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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28일 수요예배

나는 믿는다 사도신경 11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

(에베소서 219~22)

 

[들어가는 말]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들의 믿음의 고백을 우리가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여서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어떤 말보다 중요한,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 믿는다라는 말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나는 어떤 의미를 담아 믿는다는 말을 사용합니까?

 

당연히 알 것 같은데 선뜻 답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이 믿는다는 것이 그만큼 깊고 폭넓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믿는다라는 단어의 의미보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모습과 행동으로 나타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오랫동안 한국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가르치다 몇 년 전 은퇴하고 지금은 미국 캘빈 신학대학원 철학 신학 교수로 가르치는 강영안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유명하고, 원래는 신학도 했던 분입니다. 이분이 쓰신 책들도 많고 유튜브 <잘잘법(잘 믿고 잘 사는 법)> 같은 데에도 좋은 영상들이 있으니까, 책도 읽어보시고 영상도 보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분이 몇 년 전 <믿는다는 것>(복있는사람, 2018)이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믿음에 관한 아주 실제적이면서도 탁월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는 믿음의 내용보다 믿음의 행위에 더 관심을 두며 강조합니다. 그래서 크게 세 가지 주제로 질문하는 믿음’, ‘응답하는 믿음그리고 실천하는 믿음을 다루며 믿음에 대해 풀어 갑니다.

 

이 책의 방향이 중요한 것은, ‘믿는다는 것에 대해 제대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의 중요한 의미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바로 그 믿음이 우리 삶에서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또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믿음, 응답하는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실천하는 믿음으로 책을 구성한 것이 좋습니다.

 

 

1.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

 

사도신경에서 믿는다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크레도입니다. 크레도코르도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그것은 심장을 바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심장 즉 생명을 바치는 것이며, 모든 것을 다 드리고 맡기는 것이기에, ‘믿는다는 고백은 의지하다, 신뢰하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2)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

 

믿는다라는 뜻의 크레도라는 단어에서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의미는, 그것이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는다는 것은 심장(생명)을 바칠 정도로 가치가 있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고, ‘믿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한 사도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못 할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도 보통 사람이었지만 믿음이 자기 생명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목숨을 바치며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믿음 생활은 괴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이 되고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즘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소하고 그다지 알려진 말이 아니었는데, 2007년에 잭 니콜슨(Jack Nicholson)과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이 주연한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라는 영화가 나오면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인데, 주로 꼭 가보고 싶은 유명한 장소를 적어 놓습니다.

 

그런데 버킷 리스트라는 말이 사실은 아주 허무하고 슬프고 안타까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의 목록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버킷’(Bucket, 양동이)이라는 말을 쓰는지를 알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래전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을 집행할 때 죄인을 버킷, 즉 양동이 위에 세워 놓고 목을 매달았는데, 바로 그 양동이를 걷어차서 목이 졸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의미로 사용된 표현이 바로 버킷 리스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것이 슬픈 말입니다.

 

그러므로 버킷 리스트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 허무하고 비참하게 하지,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목록에 있는 것을 다 이루더라도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을 다 가면 채워집니까? 또 허전해집니다. 안 채워집니다. 오히려 더 비참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하는 것은 LOV(List of Value), 가치 목록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의 목록을 만들어 그것들을 행하고 이루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정말 행복한 삶인 겁니다. 정말로 소중한 가치를 위해 살았다면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그 삶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그 모든 순간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버킷 리스트보다 LOV(가치 목록)가 더 중요합니다.

 

이처럼 나는 믿는다의 의미는 의지하다, 신뢰하다일 뿐 아니라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가치 목록을 지키고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름답고 행복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가치 있는 것의 목록에 올려놓는 것이 나는 믿는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것은 실제적인 신앙의 행동으로서 크게 두 가지 의미,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 그리고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열두 개의 나는 믿는다라는 고백이 바로 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아홉 번째 고백이 오늘 다룰 고백입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이것은 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는 뜻인데, 특별히 믿는다는 두 가지 의미 가운데 두 번째 의미가 조금 더 강조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가 나에게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   교회를 생명같이 여기는 믿음

 

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아홉 번째 신앙 고백이 교회가 나에게 이렇게 소중합니다.’라는 고백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교회를 어떤 방식으로 받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6:13) 물으시고는, 곧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6)

 

그 순간 주님이 크게 기뻐하시면서 칭찬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7)

 

이 말씀 후에 그에게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8)

 

사도 베드로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교회를 처음 언급하셨을 뿐 아니라 내 교회라고 하셨고, 심지어 자기를 반석이라고 부르시고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때 그 반석이 자기를 가리키는 말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뜻을 올바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는 페트로스’(Petros)라는 남성명사를 사용하셨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실 때는 페트라’(Petra)라는 여성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똑같은 뜻이면 뭣 하러 다른 단어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베드로라는 개인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게 아니라, 지금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중에 거기서 더 나아가 사도신경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적 입장의 개인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신경에 대하여 가장 많이 지적하는 내용이 바로 이 아홉 번째 신앙 고백에 나오는 공교회라는 말인데, 공교회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가톨릭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가톨릭에서 의도적으로 이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고 영원히 굳건하게 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신경은 성경에서 벗어난 로마가톨릭의 의도된 음모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사도신경이 만들어졌을 때는 구교와 개신교가 나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이 고백을 할 때 무슨 로마가톨릭이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주장은 사실일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공교회라는 용어가 라틴어 단어로는 가톨릭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구교인 로마가톨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Universal) 교회’, ‘우주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 어떤 지역에 있는 특정한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교회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친히 당부하며 맡겨 주신 사명으로서 주님의 교회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디베랴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교회를 맡기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고 그때마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할 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고 세 번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친히 맡겨 주신 교회이기에, 온 삶을 드려 이루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이러한 감동과 고백을 담아서 표현한 것입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19-20)

 

 

3.   성도의 교제가 교회의 본질

 

그렇다면 공교회의 뒤에 이어서 나오는 성도의 교제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사도신경의 아홉 번째 신앙 고백에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하나의 고백으로 묶어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둘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내 교회라고 말씀하신 그 공교회의 본질을 다른 각도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제자, 곧 성도가 된 사람들이 모여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 그 자체입니다.

 

요즘 사도행전 큐티를 하는데, 사도들이 우리 어디서 교회 개척을 할까요?’ 하다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개척하기로 하고 모여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 그냥 기도하다 성령을 받고 자연스럽게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 교회는 우리는 교회를 개척합시다.’ 하며 목사, 장로, 집사를 세우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모여서 기도하다 성령 받고 방언하고 복음을 전했고 3천 명, 5천 명이 들어와 모이게 된 것이 교회가 된 겁니다. 믿는 사람들 그 자체가 교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함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성도의 교제가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 처음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하고 성찬식을 하면서 떡을 떼었고, 식사도 하면서 교제하고, 내 것 네 것 없이 서로 나눠 쓰면서 믿는 사람들이 모인 모음 그 자체가 교회가 되었습니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1-22)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서로’(21)함께’(22)입니다. 따로따로 각자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항상 함께하는 게 교회라는 겁니다. 나 따로, 너 따로 하는 게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교회 생활을 하는 분 중 주일 예배에만 살짝 왔다가 바로 가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진짜 교회가 아닙니다. 진짜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물론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중요한 게 교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이기에 함께 모이고, 성도이기에 서로 관계를 맺고, 성도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성도이기에 서로 섬기고, 성도이기에 함께 사명을 받들고, 성도이기에 함께 사역하는 그 성도의 교제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교회를 말할 때 주님의 몸이라는 개념보다도 성도의 교제라는 개념을 훨씬 더 강조했습니다. 루터도 그랬고, 칼뱅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본질은 모임입니다.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함께 모여서 뻘쭘하게 있는 게 아니라, 함께 모여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교회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공 예배를 왜 드립니까? 그냥 각자 혼자 예배하면 되지 뭐 하러 같이 모입니까? 그러나 같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제대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겁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21세 때 베를린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그의 첫 번째 저서가 바로 <성도의 교제>인데 원제를 라틴어로 ‘Sanctorum Communio’으로 지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곧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본회퍼는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 교수로 남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잡혀서 죽임당할 가능성이 큰 히틀러(Adolf Hitler) 치하의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오직 독일에 남겨둔 성도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는 성도의 교제를 추구하면서 그 당시 독일의 모든 사람이 따라가던 히틀러의 나치를 거부하고 참 제자의 좁은 길을 가다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결국 순교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이라는 정치적인 행동을 하다가 잡혀서 순교한 것으로 말하지만, 사실 본회퍼에게는 정치적인 의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성도의 교제, 곧 교회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히틀러를 거부하고 모함받아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이 바로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를 말합니다.

 

우리도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보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가?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주님의 그 교회인가?

      나는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가?

      나는 교회로 인하여 행복한가?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다 살고 나면 하나님 앞에 가게 됩니다. 인간의 사망률을 누가 조사해보았더니(?) 100%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다 죽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하늘 상급으로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평가는 주님께서 내 교회를 세워라.’라고 당부하신 대로 신실하게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긴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곧 주님의 교회는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고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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