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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5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0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마가복음 8장 27-38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제가 한국에서 대학생일 때 어느 날 그 당시 다니던 교회의 주일예배에 모 국회의원이 방문을 온 적이 있습니다. 광고 시간에 그 국회의원이 방문하셨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 국회의원은 선거철이 되면서 자기 지역구를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날 교회에 온 것도, 그가 교회에 다니는 교인은 아니었지만 유권자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5공화국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와 다른 젊은 학생들은 당시 여당의 핵심 세력 중 하나인 그 국회의원이 선거 당선을 목적으로 다니지도 않던 교회에 온 것에 대해 상당히 분개하면서, 교회가 저런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분개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제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그 때 생각이 종종 나면서, 사람들은 왜 교회에 나올까 질문하곤 합니다. 이전에 청소년들, 대학생들, 청년들과 사역을 할 때 그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너희들은 왜 교회에 다니냐?”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은 여러 가지로 답을 했습니다.
“가기 싫은데 부모님이 강제로 다니게 해서 온다.”
“친구 만나서 재미있게 지내려고 온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거지 무슨 그런 질문이 있느냐?”
“나는 교회를 좋아한다. 분위기가 좋다. 사람들이 좋다. 하여간에 좋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
또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I don't know.”
너무 당연한 질문인 것 같지만,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왜 교회에 다니는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 있어서도 각 사람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열두 제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은 뭔가 자기에게 유익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5병 2어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셨고, 8장 앞부분에 보면 또 다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또 먹이셨습니다. ‘아하, 저분을 따라다니면 뭐가 유익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던 다른 계획이 있으셨고, 묵묵히 그 길을 향해, 즉 십자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예수님은 특별히 시간을 내어 앞으로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게 될 제자들을 따로 준비시키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두 가지 질문 (27-30절)
마가복음 8장을 우리가 죽 보고 있는데, 8에 보면 이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자신의 전반기 사역을 마치시고 후반기 사역을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십니다. 그러니까 8장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시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특별히 시간을 따로 내어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산악지역으로 가십니다. 작년 안식월 때 성지순례로 갔었는데, 아직 많은 우상 신전 터가 남아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먼저 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7절)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8절)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그들에게 아주 결정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29절)
여기에서 예수님의 두 질문과 거기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어떤 선지자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구세주)라고, 자기 민족을 구해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예수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확실히 고백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는 선지자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3인칭입니다. “그 사람은 선지자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2인칭의 의미로 ‘주님’이 아니라 단지 3인칭으로 ‘그 사람’, ‘저 선지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그것은 제자들에게 이제 확실한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저 사람, 선지자 중 하나’ 정도로, 즉 훌륭하지만 자기와 인격적 관계가 없는 3인칭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은 비록 완전하진 않더라도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3인칭인 ‘저 사람’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똑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위대한 선생, 4대 성인 중 하나, 기독교의 창시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답변에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물으십니다. “나는 너에게 누구냐?”
여러분,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십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나 자신에게 누구십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훌륭한 선지자입니까, 아니면 구주와 주인이십니까? 그분은 단지 위대한 성인입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나를 구원하신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저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나의 구주와 주인’이십니까?
여러분도 다 아시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오래 전 한국에서 어느 부모님이 미국에 사는 자녀의 집에 방문을 왔습니다. 하루는 샤핑을 하러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멋진 미국 여성도 탔는데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 여자는 “Hi!”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모님이 깜짝 놀라고 움찔하면서 대답했습니다. “Do you know me?”
우리는 모두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요즘 뜨거운 선거전이 펼쳐지면서 힐러리 클린턴이냐, 도널드 트럼프냐,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그 사람들을 아는 겁니까? 정말 그들을 안다면 그들도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나를 모릅니다. 내가 아무리 힐러리 클린턴이 어떻다, 도널드 트럼프가 어떻다, 그들에 대해 좋다 싫다, 잘한다 못한다고 하며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도, 그 사람들은 나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정말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것 뿐입니다.
만일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에 가서 나는 오바마 대통령을 안다고 주장하며 마음대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곧 저지를 당하거나 심한 경우 수갑을 차고 무단 침입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딸들은 대통령을 안다고 하며 들어오면 경호원들이 막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누구에 ‘대해서 아는 것(knowing about)’과 진짜로 ‘아는 것(knowing)’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마치 우리가 대통령을 안다고 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엘리베이터의 여인이 인사치레로 그냥 눈이 마주쳤으니까 친절하게 “Hi” 하고 인사하는 정도로, 하나님께 와서 “Hi” 하니까 내가 잘 믿고 있는 줄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분으로, 위대한 성인으로 생각하지만, 심지어 구세주라고 머리로는 믿고 있지만, 정말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단지 ‘그분’으로 아는 것이지, ‘나의 주님’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인격적으로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십니까? 지식을 넘어서 믿음으로 결단하여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결정적인 것은, 그분이 나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믿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영생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정말 믿고 구원받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 단계가 삶 속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아, 내가 정말 구원받았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2. 메시야의 진정한 길 (31-33절)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메시야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1절)
“비로소”.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까지 이것을 가르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을 한 후에 “비로소” 예수님은 메시야(구세주, 그리스도)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세 번을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이 그 중 첫 번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베드로를 대표로 해서 마침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까지 오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권능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기적을 일으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두 번이나 먹이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광풍을 잠재우셨고, 물위를 걷기까지 하셨습니다. 무시무시한 거라사의 사람까지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험들을 통해,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었다고 다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주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메시야(그리스도)가 무엇을 하는 분인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오시면 정치적인 리더로서, 자기 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엎어버리고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저런 능력과 권세라면, 바다도 다스리시고 병자나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능력이라면, 로마 제국 정도는 쉽게 물리치실 것이고, 이제 유대인들의 왕국을 곧 세워서 다스리실 것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에서 자기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서 한 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은 너무 착해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순종해서 믿음으로 따른 게 아닙니다. 그 날을 꿈꾸며 따른 겁니다. 그 동안 밑에서 남들에게 굽실거리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겁니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의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그런 세상의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 하며 또 부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이게 뭔가? 잘못 온 게 아닌가?’ 하고 충격을 받고 있을 때, 우리의 용감한 베드로가 또 나섭니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2절)
조용히 베드로에게만 이야기하신 게 아니라 다 들리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베드로가 우악스럽게 예수님의 팔을 붙들고 거칠게 옆으로 끌고 나와 마구 야단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몰아붙이면서 화를 낸 것입니다. 막 야단을 쳤습니다. 왜 그럽니까? 메시야(그리스도/구원자)가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수도 없고 죽으셔서도 안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죽으면 베드로 자신의 야망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예수는 그렇게 죽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곧 왕이 되시면 그의 오른팔 격인 자기는 총리쯤 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마가복음도 그렇고 마태복음도 그렇고, 제자들끼리 막 다툽니다. “누가 크냐?”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왜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신 줄 아십니까? 제자들 중에 아무도 발을 서로 씻겨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을 씻기면 종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만약 발을 씻기면 ‘내가 너보다 밑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되기 때문에 서로 눈치 보면서 안 씻겨주고 있을 때 예수님이 “주와 선생으로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겨준다.”라고 하시며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치열하게 이들은 ‘누가 더 큰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2인자가 될 것인가?’ 그걸 놓고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제 정신입니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라고 예수님께 막 삿대질을 하며 대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3절)
예수님도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돌이키시며 제자들을 보십니다. 베드로가 따로 자신에게 막 뭐라고 할 때, 제자들이 있는 데를 보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열한 명의 제자들도 베드로가 막 야단을 칠 때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더 해라!’ 하면서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도 째려보시면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겁니다.
이 열두 명 모두 권력에 대한 굶주림과 남들 위에서 군림하며 떵떵거리고 살고자 하는 강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생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온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들 때 은근히 속으로 좋아하며 그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아니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까? 요즘 말로 하면 이런 게 마로 ‘막말’ 아닙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기도 모두가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사람의 일’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더 나아가 바로 그런 생각이 사탄이 원하는 것임을 강하게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은 세 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라.” 높은 곳으로 데려간 다음에 “여기서 뛰어내려라.” 또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온 세상을 너에게 주겠다.”
이 시험들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따르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네 배를 채우는 데 써라.’ ‘높은 데서 떨어질 때 천사가 받아주면 모든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며 인기를 끌어라.’ ‘온 세상을 주겠다, 내게 절하라.’ 이제 사탄은 베드로를 이용해서 자기의 악한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라고 고백했지만, 그를 정말로 믿었지만, 자신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사람의 일”이며, 사탄이 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개인을 향해 사탄이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지금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해 역사하는 사탄을 뒤로 물러가라고 내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삶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주인으로 대접해드리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으로 다스리셔야 하는데, 내가 주인 행세를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아직도 나입니다. 내 삶의 결정권이 나에게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다 압니다. 사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알지만, 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겁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선택하는 것이 주님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내 삶 속의 한 구석에 앉아 계시라고 명령하고, 내가 다 알아서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을 때에는 예수님이 주인이시라고 하며 예배를 드리지만, 결정적일 때에는 예수님께 잠깐 계시라고, 또는 외출 좀 하고 오시라고 해 놓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다닙니다. 성경 읽고 묵상합니다. 기도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간섭을 싫어하며 나의 계획에 따라 움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내 삶의 진로를 결정할 때, 어떤 학교를 지원할 것인가, 어떤 직장을 갈 것인가,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 결정할 때, 정말 기도하면서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방향이 무엇일까?’ 하고 결정합니까? 정말 간절히 일주일이라도 작정기도, 금식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며 결정합니까? 대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합니다. ‘어느 것이 내게 제일 유리한가? 어떤 게 내게 가장 유익을 주는가?’
자녀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이가 어떤 학교를 가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인가 하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해서 가장 좋은 데 가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색적으로 이야기해서, 제일 좋은 데 갔는데 지옥으로 떨어지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정말 잘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있어서 그냥 손님일 뿐입니다. 주님이 필요할 때마다 도와달라고 정중하게 초청을 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또 떠나가시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 목적과 내 유익을 위해서 그분을 이용할 뿐이지,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쓰임 받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잡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에게 더 많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탄교에서 사용하는 ‘사탄경’ 첫 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너 자신이 네 삶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그런데 “네가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라.”라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게 사탄의 일이라는 겁니다.
사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내가 내 주인이 되면 망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고, 사탄도 내가 내 주인이 되면 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내가 인도해줄 테니 잘 따라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 네가 해봐. 네가 네 삶의 주인이야.”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라고 자꾸 우리를 유혹합니다. 예수님 안에 풍성한 삶이 있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나타날 때, 우리도 베드로처럼 “하나님, 어떻게 내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며 주님을 꾸짖지는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시지 않는다고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아이가 어릴 때 1불짜리를 주면 막 흔들면서 좋아합니다. 그러다 10불짜리를 주면서 “그 1불 이리 주고 이 10불을 가져”라고 하면 안 빼앗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이게 더 좋은 거라니까!”라고 하며 빼앗고 10불짜리를 주면 10불을 휙 집어던지면서 1불을 도로 달라고 앉아서 막 웁니다. 얼마나 웃기는 모습입니까?
그런데 우리 삶에 그럴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내 손에 있는 시시한 것을 빼앗아서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시는데 막 화를 내며 울고불고 “하나님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일입니다. 그런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내 삶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 제자들이 해야할 일 (34-38절)
이제 예수님은 자기를 정말로 따르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말씀해주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4절)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야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한 자리 차지하겠다’ 하는 야망을 버리는 겁니다. 내 목적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운전대를 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석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운전석을 내어드렸다고 하고도 여전히 내가 ‘이리 가요, 저리 가요’라고 하며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운전하며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당할 수 있는 고통과 핍박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고통과 고난이 올 때 도망가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며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기 방식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인한 고난까지 기꺼이 감당하는 삶,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입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또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5절)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자기를 구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헛된 야망을 품고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이렇게 선포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으로 강하게 도전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6절)
예수님은 이 세상의 욕망을 따라 살아도 온 천하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분명히 인정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성공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뭡니까? 결국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길입니다. 영원한 죽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과 유익만을 계속 주장하며 살면, 그것이 온 천하를 얻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망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7절)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람의 목숨보다 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나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자기만을 위해 산다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계속 내 뜻만 주장하며 산다면,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나라는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이끌기 때문에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위해, 그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위해, 나 자신의 주장과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할 때, 그 주님이 다스리시도록 할 때, 오히려 주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 되고 또 그 영광이 내 삶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공과 진정한 영광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사는 길이며, 참된 성공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38절)
이 세상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입니다. 거기서 성공했다면 뭐가 되는 겁니까? 결국은 거기에 묻어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무엇이 정말 나의 생명을 위한 삶인가를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나가는 말]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매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내가 종이라는 뜻입니다. 종은 재산도 없고, 자기가 할 말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가라면 가야 합니다. 오라면 와야 합니다. 죽으라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이고, 바로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생명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가장 좋은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라고 하시는 것이지, 우리를 옭아매고 불편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의 삶의 주인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까? 누가 주인인지 알아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지갑을 보는 겁니다. 제 지갑에는 항상 돈이 하나도 안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 있다고 해도 차 한 대를 턱 살 수 있는 캐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차 한 대 값도 안 들어 있는 내 지갑의 돈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내 지갑의 주인이 내 삶의 주인입니다. 어디에 돈을 쓰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이 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 그것을 보면 누가 내 주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주여, 들으소서. 종이 말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믿음의 결단으로 대답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서 매 순간을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비록 주님을 따르는 믿음 때문에 혹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길이 참된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영광의 길임을 알기 때문에, 묵묵히 인내하며 이 주님을 따라 제자로서의 삶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