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q231lZ24Kec?feature=share&t=47
2023년 7월 5일 수요예배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12 ✦
용서받은 은혜와 용서하는 능력
(에베소서 4장 30~32절)
1.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인 용서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칠 때 주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용하셨는지,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마 13:34)다고 성경에 쓰여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정말 중요한 영적인 메시지를 전할 때, 그런데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때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메시지를 담은 예수님의 비유들을 보면 직간접적으로 많이 그리고 강력히 다루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 외에도 30개가 훨씬 넘는 예수님의 비유 사이사이에 이 ‘용서’라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서’라는 것입니다. 아니, 용서는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인 정도가 아니라 핵심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용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떠난 사람들을 용서하고 찾아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첫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그냥 어쩌다 보니까, 아니면 이 말씀이 갑자기 가장 먼저 떠올라서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이 용서하시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바로 ‘용서’입니다. 십자가 신앙의 핵심이 곧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인, 즉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복된 사람의 믿음의 핵심 또한 용서입니다. 용서야말로 믿음을 믿음 되게 하는 핵심 요소라는 것입니다.
저희 아들이 11학년부터 대학에 가기 전까지 스타벅스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요구를 하는 손님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커피를 만들거나 점포 내부를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지만, 고객들을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것, 특히 그런 진상 손님들에게도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아주 큰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들은 진상 손님 중 가장 엽기적인 사람은 이런 주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I want a latte with no milk(우유를 넣지 않은 라테 주세요).” 사실 라테는 90% 이상 우유가 들어가고 에스프레소는 아주 조금 들어갑니다. 근데 우유가 안 들어간 라테를 달라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라테는 우유로 만드는 거라고 설명해도 듣지 않고 “내가 전에도 그걸 마셨는데 왜 못 만드느냐?” 하며 오히려 짜증 내고 따졌다는 겁니다.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아들에게 물었더니, 너무 기가 막히고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보니까 커피를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는 그냥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메리카노를 ‘우유가 안 들어간 라테’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참 황당합니다.
‘우유를 넣지 않은 라테’라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크림을 넣지 않은 크림빵’은 없습니다. ‘카레를 넣지 않은 카레 라이스’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용서하지 않는 크리스천’도 있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용서가 없으신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듯이, 용서가 없는 크리스천도 말이 안 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을 말하는데,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핵심도 역시 용서입니다. 이 공동체가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로 세워지려면 다른 무엇보다 용서가 그 공동체의 작동 원리이어야 하며, 용서가 그 공동체의 영성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신앙의 고백이 사도신경의 열 번째 고백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과”
이것은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죄의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죄 가운데 살았던 죄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로 따르다가도 한 번씩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배신했던 전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가장 비굴하고 비참하게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광분하며 날뛰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신앙 고백 가운데 가슴 깊이 전심을 다해 올려 드리게 되는 고백이 바로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앙은 용서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듯, 사도들도 자기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죄를 용서받음’은 그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다가오는 믿음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우리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 되게 하고 우리의 공동체를 참된 신앙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열 번째 신앙 고백으로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용서의 두 가지 의미(측면)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에서 이렇게 중요한 용서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공동체를 참된 신앙의 공동체가 되게 하는 용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용서의 은혜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2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라.”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용서의 첫 번째 의미인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경험한 감당 못할 은혜, 놀라운 은혜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어로 Amazing Grace입니다.
사실 우리는 원래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마땅히 죽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면서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고 말게 될 인생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는 사람들, 사형 선고받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잘난 맛에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제멋대로 살고, 그러면서 어리석게도 사탄에게 속아 온갖 헛된 것을 우상으로 섬기며 소망도 없이 살아가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이런 우리를 택하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십자가 대속의 역사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9-10, 새번역)
그렇습니다. 우리는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기초이고, 이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의 근본 영성입니다.
10년 전인 2013년에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김동명 목사님은 “죽으면 죽으리라” 책을 쓰신 안이숙 사모님의 남편으로도 유명하셨던 분입니다. 평안북도 철산에서 목사의 3남으로 출생하여 일본 고베 공전과 서울공대를 졸업하신 후 1948년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이후 1957년 미국 남침례회 국내 선교사로 세움을 받아 LA 한인침례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시면서,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수십 개의 교회를 개척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시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이 참된 신앙인으로, 참된 목자로 존경했던 분입니다. 가정교회 핵심 리더 중 한 분이었던 아틀란타 김재정 목사님이 LA한인침례교회에서 김동명 목사님을 모시고 부목사를 하신 분입니다.
김동명 목사님의 대표적인 책이 <용서받은 탕자>인데, 그 제목처럼 그 목사님의 신앙의 핵심은 바로 ‘용서받은 탕자’였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 용서받은 탕자의 신앙으로 살았고, 용서받은 탕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가르치면서 온 삶을 다 주님에게 드리며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하신 목사님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고 ‘나는 용서받은 탕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신 겁니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앙생활을 해온 모범생인데다, 어떤 흉악한 짓을 하셨던 것도 아니고, 탕자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사셨던 분인데 왜 이런 고백을 하신 것입니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이 받은 은혜가 진짜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면 용서의 은혜를 경험할 수밖에 없으므로, 김 목사님의 믿음의 근본은 스스로 ‘용서받은 탕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용서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은 은혜, 그 감격을 늘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잃어버리면, 그 신앙은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보통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처음 사랑의 감격과 은혜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를 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용서의 은혜’를 잊어버린 경우입니다.
자격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용서받아 구원을 얻은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용서받은 것에 대한 감격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마치 자기는 원래부터 의인이었던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삶에 감사가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의 사람은 이런 영적 무감각과 불감증에 빠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세월이 갈수록 용서받은 은혜가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몇십 년을 했다는 데 감사하면서 오늘의 신앙생활을 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을 생각하지 않고 옛날만 생각하면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오늘을 생각하며 그 은혜 때문에 늘 감사하고, 행복하고, 또 죄송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용서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그 용서의 은혜 때문에 다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찬양과 기도를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2) 용서의 능력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1-32절)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이것은 죄를 이기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성경은 철저하게 ‘용서의 은혜’는 반드시 ‘용서의 능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이것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도들이 그 주님의 말씀을 따라 고백하고 살았던 믿음의 내용입니다.
참된 믿음의 능력은 죄를 이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이기는 능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게 바로 ‘용서의 능력’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정말 성령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유혹을 이기는 것도 죄를 이기는 능력이고, 진리를 선포하고 지키는 것도 죄를 이기는 능력이지만, 죄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능력은 바로 ‘용서의 능력’입니다.
용서를 선포할 때 죄의 고리가 끊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바로 그것을 하셨습니다. 계속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는 가운데 예수님이 “용서한다.” 하시며 그 악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뭡니까? 거창한 게 아닙니다. 용서는 또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무슨 의지입니까? 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니, 이것들이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시며 다 쓸어버리신 게 아니라 용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바로 죄를 이기는 신앙의 능력의 최고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나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을 말하기 위해 ‘원자탄’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의 그 능력이 바로 ‘용서의 능력’입니다. 자기 아들 둘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하고 양자로 맞아들이는 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놀랍습니다. 용서의 능력이 죄를 이기는 믿음의 능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진짜 신앙인은 ‘용서의 은혜’로 인하여 ‘용서의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참된 믿음의 공동체는 ‘용서의 은혜’로 인하여 그 안에 용서의 능력이 역사하는 공동체입니다.
미국 문학의 고전 중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가 있습니다.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쓴 소설인 <주홍 글씨>는 미국의 식민지 초기 시절 청교도 사회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호손은 이 소설을 통해 죄와 그에 대한 인간의 위선을 드러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하고 딸을 낳게 되면서 간통(Adultery)을 의미하는 주홍 글씨 A를 가슴에 붙이고 살아가는 헤스터 프린은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은 채 사회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습니다. 마을 안에 살고는 있지만 사실은 추방자나 마찬가지 형편에서 딸 펄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는 사이 마을에 들어온 헤스터의 전 남편이 로저 칠링워스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숨긴 채 헤스터와 간통을 한 사람을 잡아내려고 집요한 노력을 펼칩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딤스데일 목사가 펄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자신의 셔츠 속 가슴에 A라는 글자를 새긴 채 때때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거기에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의사인 칠링워스는 병에 걸린 딤스데일 목사를 돌보면서 그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 글씨를 보고 그가 아이의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그는 딤스데일이 드러나지 않게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도록 압박을 가합니다.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린 딤스데일은 한밤중에 헤스터가 서 있던 형틀에 홀로 서서 비명을 지르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외치지만 아무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는 대낮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형틀에 서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죽어 갑니다. 그렇게 딤스데일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칠링워스도 죽고, 세월이 흘러 헤스터도 죽어 딤스데일의 무덤 옆에 묻혔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것이 소설로는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청교도 사회가 사실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사회였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에 씁쓸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의와 진리를 지키는 공동체라 해도 용서의 능력이 없다면 참된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가슴에 주홍 글씨를 새기며 낙인을 찍고 정죄하는 공동체는 결코 참된 믿음의 공동체일 수 없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결코 사람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였지, 살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인생을 파괴했지 회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 공동체에서는 결국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참된 믿음은 용서받은 은혜 때문에 또 다른 죄인들을 용서하고 품어 주고 회복시키면서 그 인생 가운데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죄를 이기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무조건 괜찮다고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어도 모른체하고 묵인하거나 더 죄를 지으라고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죄의 낙인을 지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이 맞지만, 그 죄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인을 미워해버리면 죄가 그 공동체를 휩쓸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죄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기꺼이 함께 감당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수치와 멸시를 기꺼이 당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는 ‘용서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고 ‘용서의 능력’으로 충만한 공동체입니다. 죄를 짓고 뻔뻔하게 나와도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회개할 때 계속 낙인을 찍고 정죄하는 게 아니라, 어떤 죄를 지었든,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아무리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떨치고 일어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설 수 있도록 돕고 섬기는 공동체가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까? 간음죄를 짓고 살인죄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회복되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했을 때 하나님이 회복해주셨습니다. 물론 죄의 결과는 남아서 비참한 일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용서해주셨고 공동체가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이 넘치는 공동체가 참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이 열 번째 신앙 고백은 복음의 핵심이 지금 여기서 가장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내가 용서받은 은혜를 체험했을 뿐 아니라,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능력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것을 믿으며,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는 동시에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과 용서의 은혜가 충만한 공동체, 그리고 용서의 능력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사람과 용서의 능력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