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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3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6 ✦
“깊은 탄식과 에바다”
(마가복음 7장 31-37절)
[들어가는 말]
몇 년 전부터 베스트셀러가 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Chicken Soup for the Soul)>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해지면서 여러 시리즈가 나왔습니다. 여러 이야기들을 엮어서 낸 책인데, 그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유명한 금문교(Golden Gate Bridge)가 있습니다. 이 다리로 가는 도로에는 17개의 톨게이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통행료를 받는 징수대 부스(booth) 17개가 나란히 있는데, 어느 날 아침 금문교를 통과하던 한 운전자가 보니까, 그 부스 안에서 티켓도 끊어주고 돈도 받는 사람이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돈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운전자는 그 행동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 사람을 향해 물어보았습니다. “뭘 하십니까?”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 “파티요? 누구를 초대하셨나요?” “제가 제 자신을 초대했지요.”
얼마 후에 그 운전자는 똑같은 징수대 부스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요금 받는 사람을 보니 춤을 추며 돈을 받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날도 음악을 틀어놓고 똑같은 모션으로 춤을 추면서 돈을 받고 티켓을 내줍니다. 그래서 운전자는 또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 오늘도 파티를 열고 계십니까?” “아. 물론이지요.”
호기심이 발동한 운전자는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파티를 열고 있지 않습니까?” “아, 저 사람들이요? 저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박스는요 사실은 관입니다.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4시 반에 퇴근하기까지 저 사람들은 관속에 갇혀 있는 시체들이란 말입니다!”
운전자는 그 특이한 대답 앞에 더 호기심이 발동해서 계속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당신이 저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요? 나는 중요한 미션이 있어요.” “그 미션이 뭡니까?” “저는 댄스 교수가 될 계획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연습장에서 돈을 받아가며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인 겁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을 잘 보세요. 관 아닙니까? 저게 닫혀있는 관이라면 제가 있는 이 부스 안은 열려있는 무대입니다. 하하.”
인간이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폐쇄된 공간에서 혼자 외로워하다가 외롭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고 말도 어눌한, 청각을 잃어버려 들을 수 없고 언어를 잃어버려 말할 수도 없는 고통 중에 살던 사람입니다.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완전히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람들에게 이끌려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1. 귀가 안 들리고 말을 못하는 사람의 치유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1절)
두로의 북쪽에 시돈이 있는데, 예수님은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신 다음에 더 북쪽으로 올라가셔서 시돈을 거쳐, 동남쪽으로 내려와 데가볼리를 지나서 갈릴리 호수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에 계실 때 또 다른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 외에는 특별한 사건이 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갈릴리 호수에 오니까 가장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2절)
갈릴리로 돌아오시자마자 사람들이 왜 이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이런 병이 가장 고치기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이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적극적인 믿음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이 사람에게 안수하여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를 안 하셨습니다. 대신 데리고 나가십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3절)
예수님은 안수 대신 따로 그를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른 것을 봅니다. 사람들이 생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안수하여 기적적으로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볼 만한 구경거리가 생기는 것이고, 사람들은 이 기적에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 사람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을 안 하는 것이 됩니다. 이 사람은 단지 병이 나은 여러 병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병이 단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이 사람을 따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상한 일을 하십니다. 손가락을 양쪽 귀에 집어넣었습니다. 어느 손가락이었는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고, 이렇게 양 손의 손가락으로 넣으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좀 지저분한 일을 하시는데, 손에 칵 퉤 하고 침을 뱉어 묻힌 후 그의 혀에 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저분하게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이 시대의 우리의 눈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꼭 이런 식으로 병을 고쳐야 하십니까?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실 때도 “가라. 나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경우에 병자들을 고치실 때 말만으로 고치셨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으신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고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을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가 이런 식으로 그의 귀를 만져준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 말을 안 하는 사람은 혀가 돌처럼 굳는데, 예수님은 이 사람의 혀를 만져주시면서 부드럽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기분입니다.
혹시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귀를 파주시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형제들이 있으면 서로 자기부터 파달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무릎에 고개를 대고 파주실 때 ‘아야’ 하든지 ‘아이, 간지러’ 하든지 하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그 촉감, 부드러움, 행복함 등이 마음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말을 잘못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소리를 크게 질렀을 것입니다. 귀가 안 들리는 분들이 있는데, 주변에서 크게 소리를 쳐야 들릴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예 안 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크게 소리를 질렀다가, 입 모양으로 했다가, 손짓 발짓을 했다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말을 하다 안 되니까 짜증이 나서 표정이 아주 험악해지고 화를 내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알아들으면 알아듣는 대로,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는다고 표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험악하게 소리를 지르지 않으셨고, 담담한 표정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귀에 손가락을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에게 막 소리를 치신 것도 아니고, 험한 얼굴을 하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없는 데로 데려가시는 배려도 해주시며 고쳐주셨습니다. 귀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귀에 넣었다 빼는 순간에 뭔가가 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또 혀를 만져주셨을 때 말이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사람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인 것입니다.
2. ‘에바다’의 의미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4절)
제가 오래 전 고등학생 때 ‘에바다 선교회’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에도 쳐보니까 ‘에바다’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탄식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아주 크게 한숨을 쉬신 것입니다. deep sigh입니다. 이것은 힘들어서 푹 한숨을 쉬시는 게 아니라,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을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에 공감하시며 그 답답함을 표현하신 것이 이 깊은 탄식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이 사람 참 답답하다고 탄식하시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동안 얼마나 답답하게 살았을까 안타까워하시며 깊은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이 사람을 보셨는지 안 보셨는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거나 병자들을 고치실 때 이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냥 그것을 보며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멀뚱멀뚱한 모습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럴 때 이 사람을 이미 보셨다면 불쌍히 여기시는 그 연민의 마음(compassion)이 올라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탄식은 그 사람과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언어의 장벽을 부수는 탄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들어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는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말씀을 듣지 못하고 기도로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내가 하는 기도의 종류는 딱 한 가지다. 침묵기도!” 그런데 우리가 침묵기도를 할 때도 있고, 조용히 할 때도 있고, 중얼중얼 작게 소리를 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는 합심해서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그걸 안 좋아하니까 안 한다’고 할 게 아니라, 말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를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기에도 힘써야 합니다. ‘요즘 말씀의 홍수니까 적당히 해도 되겠지’라고 할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을 때 들어야 합니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우리는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특권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 앞에서 깊이 탄식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뭘 느꼈겠습니까? ‘아, 이분이 나 때문에 굉장히 답답해하시는구나. 나에게 굉장히 마음을 써주시는구나.’ 하는 것이 분명히 마음에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에바다”였습니다. 이 ‘에바다’는 히브리어가 변형된 아람어인데, 그 전에 시리아의 통치에 있었기 때문에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달리다굼’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에바다’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엗파따’입니다. ‘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오기는 했어도 귀가 안 들려 들을 수 없었고 혀가 굳어져 말할 수 없었던 이 사람의 모든 것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게 하셨습니다. 물론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게 하시고, 혀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혀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몸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영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 그렇게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게 만든 때가 놀랍게도 중세 때였습니다. 중세 때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대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귀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말씀을 읽고 도할 때 모두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로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만약 여기서 제가 히브리어, 헬라어로 말한다면 공부한 사람 외에는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당시 라틴어를 공부한 사람들은 사제들 밖에 없습니다. 요즘 말로 목회자들입니다. 목회자가 멋지게 가운 입고 앞에 나와서 엄숙하고 거룩하게 말씀을 줄줄 읽고 엄숙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전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멋져 보였겠지만, 사실 그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나누어주어 읽게 했습니다. 이 사람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님이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5절)
‘에바다’라고 하실 때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이 시대에도 영적으로 귀가 안 들리고 말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지만 혀가 굳어 기도가 안 됩니다. 사실 육체적인 귀나 혀는 이상이 없는데 마음이 굳어서 그런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고, 주님이 우리의 귀와 혀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하면 행동으로 나가게 됩니다. 아이들도 말로 안 되면 이로 물어뜯거나 행동으로 난동을 부립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너무 마음이 굳어 있어서 뭔가를 부수고 욕하고 혈기를 부려야 의사소통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TV 토론을 보면 얼굴이 벌게져서 서로를 욕하고 비난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것을 봅니다.
이 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귀로 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선진국이 될수록 정신질환이 더 많습니다. 먹고 살 만하니까 마음의 문제가 그렇게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은 귀신에 들렸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고, 이 사람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적으로 귀가 막히고 혀가 굳어서 영적으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의도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중에 못 보던 사람을 눈 뜨게 해주시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전에 다 듣고 본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던 종교지도자들에 비해, 이 사람이 영적으로 풀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번 만져주시니까 이 사람은 모든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과도 풀리고 사람들과도 풀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6절)
이제 사람들이 있는 데로 와 보니까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파합니다.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실은 이것이 마가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놀라운 일을 봤기 때문에 나가서 막 이 소식을 전합니다. 더 이상 이 사람에게 말할 때도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고, 그냥 이야기하면 다 통합니다. 이 사람도 이제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들을 수도 있어서 관계가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뭔가 통하지 않을 때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뭘 모르고 있는데 상대방의 목소리가 막 높아지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바로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바로 ‘에바다’라고 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의를 많이 하고 상의나 상담을 한다고 풀리는 게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되겠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로 풀리려면 ‘에바다’라고 하시는 주님 앞에 나와야 풀립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답답하고 소리가 자꾸 높아지고 있다면, 회의를 하는데 뭔가가 안 풀리고 있다면, 더 열심히 대화하거나 회의를 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겁니다. ‘에바다, 주님, 이 대화를 열어주십시오. 이 회의를 열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소리 지를 것 없이 그렇게 기도하며 나아가면 주님께서 풀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37절)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우리 앞에서 고칠 실력이 못 되어서 몰래 데리고 가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까 이 사람의 얼굴부터가 바뀌었습니다. 표정이 환해졌고 당당하게 오며, 심지어 예수님과 대화를 하며 오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단지 육신의 병만 나은 게 아니라 마음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태도가 밝아지고 당당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귀에 넣었을 때, 혀를 만져주셨을 때, ‘아, 내가 이분에게 관심을 받는 존재구나.’ 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밝고 더 당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 사람을 이렇게 바꿀 수 있었는지 심히 놀랐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기적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은 이 사랑의 마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이 이 사람을 변화시켰듯, 우리의 사랑과 관심이 어떤 어려운 형편에 있는 형제자매와 이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답답하고 힘들었던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암 진단을 받은 그 날부터 이 할아버지는 매우 난폭해졌습니다. 성격이 갑자기 난폭해져 식구들을 향해서 욕을 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욕을 퍼붓습니다. 심지어는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고 병실에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간호사와 의사들에게까지도 포악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할아버지의 옛날 친구들을 들여보냈지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의 친구들에서 큰 소리를 치며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이번에는 할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 보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을 보냈더니 목사님도 욕만 먹고 쫓겨났습니다. 카운슬러를 들여보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동네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왔습니다. 식구들이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할아버지가 이런 상태인데 네가 들어가겠니?” “예, 들어갈 게요.”라고 해서 그 아이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30분 동안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오더니 그 이후로 이 할아버지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얘기도 하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이상해서 이 아이를 붙들고 묻습니다. “얘야, 너는 할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니?”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아니 네가 할아버지와 20-30분 동안 함께 있었잖니. 너는 그 동안 도대체 뭘 했니?” “저는 그냥 같이 울었어요.”
아이는 단지 이 할아버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고 울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이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를 꼭 껴안는 순간 거기서 진정한 사랑을 느꼈고 마음이 터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느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저도 교인들에게 기도의 부탁을 받습니다. 목장 기도제목을 보고 기도하고, 교회의 기도제목도 보고 하고, 매일 가정별로 기도하는 순서를 보고 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나와 있으니까 기도하지만 형식적으로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 특히 누군가가 아프다고 기도해달라고 할 때 의무감에서 그냥 기도하면, 틀림없이 안 낫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딱 보는 순간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주님, 정말 이분을 낫게 해주셔야겠습니다.’ 하고 간절하게 나아가면, 당장 안 낫더라도 대부분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기도해주세요”라고 해서 그냥 형식적으로 줄줄 기도하면 별 일이 안 일어나는데, 정말 그분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눈물까지 나면서 기도할 때, 특히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합심해서 그런 기도로 함께 나아갈 때 거기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얼마 전 성금요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가 목마르다” 하고 고통하며 부르짖으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의 고통과, 오해 받는 것과, 배신당하는 것과, 또 우리의 눈물과, 죄악과, 치욕과, 부끄러움, “이 모든 것을 다 내가 이해한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렇게 내 죄를 담당하시고 그 보배로운 피를 쏟아내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오는 우리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구원이며 능력입니다. 또 위로이며 소망이 됩니다. 바로 이 주님 앞에 날마다 나와서, “에바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