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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2일 수요예배

신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복음 5

누가가 다시 전한 복음: 성령의 권능으로 펼쳐질 드라마

(사도행전 11~8)

 

1.   복음 드라마의 후속편 사도행전

 

이제는 한국 사람들의 일상에서 드라마를 보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된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한국 TV 프로그램 시청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인 1990년대 초반에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나간다고 하니까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오신 전도사님이 한국 비디오를 좀 보면서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 변화된 한국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빌려온 커다란 VHS 비디오 제목들이 <여명의 눈동자>, <사랑이 뭐길래>, <질투>, <코미디 전망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좀 이상한 것 같아도, 그런 것들을 보니까 한국 사회를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는데, <모래시계>, <허준>, <대장금>, <태조 왕건>, <젊은이의 양지>, <파리의 연인> 등 많습니다. 놀랍게도 한국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 1위를 차지한 드라마는 <첫사랑>(1997, 65.8%)이라고 합니다. 역대 시청률 20위 안에 들어가는 드라마들의 특징은, 대부분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인터넷이 발달하고 방송국들도 많이 생겼으며 워낙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나왔기 때문에 이전처럼 드라마 시청률이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요즘은 10%만 넘으면 성공한 것이고, 20%가 넘으면 정말 대박을 터뜨린 거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어떤 요인이 그토록 강렬하게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TV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끝날 때 항상 절정 부분에 끊음으로써 다음 편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켜 인기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궁금증 때문에 사람들이 드라마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드라마에는 마지막에 이런 자막이 늘 등장했습니다. “To be continued”(다음 편에 계속).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들이 장르는 다른 것 같아도 결국은 로맨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원 드라마는 학원에서의 로맨스, 의학 드라마는 병원에서 로맨스, 기업 드라마는 회사에서 로맨스, 사극은 그 시대의 로맨스... 전부 로맨스, 즉 사랑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간 사랑을 후회하면서 그 사랑이 다시 이루어지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며 오늘을 살기 때문에 그렇게 로맨스가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라마도 아주 성공한 것들은 후속편이 나오는데 가끔 그렇게 됩니다. 반면 영화는 한편이 성공하면 후속편이 꼭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바로 누가가 전하는 복음 드라마의 후속편 격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1)

 

먼저 쓴 글이 무엇일까요?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이 글을 쓴다고 하는데, ‘데오하나님이라는 뜻의 ‘theos’에서 나온 말이고, ‘빌로사랑이라는 뜻의 ‘philos’에서 나왔으니까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짜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어떤 로마 관원의 별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상징적인 호칭일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데오빌로를 실제로 존재했던 로마의 높은 관리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쨌든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은 정확하게 누가복음의 형식과 일치합니다. 누가복음의 첫머리와 비교해 보십시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1:3-4)

 

의사요 전도자요 역사가였던 누가에게는, 데오빌로에게 쓴 누가복음만으로 못다 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2)

 

누가는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때로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지시를 내리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하신, 모든 일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가 전한 복음 드라마의 전편이 예수 탄생부터 승천까지였다면, 이제 누가는 이 복음 드라마의 후속편에서 그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통 성령행전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 진행되는 예수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내용을 통해 누가가 다시 한 번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2.   누가가 다시 전한 복음

 

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메시지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14-15)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교훈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은 흔히 하나님 나라 비유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마치라는 말로 시작하는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가 드릴 가장 중요한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6:9-10, )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주님의 다스림을 따르게 된 결과, 이 땅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 즉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어 가는가를 보여줍니다.

 

복음의 소극적인 면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며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의 소극적인 면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문제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것을 복음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 나 구원받았다.’ 하며 마음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성경의 책이 야고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적극적인 면은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며 천국에 간다는 것은 칭의’(의롭다 함을 받음)라고 합니다. ‘받은 구원’, ‘영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매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나는 종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고 받는 구원의 과정이며 (인격)의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이 두 가지 면을 다 붙들고 살아가야겠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에 간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마음대로 산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진짜 복음의 삶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오래 전 소련이 개방(페레스트로이카)되던 시절 소련을 방문하여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소련 교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복음이라고 느껴져서 죄 사함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설교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사회자가 나와 찬양을 한 곡 인도하더니, 다시 목사님에게 다가와서 두 번째 설교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방금 설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더니, “조금 전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용서 받는 것을 설교하셨는데, 그러면 그 다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지 설교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 교회에서는 주일 아침에 보통 설교를 두세 번 듣는 것이 관례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준비가 안 되었지만 너무 감격하며 즉흥적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번에는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통치가 어떻게 우리 가정, 우리 일터에서 나타나야 되는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 임하는 비전을 나눈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도행전의 복음, 누가가 다시 전한 복음입니다. 복음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모든 곳에서 이루신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고,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또한 우리 사회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복음입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 있다

 

결국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증인으로 살 것을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약속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8)

 

여기 증인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martures(마르튀레스)’인데, 이것은 순교적 증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순교자를 뜻하는 martyr가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주님은 문자 그대로 제자들이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우리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한 결과, 우리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서 보면 우리가 뭐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이유가 있는가? 멀리 가면 돈도 많이 들고 비행기도 몇 번씩 갈아타니까 그리로 가는 것 자체도 힘든데, 가까이서 전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그 정도의 돈과 그 정도의 노력이면 우리 주변에 전하고 가까운 나라에도 전하는 게 더 효과적이 아니냐?’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은 맞는 말도 아닙니다. 만약 주님의 제자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복음이 결코 우리에게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가까운 곳이냐 먼 곳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either A or B’의 문제가 아니라 ‘both A and B’의 문제입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가까운 곳만도 아니고 먼 곳만도 아니고, 다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 중간지역, 먼 곳에 다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먼저 복음을 우리의 예루살렘과 유대에서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또 땅 끝에만 꽂혀서 무조건 멀리 가서 전해야 한다고만 합니다. 여기서는 필요 없고 저기 멀리 가서만 전해야 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도 전해야 하고 저기 가서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먼저 전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복음을 안 전하는 사람이 땅 끝에 가서 전하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여기, 즉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먼저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시 유대인들과 원수였던 사마리아에 가서도 전해야 합니다. , 껄끄러운 사마리아에서도 전해야 하고, 또 아예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증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곳에만 가서 전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아주 힘들고 복음을 전할 때 손해가 오며 심지어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하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가서 전하는 사람, 그것이 주님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첫 번째 증인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마지막에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7:59) 하고 부르짖으며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드립니다. 그 후 12장에서는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들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과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특권처럼 여기면서 주님의 증인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사도 바울도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그들에게 증인의 길을 가기로 한 자신의 결단을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0:22-24, )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은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28:30-31)

 

이런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순교란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들만 누리는 선교의 특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누가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사건의 목격자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증인은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일을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증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입니다.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직하기로 결심하기만 한다면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해 정직하려는 용기만 있으면 누구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주님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진리이며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겪은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았을 때, 자신을 따라오는 그에게 예수님은 증인의 삶을 살라는 말씀을 아주 단순하게 알려주십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5:18-20)

 

바로 이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전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는지, 어떻게 나를 고쳐주셨는지, 어떻게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는지, 어떻게 오늘까지 나를 인도해주셨는지,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많은 이웃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며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특권이 아닙니까? 내 인생이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며 자랑거리가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감이 바로 은혜가 아닙니까? 사도행전의 복음은 예수님을 체험한 우리 모두가 바로 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성령의 권능으로 선교의 사명을 완수한다

 

복음을 전하는 삶에는 때로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되는 것은 정직할 용기만 있으면 되고 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증인의 삶은 여전히 쉽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짜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의 결단과 계획과 선교전략과 수고와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무엇에 달렸습니까?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4-5)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하러 나가기 전에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권능을 받아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미 강조한 것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24:47-49)

 

그래서 120명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2징에 보면 기도하던 그들 위에 마침내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여러 언어로 이야기했고, 서로 하나가 되어 예배하고 교제하고 사역하고 봉사하고 물건도 다 나눠썼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혔다 풀려났을 때 같이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4:31)

 

이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성령 충만하니까 오히려 더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후에 나오는 사도행전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가고, 또 소아시아로 가고, 유럽으로 가고, 북미로 가고, 아시아로 가고, 마침내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자 예수행전인 것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선교라는 미완성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매일 입어야 합니다. 사실 가장 좋은 선교훈련은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이 없이 그런 기술만 배우면 잔재주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전략을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와 전도의 주체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고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마침내 그분의 능력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땅 끝이 어디입니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땅 끝입니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북한은 분명히 땅 끝입니다. 또 이슬람권도 땅 끝입니다. 교회가 많은 곳이라고 해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도 바로 땅 끝입니다.

 

결국 복음은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님의 권능으로 전해집니다. 우리는 그 도구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혼자 오늘이라도 다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도와 선교에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사용하시면서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셔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냥 두면 우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만 하다가 끝날 인생입니다. 매일 자신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십시오. 영원히 남을 가치를 지닌 일을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다 이 세상에서 끝날 것들입니다.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가치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것을 넘어 자기 욕심과 욕망을 위해서만 살아갈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그렇다면 영원히 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 허무함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으시고,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셔서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귀한 특권을 받은 우리는 매일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늘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어 살아나갈 때, 놀라운 주님의 부흥을 일으키는 도구로서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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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고후 10:3-6) - 치유기도 11 (9/19/18) kpccoh 2018.09.20 2194
166 "성경적 결혼과 교회” (창 1:1-31) - 홍영락 전도사 (Steve Hong)(9/12/18) kpccoh 2018.09.13 325
165 "용서함으로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라" (창 45:1-8) - 치유기도 10 (9/05/18) kpccoh 2018.09.06 1087
164 "용서할 때 일어나는 회복의 역사" (마 18:23-35) - 치유기도 9 (8/29/18) kpccoh 2018.08.30 876
163 "억압된 기억의 치유" (렘 31:31-34) - 치유기도 8 (8/22/18) kpccoh 2018.08.23 1032
162 단기선교 간증 및 보고 (마 16:13-19) - 이금주 교우 (8/15/18) kpccoh 2018.08.16 272
161 "부모 치유와 자녀의 회복" (엡 6:1-4) - 치유기도 7 (8/8/18) kpccoh 2018.08.09 1332
160 "내면의 갈등을 치유하기" (롬 7:15-25) - 치유기도 6 (8/01/18) kpccoh 2018.08.02 1461
159 "성인자아와 내면아이의 갈등과 치유" (마 11:28-30) - 치유기도 5 (7/25/18) kpccoh 2018.07.2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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