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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4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8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가복음 8 11-21)


 

[들어가는 ]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중년 신사가 모처럼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기사양반 서울역으로 갑시다.” 그러자 기사가 “예, 서울역으로 모실 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이분이 생각해보니 ‘어? 내가 어디를 가는 중이지?’ 기억이 안 나고 잘 모르겠어서 미안해하며 “저기, 기사양반, 내가 건망증이 심해서 그런데 갑자기 기억이 안 나요. 내가 어디로 가자고 했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사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다 보면서 말합니다. “아니, 언제 타셨어요?”

 

이런 경우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는데 금방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나, 내려가고 있었나?’ 직장에 가려고 집을 나서다가 놓고 온 것이 있어서 도로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왜 돌아왔는지 생각이 안 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심합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놓고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물어봅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또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 안경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이 날 듯, 날 듯 하면서도 안 날 때는 아주 괴롭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괴롭지만, 잊어버려야 할 기억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더 괴롭습니다. 그러니 잊어버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가끔 농담으로 ‘망각의 은사’라고 말하면서 괜찮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기억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이전의 교훈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 (11-13절)

 

제자들이 영적으로 우둔하여 이전에 경험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악한 마음 때문에 진리를 제대로 못 봅니다. 바리새파는 당시 가장 경건한 종교적 습관을 가진 종파인데, 잘못된 것과 죄악 된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하며 나온 유대교의 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의 자세보다는 신앙의 외적인 형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위선적 신앙으로 인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나와 표적을 구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1절)

 

여기서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인데, “힐난”과 “시험”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들을 찾아오신 게 아니라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힐난과 시험을 위해서였습니다.

 

‘힐난하다’라는 것은 ‘시비를 걸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내가 저 서울 강남 출신인데, 저 초라한 시골 동네인 나사렛 출신 예수에게 뭐가 그리 대단한 표적이 있겠는가?’라는 식으로 의심하고 부정하는, 그리고 시비를 걸려는 왜곡된 편견을 갖고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칠병이어로 남자만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 다음에 찾아왔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기적의 현장에 없었는데 여기를 온 것이라면, 자기들이 들은 소문을 믿지 못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자리에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럴 리가 없다는 불신으로 재차 확인하려고 온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태도로 온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2-13절)

 

먼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그들의 잘못된 태도가 너무도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단순히 ‘기적(miracle)’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sign)’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인정하신다는 표시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려는 태도가 없이 기적만 추구하는 신앙을 가지면 실패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도(2:1-12) 병만 고쳐주신 게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먼저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만 낫고 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진짜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믿음이 더해질 때 기적이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표적입니다. 표적은 믿음을 통하여 일어나고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믿음 없이도 일어나는 기적은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험하는 태도로 기적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믿음이 있어야 일어나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안 보여주겠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보여주어도 너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을 일으켜주어도 그들은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더 보여주셔도 그들에게 영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떠나가십니다.

 

우리도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삶 공부, 제자훈련, 또 다른 코스를 다 받아도,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태도가 중요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모하며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게 뭔가?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것을 사모하며 갈급한 마음으로 구할 때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처럼 그냥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식으로 ‘오늘은 하늘에서 뭐가 떨어질까’ 하는 식으로 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켜주셔도 본인이 표적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의 어리석음

 

바리새인들은 악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영적인 눈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4절)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급히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떡을 챙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다 보니까 떡을 준비하지 못해서 1개 밖에 없는 겁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때 배가 고팠을 것이고, 금방 눈치로 떡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은 금방 먹는 것에 지배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바보 녀석 순번인데 떡을 안 챙긴 거야? 우리가 이 호수를 건너고 다른 떡을 구하려면 적어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이 배고픈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먹을 떡이 없다는 걱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5절)

 

제자들이 떡을 하나 밖에 못 갔고 왔다고 걱정하는데 예수님은 누룩 이야기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절대 바보가 아닙니다. 기억력이 없는 사람들도 아니고, 머리가 빨리 도는 사람들입니다.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떡이 떠오르는 겁니다. 얼마나 상상력이 좋습니까? 그러자 제자들은 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6절)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거봐, 떡이 없는 걸 벌써 아셨어.’ ‘아 거봐, 내가 갖고 오라고 했잖아?’ ‘내가 이럴 줄 알았나?’라고 하는 겁니다. 소위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라는 두 번의 기적의 현장 속에 있던 제자들이 또 다시 먹는 것 때문에 걱정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 두 기적이 공통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기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공급자이신 것을 기적을 통해 증명해주셨습니다. 엄청난 숫자를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또 다른 무리를 떡 7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또 걱정합니다. ‘떡이 없다.’

 

제자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제자들이 참 바보 같다고 느낄 수 있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5년 전, 10년 전, 아니 바로 작년, 아니면 불과 몇 주, 몇 달 전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해결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합심해서 기도하고 자신도 열심히 기도하며 나아가니까 해결이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셨고 구원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흥분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흘러서 또 어려움이 닥치면 또 다시 걱정합니다. ‘떡이 없는데 어떡하나?’ 그 엄청난 주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도 ‘떡이 없는데....’라고 걱정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향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7절)

 

“너희들은 떡 때문에 걱정하는구나.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내가 두 번이나 기적을 행하여 너희들의 필요를 공급했지 않느냐? 수천, 수만 명이 먹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여전히 나를 신뢰하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이며, 구세주이며, 주란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 마음이 둔하냐?”고 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는 그렇게 머리가 돌이냐?”라고 하며 아주 깊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돌이냐...” 하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아주 바보 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야, 어떻게 그렇게 돌머리냐?” 하고 한탄을 하신 정도입니다.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억력 문제가 이닙니다. 사실 그들이 기억력은 뛰어났습니다. 기억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 하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것들이 지금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룩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누룩은 발효시키는 것이고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빠른 속도로 빨리 퍼지는 것을 누룩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누룩은 영향력입니다. 파급력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주로 나쁜 영향력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제자들이 지금 염려하고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씩이나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같은 문제로 걱정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나쁜 영향, 헤롯의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가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세상을 바꿔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삶을 보면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보십시오. 정말 믿음으로 결정을 합니까, 아니면 세상의 남들 하는 기준대로 결정을 합니까? 집을 살 때, 차를 살 때, 아이들 학교 보낼 때, 믿음으로 결정을 합니까? 아니면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서 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믿긴 믿는데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세상의 영향을 받고, 그것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님을 신뢰하는 게 약해지고, 조금만 어려우면 “떡이 없네”라고 합니다. 그렇게 체험을 해놓고도 또 “떡이 없네”라고 되는 겁니다.

 

 

3.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1)  바리새인들의 누룩: 형식주의

 

먼저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그들의 영향력입니다. 누가복음 12:1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 즉 위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겉만 꾸미는 것, 안으로 내용은 갖추지 않은 채 바깥에만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위선주의, 외식주의, 형식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중시했는데, 종교의 형식과 틀을 지키는 데는 아주 민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그들이 종교적 형식과 겉모습을 갖추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내용을 갖추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그런 척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회칠한 무덤이여!”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이 시체가 썩은 더럽고 부정한 곳이지만, 겉으로는 잘 꾸며놓아서 무덤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해놓았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특징을 아주 정확히 지적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우리 자신을 보면, 이 바리새인들보다 못한 게 아닌가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열심을 낸 십일조는 당시 종교인들의 대표적인 특성이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가 뭔가 하면, 이런 겁니다. 집에서 토마토, 고추, 부추 같은 것을 심어서 열매를 거두면 그것을 십일조로 낸 분이 계십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런 식물 심은 것까지도 계신해서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헌금도 열심히 드리고, 주일에 꼬박꼬박 잘 나오고,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QT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모습입니다. 나쁜 게 아닙니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삶에 대한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하는 것, 즉 의롭게 살고 사랑하며 살고 믿음으로 신실하게 사는 것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삶이 없었던 것,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 신앙의 끝이라면, 우리는 믿고 구원받은 순간 바로 죽고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원은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이제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맡겨주신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맡겨주신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되,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면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듣고, 스스로 말씀도 읽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같이 드리는 게 하나님의 백성인 표시이니까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다음에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나가서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다시 오는가가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는 다 거룩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 같은데, 이곳을 떠나는 순간 주님을 모르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는 은혜롭게 드렸는데 나가자마자 파킹장에서 다툰다면 문제입니다. 큰 도시의 교회들은 파킹 전쟁입니다. 가끔은 예배 끝나고 나와서 큰소리가 오고 갑니다. 금방 받은 은혜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럼 뭐가 진짜인가? 하나님께 예배한 모습이 진짜인가, 아니면 나가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게 진짜인가?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진짜 모습입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열심히 십일조도 하고 다 했지만, 삶을 보면 썩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배가 끝나고 제직회나 당회나 공동의회와 같이 회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끝나고 나가는 순간 진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신앙생활을 모여서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로 함께 모여 신앙의 훈련을 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들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진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한국 교인들을 비롯하여 이 시대 교인들의 최대 문제는 주일날 교회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만 신앙생활로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나가 질서를 지키는 것,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하지 않는 것, 내가 장애인도 아니면서 장애인인 가족이 받은 장애인 스티커를 나 혼자 갔을 때 사용해서 주차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웃들을 구체적으로 돌보는 것, 빛을 드러내는 것, 이웃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진짜 신앙생활,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아, 하나님, 찬양합니다. 경배합니다.”라고 하고서는, 나간 다음에 뒤에서 험담하고 이웃을 비난한다면, 바로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변화의 의지는 없이 종교의 형식만 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바리새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바로 그런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찬송과 기도에는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영향을 받고 있다. 신앙의 형식과 틀에만 관심이 있지 진짜 신앙생활과 삶의 변화에 마음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헤롯의 누룩: 물질주의

 

둘째는,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입니다. 병행 본문(같은 이야기가 기록된 본문)인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거기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마 16:6).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 본문에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사두개인과 헤롯이라고 다르게 되어 있습니까?

 

사실상 헤롯과 사두개인들은 한통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로마로부터 임명을 받아 한 지역을 맡아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이었습니다. 갈릴리 쪽을 다스렸습니다. 성경에 헤롯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의 왕은 헤롯대왕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두 살 밑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게 했던 왕입니다. 이 분봉왕 헤롯은 그 아들입니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에 보면 또 다른 헤롯들이 나옵니다.

 

이 헤롯 가문의 헤롯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헤롯의 이름이 들어간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 욕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많이 걷었습니다. 로마로 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걷어서 상당 부분은 자기들이 중간에서 가로챘습니다. 그들은 뇌물을 즐겼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대표하는 삶은 세속주의,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였습니다.

 

당시 바리새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파가 있었는데 바로 사두개파였는데, 사두개인들은 주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정치적으로 로마와 연결되어 친 로마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헤롯 가문과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이면서도 종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으로 성전을 관리하면서 성전 돈을 따로 만들어 그것만 사용하도록 하면서 이득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주의가 형식주의, 외식주의를 말한다면, 헤롯과 사두개인은 세속주의, 물질주의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헤롯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멀어 버린 원인이 바로 물질주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누룩을 이야기하시자 바로 ‘떡이 없다’ 하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는데, 그들은 떡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떡이 없으니까 누룩 이야기를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자기들 같은 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물질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실 물질, 즉 돈은 이 시대 최대의 우상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돈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뇌물 앞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치인들도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헤롯의 누룩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물론 돈은 필요합니다. 성경은 물질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돈은 그 자체로 중립적입니다. 좋은 데 쓰이면 좋은 것이고 나쁜 데 쓰이면 나쁜 겁니다. 그러나 돈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헤롯의 누룩을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우리 가운데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이 크게 두 가지에서 나타납니다.

 

첫째는 헌금생활입니다. 우리가 정말 물질주의를 극복한다면 그것이 헌금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헌금생활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재능도 시간도 다 헌신하는데 물질은 드릴 수 없다면 아직 물질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정말 예수 믿고 회개하고 변했다면, 그가 그 후에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만을 위해 사용되던 돈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되는가? 이것이 물질관을 시험하는 척도가 됩니다.

 

우리 장로교회나 개혁전통의 교회들은 세례를 베풀 때 물을 머리에 뿌리기만 하지만, 침례교회와 순복음교회 등은 물속에 푹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를 베풉니다. 어느 침례교회에서 침례식이 거행되고 있는데, 한 성도가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합니다. 왜 안 들어오느냐고 하니까 지금 지갑이 여기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당신의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속에 들어갈 때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고, 물에서 나올 때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서만, 내 가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던 물질을,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구체적 헌신이야말로, 내가 변했고 회개했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과연 나에게 그런 증거가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헌금을 많이 하라는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헌금뿐 아니라, 나의 돈의 사용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헤롯의 누룩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극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나 헌금들은 교회가 돈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게 아니고, 우리가 이런 헤롯의 누룩, 물질주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수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의 복을 받고 세상의 복도 어느 정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질적 축복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면, 어떤 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물질적 축복이 오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주님을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큰 비전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는 일입니까? 또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돈도, 헌신도, 전도도 다 필요 없으십니다. 혼자 다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용해주시며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시는가? 왜 예배하게 하시고 헌금하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동역자로 사용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떡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너무나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8절)

 

제자들이 무엇을 봐야 하겠습니까? 바로 주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 전능하신 주님,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해주신 주님께서 지금 자기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님을 보지 못하고 떡 한 개 있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19-21절)

 

이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대답을 잘합니까? 정말 머리가 빨리 돌아갑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옆에 계신 것을 못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눈이 열려서 살아 계신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지금 내 삶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고 있더라도,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주님께서 지금 함께 하고 계시는데 걱정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천지가 바뀔 수 있습니다. 날씨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나가는 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왜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그림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위대한 표적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살아 계신 주님께서 지금 내 옆에 계시고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리고 이것은 책망이 아니라 “빨리 마음을 돌이켜 깨달으라. 나를 신뢰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인 것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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