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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5일 수요예배
✦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2 ✦
“사랑의 삶을 원하시는 하나님”
(미가 6장 6~8절)
1.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가족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중 최고의 걸작품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있음으로 이 세계는 더욱 빛나고,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 중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질서대로 다스리고 가꿀 수 있는 피조물도 오직 인간뿐입니다(창 1:28).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종종 양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양 떼’라고 부르셨습니다(겔 34:8). 예수님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양이라 하셨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비신자까지도 우리 밖에 있는 나의 양이라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요 10:14-16, 새번역)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양 떼로 보셨는데, 왜 인간을 양에 비유하신 겁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들에게는 각각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 강하고 빠른 다리, 강력한 뿔, 또는 커다란 몸집 등은 적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훌륭한 조건들입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빠른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날카로운 이빨은 더더욱 없으며, 뿔이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상대방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양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돌봄을 받으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탁월한 목적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자신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간격이 존재합니다. 먼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에 비하면 하찮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피조물이 자신의 영광을 아무리 높이 쌓아 올린다고 할지라도 창조주와 감히 비교될 수 없습니다.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지만, 인간은 한시적이고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초월하여 계시지만, 인간은 그 만물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고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존재적 차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결하고 거룩한 영이십니다(시 12:6; 고후 3:17). 하지만 인간은 죄를 지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죄인 사이에 있는 격차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존재적 격차만큼이나 큰 것입니다.
본래 인간의 육체는 이 세상의 흙으로부터 창조되었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창 2:7).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위해서는 땅으로부터 공급되는 물질이, 영혼을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하고 많은 것을 가져도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없기에 마음이 공허합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단절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지던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영혼을 위해 공급되어야 할 하늘 자원의 결핍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인간은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추구해 왔던 예술과 학문, 다양한 종교와 철학, 사상 심지어 미신들도 죄로 말미암아 도입된 하나님과의 단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곤고한 영혼을 위해 어떠한 자원을 획득하려고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나 이 모든 노력들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원만이 인간의 영혼을 진정으로 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몸부림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토대로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부르고 계십니다.
2. 복음으로 부르심
복음(福音)은 문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이 남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오늘 나의 행복과 직결되며 나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기쁜 소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영생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길게 설명할 수도 있고, 짧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길게 설명하려면 수천, 수만 권의 책으로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짧게 말하면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기쁜 소식이 될까요?
인간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사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세상 나라를 세워 자기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복종시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엡 2:2-3, 새번역)
또한 사탄은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죽음이라는 카드로 인류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때로는 이런 죄를 지으면 너에게 이런 유익과 기쁨과 성공을 줄 것이라고 유혹하기도 했고, 헛된 꿈을 품도록 만들어 그 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짓밟게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강력한 힘에서 풀려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얽매인 사슬에서 풀어주지 않으신다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인류를 사로잡고 있던 죄의 지배와 사탄의 권세를 끊어버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사탄의 권세를 단숨에 깨뜨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사탄이 인간을 향해 가진 최고의 지배 카드였던 죽음을 무효로 만들어버린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죽으신 후 다시 사신 것처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사람 역시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마다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에게는 하늘로부터 생명과 사랑이 공급됩니다.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견딜 수 없는 일을 견디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며, 자신이 지금 이곳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고 뛰어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셔서 가족 관계로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티끌 같은 존재인 우리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9-10)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이 그저 객관적인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을 통해 각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게 됩니다.
3. 참된 신앙은 인격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싫어하는데 다리를 걷어차서라도 억지로 무릎 꿇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섬기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다가 때리면서 섬기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저 같으면 그럴 텐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을 싫어하시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우리도 좋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의 생각을 일깨우시고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행하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적 신앙은 인격적인 신앙이며, 인격적인 신앙은 세 가지 면으로 구성됩니다. 바로 ‘지, 정, 의’입니다. 지적인 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인간의 지성에 말을 건네십니다. 인간의 지성에 당신의 존재와 성품을 알려주시며, 우리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납득하여 받아들이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증거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성경은 그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증언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생생하게 느끼며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분의 인격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지적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며, 이 은혜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더 탁월하다는 사실, 아니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은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감정적인 터치가 일어나는데, 가장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러한 터치가 일어나며, 그 사랑을 받은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이 함께 그 사랑을 나눌 때 강렬한 감정적 터치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지적인 깨달음과 감정적인 터치가 일어날 때 그것이 의지적인 결단으로 이어지면서,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려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시간의 여유가 생길 때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묵상하고 더 기도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재미있어 하는 일을 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자신의 의지를 돌이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으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반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강제로 부러뜨리고 꺾어서 당신께 돌이키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으로 감동시키셔서 우리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적인 깨달음과 감정의 터치와 의지적 결단을 통해 우리는 노예와 같이 억지로 복종하는 삶이 아니라 인격적인 승복과 순종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 신앙, 성경적인 신앙은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압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앎인 반면,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부분적인 앎입니다. 하지만 인격적인 신앙을 통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이해하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산다면 그것은 가장 고귀한 삶이며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4. 신앙은 결국 사랑의 싸움이다
한국의 어느 농가에서 소를 키우는데 송아지 한 마리가 발이 세 개 밖에 없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네 번째 발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작아서 그 발로는 땅을 디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송아지는 땅에 어깨를 대고 세 발로 배밀이를 하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송아지들도 그것을 아는지 그 세 발 송아지를 수시로 무시하며 뒷발로 차 버리곤 했다는 겁니다. 젖도 먹을 수 없게 방해하며 사료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송아지는 항상 구석에서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배불리 먹고 돌아서면 그때서야 기어가서 남은 사료를 먹었다는 겁니다.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안쓰러워서 그 세 발 송아지 방을 따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젖 먹을 때는 엄마 젖소를 데려다가 그 방에 집어넣어서 젖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사료도 넉넉히 부어 주었습니다. 주인의 마음에는 항상 이 송아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 송아지는 어쩔 거냐며 팔아버리라고 할 때 주인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얘 안 팔아요.”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끝까지 데리고 있어야죠. 불쌍하잖아요.”
요즘 반려견을 키우다가 병이 들거나 하면 몰래 갖다 버리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아졌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인간이 병든 개를 귀찮아하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되게 더 하찮게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약점이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오히려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 여기시며 사랑해주십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없는 약점을 전부 다 아시면서도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품어주십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고 뛰어난 초월적인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안에 그리고 내 곁에 계시며 나를 이끄시며 사랑해주십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이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
하나님께서는 수천 마리의 숫양이나 수만 개의 강줄기를 채울 엄청난 양의 기름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순히 좋은 것을 드린다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랑의 삶을 원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 6:6,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신앙을 싫어하십니다. 형식적인 신앙이란, 형식에 치중한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하는 모든 신앙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고 대단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하는 행위라면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은 사랑의 싸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만 만족하며 살려는 마음과, 어떻게 이 세상을 주님의 사랑 하나만으로 살 수 있느냐고 우리를 유혹하는 이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갑자기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놀라운 능력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며, 갑자기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시련을 당할 때가 있고, 아무리 열심히 섬기더라도 열매가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굉장한 성과를 많이 남겼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삶의 과정을 통해 살아왔느냐,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에 의해 상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 다 아십니다.
그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성도, 자기 같은 사람이 감히 위대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분이 주신 사명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지를 알며 감사하는 성도는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인생의 광야를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생명수를 마시는 특권을 누릴 것이고, 인생의 폭풍을 만나도 그것이 그들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 강력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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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계와 내가 그분께로부터 왔고, 그분이 나를 여기에 두셨으며, 그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세 개의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첫째, 그분의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둘째, 나는 지금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따라 살고 있는가?
셋째, 나는 지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으며, 지금 내가 여기서 사랑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이 사실 앞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칭찬받는 우리의 삶이 되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