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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19일 수요예배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4

스가랴(은사의 기도):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스가랴 31~10)

 

[들어가는 말: 은사에 대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면, 특히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때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아서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신비주의라거나 영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영적 생활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사라는 것은 항상 공동(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기 때문에 방언이나 예언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덕을 끼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사모해야 하고, 또한 주신 은사를 열심히 사용하며 사역을 해야 합니다. 다만,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제대로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은사를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은사를 사용하며 기도할 때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기도의 은사인데,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기도를 하기가 수월합니다.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강력한 기도, 풍성한 기도, 영적인 기도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언어만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어떤 영적 차원에 도달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은사를 못 받은 사람은 기도를 안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은사 없이 기도한다고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평범한 기도나 조용한 기도가 중요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임계점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영적 은사가 필요합니다. 그 차원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은사를 받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방언의 은사는 말 그대로 은사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님이 필요에 따라 주십니다. 내가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오래 전 청소년 사역을 할 때 중학교에 이민을 온 학생이 있었는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중고등부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를 가는데 자기는 꼭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저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해서 같이 기도해보자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마침 그 수련회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방언을 강조하는 분이었는데 그분에게 안수기도도 받았지만 그 학생은 방언의 은사를 결국 못 받았습니다.

 

그 후 수년이 흘러 LA에 사시는 부모님 댁을 방문했는데 예배드리러 갔던 교회에 그 학생이 어린이 교사를 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LA에서 잡아서 온 겁니다. 그때 제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니?”라고 물었더니, 그때 제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또 다른 수련회에 갔는데 그 전에 실망이 되어서 별로 기도를 안 했는데도 방언의 은사를 그때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주세요, 주세요한다고 주시는 게 아니라 때가 되면 주십니다. 그리고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곧 그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거나 소위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금방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결코 신앙의 깊이나 성숙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다른 차원의 기도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말하는 방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온갖 다른 언어로 하는 언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기도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의 은사를 받아도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뭘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뭔지 몰라도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기도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철저하게 기도의 은사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주시는 겁니다. 조금 전 고등부 회장 학생도 자기가 남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려 했으면 주셨을 텐데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멋있게 보일 것 같아서 구하니까 안 주신 겁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이 기도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대로 기도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사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멋있게 보이니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겠다고 하면 주십니다.

 

 

1.   환상을 통해 펼쳐 보이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처럼 우리가 깊은 기도, 영적인 기도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서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기도의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 원한다면, 그리고 응답받는 능력에 대해 기도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환상을 볼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환상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주된 방법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환상은 일종의 예언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 때의 예언은 앞날을 점치듯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듣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보는 사람입니다. 물론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듣는 사람의 경우 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물론 고막을 때려서 들리는 음성으로 듣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고, 생각이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습니다.

 

환상을 보는 사람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장면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여주시거나 때로는 영상으로 봅니다. 물론 그렇게 보는 것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음성을 듣거나 뭘 보았다고 함부로 말하다가는 생사람(?) 잡을 수 있으니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본다고 해서 금방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해석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으로 서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귀한 방법인 환상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 중에 어떤 장면이 떠오르게 해주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그렇게 되면 그와 연관된 일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Yes만 응답이 아니라, No도 응답이고 Wait도 응답인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응답은 하나님의 예언, 곧 계시를 보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응답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스가랴에게 보여주신 환상

 

환상에 있어서 스가랴의 경우는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스가랴서에는 그가 본 여덟 개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는 사람으로서 그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줍니까?

 

스가랴는 우리에게 기도 가운데 어떻게 보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가 어떤 내용을 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환상을 봤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스가랴 선지자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환상도 은사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우리 전부가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응답을 받는다는 면에서는 다 받을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8)

 

사도행전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베드로에 의해서 바로 이 말씀이 인용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성령을 받으면 환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성령 가운데서 환상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고 권리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포함된 스가랴 3장은 여덟 개의 환상 가운데 네 번째로, 환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네 번째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림으로서 스가랴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볼 때 받을 수 있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판단하시는 하나님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1)

 

이 그림은 하나님의 재판정 모습인데,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서 있고 그 오른쪽에 있는 사탄이 여호수아를 계속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이야기를 다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보는 순간 스가랴의 마음이 감격으로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자신이 있는 곳을 안 보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곳에서 벌어진 억울함과 답답함, 기다리는 고통, 그리고 변화 없이 무의미한 이야기들을 볼 때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신경을 안 쓰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서 그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재판이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닌가 하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결코 잊힌 자도, 버려진 자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재판정에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보시며 판단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사탄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도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응답으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러한 응답을 얻어야 진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장 힘든 순간에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움 가운데 다 판단하고 계십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응답은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는 역사를 이룹니다.

 

 

2)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2)

 

하나님은 환상 속에서 스가랴 앞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를 보여주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겉으로 볼 때는 불에 탄 것처럼 보일뿐 아니라, 다 타서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다 끝난 줄 알았고,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줄 알았고, 이미 다 패배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 끝난 게 아니라 단지 그슬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손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환상 앞에서 절망은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낙심과 실망의 자리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완전히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3-5)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환상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스가랴도 거기에 직접 참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5)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키는데, 여호수아 자체가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단지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며 그들 자체가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다만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더러운 옷을 벗겨 버리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스가랴가 너무 감동해서 여호수아의 머리에 정결한 관을 씌워 달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많은 실패와 범죄와 문제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죄를 없애준다. 너는 여전히 내 자녀다. 너는 여전히 내 백성이다. 내가 너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는 순간, 너는 이전과 같이 회복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실패해서 끝난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순간, 그것은 반드시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바로 이것을 보여주십니다.

 

 

3)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6-7)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맺음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사실 모든 예배와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과 언약을 다시 맺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응답받고서 나오면 이전의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8)

 

여기서 예표의 사람들이란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행하실 모든 역사를 나타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까? “내가 이제 새싹이라고 부르는 나의 종을 보내겠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쩨마크라고 하는데, 이전에 사용하던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이것을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앞으로 하나님이 싹을 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순이 돋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지막 응답받는 순간부터 새순이 돋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새싹이라고 부르는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표를 나타내시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언약을 붙들고 또 걸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삶 속에서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이는 언약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와 또 다시 언약을 갱신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배할 때마다 언약을 갱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가 본 환상 속에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한 차원 높은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 보기를 사모하십시오. 또한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나타내 보이기 원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환상 보기를 사모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는 기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재판이 행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죄인이 입은 더러운 죄의 옷을 벗기고 깨끗하고 의로운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회복의 선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환상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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