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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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2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5 ✦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
(사도행전 8장 14~25절)
[들어가는 말: 안수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세례식을 거행했는데, 세례를 할 때나 임직을 할 때 안수를 합니다. 안수(按手, laying on of hands)라는 것은 어떤 인격적 존재가 다른 대상의 신체 부위에 손을 얹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짐승에게 안수하는 경우도 있고, 인간이 인간에게 안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첫째,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거나 속죄를 위해 바칠 때 제사장이 짐승에게 안수하고 잡거나 광야로 떠나보냅니다.
둘째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그들에게 안수합니다(창 48:14). 보통 장자를 오른손으로 안수하니까 장자 므낫세를 오른손 앞에 놓자, 야곱은 손을 엇갈려서 오른손으로 차자 에브라임을, 왼손으로 장자 므낫세를 안수합니다. 그러면서 에브라임이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자를 처단하기 직전에 그의 머리에 안수하고 벌을 내립니다(레 24:14). 그리고 레위 족속을 성별하거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서 리더가 되는 임직식 때 안수합니다(민 8:10).
신약 성경에도 그런 예들이 있는데,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실 때 안수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막 10:16). 또 병자들의 치유를 위해서 안수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안수와 상관없이 병을 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낫는 사람을 위해서 만지시면서 병을 낫게 해실 때가 많았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시력을 잃었을 때 아나니아가 가서 사울에게 안수함으로 시력이 회복되게 했습니다(행 9:17-18). 사도 바울은 나중에 로마로 가는 길에 멜리데(몰타) 섬에서 추장인 보블리오의 아버지에게 안수하여 병을 고쳐주었습니다(행 28:8).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행 8:17; 19:6-7).
또한 공동체가 일꾼을 임명할 때도 안수했습니다. 6장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구제사역을 위해 일곱 명의 일꾼들을 뽑을 때 그들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행 6:5-6). 선교를 위해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을 때에도 그들에게 안수하여 파송했습니다(행 13:2-3).
1. 사마리아 사람들의 회심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점
그런데 오늘 교리적으로 아주 문제가 될 수 있는 사건 하나가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은 아직 받지 못했는데,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기도하며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성경 다른 데 이런 식으로 성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경우가 19장에 나오는데, 에베소 사람들에게 바울이 안수하니까 그제야 성령이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행 19:6-7)
그러나 19장에서 에베소 사람들에게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내리신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아직 온전히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8장의 사마리아 사람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이것은 아주 해석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마리아의 성령 강림 사건, 즉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내리신 사건은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4-16절)
첫째로, 왜 사도들(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를 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 상태는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한 사람도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16).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성령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롬 8:9; 갈 3:2-3).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에는 뭔가 특이한 배경이 깔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을 받음에 있어 꼭 누군가의 안수가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될 때 성령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꼭 누군가의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세례를 베풀었는데, 오늘 세례를 받으신 교우님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 순간 성령을 받는 것이지, 그때 하나님이 성령을 붙들고 계시다가 오늘처럼 세례를 베풀며 안수를 할 때 성령이 내리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도 이미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오순절에 믿은 3천명도 성령을 선물로 받았지만(행 2:38) 모두가 안수 받았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이방인(로마사람)인 고넬료의 집에서도 역시 안수와 상관없이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행 10:44-45). 베드로가 아직 말씀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안수와 성령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의 경우는 예외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왜 빌립의 안수로는 안 되고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의 안수가 필요했습니까? 성령을 받기 위해 누군가의 안수가 필요했다면, 빌립도 얼마든지 안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를 하고 이로써 성령을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7절)
이 사마리아의 성령이 오신 사건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정상적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동시에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경우에는 두 가지 사건, 즉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는 일과 성령이 임하신 일이 시간 차이를 두고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처럼 두 단계에 걸친 사마리아인들의 회심과 성령 체험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원칙입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분명히 8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의 체험이 실제로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아직 성령은 안 내리시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하니까 그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분명히 두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회심과 세례 이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 것이 구원에 있어 일반적인 일인가?’ 예수 믿고 크리스천이 되어 구원받는 그 순간 아직 성령이 안 오시고 조금 후에 오시는 게 일반적인 일인가 하는 것을 집고 넘어가야겠습니다.
2. 이 사건에 대한 여러 견해들과 올바른 해석
원래는 오늘 이것을 간단히 하려다가, 아무래도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 책을 읽으며 정리한 것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겠습니까? 종교개혁자들도 이야기했고, 그 전의 교부들도 이야기했고, 요즘 신학자들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크게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두 단계로 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게 아니라 두 단계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단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이라고 하는 소위 ‘두 단계 입문’의 입장에서는, 첫 단계는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회심과 물 세례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 후에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견해는 소위 ‘한 단계 입문’의 입장인데,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회개하고, 믿고,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는 한 단계의 사건이며,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일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두 단계 입문
먼저 구원이 두 단계로 온다는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은 교회의 양쪽 끝에 있는 두 그룹의 주요 증거 본문입니다. 그 한편은 로마 가톨릭과 일부 성공회이고, 다른 한편은 ‘오순절’파입니다. 둘은 서로 굉장히 다른데도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둘 다 그들의 믿음, 즉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두 단계로 되는 것인데, 두 번째 단계 즉 성령을 받는 것은 기도와 안수를 받을 때 되는 것임을 이 본문이 증명해준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로마가톨릭에서는 크리스천이 되는 첫 단계가 세례라고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도들의 계승자로 간주되는 주교(bishop)의 견진성사로서 주교의 안수를 통해 성령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오순절파도 역시 두 단계를 주장하는데, 가톨릭과는 좀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첫 단계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인간의 행위로서의 회심, 그리고 거듭남과 새로운 출생이라는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중생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첫 단계는 회심과 중생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소위 ‘성령 세례’라고 하는데, 종종 오순절파 지도자들이 안수하거나 특별 기도를 해줄 때 성령이 내리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학자들은 두 가지 다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일은 성경의 명백하고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 한 단계의 체험입니다. 그 단계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다 받고, 그 이후에는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해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에 의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단계에 걸친 체험을 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상황은 사도들의 안수와 함께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식으로든, 오순절파 식으로든, 오늘날 우리를 위한 원칙이 될 수 없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2) 한 단계 입문
전체가 다 한 단계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의 체험조차 비록 두 단계처럼 보이지만, 첫 번째 단계나 두 번째 단계 중 하나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중에도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1) 한 단계 입문의 첫 번째 의견
첫째는, 사마리아인들이 경험한 첫 단계(빌립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믿은 것)는 참된 회심이 아니었고, 다만 상상해서 회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았다고 하지만 지적으로만 동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14)고 되어 있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였지, 진짜 믿은 게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은 중생, 곧 새 생명의 시작을 가져오는 성령을 받지는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절에서 빌립이 전도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을 믿은’(12)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ey believed Philip”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그냥 빌립을 따랐다고 봅니다. 게다가 신약 시대에는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었기 때문에, 결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체험한 두 번째 단계(성령이 내리신 것)가 사실은 그들의 첫 번째 크리스천이 되는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빌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리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지는 못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마술사 시몬의 신앙고백이 엉터리였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최초에 보인 반응이 가짜였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의 사역에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4-8). 그리고 빌립이 말씀을 전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을 믿었다’고 할 때, 빌립이 전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지, 그게 꼭 빌립 한 개인을 믿었다고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누가는 또 그 단어를 다른 곳(2:41과 11:1)에서 사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빌립 개인을 믿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빌립의 사역이나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표시를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2) 한 단계 입문의 두 번째 의견
한 단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두 번째 그룹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정말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 순간 성령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최초에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이미 성령을 받았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다른 표현이었다고 봅니다.
16절에 보면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특별한 은사나 은혜를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누가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고, 반면에 성령이 그들에게 ‘내린다’는 것과 같은 말로 성령을 ‘준다’, ‘받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5, 17-19절). 이는 그들이 두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받은 것이 최초로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임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3) 올바른 해석: ‘이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허락하신 사건이다’
그러나 두 단계이든 한 단계이든, 그 어떤 논리도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런 견해들에 대해 헷갈리십니까? 그럼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둘 다 만족스럽지 못하느냐 하면, 누가는 첫 단계를 진정한 회심으로, 그리고 둘째 단계를 최초로 성령이 주어진 것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성경은 사마리아에서 두 단계에 걸친 그리스도인이 되는 단계가 일어났다고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설명은 이 사건이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통상적인 가르침과 그들의 통상적인 관례에서 이 사건이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2장)에 따르면,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 그래서 회개하고 믿고 세례 받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2:38-39).
바울도 자신의 편지에서 베드로의 말을 뒷받침해줍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자녀들에게 그분의 영, 즉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말은 이 글을 쓴 사람이 바울과 동행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몇 부분만 “우리”라고 나오지만, 사실 누가는 대부분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38-39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선포를 기록한 당사자가 바로 누가입니다.
그러므로 16절에서 그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아직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약간 의아하고 놀랍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뿐’이라는 말은 그 두 가지, 즉 회심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 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고 늘 그렇게 함께 일어났는데 이상하다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도들이 하던 일과는 굉장히 벗어난 일입니다. 누가는 이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검토해보기 위해 두 핵심 리더들을 대표로 파견했다고 14절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나 보자고 하며 일일이 다 쫓아다니면서 검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데는 이런 경우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다른 경우에 사도들이 가서 상황을 조사하거나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 그들이 추가로 ‘우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8장 첫 부분에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스데반의 순교 후 교회에 대한 큰 박해 때문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을 때(1, 4), 흩어진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제대로 전했는지 보자고 검사한 게 아닙니다. 또 다음 본문인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26-40)에 있어서도, 사도들이 쫓아와서 조사하거나 인정해준 게 아닙니다. 사도들이 지중해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쫓아다니며 복음이 전해지는 데마다 검사하고 인정해주었다면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빌립의 사역을 면밀히 조사하고 확증해주기 위해서 공식적인 사도 대표단을 보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 경우에 왜 성령께서는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빌립을 통해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일을 보류하고 계셨습니까?
빌립의 가르침이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표시는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그가 전한 말씀을 따랐으며, 귀신들이 쫓겨 가고 병이 낫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런 역사가 일어났다고 곧 빌립이 한 일이 완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후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8).
정말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큰 기쁨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었는데 하나도 안 기쁘다.’라고 하는 분이 있다면, 내가 정말 믿은 것인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 중 하나가 기쁨입니다. 정말 믿었으면 기쁘게 되어 있습니다. 안 기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기쁨이 없겠습니까? 그런 것이 회심의 결과로 나오는 겁니다.
만일 빌립의 가르침이 불완전했다면 사도들이 와서 그 가르침을 보완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인데(18:24-26), 실제로 아볼로라는 사람이 말씀을 에베소에서 가르쳤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보고 뭔가 불완전했는지 그를 불러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불완전했으면 사도들이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한 일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선물이 늦게 주어진 것에 대한 가장 자연스럽고 타당한 설명은, 이것은 복음이 예루살렘 외부뿐 아니라 사마리아 내부에 선포된 첫 번째 경우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전개에서 굉장히 중요한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간에 위치한, 일종의 중간점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마리아 사람들의 회심은 마치 이방인을 부르신 것의 첫 열매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오게 되니까 물꼬가 터져서 복음이 이방 지역으로 펴져가는 첫 열매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이유 때문에 서로 완전히 원수인 상태였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경멸하면서 개돼지만도 못하게 취급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교회가 섰는데, 만약 사마리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전혀 상관없이 발전해버린다면, 교회의 하나 됨이나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를 수행하는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마리아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볼 때 사마리아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지도자 중의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해서 그들을 통해 안수했을 때 성령이 오셨고, 비로소 그때 사마리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너희와 우리는 하나다.’라고 인정해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상하관계라기보다는 ‘너희의 믿음은 참 믿음이다. 우리는 같은 주님을 믿는 한 형제자매다.’라고 인정해주는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일과 아주 비슷한 일은 이방인들이 가장 처음 믿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11장에 보면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로마사람입니다. 고넬료가 회심했을 때, 베드로를 청해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또 나중에 시리아 지역에 있는 안디옥에서 헬라(그리스)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신뢰할 만한 사람인 바나바를 보냅니다(11:20-24). 바나바가 사도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가서 케어해주는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원수처럼 지낸 것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마리아 사람들이 놀랍게도 복음을 듣고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겁니다. ‘어떻게 사마리아도 복음을 듣지?’ 하고 깜짝 놀랍니다. 누구나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도 복음을 듣고 믿었대!’ 하고 말할 만큼 굉장한 사건인 것입니다.
‘이제 복음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들어갔지만,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게도 환영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파벌이 생길 것인가?’ 이것이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얼마나 분열을 잘합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원래부터 원수였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었다고 해도, 이 두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위험성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볼 때,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이 사마리아 회심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를 아주 잠시 보류하고 계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을 조금 보류하셨다가 나중에 주셨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왜 그렇게 하셨는가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의 하나 됨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크리스천 신앙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 하나님 잘 믿으면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귀찮고 보기 싫으니까 끊고, 그냥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간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 됨을 중요시하시면, 이렇게 잠시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류하실 정도로 서로 원수 같던 유대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기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계속 지체하신 게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고서 바로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정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계명,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질 때 이웃과의 관계로 그 사랑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된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껄끄러우니까 멀리 떨어져 앉고, 마음에 안 맞으면 다른 교회로 가고, 서로 흩어지고 분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같은 공동체 안에 껄끄러운 사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옆으로 밀어놓고 ‘나 혼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보고, 예배 열심히 오고, 그냥 그 사람만 안 보며 멀리 앉고, 그럼 되지.’라고 한다면, 이런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굉장히 슬퍼하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성령이 두 단계로 오신다.’ ‘아니다, 한 단계다.’라는 게 아니라, 이것은 교회가 그토록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2. 마술사 시몬의 가짜 회심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18-19절)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니까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어떻게 내리신 것을 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을 했는지, 뭔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시몬이 즉석에서 지갑을 열어 돈을 주면서 ‘그 희한한 능력을 나에게도 파십시오.’라고 한 겁니다.
시몬은 원래 마술사인데, 악령에 사로잡혀 마술을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예수 믿습니다.’ 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전에 마술을 할 때는 값이 얼마나 비싸든지 상관없이 자기 마술을 잘할 수 있는 도구나 책이라면 지체 없이 사들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나도 저런 능력을 주십시오. 나도 안수하면 성령이 내리시는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한 겁니다.
이것만 보아도, 다른 사마리아 사람들이 정말 예수 믿고 세례 받고 회심하고 구원받은 것과는 달리, 시몬의 회심은 가짜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진짜로 믿은 게 아닙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정확히 지적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0-21절)
“이 도”, 즉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돈의 힘을 더 신뢰해서 성령님의 임재마저도 돈으로 사려고 하고 만사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니까,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의 태도냐?’라고 지적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의 죽음 이후를 책임져주지 못하는 돈의 힘만 믿다가, 그 돈 때문에 결국 죽음 후에 멸망하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죽음 이후에 우리를 책임져줄 수 없는 것에 너무 목숨을 걸고 사는 게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죽은 다음에 돈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명예, 성공, 학위, 학벌, 집안 좋은 것, 외모 등, 아무것도 못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가져가지 못할 것들에 너무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질책만 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의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2-23절)
여전히 마음이 악독과 불의로 가득한 시몬에게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기도하면, 여기 한국말로는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며 ‘혹시’라고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앞에 있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말은 회개하고 기도하면 ‘혹시 용서를 받을지 모르겠다.’라는 뜻이 아니라, ‘회개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용서해주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하라’는 단어가 평소에 신약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많이 쓰이는 헬라어 단어 대신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통상적인 ‘기도’라는 단어 대신 ‘묶다, 붙들어 매다’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주께 기도하라’고 한 것은 ‘너 자신을 주님께 묶어 두어라. 네 마음을 완전히 주님께 동여매라. 완전히 주님을 붙들어라.’ 하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인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이것과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는데, 위기상황에서 항상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주님이 명령하셨다는 겁니다.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답게 지킬 수 있는 길은, 기도를 통해 완전히 자신을 주님께 붙들어 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시몬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24절)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꽉 붙들어라! 완전히 너 자신을 주님께 동여매라!’ 그런데 마술사 시몬은 ‘내가 기도하는 게 아니고 당신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시몬에게 기도하라고 했더니 ‘니들이 해줘’ 이러고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실에 기도제목을 내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도제목을 내실 때 ‘나는 기도를 안 하지만 중보기도 헌신자들이 기도해주겠지’라고 하며 내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제목을 내실 때는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있으니까, 나를 위해 이렇게 기도해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보기도 헌신자들은 기도하고 있는데 나는 놀고(?) 있으면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먼저 기도해야 하고, 자기가 정말 주님을 꽉 붙들고 자기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동여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25절)
시몬이 그의 삶을 바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그냥 떠났습니다. 그것을 볼 때, 시몬은 안타깝게도 주님께 회개하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신 두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것을 원하시는구나’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은 8월 둘째 주일인데, 하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올해도 어느덧 4개월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결심으로 지난 새해맞이연합예배(송구영신예배) 때 새해를 시작한 것 같은데, ‘내가 이 2018년도를 제대로 살아보리라’고 결심했지만, 지금 7개월여 흐르면서 그 결심이 잘 지켜지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내 삶이 전혀 변화가 없는 건 아닙니까? 아니, 주님 보시기에 오히려 더 악화가 된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면, 아니면 더 악화되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하긴 하는데, 그저 내 소원, 내가 바라는 것만 살짝 기도해서 그런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 붙들고 완전히 동여매지 않고는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시몬과 같이 안타까운 결말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자기 자신을 정말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가? 아니면 이 시몬처럼 예수 믿는다 하고 고백도 하고 세례도 받았지만, 혹시 진짜 믿은 것이 아닌 경우는 아닌가?’ 이것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혹시 지난 7개월여 동안 시몬처럼 잘못 살았다 해도, 아직 하반기에 4개월 이상 남아 있습니다. 이 4개월 남은 이 기간을 우리가 믿는지 안 믿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그런 삶으로 계속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동여매면서 매일매일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나 됨을 이루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 주님의 복음이 증거 되는 놀라운 역사로 사용해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