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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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5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1 ✦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 모세”
(사도행전 7장 17~36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보통 헤어지면서 많이 하는 말이 “내일 봐요.”일 것입니다. 어제 만난 분들과는 “내일 뵈어요. See you tomorrow.”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순수 우리말에는 원래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어제’라는 단어와 ‘오늘’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순수한 우리말인데, 오늘의 다음 날인 내일은 우리말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한자 ‘올 래’ 자와 ‘날 일’ 자로 된 ‘내일(來日)’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점심’을 뜻하는 고유의 한국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침에 먹는 밥은 우리말로 ‘아침’이고, 저녁에 먹는 밥은 그냥 ‘저녁’입니다. 그런데 아침과 저녁의 중간에 먹는 밥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새참’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해도, 그것은 비정기적인 식사를 말하는 것이지, 아침과 저녁처럼 매일 정기적으로 먹는 식사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역시 한자어인 ‘점심(點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일’과 ‘점심’을 가리키는 순수 우리말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너무 가난해서 수천 년 동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 끼 먹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했기 때문에 점심을 먹거나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지만 내일에 해당되는 우리말이 없고, 아침과 저녁은 있지만 점심은 없는 것입니다. 또 다시 힘겹게 뚫고 나가야 할 고달픈 오늘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가 이제는 너무 형편이 좋아져서, 하루 세 끼 식사가 아니라 네 끼 또는 다섯 끼를 먹기도 하고 간식까지 먹으면서, 점심과 내일이라는 한자어가 마치 원래 우리말이었던 것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는 너무 과거에 매여서 산다는 것을 많이 봅니다. 과거에 너무 매여 있고, 현재에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을 성실하게 살아야만 내일이 보장되지만, 성실히 사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너무 과거에 매여 있고 현실에 집착해서 내일을 못 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삶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역시 너무 과거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왕년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라는 게 있는데, 왕년에 너무 매여 있다 보니까 지금이 부족하고 미래는 별로 생각을 안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가장 좋은 표시가 간증입니다. 간증은 꼭 필요한 것인데, 거창하게 앞에 나와서 삶 공부 간증, 세례 간증, 구원 간증을 하는 것만 아니라, 매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역사하셨는가를 자랑하는 게 간증입니다. 목장에서 감사제목을 나누며 지난주에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해주셨다고 나누는 것도 다 간증입니다.
그런데 간증이 정말 의미가 있으려면 지금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면서 그것이 미래로 이어져야 합니다. 과거 1.4 후퇴 때나 광복 때 어땠다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지만, 거기에만 머문 채 미래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어제의 믿음이 오늘과 내일로 이어지지 않게 되어서 신앙의 성장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간증은 생생한 간증이어야 합니다. 한 달 넘으면 간증으로 치지 말아야 합니다.
방금 너무나 은혜로운 간증을 했는데 얼마 후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니까 언제 그런 간증을 했느냐는 듯, 너무나 쉽게 절망에 빠지고 너무 쉽게 신앙생활을 떠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어제 나와 함께 하시며 역사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가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 나의 내일을 새롭게 빚고 계시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귀한 간증을 해놓고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그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되고 바르게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오늘의 결과이고,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가 쌓여서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의 수준이 내일의 수준을 결정하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을 성실히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제의 기초 위에 굳게 서서, 영원의 시각으로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데반의 설교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이었고, 특히 오늘 나오는 모세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길어서 우리는 조금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모세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로 봐서도 길게 나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고소를 당했기 때문에 모세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입니다.
1. 이집트 왕자의 출생의 비밀
1) 이스라엘에게 닥친 고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7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게 뭡니까?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기 어려운 약속이었지만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여겨주시며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는데, ‘약’ 자가 ‘언약’이나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약속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약속은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약속을 하면 때가 되어 그것을 지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인간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수를 써도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느리게 오지 않으시고 빨리 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빨리 되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천천히 움직이시는 것 같고, 우리는 나중에 되면 좋겠는데 당장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야곱 가족이 요셉을 통해서 일종의 가족이민 초청을 받아서 가나안으로부터 이집트로 이민을 왔습니다. 이집트의 총리(2인자) 가족이니까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이집트에 정착하면서 아주 좋은 땅에 살고 잘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좋게 시작한 이민생활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스러운 노예생활로 바뀝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18-19절)
성경을 읽을 때 마치 동화나 신화처럼 대충 읽을 수 있는데, 사실은 생생한 역사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나와서 이집트의 왕조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이집트 제18왕조의 창시자인 아흐모세 1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일부러라도 그 전에 있던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새로운 왕조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급속도로 번성해서 수가 많아지니까 위협을 느끼고, 이 새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를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노예로 일을 힘들게 시키면 수가 늘어나는 것이 적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도와는 달리 고된 노동을 하는 중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고 더 번성했습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아이를 잘 낳으며 번성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여자 아이면 살려주고, 남자 아이면 나일 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잔인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그 후의 투트모세 1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것도 힘든데 금방 낳은 아이를 강에 던져 죽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에게도 아기들이 태어났지만, 그런 귀여운 아이를 강에 던져 죽이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2) 모세의 부모의 믿음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0절)
모세가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힘든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모세도 태어나자마자 나일 강에 버려져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환경 탓, 남의 탓을 많이 하지만, 사실 모세만큼 환경을 탓할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절망 중에서 소망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인간이 볼 때는 나갈 길이 없고 다 끝났다고 보는 상황이, 하나님께는 최고의 상황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세 달 동안 길렀습니다. 100일 정도에 아기가 얼마나 귀엽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실 왕의 명령을 어기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들키면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까지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른 것인데, 이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마침내 아이를 강물 위에 둡니다. 그냥 보면 모세의 친부모도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기 위해 아이를 버렸으니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만약 자기가 살기 위해 아이를 버렸다면 처음에 버리지 왜 세 달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길렀겠습니까?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의 이야기가 기록된 출애굽기 2장을 보면,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고 되어 있습니다(출 2:2). 단순히 외모가 잘생겨서 버릴 수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방금 읽은 20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모도 귀엽고 잘생겼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부모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아기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뭔가 영적이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 아이는 단순히 그냥 낳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특별히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서, 목숨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킨 것입니다. ‘믿음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그를 석 달 동안 숨겨서 길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믿음으로 3개월 동안 길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아이를 나일 강에 흘려보내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이를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부모로서의 인간적인 집착을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아이를 통해 분명히 뭔가를 이루실 텐데, 우리가 더 이상은 이 아이를 기를 수 없으니, 이제 하나님 손에 이 아이를 맡긴다.’고 하며 강에 떠내려 보낸 것입니다.
자녀를 바라볼 때 우리도 이런 눈이 필요합니다. 모세의 부모처럼 믿음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너무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성적도 좋고 리더가 되면 좋아하고, 성적이 안 나오고 점수가 떨어지면 ‘어휴, 쟤는 어디서 나왔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아이를 높게 또는 낮게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아이를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부모로서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이를 보면서 ‘어휴’ 또는 ‘아이고, 내 머리야’ 하면서 괴로워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실 겁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다 커도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말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까 답답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부모가 할 일은 다른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뿐입니다. 내가 뭐라고 한다고 아이가 그리로 갑니까? 내가 낳은 아이도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적인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아이를 향해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신데 나는 계속 이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라 내 욕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아이를 맡기면, 흘러가는 나일 강 속에서도 그 아이가 이집트 공주에게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적합한 최고의 미래로 인도해주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내가 한다고 아이가 잘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부모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게 아니고, 아이를 위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의 아이는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 혹시 지금 당장은 약간 잘못 가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은 돌아옵니다. 내가 기도하는 부모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3) 극적인 반전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1-22절)
버려진 모세를 바로의 딸이 데려다 키웠다고 너무 간단히 되어 있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일 강이라는 데가 동네 개천 같이 작은 곳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바다 같이 넓고 물결이 치는 큰 강입니다. 그뿐 아니라 악어나 하마나 물뱀 같은 맹수들도 많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여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모세의 부모가 갈대상자에 역청을 바릅니다. 그리고 갈대상자에 넣어 물에 띄우는데,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그 누이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하필 이 아기를 거기에 둔 그 시간에 바로의 딸인 이집트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이 상자를 발견했다는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확률적으로 얼마나 됩니까?
게다가 이집트 왕궁의 목욕탕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그 좋은 데를 두고 이 공주가 불편한 나일 강으로 와서 목욕할 생각을 했습니까? 그리고 수많은 지류가 있고 맹수들도 많은 큰 강인 나일 강에서 어떻게 모세가 담긴 갈대상자가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이집트 공주가 왔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확률적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못 보는 사이에 뒤에서 너무도 치밀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디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일이 풀립니다.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일이 됩니다. 어디를 갔다가 정말 우연찮게 누구를 만납니다. 이런 게 우연입니까?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못 보는 사이에 너무나 엄청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28의 말씀입니다.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셔서 모든 것이 다 선하게 되도록 역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참 희한한 일은, 이집트 공주의 아버지 바로 왕(투트모세 1세)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했는데, 그 딸은 아버지의 말을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딸로서 ‘우리 아버지가 명령하셨으니까 죽여야지’ 하고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죽이지 못하겠으면 그냥 강물에 떠내려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 아들로 삼았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공주는 역사적으로 핫셉수트라는 대단한 여자군주였습니다. 핫셉수트는 자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정적이 되는 투트모세 3세를 견제하기 위해서 마침 발견한 이 아이를 자기 아들로 삼아서 붙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야심, 정치적인 견제심리, 자기가 왕권을 차지하겠다는 욕심까지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선을 이루십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도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또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며, 서로 외교적으로 많이 싸우고 무역전쟁도 벌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큰일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 끝나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의 야심을 통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집트 바로 왕의 명령이 안 통하는 곳이 이집트 땅에 없는데, 모세가 가장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곳이 왕궁 안입니다. 밖을 바라보면서는 여러 명령을 하지만, 자기가 사는 왕궁 안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쓰니까, 그 안에서 자라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모세가 받은 교육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당시 아주 강대국이고 문화의 중심지로서 이집트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입니까?
이집트 공주의 손에 의해서 모세가 건짐을 받고 왕자로 들어갔다는 것은 모세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미래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을 뿐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시는 뜻으로 이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던 이집트 문명의 최고를 흡수하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모세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뛰어난 학문, 지식, 무술, 행정, 정치, 경제, 문화에 통달하는 왕자로서 교육받고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친부모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교육을 시키겠습니까? 아니, 노예가 어떻게 이런 것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중에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의 첫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성경 전체로 보아도 약 1/5 정도나 되는 엄청난 분량인데, 이런 방대한 내용을 쓸 수 있도록 미리 교육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해서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도 버릴 게 없습니다. 심지어 내가 큰 실수를 하거나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겨도, 그것조차도 우리 인생에서는 버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도 사용하십니다. 만약 우리 능력이 부족하다면, 노예인데 공주의 아들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면 그것을 감당할 준비도 시켜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처절한 실패와 무명 생활
1) 구원자가 되려다 살인자가 된 사람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3-25절)
이제 모세가 잘 자라서 40세의 건장하고 늠름한 장년이 되었습니다. 그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지는데, 이스라엘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을 그가 본 것입니다. 노예가 이집트 사람에게 핍박을 당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고 매일 벌어지던 일이었는데, 그날따라 모세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는 이집트 최고의 학문을 공부한 엘리트였을 뿐 아니라, 이집트 최고의 무예를 배운 사람입니다. 군사적으로도 장군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무술의 고수였습니다. 그러니 순식간에 이집트 사람을 제압했고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모세는 자랑스러운 마음도 들었을 겁니다. ‘야,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가 자기들을 구원하러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알겠지? 노예 신분인 사람들이 어떻게 이집트 사람에게 대항하겠어? 내가 대신해주었으니 고마워하고 내 말을 듣겠지?’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스스로 의기양양해져서 그 다음날 또 나갔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어서 화해시키려 합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6-28절)
모세는 가서 “형제끼리 싸우면 됩니까? 사이좋게 지내세요.”라고 했는데, 오히려 때리던 사람이 모세를 밀치면서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하면서 오히려 따지고 대듭니다. 무섭게 덤벼듭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집트 왕자에게 감히 어떻게 노예가 달려듭니까?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알았으니까 이렇게 대드는 겁니다. 그 사실을 가지고 모세에게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모세를 함부로 대합니다. ‘너나 우리나 똑같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왜 너 혼자 잘난 체해?’라는 마음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자기들은 엄청나게 힘들고 고생하는 노예인데, 모세는 왕궁에서 곱게 자라고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니까, 마음속에 엄청난 분노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와서 ‘내가 너희들의 구원자다.’라는 태도로 나오니까 얼마나 열 받겠습니까?
사실 이런 때가 우리에게도 종종 있습니다. 순수하게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오히려 저쪽에서 강하게 반발하여 아주 당황스러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녀에게도 잘되라고 이야기해주었더니 설교 좀 그만하라며 반발합니다. 그래서 당황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내가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나오면 마음이 아프고 당황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모세는 그보다 훨씬 더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억울함과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찼겠습니까? 이집트 왕자로서의 신분과 능력을 믿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자가 되어 보겠다며 스스로 나섰지만, 결과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동족들의 반발을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고 살인이 드러나니까 정신없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맙니다. 사실 그때 자기 뒤를 봐주던 양어머니 핫셉수트가 실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잘 지내야 하는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니까, 그 다음 바로 왕인 투트모세 3세가 자기를 어떻게 할 것 같아 도망을 간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비전이 분명하다고 해도 내 능력과 내 열심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을 잘하고 아무리 뭘 갖다 바쳐도 사람의 마음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바꾸십니다. 모세는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2) 광야에서의 훈련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29절)
40세의 모세는 인생의 절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생기고 총명하고 용맹하고 리더십도 있고 행정력도 있고 무술도 잘하는 최고의 리더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를 부르셨다면 그는 ‘하나님, 사람 참 잘 보셨습니다. 그렇죠.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접니다, 저!’라고 나왔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스라엘 혈통이 드러나게 하시고, 살인을 통해 광야로 도망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왕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유명하지 않은 여인과 결혼하여 40년 동안 목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세에서 80세는 한참 일할 나이입니다. 열정도 있고 경험도 있고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생의 황금기에 모세를 푹 썩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도록 하셨습니다. 자기가 능력이 있고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완전히 고꾸라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부르셨습니다.
4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근육도 크고 체격도 좋고 강하고 자신만만했던 이집트 왕자가, 머리도 하얗게 세고 늙고 약해진 노인이 된 것입니다. 수천의 병거를 거느리며 말을 타고 낙타를 타던 장군이, 장인의 양 떼나 치는 무기력한 목동으로 떨어졌습니다. 장인 이드로 밑에 살면서 자존심도 얼마나 많이 상했겠습니까? 그곳 음식을 먹으면서도 옛날 음식 생각이 얼마나 났겠습니까? ‘내가 이런 걸 먹고 있다니’ 하면서 얼마나 신세가 처량했겠습니까?
처음에는 막 분하고 억울하고 울화통이 터지고 잠도 못자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와 절망의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려 40년입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살다가 가나 보다.’ 하며 포기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신 광야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최고의 제자훈련 및 신앙 훈련 학교입니다. 광야는 낮에는 불같이 덥고 밤에는 얼음 같이 추운 곳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 외롭고 억울하고 위험하고 배고프고 서러운 곳입니다. 광야에서 우리의 자존심이 완전히 부서지는 곳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쓸데없는 것들을 다 버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잘나갈 때 내게 붙어서 아첨하던 기회주의자들은 다 떨어져나가고, 진정한 친구만이 남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리더를 세우시기 전에 광야를 거치게 하십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성취되는 사이에는 반드시 인내의 기간, 광야의 시간이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우리는 다 빨리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문에 화제의 인물이라고 나는 것을 보면 ‘최연소’라고 나는 게 많습니다. 그런데 빨리 된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빨리 마쳤는데 부실공사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긴 시간을 거치게 하시면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 힘든 광야에서 인내를 배우게 하십니다.
혹시 지금 광야의 기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잘 안 되고, ‘내가 이제 여기서 이러다 끝나나 보다’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80세에 모세를 부르신 그 역사가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나는 다 죽어버린 그때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3. 하나님의 도구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0절)
40년이 그저 지난 게 아니라 ‘찼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40년 동안 훈련시키기로 작정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40년이 되어 때가 되니까 부르셨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보이셨는데, 사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목자 생활을 하면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장면은 너무 흔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가 본 것은, 분명히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이 붙었으면 타서 다 없어져야 되는데 타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세가 다가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주 와서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고 말씀 보고 대화하는 것,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일하고 하는 것은 매일 하는 똑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똑같은 중에 비범한 하나님의 역사를 캐치해낼 수 있는 사람,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의 제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내 삶이 똑같은데, 그 똑같은 것 중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를 잡아내는 것, 나에게 역사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감사의 제목을 뽑아내는 것이 영적인 실력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1-33절)
하나님의 영광이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까 신을 벗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결국 ‘나에게로 오라. 그런데 조심해서 오라.’ 하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이것은 회개와 정결의 명령입니다. 세상에서 묻혀온 모든 죄의 먼지들을 떨어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능력이 많고 재주가 많아도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 주님의 종으로 쓰일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둘째,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미움과 절망과 욕심과 분노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습관과 인간관계와 취미생활과 집착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포장된 길을 맨발로 걸어도 발이 아픕니다. 카펫은 괜찮지만 아스팔트만 걸어도 발이 아픕니다. 그런데 자갈과 돌과 가시가 많은 땅을 걸으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신발은 인간의 발을 보호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신을 벗으라는 것은 결국 무방비 상태가 되라는 말입니다. 거칠고 뱀도 나오고 전갈도 나오고 뜨거운 광야에 맨발로 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주 조심조심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겸손히 나아오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4-36절)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은 너무 힘들고 괴롭더라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무엇보다 지금 우리와 함께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를 돕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 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영적 리더의 길입니다. 이전의 모세에게 혈기는 있었지만 이런 하나님의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급했고 거칠고 강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런 모세의 모습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마음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애굽으로 너를 보내리라!’라고 하십니다.
[나가는 말]
아주 오래 된 한국의 대중가요(소위 ‘뽕짝’) 중에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오늘 내가 걷기는 걷는데, 어디로 갈지 정처 없이 그냥 걷는다는 이런 것이 나그네 설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사는 나그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 설움> 노래에서 말하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땅이 고향이 아닌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이 땅이 고향이 아니라,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행자라고 표현하는 게 어떻게 보면 더 맞습니다. 아니, 출장을 온 겁니다.
이 땅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영원히 살 곳, 돌아갈 우리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지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출장을 온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출장을 보내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매일 그저 오늘도 걷지만 정처 없이 걷는다고 하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되는 대로, 내 쾌락에 따라서, 내 욕심에 따라서 살겠다고 하다가 인생을 끝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저 영원한 하늘나라, 우리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날 우리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길 때까지,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그 목적을 붙들고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또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에 순종하며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