관점입니다. 여기 지금 스데반을 붙들어놓고 왜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상황이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사는 유대인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예루살렘 성전 순례는 아주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그러니까 매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서 그곳에 머물면서, 소나 양이나 새를 잡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하는 경비는 대단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소나 양을 끌고 오겠습니까? 율법에도 있듯이, 멀리 사는 사람은 돈을 가지고 와서 그것에 해당하는 돈으로 짐승을 사서 제물로 드려도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당시에는 일반 로마 화폐가 아니라 제물은 성전 돈으로 바꾸어 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제사장들의 수입이나 뒷돈이 얼마나 엄청나게 많았겠습니까? 깎아달라고 뇌물 주고,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하는데 흠 있는 것을 들여오면서 뒷돈 주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주변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데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치고 성전 덕분에 먹고 살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성전을 헐어 버릴 것이라고 스데반이 설교했다는 거짓 증인들의 모함에 왜 백성들이 그렇게 확 넘어갔겠습니까? 돈줄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나 세계 평화 같은 데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돈에 넘어갑니다. 아무리 진리라도 내 수입이 줄어들고 돈이 끊긴다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비진리라고 해도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온다고 하면 그리로 쏠리는 겁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나 무슨 경건함과 거룩함이나 성전을 지키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들의 돈주머니 때문에 스데반을 죽이자고 나온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이고, 또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지금의 모습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데 내 돈에 손해가 온다 해도 믿으시겠습니까? 여기 와서 한 번 예배드릴 때마다 천 불씩 내고 예배드려야 한다면 하시겠습니까?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배 오면 천 불씩 준다고 한다면 교회가 터져 나갈 겁니다. 여러분, 요즘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입니다. 돈이 가장 핵심입니다. 우리도 신앙인이라고는 하지만 돈에 얼마나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까?
백성들은 스데반이 정말 그 말을 했나 안 했나, 사실인가 아닌가 확인해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산헤드린 공회의 이름을 빌려서 합법적으로 스데반을 제거해버리려 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시는지 아닌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돈줄이 끊기게 생겼다. 우리 돈줄을 위협하는 이 놈을 처리해 버리자.’라고 쏠립니다. 오직 관심은 돈입니다. 그래서 다 한통속이 되어 스데반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달려듭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돈주머니를 주인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려고 합니다.
3. 천사의 얼굴을 지닌 사람
1) 천사와 같은 스데반의 얼굴
이제 사람들은 스데반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렇게 오해를 받고 있고, 사람들이 위증을 하고 공격을 하는데, 사실은 지금 뒤에서 사주하고 조종하는 사람들도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막 부추겨서 자기들의 눈에 껄끄러운 스데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런 공격 앞에서 스데반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5절)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날 텐데 참고 있을까? 앞으로 얼굴이 일그러질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표정을 지을 것인가?’ 지금 굉장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죽이려 달려드니까, 얼마나 억울하고 급박한 상황입니까? 죽음의 위기입니다. 이런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분노로 떨 것인가? 얼굴이 창백해지고 벌벌 떨 것인가? 일그러진 분노와 복수심으로 활활 탈 것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조금만 있으면 죽게 생겼는데 그 살기등등한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도 솔직히 힘들 것 같습니다. 만약에 누가 억울하게 저를 모함하고 고소하며,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고, 한 일을 안 했다고 하고, 하지도 않은 잘못을 지적하고, 억울하게 고소한다면, 그 사람을 보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느냐?’ 하며 복수심에 불타고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 여러분, 나를 고소하고 모함하는 사람들 앞에서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사실 천사를 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성화에서 보는 것처럼 하얗고 밝고 아기 같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얼굴이기만 했다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자로 천사가 등장할 때 밝고 좋은 소식만 전해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전하는 역할도 천사가 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의 얼굴은 시도 때도 없이 순결하고 하얗고 아기와 같고 해맑고 아름답기만 한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행하겠다고 하는 엄숙한 의지가 가득한, 결연한 얼굴 표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이 거짓 모함으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예수님의 복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진리를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스데반의 엄숙하고도 의지가 가득하며 결연한 표정을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표정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뜻대로 섬기겠다고 하며 열심히 섬기는 분들을 보면, 바로 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입니다.
그런데 엄숙하고 의지가 가득하고 결연한 표정, 투지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고 다 천사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도박장에 가서 당기는 사람도 얼굴에 의지가 결연합니다. ‘내가 이 술을 다 마셔 버리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아주 결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게임을 할 때도 옆에서 한 번 보십시오. 눈에서 막 불이 나오면서 ‘반드시 이루고야 말리라’는 표정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게 천사의 얼굴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결연한 표정으로 뭔가를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것, 주님의 말씀을 꼭 전하겠다는 것, 주님을 위해서라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표정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은 마귀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데반을 억울하게 고소하고 위증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 그를 없애려고 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마귀의 얼굴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모함하고 죽이려는 사람들, 거기에 합세한 백성들, 오직 탐욕으로 스데반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은 탐욕의 얼굴이고 마귀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광명의 천사’를 가장해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꾸미고 가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진짜 아름다움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말겠다는 의지 때문에 나오는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볼 때는 별 볼 일 없고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천사의 얼굴을 지닌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라도 마귀의 얼굴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돈주머니나 세상 것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를 구주와 주인으로 모신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진리를 지키려는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늘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하실 때, 마치 제 3자로서 내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이 보십시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가? 드라마를 보거나 예능을 보거나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실실 웃는 모습이 자기는 좋아서 그러겠지만 옆에서 보면 천사와 같은 얼굴은 아닙니다. 또 세상의 어떤 이득을 위해서 다른 사람과 머리 터지게 싸우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원망할 때의 얼굴 표정을 보십시오. 정말 마귀의 얼굴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침에는 천사의 얼굴로 집을 나섰는데 밤이면 마귀의 얼굴이 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체크해 보아야겠습니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천사와 마귀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로 인해 ‘내가 왜 이러지?’ 하고 괴로워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천사의 얼굴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표정이 흐트러질 때 서로를 돕는 겁니다. ‘요즘 얼굴이 왜 그러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세요?’ 목장에서도 나누고, 부부끼리도 나누고, 친구끼리도 나누고, 성도끼리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2) 천사의 얼굴을 가지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해주는 것은 너무 간단합니다. 스데반처럼 되면 됩니다. 스데반처럼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권능과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면 됩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모습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십니까?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7장 60절)
스데반은 돌에 맞아 억울하게 거짓 증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습니다. 아니 사형 선고도 아니고, 사람들이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런데 죽어가면서 죽기 직전에 한 말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급박한 상황이니까 크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이 누구의 기도였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천사의 얼굴로 살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무슨 철천지원수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억울하게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또 그 뒤를 따랐던 스데반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억울하지만 용서하는 그 사랑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서운하면 그 사람을 안 봅니다. 조금만 섭섭하면 다 끊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맞는 사람과만 어울리고, 그러다가 또 서운해지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없습니다. 용서하는 사람만이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성령 충만할 때,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면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보려 애쓰는 삶, 오늘도 말씀을 듣고 결단했으면 일주일 동안 그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애쓰는 삶, 그런 삶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에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렇게 될 때에만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불러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마귀의 얼굴, 탐욕의 얼굴을 내던지고 천사의 얼굴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도 그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나 결연한 표정으로 가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 바로 그러한 천사와 같은 얼굴을 지닌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