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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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30일 성금요일예배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누가복음 23장 32~49절)
[들어가는 말]
전도할 때 가끔 보면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보여 다오. 그러면 믿겠다. 기적을 보여 다오. 그러면 믿겠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하나님을 보고 기적을 보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면 믿겠다고 한 분들 중에 진짜 봐도 믿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의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과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너무 많았지만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거리상으로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심지어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본다고, 기적을 목격했다고, 반드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달리신 그 십자가 주변에 있기는 있었지만,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각자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1. 예수를 조롱하는 사람들
1) 백성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백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들은 서서 구경을 합니다(35).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합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마 27:40, 새)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8절)
35절에도, 여기에도,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순수하게 무슨 일인지를 보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로, 가정의 위기로, 심한 병으로, 사업의 실패로, 직장에서의 해고로, 자녀 문제로, 진로 문제로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구경만 합니다. 그냥 조용하고 소극적으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어떻게 되는가 지켜만 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아예 관심을 끄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인지는 아주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알아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이 생겼을 때 특히 조심할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거나 ‘저 사람이 뭔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죄를 지어서 저런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우리는 왜 멀쩡합니까? 우리도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 ‘잘난 체하더니 꼴좋다.’라는 식으로 조롱해서도 안 됩니다. 특히 믿음생활을 아주 열심히 잘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이 아주 좋은 척하더니 복을 못 받고 오히려 일이 안 풀리는 것을 볼 때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 하고 판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에서 욥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는 의인이었고 아무 죄가 없었는데도 엄청난 재앙을 당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며 조롱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저 방관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 같은 자세가 아니라, 또 저주하며 조롱하는 자세가 아니라, 힘들어하는 지체를 보면서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눈물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실 남이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곁에 함께 있어주며 함께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특히 같이 기도해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기도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관리들
두 번째로, 유대인의 관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공회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합니까? 예수님을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5절)
그들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이 남들을 구원한 것처럼 혹시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있는지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 예수가 정말로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을 행할지도 모르는데, 사실 그들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로 조롱하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약간의 두려움을 품고 주의 깊게 십자가 위의 예수를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수록, 강한 말로 비판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 사람은 굉장한 것 같아도 별 것 아니야. 나는 저 사람보다 언제든지 더 잘 할 자신이 있어. 저 사람은 잘하는데 이런 면이 부족해. 이런 면에서 더 발전할 필요가 있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낄수록, 불러다가 충고를 해 준다고 하며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회의를 할 때 굉장히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생각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뭔가 두려운 것이 있어서 그럴 수가 있습니다.
비판 의식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을 잘 지적하는 사람일수록, 특히 남에 대해 험담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이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약하게 보이는 것이 싫고, 자기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약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비방하는 상대방에 대해 뭔가 열등감을 느껴서 그럴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거품을 물고 욕을 하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사람이야말로 어떤 해결되지 않은 문제나 두려움을 가졌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들어서 아는데, 그것이 두렵고 싫어서 오히려 강하게 거부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가족 중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반대한다면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믿음의 길로 더 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함께 열을 내며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고, 그의 지식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단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겨야 하겠습니다. 논쟁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경험할 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로마 군인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4절)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로마 군인들은 그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누가 가질지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들의 바로 위에는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뼛조각과 쇳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여러 대를 맞아 살이 처참하게 찢어진 채 피를 철철 흘렸고, 그 피가 굳어서 붙어 등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입니다. 따귀와 주먹으로 여러 차례 맞아서 이곳저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얼굴 곳곳이 부어 있습니다. 두껍고 날카로운 가시로 엮은 관을 쓰고 있어서 머리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과 양발에 굵은 못이 박힌 채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슬쩍 쳐다보기만 해도 잔인한 형벌로 인하여 끔찍하게 된 모습에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요즘 십자가 목걸이도 많고 귀고리도 많이 하기 때문에 혹시 여러분 중에 ‘십자가’가 뭐 그렇게 무서운가 하실지 모르겠는데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잔인성은 거기에 달린 범죄자가 즉시 죽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래 전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와 시돈을 정복하려다 잘 안 되어 아주 고생했습니다. 결국 몇 년 걸려 정복한 뒤에 그곳의 반역자들을 다 십자가에 달아 버렸습니다. 그 정도로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고통을 다 겪어야 합니다. 중동의 뜨거운 햇빛의 열기 아래, 범죄자는 피와 땀을 흘림으로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 탈진하게 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두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그는 기절하게 되고 얼마 후 깨어납니다. 그렇게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기를 여러 번 반복되며 약해지다가, 천천히 점점 죽음에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힘이 빠지니까 다리로 버티지 못하고 가슴에 콱 막혀 숨을 못 쉬면서 질식해서 죽는 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최악의 고통을 가장 오랫동안 당하게 만든 처형 방법입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은 로마의 시민을 십자가에 죽이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엄청나고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 처참하고 괴로운 순간, 아무도 똑바로 쳐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순간에, 군인들은 그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고 있습니다. 그것도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그렇게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가가 뽑혔을 때 재수가 좋다고 웃고 뽑힌 사람도 좋아서 웃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이 예수에게서 나온 이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 물질적인 이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가 죽든 말든 얼마나 고통을 당하든 그들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오직 그의 옷을 누가 갖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6-37절)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권합니다. 이것을 주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이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들은 이전에 예수님이 보여주었던 초인간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신 포도주를 줌으로써 예수님이 깨어나도록 한 다음에 혹시라도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보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한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 군인들은 이때 그저 그를 이용해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이 상황이 그들에게는 오락거리 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하고 무정한 마음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들만 이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아실 것입니다. 독일인 쉰들러가 유태인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애썼던 내용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한 독일군 장교가 있습니다. 유태인들을 가두어놓은 수용소 안에서 높은 망대 위에 집을 지어놓고 살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나와서 기지개를 펴며 “몸 좀 풀어볼까?”라고 합니다. 아래를 보니까 엄마와 어린 아들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준을 해서 아들을 탁 쏴 죽입니다. 그러자 엄마는 무너지며 아들을 껴안고 오열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야, 몸 잘 풀었네.”라고 하면서 들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쟁 전에는 이 사람이 벌레 하나도 죽이지 못하던 평범한 아저씨였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죽여도 자기에게 아무 손해가 오지 않을 것을 아니까 그냥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착해서 살인을 안 한다고 생각하시면 착각입니다.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을 죽이면 법에 걸리고 감옥에 가고 내 인생은 끝이라는 걸 알기에 못 죽이는 것이지, 죽일 수 있는데도 안 죽이는 게 아닙니다. 만약 내가 누구를 죽여도 내게 아무런 손해가 안 온다면, 감옥에도 안 가고 내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라면, 서로 막 죽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니까 못 죽이는 것이지, 안 죽이는 게 아닙니다.
이 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지금 예수를 조롱하고 아무리 잔인하게 해도 자기들에게 아무 손해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껏 잔인하게 하는 겁니다. 이런 잔인함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에게 아무 손해가 안 온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군인들처럼, 사람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득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이 자기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요, 남의 실패가 나의 성공’이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같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망하게 되었을 때, 속으로는 좋아하지만 겉으로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가 자기 아이보다 공부를 못할 때, 속으로는 안심이 되고 우쭐하지만 겉으로는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치려 듭니다. 직장에서 동료가 상사에게 야단맞을 때, 속으로는 고소해하고 통쾌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저 상사는 인간성이 빵점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는 그런 일이 많지 않지만, 큰 도시에서는 주변에 있는 다른 교회가 분쟁을 겪고 갈라지게 되어 교인들이 옮겨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자기 교회 교인 수가 늘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분들은 이미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고 위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갈라진 교회를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긴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주님의 교회가 타격을 입은 것이기에 애통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진정한 마음을 숨기고 살아갑니까?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타까워하며 섬겨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2. 예수님의 양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 (39-43절)
여러분에게 성경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을 한 명 뽑으라면 누구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같이 달렸던 행악자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에게는 믿을 수 있는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둘 다 빌라도가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38) 쓴 패를 볼 수 있었고,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중 하나는 종교 지도자들과 비슷한 말로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39절)
이 사람의 말하는 내용을 보면 지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왜 화가 났습니까?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너무나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해를 입힌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악에 받쳐서 마침 자기 옆에 있는 예수님을 욕하고 화를 냅니다.
이런 죽음의 순간, 최악의 순간에도 이처럼 독을 뿜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기회인데도 오히려 주님을 비방하고 거부하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믿음의 기회로 삼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신앙을 떠나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이 언제 드러납니까? 모든 게 잘될 때가 아니라 일이 잘 안 풀릴 때, 기분 좋고 편안할 때가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누구나 거룩한 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마음속에 정말로 무엇이 들어있는지가 밖으로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첫 번째 행악자와는 달리, 두 번째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0-41절)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는 바보다. 네가 틀린 것도 모르느냐? 우리는 우리가 한 것에 대해 정당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분은 결백한데도 불구하고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2-43절)
이 두 번째 행악자의 말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그는 지금 당하는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알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넷째,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겠습니까? 본문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보면, 두 강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욕했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두 번째 강도는 마음을 바꾸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그가 마음을 바꾼 것입니까? 제가 확신하기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4)
지금 예수님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습니까? 머리 살을 꿰뚫은 가시 때문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 몸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 달려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십니까? 자기의 원수들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이 두 번째 행악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코 거짓이나 가식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분명히 느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고통 중에는 누구라도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저주하고 욕하고 악독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도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그들을 용서해달라니, 이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차원이 전혀 다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핵폭탄과도 같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마저 용서하시는 저분이야말로 메시아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짓고, 원수도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자기의 생명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두 행악자는 똑같이 십자가에 달린 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며 독을 뿜어댔고, 두 번째 사람은 그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한 것,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자신을 맡긴 결단입니다.
첫 번째 행악자만이 아니라, 거기 십자가 주변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붙들기는커녕 욕하고 비방했습니다. 백성들, 종교지도자들, 로마 군인들, 그리고 첫 번째 행악자 모두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을 다 자기 외부에서 찾았고, 예수님이 문제라고 조롱하며 욕했습니다. 그 결과 구원의 기회가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 사람, 두 번째 행악자는 예수님이나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인 것이 문제의 근본임을 인정하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 결과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졸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찔려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데, 어떤 사람은 왜 이렇게 지겨운 얘기만 하나 생각하며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그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이 죄인인 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은혜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두 번째 행악자는 유일하게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행악자는 성경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유일하게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한 벌이 아닙니다. 무기징역이나 사형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복수심을 부추깁니다. 교육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치밀한 범죄자들 중에 고학력자들이 많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용서하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체험할 때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녹일 수 있습니다.
청년 사울은, 열심을 다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삶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고 놀랍게 변화되어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변화의 바탕에는 바로, 스데반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영화 <Paul, Apostle of Christ>(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를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스데반을 끌어내서 돌로 쳐서 그가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그렇게 평안해 보이던 그의 모습이 나옵니다. 스데반이 죽기 직전에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행 7:60)라고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면서 죽어가던 그의 모습이 평생 바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 바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용서 때문에 바울이 나왔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이 착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품어줄 때, 제2 제3의 바울이 나를 통해 나올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제2, 제3의 바울을 나오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 안 하면 죽습니다.
아주 오래 전 <Three Stooges>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그것도 흑백으로). 미국에 이민 와서 초기에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세 명이 계속 넘어지고 부딪치고, 또 서로 치고 받고 하면서 웃기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세 명 중 한 명이 계속 친구에게 손으로 얻어맞기만 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친구, 나를 한 번만 더 때려봐. 내 몸에 다이너마이트를 감고 있다가 친구가 손으로 때릴 때 꽝 터져서 자기 손이 박살나게 할 거야!”
손만 박살납니까? 자기는 죽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분노하며 미워할 때 남에게 해가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해를 끼치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한심하고 위험한 일입니까? 실제 의학 연구에 의하면 우리 건강에 가장 타격을 주는 것이 바로 분노와 원망입니다. 계속 미워하면 마치 세균을 몸에 주사해서 넣는 것과 똑같다고 합니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우리 건강에 치명적이 됩니다. 몸이 아프고,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요즘 대부분 음식에 대해 상당히 조심을 하시면서 건강식품을 드실 겁니다. 유기농 음식만 사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통 그로서리 스토어에 가보더라도 요즘은 organic section이 아주 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organic food만 먹고 건강식품만 먹더라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보약을 먹고 좋다는 것을 다 먹어도,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분노를 품고 살면, 건강에 아주 해롭고 치명적입니다. 건강은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먹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계속해서 분노와 미움을 먹고 산다면, 아무리 많은 건강식품을 먹고 살더라도, 내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미움이 나를 산 채로 먹어치우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그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거부하며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안 주신 게 아니라, 본인이 영생을 안 받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예수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듣지만, 주님 앞에 나와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거부하여 구원을 못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핵심입니까?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세상이 이 용서하시는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들, 믿는 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이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될 뿐 아니라, 그렇게 사는 우리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