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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9일 수요예배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5 ✦
말라기(언약의 기도):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라”
(말라기 2장 1~9절)
[들어가는 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신앙이 성경이라는 단 한 권의 책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데, 이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이 한 권의 책에 의해서 살아갈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믿음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붙잡고 연구하며 나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든 성경 말씀을 잘 알지 못하면 결코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한 깊은 묵상으로 나아가는 큐티를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소선지서로서, 신구약 중간시대, 소위 침묵시대로 들어가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물론 요즘 신학자들 중에는 말라기를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나 그보다 앞선 시대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맞든지, 말라기 말씀 이후에는 한동안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시대 말기적 현상을 굉장히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총 여섯 개의 논쟁 형태로 진술되는데, 이처럼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예언자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습니까?’ 하고 묻고 하나님도 ‘너희의 잘못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시는 등,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여섯 개의 논쟁으로 그물을 짜듯 진행되는 것이 바로 말라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섯 개의 논쟁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그 시대의 말세적 상황과 현상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 시대는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이 시대를 향한 말라기의 외침
1) 사회적 타락
세기말로 가면 사회적 타락이 시작되고, 사회적 타락이 시작되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기 시작합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없는 자들의 것을 착취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굶는 것은 세상에 먹을 것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가진 자들이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타락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현상은 성적 타락입니다. 리처드 포스터가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에서 이 세 가지 단어를 서로 연관 지어 말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가진 자들은 성적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외도를 하고 불륜을 저지르면서 가정을 깨뜨립니다.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말 3:5, 새번역)
이처럼 말라기의 시대에는 사회적 타락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2) 종교적 타락
당시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은 영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겉으로는 굉장히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가 바로 말라기가 고발하는 시대입니다. 영적인 역겨움으로 가득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 (말 1:10,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겨움을 도저히 참으실 수가 없어서 성전 문을 누가 좀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종교가 이토록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영적 타락
영적 기대와 믿음이 아주 강하게 의심되고 조롱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불평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책임지신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그거 다 헛된 거야. 세상을 봐.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거 맞아?’ 이런 영적인 조롱과 회의가 가득한 질문으로 하나님을 공공연히 원망하고 조롱하는 시대가 바로 말라기가 이야기하는 모습입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말 3:14-15, 새번역)
이런 것이 바로 말라기 시대의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영적으로 타락하니까 종교가 타락합니다. 그렇게 헛된 거짓 예배를 드리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 보니까 이제는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악을 행해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습니다. 이처럼 영적 타락은 종교적 타락으로, 종교적 타락은 다시 사회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말라기 시대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그렇게 외치며 경고했던 그 시대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와 너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 타락과 종교적 타락과 영적 타락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를 정도로 진행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시대를 향해 외친 말라기의 외침이 지금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외친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를 향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4절)
그는 딱 한 가지만 이야기했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하나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겠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모시면서 맺었던 그 언약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되어서 말라비틀어진 신앙이나 무디어지고 닳아 버린 습관과 같은 신앙이 아닌, 하나님과 처음 맺었을 때의 가슴 뛰고 눈물 나게 행복했던 그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좋았던 때를 기억하면서 그리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뜨겁고 순수했던 신앙이 오늘 자신의 삶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의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를 통해 그 시대에 주셨던 하나님의 처방이고,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는 동일한 처방입니다.
모든 영적 메마름과 타락과 변질에 대한 처방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처음의 그 은혜와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처음 그 마음이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익숙해지고 닳고 닳아 잊어버렸다면 그것은 참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나도 옛날에는 열심히 했어.’라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옛날에 열심히 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에 안 나오시고 안 믿으시는 분을 만났는데, 교회를 나오시라고 했더니 오래 전에 교회를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이셨는데 그러셨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신앙도 졸업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몇 십 년 동안 교회를 안 다녔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안 믿는 분이시니까 그렇게 말하셨지만, 믿는 사람이 신앙에 졸업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졸업이 없습니다. 살다가 졸업하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신앙도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지, 졸업은 없습니다.
진짜 신앙은 살아 있기 때문에, 신앙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기 때문에, 처음 그때의 뜨거움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더욱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간증입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압니다.
그래서 목장에서도 특별한 건 아니지만 감사의 제목을 나누지 않습니까? 그런데 늘 똑같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면 간증이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가 같은 게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에 운전한 길을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운전했다고 해도 똑같은 길이 아닙니다. 거기 있는 나무의 잎도, 기어가던 개미도, 곤충도, 부는 바람도, 또 옆의 차들도 다 다릅니다. 같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눈을 뜨고 보면 분명히 다르고, 거기에서 ‘아, 하나님이 지금 나를 위해 이렇게 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영적 실력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간증 하면 ‘내가 1.4 후퇴 때...’라는 게 나오면 그 동안 제대로 한 게 없는 것이고 지금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상황이 어려워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없어서입니다. 영적 능력을 공급받는다면 오히려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능력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무너지는 것이고,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1년 3개월 동안 코로나 사태로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 백신 접종이 많이 이루어지면서 출구가 보이고 있습니다. 정말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상황이 좋아지고 있는데, 이제는 영적으로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Excuse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코로나 사태 중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년 이상의 코로나 사태 가운데 영적 상태가 어떠하셨습니까?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거나 아예 예배하지 않아도 괜찮았다면 신앙인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편안하게 모든 것이 괜찮았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신앙인은 아무리 상황이 편안하거나 돈을 잘 벌거나 일이 잘 풀리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으면 그냥 있지 못합니다. 삶은 그럭저럭 괜찮아도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가정도 평안하고 돈도 잘 벌린다면,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큰일 났다고 거기에서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도 어려움이 오면 영적으로 바르게 서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정말 하나님께 나아가야 되는데.’라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받아서 자기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도 그저 편안하고 조용하고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신앙인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런 마음이 있다면 심각하게 자신이 정말로 믿는 사람인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찔러주셔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바로 참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바로 그 복음을 회복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란 곧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생명과 평강의 언약인 복음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5절)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이 말씀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화평을 누리며 평강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를 통해 받는 은혜가 바로 생명과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바로 생명과 평강입니다. 우리 신앙과 삶의 기초는 바로 이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 곧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신앙인으로서 정말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바로 이 레위와 세운 언약이 항상 생생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서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짜 회복입니다. 특별히 기도에 있어서 이 부분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말라기의 기도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기도합니까? 아니, 기도란 무엇입니까? 물론 기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은혜로 응답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구하고 응답받는 것의 진짜 핵심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건강해지는 것입니까? 명예를 얻는 것입니까?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까? 자녀가 좋은 학교 가고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것들은 좋은 것들이며 나쁜 것들이 아니지만, 그건 주변적인 것이지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가 세워질 때, 하나님과 나는 그 순간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약해지면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깨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진짜 기도라면 기도하는 순간 이미 응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응답이 올 때를 기다릴 것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순간,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래,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게 아닙니까?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 이걸 모르니까 자꾸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기웃거리며 뭐가 없나 하고 헤매게 됩니다. 모든 것을 갖고 계신 분의 밖으로 나가니까 방황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바로 이런 은혜 가운데 있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강력한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치유의 광선을 붙잡으라
모든 기도의 순간마다 그리고 모든 예배의 시간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말라기 선지자가 자신 있게 말한 것처럼 놀라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신앙의 축복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는 사실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 앞에서 죄가 다 타 버리고 악이 모두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은 그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뜬다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 4:1)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얼마나 뜨거운지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러 모든 교만한 자와 악행한 자들을 지푸라기같이 태워 버린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과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공의로운 해가 죽이는 빛이 아니라 치료의 광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 가운데 있게 되면 치료의 광선이 비추어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를 모두 태우고 결국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비밀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기 위하여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레위와 세우신 언약, 즉 생명과 평강의 그 언약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내 안에 어떤 죄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그 모든 것이 용서받고 치유되면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가 힘차게 뛰어 나가는 것과 같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흉내만 내는 신앙이나, 말라비틀어진 것만 움켜쥐고 있는 신앙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짜 신앙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뜨면 다 타 버릴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와 세우신 언약, 곧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머무십시오. 그럴 때 기가 막힌 은혜를 누리며 이 땅에서 힘 있고 아름답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