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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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1 ✦ “욕망을 따르느냐, 사명을 따르느냐” (마가복음 6장 14-29절) [들어가는 말]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참 안타깝고 비참한 소식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자기 중학생 딸을 야단치며 5시간 동안이나 빗자루와 빨래건조대 등으로 때려서 죽게 하고 시신을 이불로 덮어 무려 11개월간 방치한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부부는 딸의 시체를 집에 그냥 둔 이유를 “기도를 하면 딸이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고 했는데, 그들은 광신도가 아니라 놀랍게도 그 아버지는 독일 유학까지 한 신학박사이자 교수이고 목사입니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퍼질까봐 향초를 켜고 방향제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딸이 죽은 지 보름 뒤에 죽은 당일 가출했다고 거짓 신고까지 한 걸 보면, 결코 모르고 한 일이라고 보기가 힘듭니다. 바로 작년 성탄절 즈음에도 30대 초반의 아버지가 11살 된 딸을 2년 동안이나 학교도 안 보내고 학대를 하며 굶기다가 아이가 탈출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11살 아이가 4살 평균 체중에 불과할 정도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온종일 인터넷 게임에만 몰두하다가 툭하면 자기 딸을 때리고 심지어는 쇠파이프를 휘두르기도 했고, 때린 다음에는 화장실이나 세탁실에 가두었습니다. 경찰이 그 아버지와 또 동거하던 여자를 체포했을 때 동거녀는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기보다는 “우리 강아지는 잘 있느냐”고 자기 개에 대해서만 물을 정도의 뻔뻔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이는 학대하고 때리면서, 남녀가 외출할 때는 강아지를 아기처럼 가슴에 품고 끔찍이 아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아직 양심이 존재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의 양심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바뀌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양심은 더렵혀질 수 있습니다. 악해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이나 ‘양심이 불타서 없어진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양심이 없어질 수도 있고 포기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시대를 다스리던 통치자의 양심이 죽어 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헤롯입니다. 헤롯과 그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며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1. 욕망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 1) 헤롯 안디바 지난주 살펴본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파송을 받은 열두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한 사건이 나옵니다(13). 그래서 예수님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4-16절)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이 예수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엘리야라는 것과,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은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에 대해 듣자마자 바로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16). 그 당시 상황과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헤롯 집안에 대해 조금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헤롯”이라는 인물이 여러 명 등장하는데,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동방의 박사들이 만난 헤롯은 헤롯대왕(Herod the Great)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난 두 살 이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한 명령에서 보듯 그는 아주 잔인한 사람으로, 자기 아들이나 부인들 중에서도 정권을 넘본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그는 거의 50년이 걸려 성전도 지은 사람입니다(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에 이은 헤롯 성전). 헤롯대왕에게는 10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4번째 아내 말다게가 나은 아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 안디바입니다. 헤롯 안디바는 헤롯대왕의 둘째 아들로, 아라비아의 왕 아레다(Aretas) 4세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 나라는 헤롯이 다스리던 땅의 바로 동쪽에 위치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AD 29년경 로마로 여행을 가던 도중, 팔레스타인의 해변 도시에 살고 있던 자기 이복형제 헤롯 빌립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방문 기간 중에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집니다. 헤로디아는 헤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인 아리스토불로스의 딸이었고, 그러니까 실제로 헤롯 안디바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자기를 좋아하게 된 안디바가 야심 있는 인물인 것을 보고, 그가 부인과 이혼하면 로마에서 돌아온 다음 결혼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안디바의 아내는 자기 아버지인 아레다 4세에게로 가버렸고, 아레다 왕은 자기를 모욕했다고 하여 나중에 헤롯 안디바와 전쟁을 일으켜 보복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레 20:21) 이처럼 율법에 의하면 자기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안 되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헤롯 안디바의 결혼에 대해 옳지 않다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7-18절) 그래서 헤롯은 요한을 잡아서 감옥에 넣었고, 나중에 결국 처형하게 됩니다. 역사에 보면, 헤롯의 원래 장인인 아레다 4세가 나중에 헤롯과의 전쟁에서 이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리켜, 의로운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이 한 말을 듣고 가볍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19절) 헤로디아는 요한을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로 여겨 죽이고 싶어 했지만 죽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0절) 악한 헤롯도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라 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요한이 그렇게 말할 때 그것으로 인해 크게 괴로워하면서도 달게 들었습니다. 이 말은, 헤롯도 헤로디아와의 결혼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양심에 찔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잘못인줄 알면서도 죄를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괴로워하면서도 요한의 말을 달게 들었지만, 진리를 따르기로 결단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성경 다른 곳에도 등장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 18:37-38) 너무 놀라운 것은, “진리가 뭐냐?” 하고 물었으면 들어야 하는데, 진리이신 예수님이 앞에 계신데 그렇게 물어봐 놓고는 그냥 나갑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 24:25)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자기 눈앞에 두고도 두려워하면서 믿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빌라도보다 후대의 총독이던 벨릭스도 갇혀 있던 바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두려워하면서 믿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가라.” 오늘 본문에서 헤롯도 자신의 죄악 된 삶을 정리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주어졌는데, 거부하여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면서도 악한 삶을 포기하길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헤롯처럼 이중적인 삶을 오래 동안 살면서 결정을 미루게 되면,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 옵니다. 꼭 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선한 쪽이 아니라 악한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진리를 따르는 것을 주저하며 결정을 미루다 보면, 알면서도 주저하며 미루다 보면, ‘언젠가는 하겠다. 지금은 아니다.’라고 하다 보면, 진리에 대해 알면서도 잘못된 삶을 완전히 청산하지도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게 되면, 언젠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반드시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옵니다. 당장 오든 늦게 오든, 반드시 옵니다. 그런데 결정을 못하고 있으면 결국 악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목회 사역을 하면서 만난 분들 중에 가끔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입니다. “저도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해야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좋아요. 그래서 천국은 좀 나중에 가겠습니다.” “포기하기엔 너무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조금만 더 즐기게 냅 둬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도 드리지만 동시에 세상에서의 재미도 포기할 수 없어요.” “천국엔 좀 나중에 가면 안 될까요? 세상만큼 천국이 별로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대단한 오해입니다. 천국은 이 땅의 어떤 재미보다 재미있습니다. 이 땅보다 재미가 없다면 어떻게 천국이겠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주님을 따르든지 다른 뭔가를 따르든지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차갑든지 덥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주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정을 미루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엘리야도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기 직전에 거기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바알을 섬기든지 하라!” 그때 백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다리 걸치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던 이유는 결코 그들이 하나님을 안 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제사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나 다른 선지서들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제사를 왜 안 드리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너희의 제사를 받기가 싫다.”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바알과 다른 신들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 섬기니까 뭔가 허전하고 안심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풍요를 약속하는 다른 신들도 섬겼습니다. 그러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전심으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른 게 더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없는 데로 자꾸 가니까 노하십니다. 우리가 망하는 길로 가려고 하니까 그러십니다. 지금 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드리지 못하고 아직도 내가 쥐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주일이나 수요일 또는 새벽기도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자기는 괜찮다고 위로하며 그 이외의 시간은 완전히 자기 맘대로 살고 있진 않습니까? 여기 살짝 왔다 가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나머지 20여 시간은 내가 알아서 산다고 하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 건물에만 계시다고 믿는다면 우상 숭배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한 군데 밖에 못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은근 슬쩍 이것을 해결 안 하고 그냥 넘어가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은 최악의 날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2)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요한을 증오하던 헤로디아는 마침내 기다리던 기회를 잡게 됩니다.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1절) 헤롯은 자기 생일에 지역의 높은 관리들, 천부장들, 갈릴리 중요 인사들을 초대해서 큰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이 파티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춥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2절)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아주 음란한 춤이었고, 헤롯과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술에 취하고 춤 때문에 기분도 좋아서 어리석은 약속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22)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3절) 사실 헤롯은 그럴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이스라엘 땅을 네 등분한 것 중에 한 군데를 다스리던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마음대로 땅을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허세를 부립니다. 게다가 그는 쪼잔하기까지 합니다. 이왕 주려면 아예 다 주겠다고 하지 왜 절반만 주겠다고 합니까? 어쨌든 그 말을 듣고 여자아이는 나가서 자기 엄마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4-25절) 결국 이 아이는 자기 엄마가 하라는 대로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헤롯은 아주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들어주기 힘든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맹세까지 하면서 약속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이런 맹세는 법적으로 전혀 구속력이 없지만, 잔치에 참석한 귀빈들 앞에서 행한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손님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싫었던 헤롯은 할 수 없이 여자아이가 원하는 대로 요한의 머리를 베어오도록 명령합니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6-28절) 이 사건을 그냥 보면, 이것은 헤로디아의 계략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을 죽이고 싶은 극도의 미움과 살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헤로디아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십대 소녀인 자기 딸에게 음란한 춤을 추도록 사주를 해서 살인을 위해 이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악합니다. 이것은 마치 엄마가 어린 딸을 사창가에 파는 것과도 같은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디아는 그 일을 합니다. 왜 그럽니까? 오직 요한을 죽이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 딸은 어떻습니까?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 이름은 살로메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항상 놀랍니다.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가 이렇게 악할 수 있을까? 자기 엄마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할 때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게다가 25절을 보면 왕에게 급히 들어갔고, 또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구합니다. ‘소반에 얹어 달라’, 그리고 ‘곧(지금 당장) 내게 달라’고 합니다. 더욱 놀랄만한 일은, 28절에서, 시위병 하나가 요한의 목을 베어 그것을 소반에 담아서 주자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엄마한테 갖다 줍니다. 이게 보통 아이가 할 일입니까? 보통 십대 여자아이들은 무슨 벌레 하나 죽여도 ‘어머머’ 하면서 놀랄 텐데, 지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고 또 잘린 머리의 모습이 아주 흉측할 텐데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들고 가서 엄마에게 줍니까? 헤로디아와 살로메는 죄에 무감각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너무 죄악에 물들어서 아예 감각이 없습니다. 이런 인간일수록 더 자극적인 것, 더 짜릿한 것을 찾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와 살로메도 악하지만, 사실 헤롯이 그들보다 더 악하고 교활한 사람입니다. 요한을 체포했을 때 헤롯이 그를 즉시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둬놓은 것은, 그가 그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거나 요한을 불쌍히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사람의 눈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본문을 보면, 헤롯은 이미 세례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마 14:5)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한 것이 사실이고, 또 그의 말을 달게 들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 하면 요한을 잘 문제 없이 죽일 수 있을까 연구해왔던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지체함 없이 곧 보내서 죽이게 했습니다. 그 동안 헤롯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면서도 주저해왔습니다. 왜 주저했습니까?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막 들고 일어날까봐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좋은 기회가 와서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헤롯은 백성들도 두려워했고, 자기가 한 말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잔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헤롯은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헤로디아가 지금 뭔가 술책을 꾸미고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헤롯 같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살로메가 나와서 춤을 춥니다. 헤롯은 아주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맹세까지 해가면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합니다. 사실 속으로 뭘 원하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해라.’ 하고 생각했을 텐데, 마침 살로메가 요한의 머리를 구합니다. 이때 헤롯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합니다. 이 요청에 놀라긴 했지만, 헤롯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요한을 죽이긴 죽여야겠지만 함부로 죽일 수가 없었는데, 이 기회에 요한을 죽이면, 자기가 원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동정해줄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도 인정해줄 것입니다. ‘당신은 그토록 요한을 안 죽이려고 보호했는데, 맹세까지 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헤로디아가 나쁜 여자다. 살로메도 어린아이가 참 맹랑하다.’ 이런 식으로 동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26)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고, 거절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헤롯을 보며, 헤로디아와 살로메를 보며, 이 사람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악한 자들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습니까? 나도 진리를 알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알면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건 죄라고 알면서도, 계속 행하며 범하는 모습은 혹시 없습니까? 요즘 정치인들이 잘못하면 얼마나 비판을 합니까? 물론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비판도 필요하고 비판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대책 없는 비난을 퍼붓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비난하는 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가? 내가 그 사람의 위치가 된다면 더 잘할 수 있는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런 사람들을 향해 비판만 하는 게 아니라 잠시 기도할 수만 있다면, 아니 열 번 비판할 때마다 한 번만이라도 기도할 수 있다면, 사회가 변할 줄 믿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잃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뻥뻥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여자아이 하나가 와서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죠?”라고 하니까 무서워서 아니라고 하다가 무너졌습니다. 실패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막 14:72) 단순히 운 게 아니라 이때 통회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때 마음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의 말씀의 선포를 듣고 괴로워하며 달게 들었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귀만 즐겁게 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귀로만 듣고 실행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실 때도 귀로도 듣고 눈으로도 들어야 합니다. 눈을 감지 말고 말씀을 보면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으로 또 써야 합니다. 오감을 동원해서 듣고 나가서 몸을 사용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헤로디아 역시 요한이 선포한 진리의 외침을 들었는데 살인의 마음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우리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큰소리치다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고, 순간적으로 주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서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보다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면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통회하는 자를 우리 주님은 결코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2. 사명을 따라 살았던 세례 요한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은 사실 헤롯도 아니고 헤로디아도 아니고 그 딸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세례요한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29절) 요한은 여기서 한 마디도 안 합니다. 그냥 비참하게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것이 혹시 헛된 죽음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던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을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실 수가 있는가? 그런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인가? 이런 의문을 품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 때 오히려 고난과 비참한 꼴을 당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고 싶겠습니까? 이런 험한 일을 당하면 누가 그렇게 살길 원하겠습니까?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악한 농부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맡겨놓고 길을 떠나는데, 나중에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까 저희가 잡아서 때리고 거저 보냅니다. 다른 종을 보내니까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함합니다. 또 다른 종을 보내니까 저희가 그를 죽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종들을 계속 보내지만, 또 때리거나 죽입니다. 먼저 갔던 종들이 크게 다쳐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죽임을 당하고 시체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도 주인은 계속 종들을 보내고 또 보냅니다. 그러니까 가는 종들은 뭡니까? 죽을 것을 알면서도 가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주인의 명령이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이 종들 중의 하나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면 당연히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이 모르고 했겠습니까? 알고 했습니다. 알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감히 권력자인 헤롯의 죄를 어떻게 지적합니까? 죄를 지적하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헤롯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몸만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죽었습니다.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를 위해 살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눈이 아니고 주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짜로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주님의 종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제자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죽는다는 말입니까? 겁이 덜컥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A라는 것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B라는 것으로 주실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A가 아니라 B라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누구나 그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간 세례 요한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항상 끝을 봐야 합니다. 여러분, 헤롯은 영광의 삶을 살았고 세례 요한은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헤롯이 죽었을 때는 장례식도 아주 성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비록 지금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나가는 말] 지난번 유럽에 갔을 때 일부러 스위스에 있는 제네바라는 도시에 갔습니다. 제네바는 존 캘빈(John Calvin, 장 깔뱅)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시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유럽 상황이 좋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가치관의 혼란과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럽의 많은 도시들 중에 가장 편안한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바람직한 도시로 변화되고 있는 도시가 바로 이 제네바였습니다. 제네바의 개혁자 캘빈 때문이었습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그를 가리켜서 ‘제네바의 양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캘빈은 종교개혁만 한 것이 아니라 제네바라는 한 도시의 문화와 정치와 삶의 모습들을 다 바꾸어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뢰했으며, 그는 문자 그대로 ‘제네바의 양심’이었고 또 더 나아가 ‘유럽의 양심’이었습니다. 캘빈이 그런 생애를 살 수 있었던 데에는 중요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평생을 지배하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코람 데오(Coram Deo)’였습니다. 라틴어인데, 그 뜻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산다. 내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 이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 살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