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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4일 수요예배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8 ✦
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자리
(출애굽기 38장 9~20절)
1. 예배의 자리인 ‘주의 뜰’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책망이나 비난이나 비판보다는 칭찬과 격려 그리고 소망과 약속을 듣는 것이 훨씬 좋은 법입니다.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잘못했다. 왜 이렇게 했느냐?’라고 하면 내가 잘못한 걸 알아도 마음이 상합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것을 아는데도 와서 ‘괜찮다. 더 잘할 수 있어.’라고 할 때 굉장히 힘이 됩니다.
요즘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는데 어제 한국 여자배구 팀이 세계 13위인데 4위인 터키와 8강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올라갔습니다. 한국 팀의 어느 선수가 인터뷰를 한 기사를 보았는데, 자기가 실수를 했을 때 세계적인 선수가 와서 ‘왜 너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느냐?’라고 할 만한 상황인데 ‘괜찮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수뿐 아니라 주변 동료들이 모두 ‘괜찮다. 너는 원래 수비 전문이 아니라 공격 전문이니까 네가 잘하는 공격을 해서 점수를 따주면 된다.’라고 해서 굉장히 힘이 났다고 합니다.
사실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 팀 전체가 의기소침해집니다. ‘왜 저러나? 왜 저것도 못 받나?’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 ‘괜찮아. 그건 원래 네가 제일 잘하는 게 아니야. 네가 제일 잘하는 걸로 하면 된다.’라고 해주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한국 팀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객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데 One Team이 되어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저래야 하지 않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하면 잘못한 걸 다 압니다.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잘못한 걸 또 ‘왜 잘못했느냐? 왜 그렇게 하느냐?’가 아니라 ‘괜찮다. 다른 것을 잘하니까 그 잘하는 것으로 하면 된다.’라고 해주면 얼마나 용기가 되고 또 얼마나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그런 격려와 칭찬을 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4장 3절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고전 14:3)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은사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에게 은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12장과 14장이 그래서 ‘은사 장’이고 그 중간의 13장은 ‘사랑 장’입니다. 은사를 사용하되 사랑으로 하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특히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방언은 개인에게 유익하지만 통역하지 않으면 교회에 유익하지 않으니까, 사람에 대해서 하는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회가 은사 때문에 무질서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일어나 막 방언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저쪽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고, 그러면 또 다른 사람도 일어나 뭐라고 했습니다. 예배가 너무 무질서했고, 특히 여인들 중 그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여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여성들 중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덕을 세우며’(strengthening), ‘권면하며’(encouraging), ‘위로하는’(comfort) 것입니다. 그러니까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혹시 예언기도를 받은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종종 보면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예언기도를 한다면서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언기도를 받고 와서 마음에 근심이 되고 괴로워지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예언은 항상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언은 저주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너는 전에 죄를 지었는데 그것 때문에 집안이 망해!’라는 건 예언이 아닙니다. 그건 사탄의 메시지이지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물론 때에 따라 하나님이 책망도 하시고 야단을 치기도 하십니다. 구약을 보면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책망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그것은 결코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실 때는 우리가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변화되게 제대로 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을 할 때 어떤 책망의 메시지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빨리 마음을 돌이키게 해서 바른 길로 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항상 그 내용과 상관없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무슨 저주하고 괴롭히고 옭아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춘기 청소년이나 청년의 때에 마음이 정의감으로 충만해서 나는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세상은 부조리에 사로잡히고 다 틀렸다고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경에서 야단치는 말씀을 좋아하게 됩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 ‘악한 자들을 다 쓸어버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크리스천들 중에서 운동권이었던 학생들이 가장 좋아했던 말씀이 이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그 심판의 칼날이 자기에게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고 그 말씀을 그렇게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이 소위 ‘586세대’입니다. 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을 말합니다(386-486-586으로 변해왔고 곧 686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몇 년 전부터 국회의원이나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대부분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된 것을 보며 씁쓸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게 되고 인생의 무게를 느끼게 되면서
그런 심판의 말씀이 다른 사람들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러한 말씀이 무섭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삶의 어려움 가운데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그런 무서운 심판과 책망의 말씀이 결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과 복을 선포하는 것이 참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깨달아 그 말씀을 좋아하고 그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그러한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시편 65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고 시작되는 이 아름다운 시편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예배와 기도와 결단과 그러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들어 있습니다. 요즘 쓰는 표현 가운데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시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축복을 누리는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시 65:8-13)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귀한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복 주심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온전히 꽉 붙잡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절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인데, 앞쪽의 두 가지 표현,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그대로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이라는 말은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 여기서 성소나 지성소가 아니라 ‘주의 뜰’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까? 주의 뜰에 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거기에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또한 그것이 무엇이기에 거기 살게 하신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표현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습니까?
‘주의 뜰’이라는 것은 바로 예배의 현장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어떤 종류의 예배이든지, 예배가 일어나고 있는 그 현장이 ‘주의 뜰’입니다. 주일에 주일예배를 드리는 그곳, 수요일에 수요예배를 드리는 그곳, 새벽에 새벽예배를 드리는 그곳이 바로 ‘주의 뜰’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을 다른 곳이 아닌 주님의 뜰, 즉 예배의 현장에 머물게 하시며 그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2. 성막의 뜰에 서는 은혜
성막의 구조 중에서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성막 밖에 울타리로 쳐 있는 뜰이 있습니다. 그 울타리의 사이즈는 100×50규빗(50×25미터)이고, 높이는 5규빗(2.5미터) 정도입니다.
“그가 또 뜰을 만들었으니 남으로 뜰의 남쪽에는 세마포 포장이 백 규빗이라” (9절)
“그 북쪽에도 백 규빗이라” (11a절)
“서쪽에 포장은 쉰 규빗이라” (12a절)
“동으로 동쪽에도 쉰 규빗이라” (13절)
한국 규격으로 400평(13,400 sq ft)이 조금 안 되는 공간 한가운데 22평(740 sq ft)쯤 되는 성막이 있는데, 성막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이 바로 뜰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성전의 뜰은 보통 무시하기 쉬운데, ‘성전 뜰만 밟고 간다’는 말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지만 성경 말씀만큼 영향력이 있는 말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 말이 잘못된 표현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로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그저 몸만 살짝 왔다 가는 잘못된 예배를 경고하는 아주 적절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때문에 성전 뜰을 하찮게 여기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전 뜰을 가리켜 예배와 상관이 없고, 아무나 밟을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전 뜰만 밟고 간다.’라는 말 때문에 성전(성막) 뜰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뜰도 성전의 아주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도 예배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통 성막을 말할 때 그것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1) 성막: 벽과 덮개와 휘장
(2) 집기들: 언약궤를 비롯한 여러 가지
(3) 뜰과 울타리
(4) 성막을 섬기는 사람들: 제사장들
(5) 제사의 진행
우리는 뜰과 울타리가 바로 이 성막의 다섯 요소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 뜰에 선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의 현장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들이 예배의 내용과 기능을 말하는 것이라면, 성막 뜰은 예배의 현장을 가리킵니다.
요즘 아무리 다양한 예배의 형태가 있다고 해도, 예배의 현장인 것과 예배의 현장이 아닌 것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예배의 현장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기본 요소입니다. 진짜 예배가 되려면, 그 자리가 예배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형태든지 예배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은 정말 복된 것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1) 뜰까지 온 것만으로도 복이다
시편 65편 말씀을 통해 이미 확인한 것처럼, 하나님이 택해주지 않으시면 거기에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뜰은 아무나 밟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뜰만 밟고 간다고 표현하니까 누구나 아무 때든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동쪽 울타리의 정문에 칠 막은,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모시 실로 수를 놓아 짠 것으로, 그 길이는 스무 자이고, 너비 곧 높이는 뜰의 휘장과 마찬가지로 다섯 자이다.” (18절, 새번역)
뜰은 5규빗(2.5미터) 높이의 울타리로 구별되어 있고, 들어오는 입구도 비록 20규빗(10미터) 정도 되는 넓은 문이기는 하지만, 열리고 닫히는 문이 달려 있습니다. 즉, 아무나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전에 성막 은 받침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했지만, 예배는 성도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 뜰, 즉 예배의 현장에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엉겁결에 끌려온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 것이라면, 자신이 예배의 자리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시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가까이하겠다고 하신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복입니다. 예배의 자리인 성막 뜰에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반항입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반항한 사람이 요나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 반대편인 스페인의 다시스로 갔습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 65편 4절에서 분명히 “가까이 오게 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고 실제로 가까이 오게 하심으로 가능한 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이 말씀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복입니다. 어떤 것보다도 최고의 복은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죄는 왜 무서운 저주가 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자꾸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고난이 어떻게 복이 됩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때문에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찬양사역자가 있는데, 찬양을 인도하면서 거의 매번 두 가지 멘트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라는 말씀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a)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의 모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 두 가지가 가장 실제적인 예배의 축복입니다.
3) 예배의 현장에 있는 것이 복이다
성막 뜰, 즉 예배의 현장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예배의 현장에 있는 것이 복이 되는 겁니다. 성막의 뜰은 그냥 뜰이 아닙니다. 그곳은 바로 예배의 역사가 일어나는 예배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귀하기 때문에, 그 주님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를 했는데, 부모님은 이전에 살던 동네에 있는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이셨고 계속 그 교회를 섬기셨고 주일마다 늦게 오셨기 때문에, 저희를 데리고 다니시기보다는 같은 교단에 소속된 동네 교회를 다니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상가에 있는 교회여서 포근함과 따뜻함을 느끼기 힘든 분위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처음 그 교회에 갔을 때 뭔가 포근함을 느꼈습니다. 그때 제가 있는 반의 주일학교 선생님이 늘 미소를 띤 얼굴로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교회 안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이 항상 잘해주셔서 너무 좋았고, 교회는 참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이 섬기시던 교회를 다닐 때도 사랑해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은 그보다도 전 제가 5~6살쯤에 다니던 옥인동의 어느 작은 개척 교회도 그랬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환한 얼굴로 항상 맞이해주시며 마치 제가 아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맞아주시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실 결정적으로 좋았던 것은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미제’ 캐러멜을 매주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야, 교회는 정말 달콤한 곳이구나. 좋다.’라고 느꼈습니다. 또 뭔가를 잘하면 하나를 더 주시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통하여 교회는 따뜻하고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남았습니다. 우리도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작은 것 하나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까? 제가 어렸지만 주의 뜰, 즉 예배의 현장에 갔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안 간 아이들은 못 받아먹고 따뜻함과 친절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갔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따뜻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셔서 주의 뜰에 머물게 하시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즉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역사를 체험하는 참된 예배자로서 참으로 복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