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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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3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4 ✦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 (마가복음 7장 1-23절) [들어가는 말]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아주 짜증나는 무더운 한 여름날에, 한 가정에서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집의 엄마는 네 살짜리 아들이 기도를 아주 잘한다고 식사 기도를 시켰습니다. “뭘 기도해야 되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대답합니다. “엄마가 아까 말한 그대로 기도하면 돼. 자, 빨리 기도해봐.”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오늘같이 짜증나는 더운 날 손님을 초대해서 이 고생인가요? 그리고 눈치도 없이, 오란다고 오는 건 또 뭡니까?”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 가장 싫어하셨던 것이 바로 위선적인 태도였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태도, 겉으로는 아주 의롭고 선한 척하면서도, 속은 완전히 썩어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늘 지적하고 꾸짖으셨습니다.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지적하시는 예수님 (1-8절)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1절)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까지 그 먼 거리를 여행하여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체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2-4절)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봤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냥 우연히 거기 있다가 본 것이 아니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명분을 찾기 위해 그 멀리서 여기까지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유심히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점에 대해 예수님께 따지며 질문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5절) 유대인들에게 ‘율법’이라고 하면 원래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구약의 첫 다섯 권의 책(모세 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그런데 BC 4세기와 5세기에 서기관(율법학자)이라는 새로운 율법 전문가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은 율법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원칙들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원칙들을 바탕으로 하여, 실제 생활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주 소소한 상황까지 다 생각해서 그 원칙들을 지킬 수 있는 수만 개의 규정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들은 예수님 시대가 훨씬 지나서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 5절에 나오는 “장로들의 전통”입니다. 여기에서 “장로”라는 것은 요즘의 장로 직분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내려온 위대한 율법 전문가들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제가 된 것은, 이 장로들의 전통 중에서 손을 씻는 전통에 관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손을 씻는 것에 관한 아주 분명하고도 엄격한 규정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의하면, 매 끼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는데, 그것도 전통에서 규정하는 특정한 방식으로만 씻어야 했습니다. 모래나 먼지나 그 어떠한 이물질이 손에 묻어 있어도 안 되었습니다. 손을 씻는 물도, 돌로 만든 아주 특별한 큰 항아리들에 보관했는데, 그것은 이 물이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또 아무 것도 물위에 떨어지거나 섞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또 그런 항아리들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특혜를 주는 등의 비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규칙들은 이차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 규정들이 마치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이 규정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핵심이며 본질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이러한 규정들과 전통들이 그들에게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전통들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이고 안 지키는 것은 곧 죄였기 때문에, 매일 조심조심하면서 전통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고, 조금이라도 전통을 깨는 사람을 보면 견디지 못하면서 그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세리와 죄인”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세리는 민족으로부터 배신자라고 멸시를 받던 사람들이고, 따로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규칙들을 안 지키는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이런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바른 삶에 대한 개념이었고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야말로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대해, 이사야 29:13 말씀을 인용하며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ㄱ)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6-7절) 예수님은 여기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두 가지로 지적하십니다. 1) 그들의 이중성과 위선 외식이 무엇입니까? 밖에서 밥 사먹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원래 ‘대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는데, 나중에 뜻이 발전해서 ‘미리 정해진 답을 하는 사람’, 즉 ‘배우’라는 뜻이 되었고, 결국 나중에 이 단어는 무대 위의 배우뿐 아니라 ‘신실함이 없이 그 삶이 거짓된 연기 그 자체인 사람’이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지적하시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겉으로는 모든 율법의 명령들을 다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자기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온갖 규칙들을 다 지키는 것 같지만, 그러한 행위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아주 경건한 사람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얘기할 때 기독교적인 언어들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하늘의 복과 교회의 신앙고백들에 대해 말했고, 그 내용은 그가 이끄는 새 정부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언론에 늘 경건한 이야기들을 나눠주었고, 특히 교회 언론에는 더욱 그렇게 했습니다. 또한 너무 많이 읽어서 다 낡아진 자기 성경을 보여주며, “바로 이 책으로부터 제가 힘과 지혜를 얻어서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지도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겉으로 아주 완벽한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은 하나님과 거리가 너무나 먼 사람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지적하신 두 번째 잘못은 8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8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붙으신 이유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로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 아니냐로 붙으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계명을 버리고 자기들의 전통만 중요시하니까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만든 전통을 지키는 데 있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그렇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서 자기들의 전통을 더 높이 떠받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전통을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전통이었습니다. 이단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나 몰몬교 등은 성경도 사용하지만, 다 자기 경전이 있습니다. 자기네 경전이 성경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그대로 드러난 예가 바로 조금 후에 살펴볼 고르반입니다. 우리 장로교에는 참으로 귀한 전통이 있습니다. 개혁교회의 전통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우리 장로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존 칼빈(장 깔뱅)인데, 그래서 작년 안식월 때 일부러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칼빈이 시무했던 성베드로 교회도 가보고 종교개혁 박물관도 가보고 종교개혁자들의 상을 세워놓은 공원에도 가보았습니다. 우리가 좋은 전통은 잘 살리고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일이 생겨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만약에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것은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전통주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혹시 내 안에도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얼마든지 바리새인과 같이 외식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요 4:23-24). 예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잠언에서 누누이 이야기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면서 무엇을 하든 주님께 하듯 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 바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 곧 참된 예배자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입니다(롬 12:1).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기준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까, 늘 생각합니다. 자기 방식만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어떤 사건에 대해 평가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성경에 바탕을 두고 합니까, 아니면 내 느낌이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판단합니까? 혹시라도 내 방식이나 스타일과 다른 일을 다른 사람이 할 때 못 견뎌하고 정죄하는 모습은 없습니까? 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내 느낌이나 감정이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 묵상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2. ‘고르반’과 마음의 중심 (9-16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원래 의미는 갖다 버리고 거기에 자기들의 전통을 올려놓았다고 통렬히 꾸짖으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9절) 이에 대한 증거로서 예수님은 십계명의 제5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설명하십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0절) 예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 5계명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는 출애굽기 21:17도 인용하십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법이 이렇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전통 중의 한 예로 예수님은 고르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1-13절) 고르반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선물’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특별히 드려진 어떤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고르반으로 정해진 물건은 아직 드리지 않았더라도 제단에 바쳐진 것과 똑같이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어떤 물건이든 고르반이 되면 따로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돈이나 소유물 중에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할 때, 그것을 고르반이라고 선포하면 그것은 이제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의 전체 소유가 고르반이 되었다고 선포하고서 자기 부모가 와서 도움을 요청하면, “저도 정말 부모님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모든 것이 이미 하나님께 바친 고르반이라 도와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자기의 소유를 고르반이라고 선포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모를 돕기 싫어서 하는 핑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악한 마음을 지적하시며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고르반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요즘으로 하면 이런 것과 같습니다. 택스 보고를 해서 $200 정도가 생겨 ‘아, 잘됐다. 이걸로 뭘 사야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부모님이 연락이 와서 “야야, 지금 급한데 혹시 $200 정도 없니? 좀 도와다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 이미 선교지정헌금으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놓고 가서 원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쓰는 겁니다. 이것은 단지 작은 예일 뿐이지, 모든 소유가 그렇다고 하니 얼마나 악합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마음의 중심입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4-16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질적인 것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을 놓고 서로 갈등하느라 시간과 힘을 낭비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서, 한번 가진 고정관념을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거리 비행기 여행을 하는데, 오래 가니까 피곤해서 곤히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어, 안 되지. 이런, 깜빡했네! 하마터면 수면제 먹고 자는 것을 잊을 뻔했네!” 그래서 황급히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는 “어, 이제 됐네.” 하고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우리 삶에는 왜 하는 건지도 모르고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내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항상 틀린 사람도 없고 항상 옳은 사람도 없습니다. 항상 옳은 분은 하나님 밖에 안 계십니다. 자기만 항상 옳다고 한다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겸손하게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믿음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것, 사랑을 베푸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겸손히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왜 그런가?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말이 많습니까? 안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어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자기의 옛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자기가 편한 것, 좋아하는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손뼉을 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조용하게 부르는 것이 옳습니까? 또 찬양할 때 손 들고 하는 게 옳습니까, 가만히 있는 게 옳습니까?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시 47:1) 손뼉 치며 찬송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에서 하라고 한 명령입니다. 손뼉 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손뼉 치는 것을 안 좋아해서“나는 절대로 손뼉을 안치겠다.”라고 하면 불순종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항상 손뼉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부흥회 같은 데 가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피 흘리셨다.”라는 식의 가사가 있는데 막 손뼉 치면서 그런 내용을 부르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했습니다. 즉 기쁜 찬양을 부를 때 손뼉 치라 했습니다. 마음이 기쁜데 어떻게 손뼉을 안 치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돌 그룹이나 유명한 가수가 나올 때 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환호하는지 모릅니다. 운동경기 하나 할 때도 골 하나 들어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박수 치며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는데 ‘나는 박수를 싫어하니까 가만히 있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옳은가 아닌가가 아니라, 내가 좋은가 싫은가를 따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하는가보다는, 내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찬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방식, 내 자존심을 더 내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3.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 (17-23절) 제자들은 다시 그들이 예수님과 따로 있을 때 그 말씀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설명하십니다.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17-19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도 이야기해주시니, 얼마나 사랑의 주님이십니까? 비록 나도 때때로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우둔하게 살더라도, 주님께 간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나의 우둔함을 꾸짖으면서도 설명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0-23절) 예수님은 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해주십니다. 모든 음식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 의해서 정하고 부정한 것이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선포하십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에 의해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결정됩니다. 겉으로 하는 것만 가지고는 모릅니다. 물론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속에 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고 모든 형식을 지켰지만 그 마음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전혀 없고 교만과 외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문제이지, 음식을 손 씻고 먹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럽게 먹으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9-10)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게는 이런 악한 것들이 없는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없는가? 나는 혹시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이 아닌가? 이런 것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우리 중에 형편없이 보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옳은지를 언제나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매년 수백억 달러의 돈을 외모나 건강 유지를 위해 쓰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가? 외모나 건강 등 밖을 가꾸는 데는 시간과 돈을 많이 들이는데, 속사람을 가꾸는 데는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보십니다. 잠언에 보면 우리 마음이 밭과 같아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잡초가 납니다. 그래서 늘 기경하는 수고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짜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어느 교회 제직회에서 추수감사절 무렵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니까 실화 같지는 않은데, 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회의 때만 되면 회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한 마디씩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또 제직회가 열리자, 모두 한마디씩 하면 제직회가 길어질 테니까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서로 발언을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참석한 신참 집사님이 분위기도 잘 모르고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 의견이란 “추수감사절에 떡을 만들어서 교인들도 먹고 이웃에게도 나누어줍시다.”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 한 분이 “아, 그거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교인들도 먹고 전도도 할 겸 떡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장로님 한 분이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떡을 안 먹습니다. 떡을 만들지 맙시다.”라는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또 다른 장로님이 “그래도 추수감사절은 교회의 명절인데 떡을 만들어 경로당에도 갖다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신참 집사님의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그러자 또 나온 반대 의견이 “모든 의견이 다 좋기는 하지만 이런 사소한 문제로 우리가 다투기까지 하면서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떡을 만들지 맙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장로님은 “요즘 교회가 인색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떡을 만듭시다.”라고 했습니다. 이쯤 되니 가만히 있던 안수집사님들도 떡을 만들자는 의견과 만들지 말자는 의견을 내며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온 제직들이 떡을 만들지 안 만들지 서로 자기들의 의견을 내놓다가, 결국 떡을 만들자고 결정을 했는데, 그 걸린 시간이 5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은 좀 가만히 계시지 나서서 “그럼 무슨 떡으로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또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백설기로 하자, 요즘 백설기 먹는 사람이 없으니 인절미로 하자, 교회에서 무슨 인절미를 만드느냐 시루떡을 만들자, 송편으로 하자, 가장 쉬운 절편으로 하자 등등, 여러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다른 제직들도 나름대로 한 마디씩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마지막에 결국은 백설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을 내리는 데에 또 다시 2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장장 일곱 시간 만에 제직회에서 결정한 것이, “추수감사절에 백설기를 만들기로 결정한다.”였습니다. 이 얼마나 낭비입니까? 자신들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만약 그 자리에 교회 밖의 사람, 주님을 안 믿는 VIP 분이 와서 봤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쯧쯧 혀를 차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전통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전통 그 자체가 아니라 “너희의 전한 전통”(13)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전통,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방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예수님은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통주의입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그 전통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악한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배격해야 할 것은 전통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좋은 전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통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권위는 좋지만 권위주의를 물리쳐야 합니다. 오래 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면, 과감하게 행할 수 있는 결단력과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동시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을 하느냐 저것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마음을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외식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로 마치려고 합니다. “주여!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