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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일 수요예배
✦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7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베드로전서 2장 9~10절)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인데, 이것을 쓴 시기는 주후 64년에서 68년 사이일 것이라고 학자들이 추정합니다. 이때 로마는 네로 황제(37-68)의 통치하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과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뿐 아니라 흩어진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흔들리던 시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일찍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였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처럼 믿음이 없어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컸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믿음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힘 있는 필체로 이 편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르쳐줍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자신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그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9절 상)
여기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 택하신 족속: 선택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택하신 족속’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전 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아셨습니다. 아셨다는 것은 곧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것을 예정하셨고, 시간 안에 있지도 않은 우리를 당신 안에서 사랑하셨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왜 저 사람이 아니고 내가 선택받았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지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신 이 은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엡 1:5, 새번역)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에게 무슨 공로나 장점이나 뭔가 좋은 게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쁘거나 잘나서 된 게 아닙니다. 그냥 아무 공로 없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창세전에 이루어진 그 선택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래서 당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2) 왕 같은 제사장들: 사명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이것은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제사라는 제도를 통하여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제사 제도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모든 사람이 아무렇게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사장의 중보 없이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개념이 출애굽기에서는 국가 단위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6)
이 세상에는 크기와 이념이 각각 다른 수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밝기와는 상관없이 이방 나라들은 자력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시고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의 덕을 입어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하나님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의 그림자였고 불완전한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영적인 이스라엘을 세우셨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지만, 신약에서는 교회가 하나님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의 중재자적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셨고, 그래서 이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믿는 우리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나라와 민족들을 마음에 품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사용하여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헌신해야 합니다.
3) 거룩한 나라: 구별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구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즉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하나님께 선택되었음을 뜻합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바쳐진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일주일에 7일이 있지만 우리는 그중 한 날을 주일로 따로 떼어 놓아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에게 있는 물질 중 일부를 따로 떼어 놓아 헌금으로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하루 중 24시간이 있지만 우리는 그중 일부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합니다.
그날, 물질, 그 시간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기에 거룩한 것들이 됩니다. 이렇게 구별된 것들이 있기에 나머지 시간과 공간, 사물들도 거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룩함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거룩하게 살아야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 이미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구별하여 이미 하나님께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바쳐지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세상 나라와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들의 실질적인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자들도 이 세상 나라 안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거룩한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거룩한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세상 나라 백성의 정체성에 우선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가치관과 인생관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구별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주님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사랑
넷째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소유’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같은 뜻의 히브리어가 ‘세굴라’인데, 이 단어는 ‘값진 재산’, ‘특별한 보물’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7:6)
여기에서 ‘자기 기업의 백성’이 히브리어로 ‘암 세굴라’인데 직역하면 ‘보물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께 보물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받고 충만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는 보물과 같은 존재이며 그렇게 돌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끼는 보물을 아무 데나 놓지 않고 비밀함 같은 데 아주 잘 모셔놓고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귀한 보물 같이 보시며 그토록 아끼고 돌보아주십니다.
어떤 물건의 가치는 그것을 주고 산 대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소중한 사람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2.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삶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이런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우리의 어떠한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구원의 덕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절 하)
1) 어두운 데서 불러내심
하나님께서는 어둠에 있던 우리를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어둠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도 몰라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악하게 살았고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어둠에서 불러내셔서 당신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해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빛은 세 가지 용례로 쓰입니다. 첫째는 자연적인 빛이고, 둘째는 윤리의 빛이며, 셋째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9-10)
오늘 본문에서의 빛은 세 번째 의미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신자의 마음 안에 도입되는 진리의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빛입니다.
이 빛은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습니다. 이 빛 때문에 어둠이 물러갔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을 받은 사람이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왜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지, 우리 인생이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빛의 비추임을 받은 사람은 곧 지혜를 얻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눈멀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하던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빛의 일보다는 어둠의 일을 더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런 캄캄한 어둠에 기이한 빛이 들어온 것이고, 구원 받은 사람은 이 진리의 빛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음 전도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이 빛을 비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 빛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사람은 영적인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이 진리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하게 됩니다.
2) 아름다운 덕을 선포함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불러 주신 것은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 ‘덕’의 선포가 이사야 말씀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여기에서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은 ‘그들이 나의 찬송을 상세히 말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위대한 구원 역사에는 그분의 성품이 들어 있는데, 이 성품이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역사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지혜가 있고, 선함이 있고, 권능이 있고, 공의가 있습니다. 그런 성품이 들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덕’이라는 겁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하나님의 덕을 드러내고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사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는지,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자세히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말로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통해 선포하는 것입니다. 말로도 하고, 평소의 삶으로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로 불러주신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딤후 4:2).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으니까 나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을 구원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전까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충분히 고백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런 사랑을 받았다면 나도 그런 사랑을 나누어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3) 전파하는 선교적 삶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 기여하도록 요구받습니다. 그것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값진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섬긴 그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주신 성령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벧전 1:12, 새번역)
하나님의 역사는 정말로 위대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 삶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 삶의 사소해 보이는 일이 위대한 일입니다.
목장에서 지난주 감사한 일과 삶을 나누자고 하면 항상 똑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코로나 상황 속에 뭐 그리도 특별한 일들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항상 똑같고 사소한 일이 위대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안에서 부부가 함께 가정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아이들을 주님의 뜻대로 키워보려고 애쓰는 것, 교회에서 다른 지체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이런 상황에도 어떻게 하면 더 섬길 수 있는지 노력하며 실천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또 목장에 참석하는 것도, 삶 공부를 하는 것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직장인이면 일하는 시간에 슬쩍슬쩍 딴 짓하지 않고 정직하게 일하는 것,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손님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이 땅에 사는 시민으로서 법과 질서를 지키며 의무를 다하는 것들이 다 사소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는 위대한 일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을 안 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일상적인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탁월하신 덕을 선포할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 위대한 일입니다. 사람들을 마주치며 거기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장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 같아도 위대한 일이라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 때 우리의 삶에는 고난과 희생이 있고, 아픔과 좌절도 찾아오고, 눈물과 슬픔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그런 삶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덕의 열매를 보게 될 것이며, 그럴 때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유한한 인간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저 영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이러한 감격과 감사가 우리 평생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