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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31일 새해맞이 감사예배
✦ 송구영신 메시지 ✦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장 1~7절)
[들어가는 말]
어느덧 2021년이 저물어갑니다. 이번에도 한 해를 돌아볼 때 여러 감정들이 지나갑니다.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쉽지 않았던 한 해였지만, 그 가운데 기쁜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으며, 좋은 일도 있었고 어려운 일도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가운데 올해 사랑하는 부모님을 먼저 보내드린 분들이 계시고, 또 우리가 협력하던 선교사님을 떠나보낸 슬픈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더욱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셔서 이 순간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분위기는 암울하지만,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더욱 주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나 잘못한 것 때문에 어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죄를 하나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게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습니다. 비슷한 의미이지만 구분해서 말하자면,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은혜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데 면해주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예수님이 대신 당하시고 우리가 면하게 해주신 것,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해주신 것이 자비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길을 갈 때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그들이 회개하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결코 그들을 무너뜨리고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회복되어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 숭배와 이방인들이 하는 악한 의식들을 행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 죽이는 끔찍한 일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그들을 징계하셨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사야서가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1~39장을 ‘제1 이사야’라고 부르고 40~66장을 ‘제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끝 부분을 ‘제3 이사야’라고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 이후의 내용을 보면 시대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40장 이후에는 회복을 이야기하고 바벨론에 끌려갔다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가 활동할 때는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를 위협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는 한참 남은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의 제자들 중 뒷부분을 완성한 게 아닌가 하고 학자들이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43장은 제2 이사야, 즉 뒷부분에 속한 내용인데,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인 42:18-25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렇게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설명하십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라가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날이 이르렀음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 선택하신 백성을 위해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샌드위치 스타일’입니다. 1절과 7절에서 이스라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2절과 5-6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중간인 3-4절에서는 하나님이 보시는 이스라엘의 고귀한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1. 이스라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1, 7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1절)
여기 나오는 ‘지금’이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그러나 지금’입니다. 이전에는 힘들었는데, ‘그러나 지금’ 좋아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을 때, 그 언약에는 은혜뿐 아니라 진노도 포함되어 있고, 복뿐 아니라 저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죄를 범했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주님이 벌을 내리시면서도 당신의 백성과 함께 남아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함과 큰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았고, 이사야가 말씀을 선포하던 이때까지도 큰 고통을 겪고 있던 상태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비롯하여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하고 성전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 왜 그런지를 여러 차례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온갖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들에게 과거의 일은 전부 잊어버리고 오직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의 백성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Who am I?’(나는 누구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Whose am I?’(나는 누구의 것인가?)가 사실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의 백성인가’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그들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워하지도 않는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때 두려워하고 있었기 떄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입니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다 없어질 정도로 나라가 기울어버린 이때, 과연 영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그저 이름뿐인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했다면, 그들은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들을 하나님의 버리신 것은 아닌지, 아니 혹시 처음부터 자기들이 그분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괜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이 이렇게 무기력하신 건가?’ ‘혹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닌가?’ ‘이러다 망하는 건 아닌가?’
이스라엘은 과연 자신들에게 앞날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두려웠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이제 뭔가 소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7절)
하나님은 그 백성이 원래 속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이라고 하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회복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자격이 무엇입니까? 스스로는 아무런 자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자격이 생깁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무슨 착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천국에 들어갑니다.
6절에 나오는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복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지어졌고 만들어졌습니다(7).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영광” 즉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을 “오게 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그들의 삶은 자유와 기쁨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속박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19세기 영국의 탐험가였고 사실은 선교사이기도 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마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아주 무거운 짐을 여러 개 진 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그 사람을 돕고 싶어서 마차에 태워주었는데, 얼마 못 가서 마차가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태워준 사람의 짐들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빙스턴은 그날 하기로 했던 모든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누군가가 리빙스턴에게 놀라운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그 사람을 태워주었던 바로 그날 그 시간에 리빙스턴이 향하고 있던 마을에 적들이 쳐들어와 마을 사람 60명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리빙스턴이 바쁘다고 하며 그 사람을 태워주지 않고 그냥 갔더라면 그도 그 상황에 화를 당할 뻔했던 겁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도 마차가 고장이 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괴로워지고 화도 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마음도 생깁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저 혼자 살자는 것도 아니고 남을 돕는 선행까지 했는데, 그러면 제 일이 술술 풀리게 해주지는 않으시더라도 이렇게 어렵게 만들지는 않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닥칠 위험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렇지 않을 때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뭔가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차를 끌고 가다가 망가진 것이 오히려 우리를 보호하시는 계획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 또는 좋은 일이 일어날 때도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에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 대해 살펴볼 때 제가 알려드렸던 질문이 있습니다. 아직 기억하십니까?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아니면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질문을 해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 여러분,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이게 과연 안 좋은 일일까?’ 하고 질문해보는 겁니다. 좋은 일이 탁 생겼을 때도 ‘야, 신난다!’가 아니라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 하고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 인생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이 정말 불행일까요? 과연 내 인생에 일어나는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요? 우리는 행복과 불행의 정의를 주님 안에서 확실하게 하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짜 행복인지 진짜 불행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안 좋다고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면서 ‘이것이 정말 안 좋은 일인가? 과연 그럴까?’라고 질문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들 ‘안 되셨습니다.’라고 할 때 ‘과연 그럴까?’ 하며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살펴보는 겁니다.
좋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축하합니다. 잘되셨습니다.’라고 할 때 ‘과연 그럴까? 정말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일까?’ 하고 살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안 좋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럴까?’를 꼭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삶에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 겸손히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끝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달라고 찾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다 알지 못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은 선한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도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혼란스러운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2. 하나님의 구원 역사 (2절, 5-6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2절)
여기에 보면 여러 종류의 어려움들이 등장합니다. 물과 강과 불과 불꽃입니다. 크게 물과 불인데, 여기서 물과 불이라는 것은, 모든 종류의 고통과 어려움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엄청난 물길이 덮치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지난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습니다. 또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쪽 태평양에서 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일본을 덮쳐서 지금까지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데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또 뜨거운 불길을 통과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전쟁 영화를 보면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폭탄이 날아다니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런 곳을 지나갈 때 어떻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다”(2).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엄청난 물과 불을 통과하는 것 같이 느끼고 있고, 극심한 고통 중에 신음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또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5-6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어떤 문제보다, 크고 강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삶에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문제가 전혀 없거나 아무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 삶에는 물도 있고, 강도 있고, 불도 있고, 불꽃도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문제와 어려움과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비극이 우리 삶에 존재합니다. 주님을 안 믿는 사람만 코로나에 걸려 죽는 게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걸리고 죽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하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울어주시고, 우리가 괴로워할 때 우리 옆에서 함께 괴로워해주십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강한 폭풍으로 위기에 처하자 제자들이 주님께 도와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주님은 바람을 잔잔하게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 4:40)
그렇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주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그 당시 예수님이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폭풍이 불고 물결이 높이 인다고 해서 두려워한 것을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엄청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3. 하나님이 보시는 이스라엘의 고귀한 가치 (3-4절)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너는 내 것이라”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십니다. 어떤 이름입니까?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3절)
‘여호와 네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네 구원자’라고 하십니다. 이 말들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이신가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호관계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헌신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앞으로도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 이유는, 주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거룩한 분이시며 그들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애굽을 속량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구스와 스바’는 이집트 남쪽의 광활한 땅들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해서라면 또 어떤 값을 주고라도 보호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면 더 내어주지 못하실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내어주셨는데 더 못 내어주실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4절)
옆에 있는 분들, 특히 배우자를 보시면서 ‘참 보배롭고 존귀한 분이십니다.’라고 하기가 조금 망설여지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봐도 사실 아닙니다. 내가 거울을 통해 나를 봐도 뭐가 그렇게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건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3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미 해주신 일을 보여주는 반면, 4절은 앞으로 어떻게 해주실 것인지 미래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보실 때 그들은 보배롭고 존귀하기 때문이며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지켜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고대사회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사용하는 언어와 같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보며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런 모습이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보면 너무나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신부를 볼 때 그렇게 느끼지 않더라도 신랑이 볼 때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어떤 값을 치르고라도 우리를 데려오실 정도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그토록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의 사랑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아십니다. 악하고 죄 많고 배신도 하고 신실하지 않을 것을 잘 아십니다. 사실 신랑 신부는 서로를 잘 모르고 결혼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속았다고 하는데, 속은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즉 우리가 정말 형편없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해주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보배롭다’, ‘존귀하다’ ‘사랑한다’는 말들은 모두 여기서 완료시제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은혜입니다.
[나가는 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또 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16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봉사한 리빙스턴을 영국 정부에서 불렀습니다. 그래서 옥스퍼드(Oxford)와 캠브리지(Cambridge)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 후 글래스고우(Glasgow) 대학교에서도 상을 받고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리빙스턴이 그렇게 위험한 아프리카의 맹수들과 무더운 날씨와 무서운 질병과 잔인한 토인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굉장히 궁금해 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제가 아프리카의 그 험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해 하실 줄 압니다. 그 해답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주님의 약속이 저를 온갖 어려움과 위험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저를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않으십니다.”
리빙스턴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거룩한 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강을 건널 때 물이 우리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고,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우리를 사르지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2021년 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래도 잘 견디셨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2021년을 돌아보면, 우리 삶에 여러 가지로 물과 강과 불과 불꽃의 위험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보호해주셨습니다.
2022년에도 우리 삶에는 분명히 엄청난 파도가 몰려올 것이고 엄청난 불길도 타오를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이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괜찮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2022년 한 해 동안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