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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8일 수요예배
✦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3 ✦
“누가가 전한 복음: 은혜를 누리는 새로운 삶”
(누가복음 1장 1~4절, 2장 8~14절)
1. 누가복음의 배경
오래 전 제가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아주 인기가 있던 저자이자 강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기독교 사상가 함석헌 선생인데, 198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작품 중에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지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중략)
잊지 못할 이 세상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참 마음을 울리는 시입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가졌는가?’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함석헌 선생이 묘사한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누가입니다. 사도 바울과 끝까지 함께했던 동역자가 바로 누가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를 뭐라고 부릅니까?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골 4:14)
바울은 누가를 ‘사랑받는 의사 누가’라고 부르는데, 사실 누가는 단순히 의사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요즘 말로 하면 ‘멀티 플레이어’였습니다. 먼저, 그는 유능한 의사였던 것이 맞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병자들에 대한 의학적 묘사들이 다른 책들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전도여행 장면에는 종종 ‘우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학자들이 ‘we-section’이라고 부르는 본문들입니다. 바울과 함께 누가가 동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육체의 가시’이자 ‘사탄의 사자’(고후 12:7)를 지니고 있었던 바울에게 의사 누가의 동행이 얼마나 큰 힘과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죽기 얼마 전에 쓴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11)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였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의리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몇 달 전에 나왔던 영화 <Paul, Apostle of Christ(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를 보았는데, 누가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오면서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에 대해 설명하는 형식으로 나옵니다. 실제로 누가는 바울을 만나 전도여행에 동행하면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영혼의 의사, 곧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누가는 유능한 음악가였습니다. 누가복음에 여러 노래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미> 1:46~56, the Magnificat
<사가랴의 노래> 1:67~79, the Benedictus
<천사들의 노래> 2:13~14, the GIoria
<시므온의 노래> 2:28~32, the Nunc Dimittis
무엇보다 그는 치밀한 역사가였습니다. 누가는 초대교회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의 기록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자 누가복음을 시작하면서 그가 쓴 서두만 읽어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1:1)
그는 사실을 기록한다고 선언하면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1:2~4)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라는 구절은 헬라어 원어(아크리보스)로 ‘정확한 연구’라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기억을 더듬어 쓴 게 아니라 정확한 리서치를 하고 썼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 기록했습니까? 누가입니다. 마가가 베드로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다면, 누가는 바울을 대신하여 예수님의 생애를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이 일차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헬라인들입니다. 누가 자신이 헬라인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이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쓰였다면, 누가복음은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쓰였습니다.
2. 누가가 전한 복음
그렇다면 의사요, 전도자요, 음악가요, 역사가인 누가가 증언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1) 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의 구주로 오신 소식이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밤 베들레헴 지경 밖 양 치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한 메신저는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10)
3년 전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베들레헴을 갔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 위에 세운 교회도 갔고, ‘목자들의 들판교회’라는 곳도 갔습니다. 지금은 베들레헴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지역이 되어서 이스라엘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 가이드는 못 가고 팔레스타인 가이드가 와서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한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경험하는 소소한 기쁨의 뉴스가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소수가 아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엄청나게 좋은 소식, 곧 복음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던 당시에 종종 로마 황제가 전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온 메신저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복음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황제의 명을 전하는 사람이니까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백성이 들어야 했던 소식은 복음이 아니고 사실은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드는 명령들뿐이었습니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1)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원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가 영을 내려서 천하로 다 호적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황제의 메시지는 복음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를 위한 명령에 불과했고, 이 명령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그 소식은 절대 복음이 아니라 괴로운 소식이고 자기들을 착취하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전한 소식은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1)
천사는 예수를 ‘구주(Savior)’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는 구원을 선물로 갖고 오신 것입니다. 헬라 제국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은 하나의 세계라는 희망을 약속했고, 로마의 황제들은 관대한 식민정치를 통해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정치적 평화를 약속했지만, 그 팍스 로마나도 힘으로 눌러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지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구원을 약속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지금 예수가 구원을 주는 구주이심을 선포합니다. 또 그가 바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보내시는 구세주 곧 “그리스도 주”이시라고 선포합니다. 그분은 구주이시고, 유대 민족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참된 왕이시고, 참된 선지자이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중보자이자 제사장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분이 오심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안 오셨으면 어떻게 그런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능해졌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 참된 평화를 상실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2:13-14)
누가가 전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구원의 주로 오셔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참 평화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2) 복음은 예수로 말미암은 죄 사함의 소식이다
예수께서는 구원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구원의 성경적 의미는 죄를 떠나서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물론 사회 복음을 강조하는 분들 중에는 구원의 의미를 사회적 불평등이나 구조적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성경적인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복음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어떻게 증거했습니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그러므로 우리가 증거하는 구원의 복음은 그 구원의 전제가 죄로부터의 돌이킴, 곧 회개여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 없이 교회 생활하는 분들을 보면 회개의 경험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태신앙이 왜 구원의 감격이 별로 없는가 하면, 날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자신이 정말 주님 앞에서 죄를 회개한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는데 구원의 기쁨이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를 보면, 회개의 경험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복음 전파’를 다른 말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전파’라고 말합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7)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기쁨을 빼앗는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가 죄책감(guilty feeling)입니다. 죄책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범죄한 다윗이 참회의 시편에서 이렇게 부르짖었겠습니까?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7)
‘우슬초’는 벽이나 담에 자라는 식물로, 정결식에서 양의 피를 적시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물을 적셔서 제단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다윗 때는 정결예식 때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지금은 인간의 죄를 무엇으로 씻을 수 있겠습니까? 우슬초 같은 것으로 닦는다고 죄가 씻어지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로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요일 1:7, 새)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순간 그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겨주고 우리를 온전하게 해줍니다. 누가가 전한 복음은 오직 예수의 피를 통해서만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3)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변화의 소식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8)
그런데 거기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끝내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 한 가지를 더 추가해서 알려줍니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눅 24:49, 새)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설득력이나 말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재주가 전혀 없는데도 전도를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데, 그런 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입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쓴 누가복음은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으로 연결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으며, 자기들이 살던 세상을 변화시키는 담대한 증인들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정말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 자신을 보아도 참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변하는 것은 그냥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렘 13:23)
검은 피부 색깔을 바꿀 수가 없고, 표범의 반점을 없앨 수가 없듯이, 인간의 변화도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까? 소망이 없다면 복음도 없습니다. 이 구스인과 표범 이야기를 하던 예레미야가 31장에 가면 소망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소망은 새 언약에 있다고 말합니다. 옛 언약으로는 안 되고 새 언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맺으신 언약입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고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31:33, 새)
이 말씀처럼, 새 언약은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옛 언약은 돌판에 새겨주셔서 특정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마음 판에 새겼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겨주시면서 지킬 능력과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한 해답을 에스겔서에서 말해줍니다.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겔 36:26-27, 새)
“내 영” 즉 성령을 주실 때 인간의 변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노력으로 변화되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인간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역사의 장을 사도행전이 잘 보여줍니다. 누가는 오순절 부흥의 현장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의 결론을 알려줍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8)
결국 성령이 해답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선물로 찾아오시는 성령, 그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내가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인간 변화의 유일한 해답인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가 증언한 복음입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자기 자신이 변화되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 때문에 변화될 수 있고 신분부터 바뀐다는 사실을 전해주게 됩니다. 그것이 누가가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인간의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나 윤리나 도덕으로도 불가능했던 변화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을 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변화의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전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성령 세례는 일회적이지만, 그 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
사도 바울이 굳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면서 술 취한 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것이 비슷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술 취한 것은 알코올의 지배를 받아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 충만은 무슨 뜨거운 것을 받거나 능력을 받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상태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내가 앞서가지 않고,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며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했는데, 제대로 번역하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계속 받으라”라고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는 성령 세례는 단 한 번 받는 것이지만, 그 후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매일 매순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을 닮을 수 있고 아름다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내가 변하지 않는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충만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주님 뜻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변화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만 변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의 인생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구로 충만한 상태인가, 무엇으로 충만한 상태인가를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충만함을 받은 바로 그것의 지배를 받아서 나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나의 헛된 야망이라면, 그것의 지배를 받아서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충만한 상태라면 그 사람의 방향대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것으로 충만함을 받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완전하신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님의 지배만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쓰임 받고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도 변화시키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