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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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5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7 ✦
영성은 매일의 삶 속에서 빚어진다
(창세기 39장 11~23절)
[들어가는 말]
영성에 관한 오해가 많은 만큼 영적인 삶에 관한 오해도 깊습니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면 언젠가는 영적인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를 알아맞히면 영적인 것입니까? 영적 기운이 강한 장소를 찾아 혼자 오랫동안 수행하거나 기도하면 누구나 영적이 됩니까?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심을 깨달으며 나아가는 것이 영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거듭난 후 비로소 참 영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심 전에도 바리새인으로서 누구보다 종교 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을 그토록 열심히 추구했지만 진정한 영성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자신의 전 인생을 헌신해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올바른 헌신도 아니었거니와, 도리어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가 영적인 삶에 눈을 뜨고서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곧 영적 예배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영적 예배’란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예배라는 뜻도 포함합니다. 논리나 이성과는 완전히 동떨어져서 무조건 뜨거운 것이 영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신비한 것만이 아닙니다. 몸은 예배드리려고 와 있는데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함께 있는 것, 몸과 마음이 함께 몰입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고 바른 영성입니다.
1. 영성은 일상에서의 몰입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주고 싶어 합니다. 전부를 주기가 아까워서 일부만 주려고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 마음 전부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우리의 몸만 앉아 있고 마음은 딴 데 가 있다면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실제로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기 마련입니다. 삶이 왜 타락하게 됩니까? 마음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연예인 중에 마약 때문에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마약에 먼저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빼앗기니까 몸도 따라가는 겁니다. 마음이 가 있는 곳에 언젠가는 몸도 따라가 있게 됩니다. 좋은 일에는 그게 잘 안 되는데, 타락하는 데에는 그렇게 됩니다.
이렇듯 영적인 삶은 몸 따로 마음 따로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 되는 시간입니다. 예배의 몰입을 한 번이라도 온전히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계속해서 예배를 사모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기쁨의 차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축구나 농구를 하는데 마음이 딴 곳에 있으면 공을 어떻게 제대로 다룰 수 있습니까? 무슨 운동을 하든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몰입의 상태여야 합니다.
사실 영성이란 일상 가운데서 몰입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거짓의 영성은 틈만 나면 거짓에 몰입하는 것이고, 음란의 영성은 종일 음란한 말과 생각에 자신을 내어주는 태도입니다. 반면, 바른 영성은 하나님께 몰입하여 한순간도 하나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자기가 24시간 내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자각에서 옵니다. 바른 영성을 지닌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일상생활은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몰입해 있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일상 중에 하나님께 몰입하여 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중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오랫동안 아기를 갖지 못하다가, 다른 아내들에게서 아들 열 명을 둔 뒤에야 라헬이 요셉을 낳았습니다. 야곱은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 형들에게는 한 번도 입히지 않았던 채색옷을 입힐 정도였습니다. 당시 물감이 귀했으므로 값비싼 채색옷을 아무나 입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요셉에게만 명품 옷을 입힌 것입니다.
그런데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사실상 장자가 요셉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어떻게 열한 번째가 장자가 됩니까? 게다가 요셉의 꿈 이야기가 형들의 미움의 불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곡식 단에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꿈 이야기가 형들을 분노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버린 후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죽은 것 같다고 짐승 피를 묻힌 채색옷을 가져가 거짓말합니다. 이것이 3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립니다(1).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너무 급격한 신분 하락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탈출하여 복수극을 펼치는 사람도 나올 수 있지만, 대부분은 자포자기하고 그냥 노예로 살다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노예가 된 뒤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는 자살하지도 않았고, 복수하지도 않았고,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요셉은 주어진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애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입했습니다. 이 몰입은 단지 타협이나 적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지금의 상황을 온전히 수용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가는 지극히 영적인 삶입니다.
성실히 일하던 요셉은 보디발의 눈에 들어서 그 집안의 가정 총무가 되어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됩니다. 얼마나 잘된 일입니까? 사실 요셉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보디발과 같이 높은 사람의 눈에 들었겠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함으로 형통한 것을 보디발도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잘되고 있었으나 또다시 뜻밖의 고난이 찾아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가 안 되니까 요셉이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19-20절)
이런 억울한 일을 겪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백을 주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보디발이 요셉의 말을 믿고 아내를 내쫓겠습니까? 만약 요셉이 이때 억울해하며 적극적으로 해명했다면 요셉은 아마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때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한 채 감옥으로 갑니다. 이 침묵은 온전한 수용이고, 또한 온전한 몰입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영성입니다.
이제 감옥에 갇혀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억울함에 못 이겨 감방에서 목이라도 매고 죽어야 합니까? 기회를 엿보다 탈옥하여 보디발의 아내를 처단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자포자기하고 죄수로 늙어 죽어야 하겠습니까?
요셉은 이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는 감옥에 갇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십니다.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21-23절)
요셉은 감옥의 일을 관장하는 전옥(典獄)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끔찍한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심을 깨달은 그는 옥에 갇혀서도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 틀렸다고 하면서 막 나가거나 함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의 일상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증거는, 그가 감옥에서 왕의 측근인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포자기하고 있었다면 그 사람들이 꿈을 꾸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몽해 줍니다. 그가 해몽해 준 대로 떡 굽는 관리는 처형되었고, 술 맡은 관리는 복권되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그가 풀려난 후 자기도 석방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나간 후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서운하고 화가 나며 절망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 됩니다. 일이 하나도 안 풀리고 소망이 없는데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인생은 이게 뭔가?’라고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때도 여전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일상에 함몰되지 않았습니다.
일상에 함몰된다는 말은 매일 지루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숨 쉬니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과도 같습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삶은 일상에 함몰되는 삶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일상에 함몰됩니다. 일상에 함몰되면 지치고 피곤해서 못 견딥니다. 일상에 짓눌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상에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사람은 짜증 내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몰입과 함몰의 차이를 더 쉽게 구분하자면, 몰입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멋진 풀장 안에서 기분 좋게 수영하는 것과 같고, 함몰은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만큼 분노할 만한 이유와 명분이 충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억울하다고 충분히 주장할 만했으면서도,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일상에 몰입했기에 삶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옵니다.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게 되자 술 맡은 관리가 요셉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요셉은 그때 30세가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먼저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 때 이집트를 배웠습니다. 이집트 문화와 언어를 익히고, 삶의 방식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누명을 쓴 채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 감옥은 하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20), 즉 정치범 수용소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놀랍게도 거기 갇혀 있으면서 왕의 죄수들, 즉 정치범들과 접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이집트 왕궁이 돌아가는 법을 배우고 정치가 돌아가는 흐름을 배운 겁니다.
바로의 꿈을 지혜롭게 해석한 요셉은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는데, 바로가 그냥 보고 그를 총리로 임명한 게 아닙니다. 이야기해보니까 요셉은 이미 이집트 문화와 언어에 능통하고 왕궁 정치까지 다 파악하고 있는 겁니다.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그를 발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이미 보디발의 집을 거치고 정치범 수용소 생활을 통해 나라를 위해 일할 준비를 끝낸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은 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혹시 금요일만 손꼽아 기다리고 월요병에 시달립니까? 언제 또 휴일이 오나 목을 빼고 기다립니까? 월급은 언제 나오나, 올해 연봉 인상은 얼마나 될까 자주 생각하면서 일합니까? 그렇다면 일상에 몰입해서 사는 게 아니라 일상에 함몰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 일상은 우리의 영성을 어떻게 빚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상에 함몰되어 삶을 낭비하고 말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일상에서 날마다 영성을 가다듬고 키워 갑니다. 요셉은 후자의 사람입니다.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일상에 몰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무엇보다 영적인 삶이며, 바로 그것이 영성입니다.
요셉의 영성은 수도원 같은 데서 빚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일터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일상은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입니다. 지금 상황이 고통스럽고 잘 안 풀린다면 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환경에서 삶에 몰입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2. 일상에 몰입하는 훈련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인생은 모든 사람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즉 인종 격리 정책을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하다가 정치범이 되어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드시 끝내야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990년 2월 11일 석방된 그는 줄루족 등 흑인 종족들 간의 갈등으로 복잡해진 상황에서 흑인 극단주의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대통령이 이끄는 백인 정부와 협상을 계속했습니다.
결국, 민주적인 선거를 할 수 있도록 합의를 보았고, 이러한 공로로 1993년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실시된 흑인 참여 자유 총선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마침내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었고, 350여 년에 걸친 인종 분규가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의 말에서 내면의 깊은 영성이 드러납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우리 삶이 다른 이들의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는가이다.”
“진정한 자유란 단지 사슬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삶을 의미한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
만델라는 감옥에서 파괴되거나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셉처럼 그도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육적인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일상은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터가 싫어서 교회 안으로 도피하는 교인의 삶이 영적인 게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면 육적이고 교회 안에 있으면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모습을 보이다가 교회 밖에서는 안 믿는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사는 것을 주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교회 안에 있어도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오히려 육적인 사람입니다. 사실 목회자들 가운데에도 종종 그런 경우가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사역을 하지만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혀 사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과 밖의 삶이 전혀 다른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예배가 중요한데, 그것은 예배에 몰입하는 경험 때문입니다. 그 몰입의 기억으로 일상에도 몰입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영성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자리가 곧 예배의 자리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참된 크리스천은 세상 한가운데서 일상의 영성을 빚는 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셉의 삶에서 영성의 절정이 창세기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19-21)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이 복수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을 진심으로 위로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사과하기 훨씬 전에 다 용서했습니다. 요셉이 만약 형들에 대한 분노에 묶여 있었고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했다면 어떻게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겠으며, 어떻게 감옥의 모든 상황에서 몰입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은 꿈의 사람이자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분노에 사로잡혔더라면 그는 결코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더라면 이스라엘 자손뿐 아니라 이집트까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분노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교만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왜 분노합니까?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기에 화가 나는 겁니다. 왜 만족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기에 불만족스러운 겁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노릇을 하지 않으면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전적으로 몰입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몸은 정직해서, 우리가 식사량을 줄이면 그만큼 몸무게가 줄고,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 대면 그만큼 몸이 불어납니다. 운동하면 건강해지고, 운동을 안 하면 약해집니다. 금식이 영성 훈련의 기본이 되는 것은, 운동으로 몸의 군살을 빼듯이 훈련을 통해 영적인 군살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일상 밖에서가 아니라 매일의 삶 가운데 빚어가는 것입니다. 예배 때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대화를 나눌 때는 그 대화에 집중하고, 일할 때는 그 일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나머지 인생길을 하나님께 맡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매일의 일상을 통해 영성을 빚어나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