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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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6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12 ✦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
(요한복음 5장 16~19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1980년대에 방송국 기자로 일하던 사람이 하루는 독감에 걸려 도저히 출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열이 섭씨 40도 가까이 올라서 너무 아팠습니다. 그렇게 누워서 헤매고 있는데, 새벽 5시쯤 하늘 같은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고, 수화기 너머로 엄청난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야, 이 XX. 네가 환장했구나. 이 XX가 어디라고 지금 방구석에 드러누워서 아직 연락도 안 하는 거야? 죽고 싶어서 미쳤냐?” 3분쯤 욕설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마무리 짓는 말이 들렸습니다. “너, 이 XX. 지금 당장 나와! 나와서 죽어. 기자실에서 죽으면 순직이고, 집에서 죽으면 자연사야. 빨리 나와. 나와서 바로 전화해.” 그러고 나서 전화가 뚝 끊겼습니다.
이 사람은 그 선배 밑에서 경찰서를 출입하며 6년 동안 사건기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도 선배가 되었고, 어느덧 후배에게 그 선배와 똑같이 욕을 해 댔습니다. 오히려 ‘청출어람’이라고, 3분 동안 숨도 쉬지 않고 자기에게 욕하던 선배보다 더 심한 욕을 속사포처럼 퍼붓는 나쁜 선배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는 집에 들어가는 둥 마는 둥 죽도록 일하면서 거의 매일 코피를 쏟았고, 눈은 독기로 가득했습니다. 얼마나 독했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기자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웬만큼 번듯한 직장이라면 대충 일해서는 버틸 수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낙오되고 맙니다.
1. 예수님은 노동이 힘들다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평범한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막 6:3)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목수’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은 목수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목수 일은 지금의 건축노동자 일에 가까웠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작은 마을에 속하는 촌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예수님은 목수 일을 나사렛에서만 하시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셨거나, 적어도 갈릴리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세포리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20대 초반이었을 AD 20년에 헤롯 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황제의 도시 티베리아스를 건축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수로서 그곳에서도 일하셨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이 추측합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부터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많이 하셔서 일하는 데 익숙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을 많이 감당하실 수 있었는지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늘 부지런하게, 그리고 빈틈없이 일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로 사역을 시작하셨고, 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셨으며, 종일 쉬지 않고 일하실 때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동기와 태도를 잘 아셨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왜 그 일을 하는가를 가장 먼저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제사 드릴 때, 구제할 때, 봉사할 때, 또 기도하고 금식할 때도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한 동기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꿰뚫어 보시고 단호하게 지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바른 동기로 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일의 바른 목적과 동기를 정하는 것이 영성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2. 회복을 위한 일은 안식이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식일에 관해서도 독특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일과 안식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예수님은 마치 안식일 계명을 일부러 무시하거나 없애려는 듯 혼자 일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이 보실 때 안식일은 이미 쉼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정작 안식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도 일부러 안식일에 불치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처음부터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워 있던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병자는 애타게 기다리던 물의 움직임이 진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물에 먼저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며, 병자로서 치유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환자에게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명령하시자, 놀랍게도 그 병자는 즉시 나아서 자기가 누워 있던 자리를 걷어서 가지고 걸어갑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나무랍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요 5:10)
사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아니, 지난 38년 동안 중풍으로 앓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안식일에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강퍅합니까?
그는 자신을 낫게 한 이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다고 대답합니다. 나중에 그렇게 치유해준 사람이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되자, 모든 비난의 화살이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도록 명령하신 예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6절)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따졌을 것입니다. “왜 하필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소? 도대체 당신이 누군데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7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더욱 격분하게 됩니다. 안식일을 어긴 것도 괘씸한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더욱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18-19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6일 동안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씀을 근거로 누구나 안식했고, 또한 안식일을 지키라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계명을 정면으로 어긴 것으로 보이는 예수님께 받았을 그들의 충격과 분노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도대체 누구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는 말인가? 하나님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얘기를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일과 쉼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갇혀 진정으로 안식하지 못했습니다.
요즘도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 버튼조차 누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가 모든 층에 멈추도록 미리 조치해 놓습니다. 심지어 가스레인지 불도 켜지 않는데, 그것도 일이라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반발할 것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왜 하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까? 그 전날 하셔도 되고 그다음 날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 12:8)
바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이니까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주인이기에 안식일의 참 의미가 뭔지를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과 안식을 어떻게 구분하시기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깨뜨리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안식이란 회복을 뜻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안식은 거룩함의 회복이라고 하십니다. 회복을 위한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이며, 노동이 아니라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자에게 병이 낫고 회복되는 것보다 더한 안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병든 이웃을 돕는 것보다 평안한 안식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에 분명히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신 5:12)라는 명령이 있는데, 예수님은 왜 굳이 이 계명을 깨뜨리려고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까? 원래 안식일 규정은 430년간 노예 생활을 한 이스라엘을 광야로 불러내어 노예로서의 삶의 리듬을 깨뜨리고 자유민의 삶을 심어 주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매일 아침 식탁에 올려야 할 만나도 못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안식일 규정은 더 이상 쉼이 아니라 일상의 가장 큰 부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안식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쉼의 본질은 회복입니다. 엿새간 자기중심으로 살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회복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중심이 회복됩니까? 자기 필요만을 위해 사는 삶에서 벗어나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사는 것이 곧 회복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소방관이 화재를 진압으로 출동하거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경찰이 달려가거나, 의사가 응급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고 왜 주일성수 하지 않느냐고 뭐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흑백논리로 밀어붙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주일에 빠지면서 괜찮은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일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과 회복을 위해 일할 때 그것도 안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3. 일 속에 사랑을 불어 넣으라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하나로 통합하셨습니다.
“37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 (마 22:37-40, 새번역)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이 사랑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이루는 것이 곧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불치병 환자들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습니다. 불치병 환자들에게는 진정한 쉼이 없습니다. 항상 병에 매여 있는데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고통을 벗겨 주심으로써 그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참 안식을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쉼을 주기 위해 자기 쉼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안식일 율법 규정에 묶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쉰 적이 있으시냐? 하나님이 피곤하여 아침에 해 뜨는 것을 잠시 멈추거나 몇 주간이나 휴가를 떠나셔서 대기에 산소가 희박해지게 한 적이 있으시냐?’ 사랑에는 쉼이 없습니다. 생명에도 쉼이 없습니다. 회복시키고 사람을 세우는 것은 일이 아니라 쉼과 안식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목수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다가 서른 살이 되자 세례 요한을 찾아가십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에 나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곳에서 인간 본성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그러고 나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목수로 일하시던 때나 공생애 시절에나, 쉴 새 없이 일하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일하는 삶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일을 해라.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해라.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라. 영혼을 회복시키는 일을 해라. 이 일에는 안식일이 따로 없고 쉼이 따로 없다.” 사실 예수님이 하신 것은 일이 아닙니다. 사랑이고,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지난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보다 더 많이 가졌던 때가 없습니다. 먹는 것만 해도 요즘 사람들이 조선 시대 왕들보다 더 잘 먹습니다. 뷔페(buffet) 식당에 가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식욕을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차려 놓은 음식을 한 번씩 맛봐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시달립니다.
그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하면서도, 이 시대 사람들은 더 기쁘거나 더 건강하거나 더 인격적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많은 일을 해서 많은 것을 쌓았는데도, 예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의 영성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일과 삶이 분리되고, 일과 가치가 분리됨으로써 인간은 노동으로 인해 소외되고 소모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복을 원하십니다. 진정한 안식을 원하십니다. 일로 인하여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관계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이상 죽음을 부르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우리는 일의 참 의미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우리는 쉼과 안식의 참뜻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진정한 일과 진정한 쉼으로 초청하십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
세상 일이 쉽진 않지만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 일이 내게 기쁨이 되며 나 자신뿐 아니라 남도 회복시키는 생명의 사역이 됩니다. 일터에서 어떤 마음 자세로, 또한 어떤 동기와 중심을 가지고 일하느냐를 예수님이 항상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일에 사랑을 불어넣으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죽도록 일할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먹고사는 데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주님과 함께 일과 영성의 균형을 갖춘 일터를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듯이 일터에서 누군가에게 생명을 전할 때 이웃의 회복이 일어나며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임할 것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생명의 일, 빛의 일, 소망의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성이 없는 일은 생명도 빛도 소망도 없습니다. 일과 영성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일터에서는 직원으로 일하고 교회에 오면 크리스천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우리 삶이고, 그래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있든 똑같은 모습과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영성이고 바른 영성이 있을 때만 바르게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남을 회복시키는 교회에서의 사역이 되고, 가정에서의 삶이 되고, 또 일터에서의 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