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8년 7월 8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0 ✦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조상들”
(사도행전 7장 1~16절)
[들어가는 말]
요즘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러시아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워낙 축구를 좋아해서, 평소에는 케이블이 없다가 월드컵 때만 신청해서 보고 또 끊었습니다. 이전에는 1년 계약을 요구했었는데 요즘은 자유롭게 했다 안 했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케이블이나 위성 통신이나 인터넷 TV들을 보면 채널수가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도대체 뭘 봐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많은 채널들을 넘기다 보면 어떤 방송들은 1초 만에 다음으로 넘어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송이 나오면 즉시 채널을 돌리십니까? 아마도 무용을 하는 채널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발레나 현대무용을 하는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넘기게 됩니다. 발레는 그나마 고전적인 내용들이 있고 복장도 멋지기 때문에 잠시 이게 뭔가 하고 볼 때도 있습니다. 그 움직임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현대무용은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넘겨 버립니다. 특히 남자 무용수들의 복장은 정말이지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언젠가 현대무용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평소와 같이 그대로 돌려버리려 하다가 복장이 너무 특이했기에 신기해서 잠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보통 공연이 한 시간 이상 되고 대개 80분에서 90분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90분 동안의 몸짓을 다 외워서 그렇게 매번 공연을 합니까? 매번 공연을 할 때마다 100% 똑같이 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음악은 악보라도 있지만, 무용은 다 외워서 해야 되는데 놀랍습니다. 어제는 한 작품, 오늘은 다른 작품, 내일은 또 다른 작품을 공연하는데, 어떻게 그걸 다 외워서 합니까?
그런데 무용수들이 80~90분이나 되는 공연에서 전체의 의미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따라가니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를 다 외우려 하면 잊어버리게 되고 틀리게 됩니다. 그러나 전체의 의미를 파악해서 그 의미 가운데 내 손짓 하나가 무슨 의미인가를 알고 하니까 된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별 의미 없이 하는 행동들은 다 기억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전체의 그림을 그리고 그 의미를 확실히 알고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한다면, 그것을 계속 훈련한다면, 우리도 똑같은 몸짓을 한 시간 이상 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생도 비슷합니다. 지금 7월 둘째 주일인데, 그러니까 올해도 벌써 하반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올해도 6개월이 지나고 반이 남았습니다. 지난 6개월을 돌아보십시오. 2018년 1월 1일이 된 것이 불과 엊그제 같은데, 지난 6개월 동안 뭘 하고 살아왔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별로 기억이 나지도 않는데 한 해의 반이 지났다면, 나 자신이 지난 6개월 동안 별로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참된 의미가 있는 삶을 살지 않는 한, 우리는 그저 자신의 욕구만을 따라 사는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삶은 우리 인생에 쌓이는 것도 아니고, 기억되지도 않으며,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욕구를 따라, 쾌락을 따라, 욕심을 따라, 자기 생각만을 따라 사는 삶은 마치 물거품과 같습니다. 실체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참된 의미를 추구하는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러면 지난 6개월 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만한 삶으로 도대체 뭘 살았나?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아직 6개월이 남아 있습니다. 올해 남은 6개월 동안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뭔가 들고 갈 만한 것을 만들어내는 이 6개월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스데반의 설교의 구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 들고 갈 것이 있었던, 의미 있었던 삶을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합니다. 7장은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설교인데 아주 깁니다. 그래서 간단히 넘어갈까 하다가, 아주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7장 전체를 나눠보면, 스데반의 설교가 2절부터 50절까지 나옵니다. 아주 긴 메시지입니다. 구약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의 방대한 분량을 단 50절로 압축해서 요약하여 아주 귀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2절부터 16절까지로, 창세기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17절부터 41절까지인데,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실 때 모세를 사용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로, 42절부터 44절까지 민수기와 신명기를 요약했습니다. 넷째로, 45절은 여호수아서의 긴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46~47절은 사무엘부터 역대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48~50절은 에스겔부터 말라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스데반이 지금 공격을 받아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온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선포했는지 놀랍습니다. 정말 스데반은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나온 다음에 말씀을 전한 게 아니라, 갑작스럽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술술 나왔습니다. 정말 그는 성령과 권능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1-2절)
대제사장이 사실이냐고 물으니까 스데반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구약을 죽 설명하는데, 먼저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것을 ‘변증’이라고 하는데, 믿음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마다 복음을 듣는 대상에 따라 전하는 방식을 달리한 것을 봅니다.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갔을 때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의 문화, 철학, 문학의 중심지였던 아덴(아테네)에 갔을 때는 그들이 헬라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구약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참 종교성이 많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절하고 있다.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지 내가 알려주겠다.’라고 하면서 접촉점을 찾아서 복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스데반도 왜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막 외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70-80년대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할 때 노방전도라고 해서, 길에 나가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요즘까지도 번화가에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점점 그런 방식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습니다. 부담감을 주고, 전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에게 여쭤보면 대개 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 친구, 친척, 가족 중에 예수님을 믿으라거나 교회에 나오라고 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중간에 그런 사람들이 아예 없었던 게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왜 아무도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을 합니까? 거부감이 들었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내용이나 예수님에게 거부감이 든 게 아니라, 전하는 방식, 즉 나를 모르면서 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고 가는 것이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사귀고 친해지면서 예수님을 믿어보라고, 교회에 나오라고 했을 때 나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요즘 개인주의화가 되면서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며 혼자 하는 것이 많아지는 이때에, 그런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우리의 말만 하고 끝나는 전도방식보다는, 먼저 사귀고 친해지면서, 그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마음과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섬기면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목장으로 안 믿는 분들을 초대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도 전혀 씨가 땅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딱딱한 길가에 씨만 뿌린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일을 해서 딱딱한 그 땅을 갈아엎어 좋은 땅으로 만든 다음에 씨를 뿌리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외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하면서 씨를 뿌리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듣는 사람에 따라 접촉점을 아브라함으로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이 하셨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3-4절)
여러 가지 내용들이 나오는데, 먼저 2절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그(아브라함)에게 보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먼저 움직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둘째로, 3절에도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셨는데,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셋째로, 4절에도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에서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라고 지시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 땅으로 옮긴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스데반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지만,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해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전했던 첫 번째 메시지가 바로 이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필요 없고, 내가 알아서 한다.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것은 나태함이고 게으름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지만 막 기적으로 다 해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일을 통해서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했는데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하시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 신비합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잘해서 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하셨구나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모르면서 하나님께 사용 받는 사람들이 있고, 알면서 사용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악한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도 있고, 선한 일에 사용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셨고, 그것도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내가 알아서 믿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믿게 해주셨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구원해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신 것은 나를 통해 뭔가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그 길로 따라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
스데반이 전해주는 아브라함에 대한 두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이 인간을 인도하실 때 반드시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부르셔서 점프하게 하시는 게 아니라, 중간에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먼저 고향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원래 고향이 ‘갈대아 사람의 땅’, 즉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데, 그곳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 일가친척이 사는 그곳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들은 고향 땅에 한 번이라도 가보는 게 소원 아닙니까? ‘내가 죽은 다음에 고향에 묻어 달라.’라고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타지에서 살다가도 죽은 뒤에 고향에 돌아가 묻히고 싶은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우리 환경은 우리가 떠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면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이 바로 고향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태어나 살던 곳을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간적으로 의지하던 것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고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계시고, 일가친척이 있고, 형제들이 있고, 자기 편리한 게 있고, 자기를 도와주는 많은 익숙한 것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의 역사를 이루며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러한 익숙한 곳, 자기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을 먼저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믿음의 사람에게는 약속의 땅이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시는 세 번째 말씀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 가는 약속의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수요예배도 있고, 새벽기도도 있고, 수시로 집회도 있습니다. 예배 때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헌금하고, 나가서 서로 봉사하고 섬기고, 평소에 혼자서도 기도하고 말씀 보고, 삶 공부도 하고, 목장도 모이고, 구제도 하고, 남들도 돕습니다. 왜 이런 일들을 합니까? 그냥 교회이니까 하는 게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활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이 모든 활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을 과정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목표를 향해 나아가서 그 약속의 땅에 이르도록 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를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데 안 가면 고생하게 됩니다. 가야 할 때는 가고, 멈추라 하실 때는 멈추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목적지로 가다가 중간에 잠깐 머물다 가는 하란과 같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5절)
너무 놀랍게도, 약속의 땅으로 갔는데 발붙일 만한 땅을 유업으로 안 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하셨는데 어디로 가라고는 안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름대로 기도하고 생각하다가 갔는데, 하나님이 거기 나타나셔서 여기가 맞는다고 하셨습니다. 맞으면 그 땅을 주셔야 하는데 땅을 안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때로는 이해가 안 갑니다. 참 묘합니다. 약속의 땅에 왔으면 땅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가라고 하셔서 순종했고 이제 왔으니 주셔야 하는데 안 주십니다. 그럼 약속의 땅에 대해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결국 굴 하나 산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약속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실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무 자식도 없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아내와 같이 삽니다. 그런데도 ‘내가 너에게 후손을 줄 것인데, 그것도 셀 수 없을 정도의 후손들을 줄 것이니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따르며 그것을 믿었기에 그것을 인하여 그를 의롭게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뤄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이 땅을 떠나는 분들에게 실감이 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마지막 죽기 직전의 순간이고 얼마 있으면 죽는데, 이 땅에서 그렇게 땀 흘려 모았던 돈과 재산과 물질과 명예,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학위, 그렇게 애쓰며 올라가서 성취한 높은 자리 같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보다 장례식을 크게 한다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죽는 건 똑같습니다. 이 땅에 묻히는 건 똑같습니다.
지금 큰 집에 살며 누워 있고, 수많은 땅이 있고, 빌딩들도 많고, 공장들도 있지만, 딱 한 달 밖에 더 살지 못한다면, 그 많은 재산과 건물과 화려한 지위 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의 물질에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할 때 그것을 물질적으로 생각하면 실망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런데 내 지나친 욕심으로 물질을 추구하다 얻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정말 쌓아야 할 것을 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의 부요함에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높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6-7절)
지금 스데반이 말하고 있는 사건들은 구약에서 역사적으로 다 일어나고 성취된 사건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인데, ‘네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다. 종이 될 것이다. 400년이나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내 후손이 이 다음에 400년 동안 고난을 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집트는 아주 뛰어난 문화를 지닌 강대국인데, 75명밖에 안 되는 야곱의 가족들(이스라엘)이 이집트에 가서 400여 년 동안 살면서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군대만 60만이 될 정도로 엄청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곳이 마치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그냥 있었으면 다 죽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거기 내려가게 하셔서 민족이 수적으로 불어났을 뿐 아니라 고난과 괴로움을 당하게 하심으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8절)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들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는 겁니다. 할례의 언약이라는 것은 사실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아브라함은 당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주셨습니다. 자녀도 없는데 앞으로 할례를 행하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순종하며 믿음으로 따라간 것을 하나님이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적을 경험하며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아들들을 낳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데 하나님이 가능하게 해주시는 것, 없는 것 같은데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이런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경우에 내 이성으로 나 자신을 제한해버립니다. ‘내가 그 동안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이건 될 수가 없다. 내가 가진 지식에 의하면 이건 될 수가 없다. 내 전문분야에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이건 될 수가 없다.’라고 합니다. 내가 못하니까 하나님도 못하실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못하니까 하나님도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날을 조금만 돌아보아도, 정말 길이 없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열어주신 게 너무 많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인도를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못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못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게 필요합니다.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믿음의 눈으로 보면 놀라운 신비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녀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괴로운 부모님이 계십니까? 물론 부모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나를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혹시 말을 안 듣고 반항하고 내가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장성한 자녀가 컸다고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믿음의 길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공부도 안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걱정할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의외로 부모님들이 자녀의 문제가 있는데도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면서 걱정만 하고, 야단만 치고, 잔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겁니다. 물론 기도만 하면 다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내 자녀를 맡기는 겁니다. 사실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맡기는 겁니다. 내 방식으로 자꾸 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보자고 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며 그저 내 방식대로 살다가 끝나는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위대한 주님의 일을 하고 성취하는 교회가 될 수도 있고, 반면에 아무것도 안 하고 전통에 파묻혀서 무덤 같은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바로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해서 위대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뿐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그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했기 때문에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 예배에 왜 오십니까? 잠깐 와서 설교 듣고 기분 좋아지고 위로받기 위해서 오십니까? 진정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함께 마음 모아 예배하고 함께 만나며, 또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내 인생을 어떻게 위대하게 쓰려고 하시는가를 발견하고 그 뜻을 붙들며 나가 행하겠다고 결단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필요합니다. 실천을 하기 위해서 삶 공부도 하고 목장도 모이고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방법을 배우고 훈련해서, 실제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해보자는 것입니다.
3. 사명자 요셉
이제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끝낸 다음 요셉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 극적인 인생에는 뜻이 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9-10절)
스데반이 스피드를 내며 빨리 넘어가는 것은 듣는 사람들이 이 내용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아주 극적인 인생입니다.
종종 90대 권사님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내가 1.4 후퇴 때 총 안 맞고 왔고, 숟가락 하나 들고 왔다.’라고 합니다. 미국에 오신 분들도 서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옛날에 오신 분들은 ‘내가 미국에 올 때 딱 100불 들고 왔어.’라고 하면, ‘되게 많이 갖고 왔네. 나는 50불 갖고 왔는데.’라고 하며 더 적게 갖고 온 것을 자랑하며 서로 경쟁(?)을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극적이고 힘들었지만 반전의 인생을 산 사람이 요셉입니다. 사실 이것이 강제 이민인데, 형들에게 팔려 노예로 왔으니 얼마나 괴로운 인생입니까? 이집트에서 바로의 신하였던 보디발 장군에 팔리고, 열심히 일해서 인정을 받으면서 이제 인생이 좀 펴나 보다 했더니, 그 아내의 유혹을 거부하여 감옥에 억울하게 갇히고, 감옥에서도 배신을 당하고, 잊혀진 인생이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 자기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팔렸으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도 마음이 아픈데, 내 형제자매에게 배신을 당하고 사기를 당했다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 인생이 끝날 정도로 노예로 팔렸으니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형제에게 당한 배신은 참기 어려운 일인데, 요셉이 17세의 나이에 그런 배신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참 놀라운 인물입니다. 신실함을 잃지 않습니다. 어떤 위기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잔꾀를 부리거나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요셉의 인생입니다. 그러다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그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갔습니다. 눈에 실제로 보인 건 아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흐름이 그의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입니다.
2) 우리 인생을 통한 하나님의 진짜 목적을 찾으라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1-14절)
하나님은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대신(바로 다음의 2인자)이 되게 하셨는데, 요셉이 그렇게 성공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땅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성공했다고 하며 하나님이 축복해주셨다고 이야기하는데, 맞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있으셔서 그렇게 올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게 끝이 되면 타락합니다. 사람은 틀림없습니다. 성공을 했는데 거기서 끝이면 그때부터 타락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나를 왜 여기에 올려주셨나?’ 하고 생각하며 나가면 타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그가 확실히 알았습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갔을 때, 우리 자녀가 나중에 잘됐을 때, 거기서 끝난다면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지고, 자살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거기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공하고 그렇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총리 자리까지 올라간 것은 자기 형들과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총리가 되어서 아주 지혜롭게 행함으로,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가족들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왔습니다. 그래서 만나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아주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 있는가 원망도 됩니다. 반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를 높여주시나, 내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잘되나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자리에 놓으셨나?’ 아주 힘든 자리에 내려갈 때도 ‘하나님이 지금 왜 이것을 내게 허락하시는가?’를 찾아야 하고,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도 ‘하나님이 왜 나를 여기에 두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온 중동 지역에 흉년이 든 것은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아버지를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총리대신이 되게 해주셨고, 흉년까지도 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살려내시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3) 인생은 결국 죽지만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15-16절)
‘인생은 한 줌의 흙이다.’라고 보통 말합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흙이 되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주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하고 파란만장하고 아주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해도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성공적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삶을 살았다 해도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정말 한 줌의 흙에 불과한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왜 믿겠습니까? 왜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보겠다고 선하게, 신실하게, 또 고난까지 겪으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생애는 아브라함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 후손에게 있었습니다. 바로 그 후손에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런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인생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인생이 그랬듯, 비록 우리가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 나그네로 살다가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게 이 땅의 인생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뜻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자녀에게로 전수되고, 우리 자녀에게서 또 그 자녀에게 전수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며 위대한 믿음의 가문이 되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살면서 어떤 말 한마디를 하고 행동을 하나 하더라도 그런 의미를 생각하며 해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언젠가는 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어제 유승자 성도님 천국환송예배를 드렸는데, 이 땅에서 입고 사시던 육신의 장막을 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영혼은 하나님 품에 안겨 계십니다.
우리가 입고 사는 이 몸은 언젠가 이 땅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내 자녀들과 친지들이 와서 나를 위해 천국환송예배(장례예배)를 드려줄 것입니다. 그럼 그 예배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 순종의 삶,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같은 삶이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축복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끔 보면 물거품도 있고, 아이들이 비누로 크게 부는 방울도 있습니다. 반면 진주 같은 것은 값비싼 보석이지만 아주 작습니다. 다이아몬드도 작습니다. 그런 작은 보석이 있고 큰 거품이 있습니다. 뭘 선택하시겠습니까? 크다고 거품을 선택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것들이 그런 거품입니다. 그런데 크고 좋고 화려해 보인다고 거품을 선택하고, 작다고 진짜 보석을 무시해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매일매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품을 선택하지 않고 진짜 보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무엇을 선택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당연히 보석을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것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며 저 하늘나라, 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