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P1RhuqCm5sU?si=O7baGHeiAwmI_BNN&t=87
2023년 10월 4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5 ✦
일을 통해 사람을 얻는 지혜
(사무엘하 23장 13~17절)
[들어가는 말]
이 시대에 일터는 전쟁터와도 같습니다.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전의를 다지며 출근합니다. 직장에서 어떻게 버텨 내나, 어떻게 해야 승진할까, 어떻게 하면 주도권을 잡고 승기를 움켜쥘 수 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합니다. 그래서 곁에 가면 머리가 팽팽 도는 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보통 직장인도 그렇지만, 윗사람들은 더합니다. 어떻게 해야 아랫사람들을 맘대로 부릴 수 있는지, 어떻게 교육해야 잘 복종할지, 어떤 보상 체계를 만들어야 스스로 죽도록 일하며 충성할지, 어떻게 해야 수익을 크게 올릴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짜내려고 애씁니다.
자본주의의 두 축이 무엇입니까? 돈과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두 축은 효율성과 생산성입니다. 효율적이라면 사람은 얼마든지 기계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AI(=Artificial Intelligence), 즉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더더욱 사람의 역할이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요즘은 목사보다 AI가 더 좋은 설교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조직에서는 ‘일’과 ‘관계’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일입니다. 조직의 목적을 생각하면 그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자본 수익의 극대화를 이루었지만, 인간 소외의 극대화라는 어두운 결과도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전장과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세한 처세술을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늘 당하고 양보하고 뒤처져야 합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고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신앙과는 별개로 세상 논리를 따르며 세상 법칙대로 살아야 합니까? 많은 사람이 이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나서 세상 것을 다 버리는 길을 선택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착하고 무능한 사람은 세상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서 수년 전부터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소위 신앙이 좋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범적인 청년들은 직장을 잡아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그만두거나, 세상을 죄악시하면서 교회 안으로만 들어오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반면, 세상에서 열심히 하여 잘나가는 청년들은 교회에 제대로 나오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 심지어 신앙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청년들은 사회에서 실패하고 교회에만 있고, 사회에서 잘나가는 청년들은 교회를 잘 안 나오고 신앙을 떠나니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1. 실력과 영성을 동시에 갖춘 사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해야겠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이 말씀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전도하도록 내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둘 다 갖추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과 싸우게 되었을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나가서 싸웁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돌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팔을 각각 붙들어 올리게 도왔고, 그러자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전쟁에서 어떻게 이겼습니까? 기도하며 동시에 싸워 이겼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싸운 끝에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만 해서 이긴 것도 아니고, 싸움만 해서 이긴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없이 싸움만 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또 기도만 하고 싸우지 않아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싸워야 이깁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는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실력과 영성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갖춘 사람과 둘 다 갖춘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둘 다 갖춘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발탁한 사람입니다. 그가 왕의 눈에 처음 띈 것은 찬양 실력 덕분이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귀신이 떠나고 사울의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또 다른 실력이 사건의 발단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물매 던지는 실력이 온 이스라엘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던 모양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은 키가 무려 2미터 90센티미터나 되는 어마어마한 거인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간 형들에게 식량을 전해 주러 갑니다. 그가 도착해서 보니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군대는 벌벌 떨기만 하지, 그중 그를 상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거룩한 분노에 휩싸인 다윗은 사울 왕의 허락을 받고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돌멩이 다섯 개를 들고 나가 골리앗에 맞섭니다. 그리고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 정 중앙을 맞추어서 쓰러뜨립니다. 그래서 그토록 무서운 장수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것은 참 좋은 일인데, 문제는 다윗이 이 일로 인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기가 날로 높아져 가자 사울 왕이 괴로워합니다.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가 못마땅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 18:7)
이 곡이 바로 ‘사천다만’(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입니다. 요즘 케이팝(K-Pop)이 인기인데, 당시는 이스라엘 팝인 아이팝(I-Pop)이 있었고 그 최고 인기곡이 바로 ‘사천다만’이었습니다. 잘 보십시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게 바로 걸그룹의 원조 아닙니까? 요즘 걸그룹이 다 춤추며 노래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여인들이 춤추며 노래했으니까 아이팝 걸그룹이었습니다.
다윗이 무슨 잘못을 해서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을 너무 잘해서 미운털이 박혔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군대를 보내는데, 다윗은 피신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전국에 다윗을 지명 수배합니다. 다윗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다윗은 숨을 만한 동굴이 많은 유대 남부 지역의 광야를 전전합니다. 다윗이 숨어든 아둘람 굴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다윗과 함께한 사람이 4백 명이나 되었는데, 대다수가 압제를 받고 억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인품에 반하여 그에게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훗날 이들이 통일 이스라엘을 이끄는 다윗의 주축 세력이 됩니다.
다윗은 쫓기다 못해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는 모압 왕에게 도망가기도 하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로까지 몸을 피합니다.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전사함으로써,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사울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다윗과 블레셋의 전쟁이 다시 벌어집니다.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3절)
이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23장에 다윗의 용사들이 나오는데,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즉 30명의 대장 중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 ‘세 사람’은 다윗의 ‘삼십 용사’ 안에서도 최고 엘리트 트리오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23장을 계속 읽어보면, 최고 엘리트 트리오가 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 번째 세 용사는 누구보다도 다윗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히 깊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4 그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블레셋과의 전쟁 중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있는 곳에 베들레헴 성문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배경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투가 언제 벌어진 전투였든지 간에 다윗이 블레셋과 대치하던 중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다는 겁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며, 예루살렘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블레셋과 가까워서 블레셋이 자주 쳐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우물은 다윗이 어릴 때 양을 치면서 물을 마시게 하고 자기도 마시곤 했던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물을 마시던 그 우물이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 중에서도 내 고향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혼자 말한 것뿐입니다.
이때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에 있었습니다(14). 그런데 놀랍게도 최고의 엘리트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달려가 우물물을 떠서 다윗에게로 가지고 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16a절)
그러니까 이 세 용사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인가를 보여줍니다. 아니, 아무리 왕이 원한다고 목숨을 걸고 가서 물을 떠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가는 길에 블레셋 군대를 뚫고 가야 하고, 또 다행히 물을 떴더라도 돌아오는 길에 다시 블세셋 군대를 뚫고 와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럼에도 ‘왕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조건 합니다.’라는 엄청난 충성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괜히 최고의 엘리트 트리오 세 명인 것이 아닙니다.
“16b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16b-17절)
다윗의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서 적진을 뚫고 들어가 베들레헴 우물물을 길어 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차마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어 드립니다. 그것은 부하들의 피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통해 다윗은 충성스러운 세 부하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물을 쏟고 관계를 얻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영성과 인격입니다. 작은 일 같이 보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다윗의 영성과 인격이 드러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솔한 한마디 말로 부하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일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 일과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명히 구분해서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는 다윗을 향한 부하들의 충성과 그런 부하들을 향한 다윗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다윗은 혼잣말로 시원한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렸을 뿐입니다. 부하들에게 물을 떠 오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부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은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물을 떠 왔습니다. 다시 말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물을 떠 온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충성심이며 사랑입니까? 만일 왕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대부분 군인은 왜 우물물을 길어 올 수 없는지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이 일이 제발 나한테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마음을 졸이면서 슬슬 눈을 피할 것입니다.
2. 일을 통해 사람을 얻고 관계를 살리다
다윗은 실력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그의 실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실력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하와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생명을 아끼는 태도를 보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길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부하들이 사울을 죽이자고 설득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면서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또 시글락에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전 재산을 빼앗고, 모든 사람의 가족들을 납치해 가자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그때 어디로 갔는지 몰라 난감할 때 광야에서 죽어 가는 한 애굽 소년을 만났습니다. 다급한 추격 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소년에게 물과 음식을 주고 생명을 살렸습니다. 아말렉 족속이 버리고 간 애굽 소년의 도움으로 결국 추격에 성공하고, 빼앗긴 것을 전부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때 엄청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던 다윗은 아말렉 족속을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브솔 시냇가에서 낙오되었던 2백 명을 만나자 그들에게도 전리품을 똑같이 나누어 줍니다. 그와 함께 아말렉 족속을 끝까지 추격했던 장정 4백 명 중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불만을 터뜨릴 때 그들을 설득합니다.
“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삼상 30:23-24)
이것이 다윗의 리더십입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애굽 청년을 살린 것도 다윗답지만, 전리품을 똑같이 분배한 것도 그다운 일입니다. 그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그러한 그가 노래한 유명한 가사가 있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다윗은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실력의 원천이자 영성의 뿌리입니다. 그가 아둘람 굴에 피신했을 때 모인 사람들은 사회에서 버림받고 외면당하던 이들이지만, 그는 사람들이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자들을 사랑했고, 사람들이 품어 주지 않는 그런 자들을 품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러한 자들이 후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주축이 됩니다. 다윗이 사람들의 관점을 따르지 않고 늘 하나님의 관점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에서 만약에 다윗이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떠 온 물을 혼자 마셨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혼자 다 마시고 나서 ‘야, 정말 좋다. 시원하고 맛있구나. 한 잔 더 마셨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누가 다녀오겠느냐?’라고 물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흩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다윗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입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더욱 필요한 배려입니다. 우리가 지난 3년 반 동안 코로나 사태를 지나고 나왔는데,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어렵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서로를 배려하며 품어 주는 마음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을 통해 사람을 얻고 관계를 세우며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회복시키며 생명을 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과 시간과 물질은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사람을 돌보고,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다윗이 브솔 시냇가에 주저앉아 있던 200명에게까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리품을 나누었을 때, 그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일의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를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나를 버림으로 남을 얻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은 생애를 살기를 바랍니다. 그는 고난을 당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비전을 주고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나눔으로써 힘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내 것을 쓰면,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는데, 떨어져 죽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내가 죽고 내 것을 내어줌으로써 남을 살리는 인생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우리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