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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9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4

지옥, 불편한 진실

(마가복음 9 38-50)


[들어가는 ]


지난 2006 미국에서 제작된 데이비스 구겐하임(Davis Guggenheim)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었습니다. 제목은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입니다. 미국의 부통령인 고어(Al Gore) 자신이 행한 1,000번이 넘는 강연에서 사용했던 슬라이드 쇼를 바탕으로 지구 온난화에 대해 다루고 있는 내용인데, 2007 아카데미 영화제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원래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지만 대놓고 말하기는 꺼려지는 것들, 비록 사실이라고 해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내용을 가리킬 쓰는 말입니다. 비슷한 뜻의 말로서 ‘공공연한 비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실’이 있는데 그것을 말하려고 하면 괜히 꺼려지거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도 쉬쉬하게 되면 ‘사실’은 바로 ‘불편한 진실’이라고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해서 덮어두고 쉬쉬하기만 하면, 당장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있겠지만 나중에 가서는 도저히 해결할 없을 정도로 곪아터져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Elephant in the room’이라고 하여, 상당히 자주 쓰이는 관용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있는 불편한 진실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가장 하나가 지옥의 문제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서는 그래도 말을 합니다. 천국에 간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지옥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하거나 말하기를 꺼려하며 쉬쉬합니다. 그렇습니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이 정말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불편한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옥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지옥은 존재합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지옥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옥은 없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일 뿐이며, 지옥은 그들에게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어떤 곳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지옥에 대해 질문들을 많이 있지만, 성경은 지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1.   우리를 위하는 사람 (38-41)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옥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게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37). 말을 들은 요한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8)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는 것은 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에게는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람에게 그것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는 사람에게 이상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단지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그런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당에 있어서, 12 가운데에서도 권력 쟁탈전이 심각합니다. 누가 크냐고 싸우는 상황입니다. 그런 중에 경쟁자 명이 끼게 없다는 생각을 것입니다. 경쟁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주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은 다른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금지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39-40)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항상 같이 다니면서도 그런 능력을 행하지 못했는데, 함께 다니지도 않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요한은 그를 보면서 비교 의식도 느꼈고, 경쟁심도 느꼈습니다. 사실상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열두 제자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나와 다른 신앙의 색깔을 가졌다고 무조건 정죄하고 반대해서는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 신앙대로 사는 성실한 사람을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라고, 다른 교단이라고 반대해서는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교회, 교단에 소속이 사람은 비판하거나 방해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일이냐, 교회냐, 교단이냐가 중요한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일이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정말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교회나 교단이라는 제한 속에서 자신을 가두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모든 단체는, 교회이든, 선교 단체이든 함께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나와 맞지 않고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요한처럼 다른 형제자매를 책망하거나 기를 꺾어버린 일은 없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언제든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즉각 반응해서는 곤란합니다. 마음에 감정이 올라올 즉시 반응하지 말고 심호흡을 하며 늦춰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치우쳐서는 곤란하며,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위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가장 먼저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우리를 따르는 자가 아니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관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관용하지 못하고 모욕하면 그렇게 당한 사람은 적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처신입니다. 오히려 서로 용납하고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비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도 용납하고 타협하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자와 타협하거나 함께 교제를 나눠서는 된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특히 이렇게 성격이 불같던 요한이 나중에 ‘사랑의 사도’가 되어 요한 1, 2, 3서를 쓰는데, 요한이서에서 그렇게 악을 행하는 자와 타협하거나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당시에는 이단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요한처럼 다른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못하게 하면, 모욕을 당한 사람은 복음을 방해하는 적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막아야 하는 사람은 주님의 진리를 전하는 다른 교회나 다른 교단 사람이 아니라 이단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나 다른 목적으로 주의 진리를 왜곡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반대해야 합니다. 이것을 구별할 있는 길은 평소에 말씀에 굳게 서고 깨어 기도하는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 후에 예수님은 가지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1)


여러분, 다른 형제자매(예수님께 속한 )에게 그릇이라도 대접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릇 대접하는 얼마나 대수입니까? 그런데도 상을 주신다니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누구라도 주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아무리 작은 정성이라 할지라도 상을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선을 행하면 상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아는 사람이어야 가능합니다.


또한 대접의 이유는 대접의 대상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에게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로서 주님의 사랑으로 대접을 하는 사람은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야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대접하는 힘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리 솜씨가 부족하다고 해도, 가정을 오픈하여 목장으로 모이고 서로 대접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것 아닙니까? 정성으로 주님께 속한 자들을 대접하는 . 그러면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자신의 돕는 자로서의 명성이나 체면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못합니다. 대접받는 사람도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의 대접을 받는지 아닌지를 금방 압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는데, 선물을 받을 때도 그런 것이 느껴집니다. 리사이클을 선물이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정성껏 준비해서 주는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받았는데 자기는 필요가 없거나 마음에 드니까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받는 사람도 압니다. 물론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진심으로 하는지 하는지 느낍니다.


우리가 남을 대접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주님을 믿는 우리도 사랑으로 서로를 대접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고 너무 감사해서, 나도 남에게 사랑으로 남에게 베푼다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상이 예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속한 다른 사람을 이렇게 도와준 적이 있는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가? 이것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목장에서도 헌금을 하고 골프대회 등을 통해서 기금을 모아 선교사님들에게 보냅니다. 선교를 돈이 필요하지만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돈만 보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가 함께 해야만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물질적으로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은 돈의 후원이 없어도 버틸 있지만, 영적 후원인 기도가 없이는 사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기도하는 것이 헌금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선교헌금을 보내자고 하면 $10, $20 자리에서 꺼내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선교사님의 사정을 살피며, 자녀가 어떤지, 현지에서 전도하는 대상이 누군지, 이름을 불러가며 매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사랑과 정성과 관심이 없이는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헌금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접한 가정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축복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만 축복권이 있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모두 서로를 축복해줄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주님에게 속한 사람을 대접하는 사람은 상을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을 받는 사람은 가정을 위해 축복하고,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와 평안이 넘치길 위해 기도해주고, 안에서 신실한 주의 제자의 길을 걸을 있도록 기도해주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바로 그것이 크리스천으로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크리스천은 혼자 이렇게 교회 예배당에 주일에 와서 시간 예배드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만 믿으면 된다고 하고 가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크리스천의 삶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이렇게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각자도 집에서 예배하지만, 특이 이웃 사랑,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 사랑을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2.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의 심각성 (42)


이렇게 예수님은 41절에서 상에 대해 말씀하시고 나서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들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2)


여기에서 “나를 믿는 작은 자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말합니다. 41절과 42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대접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은 영원한 상을 받는 길이 되고, 중에 명이라도 실족하게 만드는 것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길이 된다는 것을 여기서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실족하다’라는 단어가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엄청나게 심각한 일입니다. 물론 진짜로 믿은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만나지 못한 분들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실족시킬 어떤 벌을 받는지 보면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느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종류의 맷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인들이 집에서 돌리는 맷돌입니다. 한국에서도 가정에서 사용하는 그런 맷돌과 비슷합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여인이 맷돌을 갈다가 명은 들림을 받고 명은 그냥 남는다는 말씀도 나오는데, 맷돌입니다( 24:41). 다른 하나는 나귀가 돌려야 정도로 맷돌입니다. 여기 42절에 나온 “연자 맷돌”이라는 것은 바로 번째 종류의 커다란 맷돌을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런 장면을 상상하며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위에 가면 넓은 5대호가 있는데, Lake Erie 호수로 가서 보트를 타고 호수의 중앙으로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나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간 사람들이 손을 결박하더니 엄청나게 바위를 목에 줄로 달아서 나를 그대로 들어 물속에 풍덩 던집니다. 물위로 다시 올라올 희망이 있습니까? 돌아올 있겠습니까?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서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고대 로마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행해지던 사형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형벌을 가리켜서 이교도들이나 행하는 잔인한 형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무덤에 장사를 지낼 수도 없는 죽음이기에 가장 처참한 죽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십니까? 정말 남을 실족시킨 사람이 이렇게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알려주기를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들어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죄는 이처럼 너무나 심각하고 엄청난 죄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에 대해서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넘어지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냥 넘기지 못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정말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삶에서 다른 형제자매가 실족하게 적은 없는가? 잠시 마음이 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믿음이 흔들릴 정도로 실족하게 만든 적은 없는가 정말 돌아봐야 합니다. 만약 그런 것이 생각나면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고, 내가 죄를 범한 형제자매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빠져 죽으라고 정도로 엄청나고 심각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각자 신앙의 모습은 다를 있습니다. 믿은 얼마 되는 분도 있고, 아직 예수님을 확실히 영접하지 못한 분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믿는 집에서 자라난 분도 계시고, 아주 확신 속에서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새로 믿게 사람은 아무래도 오래 믿은 사람보다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래 믿어 사람도 굉장히 혼란스러운 일을 보면 실족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목사인데 만일 목사인 제가 술집에서 나오면서 비틀거리며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린다면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야, 목사는 아주 멋진 인간이야! 같이 해야되겠는데!’라고 분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저나 어떤 장로님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며 도우넛도 척척 만드는 것을 보셨다면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야, 정말 아름답다. 21세기에 걸맞은 오픈 마인드를 가진 분이야.’라고 하실 분은 분도 없습니다. 반대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저러지? 장로가 어떻게 저러지? 실족하게 됩니다.


술과 담배만 그렇겠습니까? 무엇으로든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특히 교회 나온지 얼마 되는 , 믿음이 연약한 분들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 (고전 10:23-24, )


로마서에서도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15:1). 그렇다면 혹시라도 나의 행동이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앙에 타격을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만약 해결이 것이 생각난다면 빨리 해결을 해야겠습니다.


혹시 때문에 실망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까?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일은 없습니까? 혹시라도 남을 실족시킬 만한 일을 적이 있다면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하여 다시 데리고 나올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물에 빠지라고 정도로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   천국이냐, 지옥이냐? (43-48)


42절에서 다른 사람이 죄를 짓도록 만드는 죄의 심각성을 지적하신 예수님은, 그 다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의 심각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3-47절)

 

여러분, 먼저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의 과장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씀을 보고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눈을 뽑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죄를 지을 때마다 손을 자르고 발을 자르고 눈을 뽑으면 각각 두 개씩으로 모자랍니다. 두 번만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손과 발로 죄를 지으면 실제로 다 찍어버리고 눈으로 죄를 지으면 실제로 다 빼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렇게 한다면 얼마 못 가서 우리 손과 발과 눈을 다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 정도로 죄가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손은 우리가 하는 일을 상징합니다. 발은 우리가 가는 곳을 상징합니다. 눈은 우리가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한 몸으로 지옥을 가는 것보다 몸의 일부가 없이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시는 것은, 그만큼 지옥이란 곳이 너무나 무서운 곳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단어는 ‘게헨나(gehenna)’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원래 “힌놈(Hinnom)의 골짜기(ge)”라는 말로, 예루살렘 외곽에 실제로 있는 곳입니다. ‘아골 골짜기’라고도 부릅니다. 아하스 왕이 불의 신 몰렉을 섬기며 자기 아들들도 불에 태워 제사를 한 곳이기도 합니다(대하 28). 힌놈 골짜기, 즉 게헨나는 이스라엘에게 악한 곳의 상징이며 불이 타는 곳을 의미합니다. 지옥은 이처럼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8절)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상상해보십시오. 구더기가 득실거리는데 스멀스멀 내 몸을 타고 올라옵니다. 귀와 코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아무리 죽여도 안 죽습니다. 얼마나 괴롭습니까? 또 불이 너무 뜨거워서 불을 끄려고 아무리 물을 갖다 부어도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갈 곳은 단 두 군데밖에 없다고 합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여기서 착한 일을 조금 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는 것이 ‘선한 일’이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생명의 부활로 천국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천국이나 지옥은 어떤 일시적인 곳이 아니라 영원한 곳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봐도, 한번 지옥에 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다시 옮길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한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무서운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한 몸으로 그 무서운 지옥에 가는 것보다, 손과 발과 눈이 없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천국은 두 가지로 표현하시데, 43절과 45절을 보면 “영생”이라고 표현하시고, 47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행세하며 마음대로 살면서 손과 발과 눈으로 죄를 짓는 곳이 지옥입니다. 왜 죄를 짓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기쁨으로 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땅에 있어도 천국입니다. 바로 그런 기쁨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지옥으로 가라는 게 아니라, 이 기쁨의 천국으로 가고 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지옥이 있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불편하지만 진실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라면 지옥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천국이 있듯이 지옥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기억하실 것은, 정말 크리스천이라면,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결코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혀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해서 마음대로 죄를 짓는 생활을 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정말 예수님을 믿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가끔씩 넘어지고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회개하고 바로 돌아옵니다. 그런 죄 가운데, 지옥의 삶에 계속 머물 수가 없습니다.

 

지옥이라는 게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없는 곳이 아닙니까? 반면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에 은혜와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말 믿은 사람은 지옥의 삶을 계속 살 수가 없습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지옥의 삶을 산다면 그것이 어떻게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주님을 믿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매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만 하고 있는가? 손으로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발로 어떤 곳을 가고 있는가? 눈으로 어떤 것을 보는가?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하는 일들입니다. 그런 것들로 죄를 짓는다면 어쩔 수 없이 짓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일과 가는 곳과 보는 것을 의도적으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은 다음에만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이나 지옥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고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삶 자체가 지옥이 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인 사람의 삶은 그 자체가 혼란과 괴로움으로 가득한, 지옥과 같은 삶이 됩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될 때, 가정이든 교회든 지옥과 같은 분위기가 되어서 아주 괴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주인이 원하시는 것만 하면, 천국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손과 발과 눈을 찍고 빼는 고통이 있더라도 죄악 된 모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러나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 천국의 평화와 위로와 기쁨이 몰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4. 소금 (49-50절)

 

이렇게 무서운 지옥 얘기를 하신 예수님은 갑자기 소금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49-50절)

 

49절은 마가복음에서 가장 해석이 어려운 구절 중 하나이며,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그 중에서 그래도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해석이 이것입니다.

 

레위기 2장을 보면 소제를 드릴 때 누룩이나 꿀이 아닌 소금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은 순결과 보존을 나타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13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당연히 짜야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물질들과 섞였을 때 소금이 짠맛을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 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짠맛을 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으로서 이 세상이 맛이 나도록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정결하고 순수한 소금이 되어야만 합니다. 즉 세상의 다른 기준이 내 삶에 들어오거나, 손과 발과 눈을 사용해서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을 살아서는 그런 소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살아서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내 손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발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눈이 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 손으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습니까? 내 발로 내가 원하는 곳만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을 가고 있습니까? 내 눈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보기를 원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의 손과 발과 눈이 내 몸에 이식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과 눈이 내 몸에 붙여진 것입니다. 이식된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불로 연단을 받는 것 같은 고통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도전하고 계십니다.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곳에서 불에 타고 싶은가, 아니면 힘들더라도 자신을 정결케 만드는 주님의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겠는가?

 

사탄은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그 힘들고 고통스런 일을 왜 하느냐? 지금 당장 편안하게 하지 왜 그런 일을 하느냐?’ 하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지금 편하고 영원히 괴로운 길로 가도록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편하고 영원히 괴로움을 당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당장의 편안함보다는 영원한 영광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님의 불로 연단을 받으며 정결하게 될 때, 그것은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결국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소식도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편하고 안락하지만 결국은 멸망으로 가는 그런 길이 아니라, 지금은 조금 힘들고 고통스럽고 좁은 길이라도 영원한 기쁨과 생명의 길로 사람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다하는 우리 각 개인과 가정과 목장과 온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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