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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5일 수요예배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2 ✦
스바냐(공의의 기도):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간구하자”
(스바냐 1장 7~18절)
1. 치열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찾으라
스바냐는 어떤 사람입니까? 1장 1절을 보십시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습 1:1)
스바냐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 즉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인 왕족 출신의 선지자로, 유다의 가장 위대한 왕인 요시야 때 활동했습니다. ‘스바냐’라는 이름은 ‘스반’과 ‘야’가 합쳐져서 ‘여호와(야훼)가 숨으시다’, 다르게 말하면 ‘숨어 계신 여호와(주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름의 뜻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숨어 계신다는 말입니까? 사실은 그러한 그의 이름에 굉장히 중요한 영적 단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바냐를 통해 받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그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주님이 숨으실 수가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만나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 몇 개를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6)
“나의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섬기도록 하여라.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과 의도를 헤아리신다. 네가 그를 찾으면 너를 만나 주시겠지만, 네가 그를 버리면 그도 너를 영원히 버리실 것이다.” (대상 28:9, 새번역)
‘찾으면 만나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원하는 때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다면, 즉 하나님에게 범죄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는다면, 혹은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위선과 거짓 가운데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숨으시면서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숨으시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범죄는 교만에서 나오는데, 그로 인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떳떳하고 당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나? 왜 나한테서 숨으시는 건가?’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때때로 숨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고, 분명히 계시는데 안 계신 것처럼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사실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스바냐의 이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결코 문제만 제기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문제만 제기하고 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어떤 문제를 제기했다면, 대답 또한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 대답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에게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바냐가 ‘여호와가 숨으시다’라는 이름으로 나와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숨으셨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바냐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숨으셨으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아내는 그 치열한 싸움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사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마치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 같은 느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진정한 기도의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며 들어오는 불신앙의 모든 방해를 이기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기도가 응답되는 여호와의 날
스바냐가 바로 그런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 만날 수 있는지를 말해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기도의 길을 가면서 강조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스바냐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기도의 사람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을 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사야, 아모스, 요엘 등 많은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날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여호와의 날을 말한 사람이 바로 스바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스바냐서의 핵심 주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스바냐가 말한 여호와의 날, 또한 우리가 기도하면서 구해야 할 여호와의 날, 그리고 기도가 응답되는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5-16절)
한마디로 여호와의 날은 굉장히 무서운 날입니다. 그날은 ‘분노의 날’, 즉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환난과 고통의 날’, 즉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입니다. 그날은 ‘황폐와 패망의 날’, 즉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입니다. 그날은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 즉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날이 속히 오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토록 무서운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까? 그날이 악인에게는 무서운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오셔서 그렇게 역사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해서 응답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기도는 아주 얕은 수준의 기도입니다. 진짜 기도는 하나님이 오셔서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도록 그분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고 이 땅에 임하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가장 중요한 주제도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구하며 기도할 때,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를 바라며 하나님을 초청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주님께서 죄악을 때려 부수신다
이것을 알지 못한 채 기도한다면 잘못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수지 않고는 회복이 없습니다.
죄를 먼저 부수지 않고는 은혜가 부어질 수 없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부수고 세우는 것입니다. 무너뜨리고 나서 새롭게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얼마 안 되어 결례를 행하려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뭐라고 합니까?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눅 2:34)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에 대해 예언한 이 내용을 보십시오. 먼저 부수지 않고는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날을 구하는 사람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오셔서 삶 가운데 심판하고 부수시는 역사를 행하여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고는 여호와의 날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렇게 죽을 각오 없이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찾아서도 안 됩니다. 바로 이렇게 죽을 각오로 여호와의 날을 구한 사람이 스바냐입니다.
이 시대에도 바로 그러한 기도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 보고 하라고 하는 것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바냐의 기도는 자신의 대적들 가운데 오셔서 심판해달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그럼 스바냐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그는 남 유다의 왕족 출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족들이 다스리는 유다 땅에 임하셔서 그곳을 모두 때려 부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7-9절)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스바냐처럼 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이곳에 주님이 오셔서 죄를 다 때려 부숴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각자 내 가정에, 내 자녀에, 내 교회에, 무엇보다 나 자신 안에 오셔서 모든 죄악과 더러운 것들을 다 부수고 박살내고 없애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여호와의 날을 구하는 기도는 사실 회개의 기도입니다. 나의 전 존재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심판을 받을 각오로 나아가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그러한 회개 없이는 진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무서운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우리가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오셔서 나 자신을 심판해달라는 뜻입니다. 오셔서 때릴 건 때리시고, 부술 건 부수시고, 무너뜨릴 건 무너뜨리시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2)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진다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구하며 하나님을 초청할 때 일어나는 두 번째 역사는 온 땅이 주님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17-18절)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행해지는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개념인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의 질투, 곧 주님의 불같은 질투입니다.
여기서 질투는 히브리어로 ‘키느아’인데, 이 단어는 대적들을 향한 분노, 곧 죄를 향한 분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함께 담겨져 있는 열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주님의 불같은 질투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죄를 향한 분노와 그들을 향한 사랑이 함께 담겨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의 정서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뜨거운 열정이 쏟아지며 드러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고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시편 69편 9절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 69:9)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위의 말씀에서의 ‘열성’과 ‘열심’이 바로 주님의 질투와 같은 단어인 ‘키느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이 열성과 열심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6-7)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숨으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열심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역사를 행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 3:15-16)
미지근하면서도 그걸 모릅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메말라가는 것입니다. 영적 감동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이 습관적으로 되어 감으로써 그 어떤 영적 기대도 없어지는 것이 크리스천에게 가장 심각하고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식어 가기 시작할 때, 우리의 영적 기대와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숨으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로부터 떠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재앙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파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럼 괜찮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면서도 아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굉장히 심각합니다. 지금 신앙적으로 죽어 가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늘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정말 목숨을 건 몸부림을 매일 쳐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다이내믹하고 필사적이어야 합니다. 특히 기도가 그렇습니다. 주님의 열심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또 이 땅 가운데 일어나도록 필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다시 펼치시도록 목숨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결코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는 말씀의 역사가 지금 이곳의 삶 속에서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을 해도 한 달 이상 된 것은 간증으로 치지 않는다는 말이 맞습니다. ‘몇 년 전에, 십 수 년 전에 나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 하는 것은 감사의 제목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간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역사가 바로 지금 이곳에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키느아, 하나님의 질투, 곧 하나님의 열심이 발동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여, 다시 한 번 저를 뜨겁게 해주십시오. 다시 한 번 제 심장이 뛰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해주십시오.’
스바냐는 그렇게 숨어 계신 하나님을 목숨 걸고 찾아 그 백성 가운데 다시 오시게 초청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비록 다 부수어지고 불에 태워지더라도 그것을 구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호와의 날이고, 우리도 바로 그날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비록 두렵지만, 내 안에서 때려 부숴야 할 것이 있으면 때려 부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무섭지만 없어져야 유익인 것이 있으면 없어져야 합니다. 정말 떨리지만 내가 맞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맞아야 합니다.
아무리 두렵고 무섭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고 그게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하나님의 그 열심이 다시 한 번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진짜 믿음의 사람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바냐 3장 17절의 말씀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간절히 생명을 걸고 여호와의 날을 구하며 나아갈 때 바로 이 3장 17절의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