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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d_Myulm3LW4?t=1799

 

 

2021121일 수요예배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3

분노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2)

 

지난번 분노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6가지를 다루었는데, 오늘은 나머지 6개를 살펴보면서 이번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7.  14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 상사의 분노와 이간과 독단으로 지난주에도 두 명이 사표를 냈고, 나를 포함한 세 명도 사표를 쓸까 고민 중에 있다.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계속 기도하며 버텨야 하는가, 아니면 사표를 내고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는가?

 

이것은 정말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길은 기간을 정해놓고 작정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또는 세 달 정도 죽을힘을 다해 매일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바꾸시든지 그 상사의 마음을 바꾸시든지 할 것입니다.

 

기도는 씨름입니다. 그저 부드럽게 속삭일 때도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샅바 잡고 힘을 쓰는 씨름과 같이 힘써서 해야 합니다. 야곱도 얍복강 나루터에서 환도뼈를 다치면서까지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32:24-25)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평소에는 부드럽고 잔잔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 폭풍이 불어 닥쳤을 때는 생명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위기 때는 교양 있는 척, 거룩한 척 기도하거나 온갖 미사여구로 꾸민 기도는 하나 마나 합니다. 생명을 걸고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의 어느 회사에 노사 문제로 큰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회사의 CEO40일간 한 끼씩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당시 회사와 노조가 서로 대립하면서 전혀 해결점이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40일 작정을 하고 하루 한 끼씩 금식기도를 하는데 한 지 38일 동안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한지 39일째 되는 날 그 회사 오너가 사과하고 노조위원장이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노사 간의 화해가 이뤄졌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가서 씨름할 때, 나 자신의 분노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분노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두려워하면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두려운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는 기도하면서 주님의 평안이 내 안에 깃들이게 해야 합니다. 내 안의 평안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계가 좀 더 부드러워집니다.

 

신앙은 관점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저 상사는 원수가 아니라 은인이라고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는 나를 기도하게 해주고 겸손하게 해주고 깨어 있게 해주는 은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관점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꾸 시도하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상사가 원수가 아니라 은인으로 생각될 때가 올 것입니다.

 

 

8.  성경은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는데, 혹시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가 화평을 깨뜨리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번제물로 올려 드렸을 때 그분은 실로 이 땅의 화평이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죄악 된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 죗값을 지불할 때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화평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양보하면서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는 게 아닙니다. 의로운 분노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그 죄를 심는 사탄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분노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죽어야 사는 존재가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런 사명자들이 자꾸 살려고 하니까 타협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룩한 분노가 불타올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올랐고, 그 열정에는 사랑과 분노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든 감옥을 가든 죽을 고비를 넘기든, 바울의 열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 (17:16-17, 새번역)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혼자 아테네로 온 것입니다.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여 루디아와 간수와 귀신 들렸던 여종이 중심이 되어 교회가 섰습니다. 그 후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믿는 자들이 나왔지만,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켜서 베뢰아로 피했습니다.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거기까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원정을 와서 박해를 하여 바닷가로 피해서 혼자 배를 타고 아테네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찬란한 헬라 문화의 중심지에서 여기저기 구경하며 즐길 수도 있었고, 조용히 쉴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많은 것들을 감상하며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 도시에 우상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회당과 광장으로 가서 여러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우상들에 대한 거룩한 분노 때문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영국의 크리스천 정치인으로서 노예무역제도에 분노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그는 무려 50년간이나 꾸준히 노예무역제도 폐지를 위해 열정을 쏟았습니다. 단숨에 폭발하지 않고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꾸준히 의로운 분을 냈던 겁니다. 마침내 그는 노예무역제도가 폐지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는 또 어떻습니까? 인종 차별에 맞선 의로운 분노를 폭력적으로 폭발시켰다면 흑인들을 그렇게 대규모로 연합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비폭력으로 의로운 분노를 쏟아 냈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마침내 미국 사회에서 비정상적으로 행해지던 인종 차별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혜택을 우리까지 보게 된 겁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분노는 타협할 줄 모르는 분노였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결국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생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라고 하여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분노 사회가 되어 버린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로운 분노로 불타오르는 열정의 사람으로 살아겠고, 나를 죽임으로 이 세상에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9.  아동 성폭행 사건과 같이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 받는 사건을 접할 때면, 더구나 그 가해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금세 그 사건도 잊어버리고 그로 인한 분노도 잊어버리고 마는 나 자신에게 실망스럽다. 분노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분노를 지속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민을 잘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분노보다 긍휼이 먼저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만일 울고 있는 피해자가 있다면, 가해자와 싸우는 것보다 피해자를 보듬어주는 게 먼저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많은 탈북자들이 교회에 와서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교회는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보다 먼저 피해자인 탈북자들을 긍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탈북자들이 교회에서조차 상처 받는다면 일반 사회에선 얼마나 냉대와 멸시를 받겠습니까? 분노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2:13)

 

그런데 지속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지속적인 분노는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람마다 분노의 지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학교 아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교회가 아이들을 위해 해주는 것이 별로 없느냐고 분노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거기가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홈리스들을 보면서 왜 교회가 저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고 분노하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바로 거기가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임을 깨닫고 그것을 신실하게 감당하면 됩니다.

 

 

10.  인간관계에서 겉으로는 손해 보고 맞춰주고 공감해주고 웃을 수 있는데, 속으로는 그 사람을 정죄하고 미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으로 가득 찬 나 자신을 볼 때 너무 괴롭고, 상대방을 사랑으로 섬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쉽지 않다. 화가 날 때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화가 날 때 화장실에 들어가 울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며 기도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발산하는 것이 건강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람한테 발산하면 더욱 곤란해집니다. 한 대 때리면 두 대 맞는 악순환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나게 만든 그 사람을 보지 말고 잠시 상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부부간이나 가족 간에 화를 참기가 어려운데, 그럴수록 더 조심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16:21-23, 새번역)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하자 베드로가 그러지 말라고 강력하게 대들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베드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씀하셨을 것 같지 않고, 그보다는 약간 몸을 돌려 베드로가 아니라 사탄을 향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 숨은 사탄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떤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어 나를 화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사탄에게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분노가 전염되는 것 같다. 상대에게서 영향을 받아 전염되는 분노는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아침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새벽마다 만나를 거둔 것처럼, 우리도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차에 기름을 채워야 하듯이,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루치의 에너지를 공급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매일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따로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1:35)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루분의 양식 또는 연료를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라는 말입니다. 하루분의 연료를 채우고 세상 가운데로 나가야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비축된 연료 눈금이 확 떨어집니다. 게다가 아무에게나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을 만나면 연료가 바닥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분노가 끓어오르게 됩니다. 바로 그때 여분의 연료를 부어 채우고 견디면 이기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루분의 양식을 주실 때 이것까지 고려해서 주십니다. 우리에겐 여분의 연료가 언제나 있으므로 패잔병이 되어 돌아올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주시는 만나를 준비하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지고 맙니다.

 

 

12.  그리스도인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서 화가 나도 참으면서 조근조근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가?

 

우리는 대개 사랑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부모가 자녀를 야단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는 전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전제 위에 내가 화났다는 것을 알리는 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우리가 ‘No’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Yes’만 하는 것이 사랑과 배려가 아닙니다. 나쁜 일을 하겠다는데,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하고 진짜 총을 달라고 하는데 yes를 하는 것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착한 척하며 화를 안 내고 배려하는 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런 사람은 아무 때나 화를 내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교묘하게 감추면서 간접적, 소극적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고, 아무 때나 화를 내는 사람은 직접적 또는 폭력적 방법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같은 겁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착한 척하는 외식과 위선을 더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은 백성에게 돈을 강요하는 세리나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는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경건한 척하면서 사람들을 조종하고 싶어 하던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저주까지 퍼부으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오신다면 어쩌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더 분노하실지 모릅니다. 자기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 입으로는 사랑을 남발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려 드는 가짜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착합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사랑 받을 만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착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8:10-14)

 

예수님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기도한 세리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남들에게 칭찬 듣기 위한 바리새인의 유창한 기도에는 귀를 막으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을 놀랍게도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사람들을 대하지 마십시오. 겉으로 착한 척하는 것에 속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차라리 진심을 말하는 게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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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제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이것입니다. 분노와 관련되어 가장 안 좋은 행동은 그것을 마음속에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이며, 가장 좋은 분노 해결 방법은 그것을 쏟아놓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노를 사람에게 쏟아놓으면 안 되고,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화가 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뉴스만 봐도 화가 납니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혹시 꾹꾹 눌러 놓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폭발시키는 것은 아닌지?

 

언제 어디서 우리를 덮칠지 모르는 분노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분노를 다 쏟아 붓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쏟아 붓기를 바랍니다. 대충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쏟아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속박과 위선과 불편함을 떨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기쁨 가운데 정직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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