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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7일 수요예배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8 ✦
하늘에 오르시어 통치하시는 주님
(에베소서 1장 20~23절)
[들어가는 말]
오늘 살펴볼 사도신경의 여섯 번째 신앙 고백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것을 좀 더 고백적인 형태로 바꾸어 본다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한 후 하늘에 올라가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믿습니다.’
이 여섯 번째 신앙 고백은 언뜻 보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늘에 오르시어”, 즉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즉 예수님은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믿음의 고백은 사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하나의 중요한 신앙 고백,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신앙 고백을 위하여 하나로 연결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신앙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그것을 향해 가는 도입을 위해 우선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고백, 즉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먼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의미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따라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믿음의 고백은 어떤 의미의 고백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제로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물면서 주로 제자들, 즉 사도들을 만나 무너졌던 그들의 신앙을 다시 세워 주시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
이것은 분명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소식이거나 누군가의 말을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환상 가운데 일어난 일을 말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본 그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라고 계속해서 증언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해놓았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의 이 신앙 고백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의미만 있는 겁니까? 어떤 글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마지막 기적’이라고 말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 가운데 마지막으로 행하신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그것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이 신앙 고백은 그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뿐이겠습니까? 또는 그렇게 고백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다고 알려 주고, 그러니까 너희도 이 기적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겠습니까?
예루살렘에 가면 감람산 정상에 ‘예수 승천 교회’(Chapel of the Ascension)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장소라고 알려진 곳에 주후 387년 기념 교회를 세웠고, 이것이 여러 번 무너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살라딘의 예루살렘 정복 이후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지금도 그곳은 이슬람 소유입니다. 하지만 ‘승천 바위’가 있는 돔은 성지 순례를 온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가 볼 수 있습니다.
작은 돔으로 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바위라는 게 있는데, 이것을 보면 너무 황당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기 보이는 바위 위에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사람 발 모양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밟으셨던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황당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시니까 당연히 특별한 존재이시지만, 예수님이 바위를 밟으셨을 때 그 자리가 움푹 파일 정도로 몸이 무거우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의 발자국이라는 것이 대충 보아도 50센티미터는 넘어 보이는데, 예수님의 발이 그렇게 컸겠습니까? 제 발이 한국 사이즈로 285, 미국 남자 사이즈로 10.5인데, 한국 사이즈 320이 미국 사이즈로 16입니다. 50센티미터면 사이즈도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이지, 예수님의 발자국이라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실제로 가 보면 다 실망합니다. 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저와 가족이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을 때 가이드를 해준 회사는 그곳에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한 번 가 본 분들도 그 후 다시 가더라도 거기는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일정이 바빠서도 그렇지만, 너무 황당한 것이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그런 기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도들이 고백했고, 그 고백을 따라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단지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승천은 결코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닙니다. 여기 이 땅에서 올라가 하늘이라는 다른 공간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승천하신 예수님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19)
예수님은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느 교회에서 제자 훈련 시간에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우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자 어떤 분이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좌편!” 물론 웃자고 한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무슨 우편, 좌편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우편은 영광의 자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정된 공간이나 장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어떻게 특정한 공간에 한정되어 계시겠습니까? 그것을 잘 보여 주는 구절 중 하나가 예레미야 말씀입니다.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 23:23-24)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 어디에나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우편으로 가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믿습니다.’라는 이 고백은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린 이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로 올라가셔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신다는 만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을 통해 2천 년 전 유대 땅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있는 성도들 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딱 유대 땅에밖에 계실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신경의 ‘하늘에 오르시어’라는 고백에 담긴 영적 의미이며, 그래서 이 고백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심
그런데 이 여섯 번째 신앙 고백은 “하늘에 오르시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로 이어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셔서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승천하심으로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계신다는 것, 즉 지금 이곳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분명히 믿겠는데, 그렇게 함께하시면서 무엇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0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20-23절, 새번역)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모든 시간과 공간 가운데 거하시며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통치하심’이 바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의 의미입니다. 그냥 저 멀리 떨어진 하늘 한편에 가셔서 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또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앙 고백을 사도신경의 여섯 번째 고백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며 가장 강력한 고백입니다. 다른 이유를 댈 것 없이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통치하고 계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신앙 고백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 마음이 힘들더라도, 대적 마귀가 우리를 아무리 협박하며 뒤흔든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강력한 신앙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금 나와 바로 여기에 함께하고 계시고 다스리신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가장 구체적이며 강력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가 놀랍게도 ‘야곱의 벧엘 사건’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이나 요셉에게는 많은 점수를 주지만, 이삭은 그저 그런 평범한 인물로 생각하고, 야곱은 그의 비열하고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가까운 사람은 놀랍게도 야곱입니다. 먼저,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야곱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시작하셨고, 나라의 이름도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인 이스라엘로 정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야곱이 여러 가지 욕심도 많았고 잔머리도 많이 굴리면서 그로 인해 어렵고 힘든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기 때문에 야곱의 믿음은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강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믿음 때문에 살았고 믿음 때문에 승리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야곱의 신앙에 있어 근본이 된 것이 바로 벧엘에서의 체험이었습니다. 이 벧엘에서의 체험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나중에 딸 디나 때문에 두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그녀를 강간한 하몰의 아들 세겜과 그 성 사람들을 다 살육하는 일을 벌임으로써 자기 집안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공격받고 죽임당할 수 있는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라고 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믿음은 바로 그 벧엘의 체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벧엘에 가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서 그때부터 ‘나의 하나님’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벧엘 체험 이후에는 야곱이 남을 속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속임을 당하며 연단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벧엘의 체험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대로, 그가 아버지를 속여서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채고는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는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빈 들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꾼 사건입니다.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0-11)
이때 야곱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불안했겠습니까? 장소도 빈 들이고 베고 자는 베개도 돌베개였으니까 춥고 힘들었을 것이고, 혹시라도 에서가 보낸 자객이 언제 어디서 자기를 덮칠지 알 수 없어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불안에 떨던 그 밤에 야곱은 꿈을 꾸었는데, 하늘에 닿은 사다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위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꿈을 꾸고 나서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 28:16-19)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베개로 삼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세워서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벧엘 사건이 말해주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곱이 꿈을 꾸고 나서 했던 고백,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는 고백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집을 떠나 도망가다가 빈 들에 와 자면서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나는 철저히 혼자이구나.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구나.’ 그리고 자기는 아버지뿐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도 멀리 떠나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신데, 아버지 집을 떠났으니까 하나님도 멀리 떠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벧엘 체험으로 확실하게 깨달은 은혜가 바로 ‘하나님이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자기 인생의 모든 여정을 하나님이 주장하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고백이 바로 이 벧엘의 체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잘나서 산 줄 알았습니다. 자기 힘으로 산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섬기니까 나도 그 밑에서 섬기는 시늉을 했고, 안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을 떠났으니까 하나님도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원래부터 나의 하나님이셨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이 벧엘 체험입니다.
그 후 야곱은 바로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제대로 된 믿음 생활을 이제 시작한 겁니다. 그 후에도 좌충우돌하고 제대로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이때부터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를 엄청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신앙 고백은 야곱이 드린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고백이었을뿐 아니라, 그 이후 시대의 모든 신앙인을 거쳐 우리도 드리는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의 여섯 번째 고백인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내용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야곱이 벧엘에서 체험하고 했던 신앙 고백과 같은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하고 계시며, 내 삶과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불안하고 어려운 상황이 올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무엇보다 이 사실만은 꼭 기억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바로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계시며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고백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마치 주님이 안 계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했는데 그 반대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나는 철저히 혼자이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성령의 능력 가운데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신다. 나의 가장 깊고 어둡고 혼란스러운 이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시며 이 상황도 주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나아가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악한 세력이 득세하고 이기는 것 같을 때, 믿는 나는 잘 안 되고 안 믿는 사람은 잘되며 심지어 악한 사람이 잘될 때도 ‘아니다. 주님이 다스리신다. 나의 주님이 통치하신다!’ 하며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고 자기에게 주신 이 믿음의 길을 힘 있게 걸어가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며,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신앙을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구체적으로 강력하게 외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저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내 삶과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선포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