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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30일 주일예배

예수와의 만남 1

말씀에 의지한 결과와 그에 대한 반응

(누가복음 51~11)

 

[들어가는 말]

 

오래전 제가 마이애미(Miami, FL)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청소년들을 데리고 거기서 3시간쯤 북쪽에 있는 올랜도(Orlando)Disney World Magic Kingdom에 간 적이 있습니다. 매년 한 번씩 거기서 <Night of Joy>라는 콘서트가 열렸는데, 유명한 CCM 가수들이 와서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그 공원 안에서 공연장을 여러 군데에 마련해놓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다니며 공원 라이드도 즐기고 공연도 즐겼습니다.

 

그때가 저녁때였는데도 굉장히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데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그곳에 모였겠습니까? 디즈니 공원이 주는 재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명한 크리스천 가수들을 한 군데에서 직접 그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하면 어떻습니까? 피곤합니다. 특히 유명한 곳에 가면 굉장히 복잡하고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가 끝난 이후 그동안 못하던 여행을 한꺼번에 하느라고 유명한 관광지마다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자기 돈을 써 가면서 여행을 합니까? 가족들을 만나는 기쁨 때문에, 또는 새로운 곳이나 유명한 곳을 가보는 재미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복잡하고 붐비는데도 여행을 갑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오랜 시간이 걸려 차를 운전해서라도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에 가고, 워싱턴DC에도 가고, 시카고나 애틀랜타에도 갑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다른 도시로 원정 식사를 가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으러 시카고나 워싱턴에 가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요즘 클리블랜드, 신시내티, 데이튼 등에 사는 분들이 음식을 먹으러 이 콜럼버스에 옵니다. 콜럼버스가 요즘 핫 플레이스입니다. 우리는 뭔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까, 뭔가 유익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여행을 떠납니다.

 

오늘부터 새 말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고 마가복음은 전체를 모두 강해설교를 했습니다. 지난번 누가복음의 비유들을 다루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오면 대부분 뭔가 자기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니, 거의 대다수가 뭔가 유익이 있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전혀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죽이려고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몇 주 동안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살펴보며 그것을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을 그냥 만나기만 하고 떠나거나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알고 변화되어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과 시몬 베드로의 만남 (1~3)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계십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1)

 

지금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 서로 밀고 당기며 아주 복잡한 상황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모였겠습니까? 그 이유는 앞의 4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다른 선생들과는 달리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4:16-30). 또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4:31-37),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수많은 귀신을 쫓아내신 일(4:40-41), 갈릴리 전역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신 일(4:42-44)이 나옵니다. 이러한 사역들 때문에 4:37을 보면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많은 사람이 여기 왜 몰려왔습니까? 뭔가 예수님에게서 얻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분에게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다. 좋은 말씀을 듣든지, 아니면 내가 아픈데 치유를 받든지, 기적이 일어나든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니까 저분에게 가자.’ 하며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엄청나게 메시아를 갈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막 열광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먼 거리였고 사람들도 많아서 아주 복잡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십니다(1). 무리가 몰려오자, 기적부터 일으키신 게 아니라 말씀부터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는 너무나 많은 숫자여서 서로 밀고 당기고 있습니다.

 

한국에 최근에 가보셨어도 그렇고 옛날에 사셨어도 그럴 텐데, 서울에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오래전에는 푸시맨’(push man)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탈 수가 없으니까,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까지 지하철 공사에서 고용해서 밀어줄 정도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제가 1년 반 전 한국에 나갔을 때 출퇴근 시간에는 안 다녔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에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파리 같은 곳도 지난 가을 제 아들이 교환 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잠깐 갔을 때 보니까, 거기도 지하철에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렇게 막 밀고 당기고 그 이상으로 서로 따닥따닥 붙어서 틈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것인데, 도저히 그런 상황에서는 계속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돌아보시니까 거기에는 두 척의 배가 묶여 있고 어부들은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2)

 

여기가 게네사렛 호수인데,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게네사렛, 갈릴리, 디베랴 등 출신이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불렀지만, 같은 호수입니다. 거기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그물을 씻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그물에 물고기가 아닌 다른 것들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그물은 당시 세마포로 만들었기 때문에, 쓰고서 바로 씻어놓지 않으면 금방 썩어버립니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바로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는 두 척의 배 중에 누구의 배에 오르십니까?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3)

 

예수님 시대 당시 어부는 아주 힘들고 고된 직업이었습니다. 어부들은 주로 밤에 고기를 잡았고 낮에 잡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시 그들이 사용하던 그물이 세마포로 만들어져서 아침에 해가 뜨고 나면 물속에서 그물이 너무 훤하게 잘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 그물을 내리고 물고기가 그물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끌어올렸습니다.

 

어부들은 주로 밤 10시에서 새벽 4시 정도 사이에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히 엔진 달린 배가 없었기에, 당시 어부들은 호수의 중앙까지 열심히 노를 저어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의 남북 길이가 약 13마일(21km)이고 동서 길이가 7.5마일(12km)이라서 아주 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짧은 거기를 노를 저어 가운데로 가더라도 4마일 가까이 노를 저여야 했습니다.

 

물고기는 주로 우기인 겨울에 많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가서 일을 하던 갈릴리 어부들은 항상 비로 흠뻑 젖게 되고, 또 물속에 던진 그물이 엉키지 않도록 그들은 수시로 물속에 들어가 그물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심한 날씨이며 우기라 비도 많이 와서 으슬으슬 추운데, 온몸이 비에 흠뻑 젖은 것도 모자라 수시로 물속에 들어가야 했으니, 어부들은 밤새 몸을 떨며 지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밤새 중노동에 시달린 어부들은 빨리 그물을 씻어놓고 낮에 푹 자서 피로를 풀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른 아침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는 일을 하고 와서 그물을 씻는 것을 볼 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벌써 많은 무리가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이 계신 게네사렛 호숫가에 몰려듭니다(1). 예수님은 그들 때문에 점점 호수 쪽으로 밀리셨고 그 자리에 시몬이 있습니다. 그러나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는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는 허탈한 마음으로 예수님 옆에서 그물을 씻으며 말리고 있었습니다. 피곤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그물이 썩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계신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가 아니라 시몬 한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몬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이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밀려드는 무리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육지에서 약간 떨어지게 하도록 부탁하신 후에 말씀을 계속 가르치십니다(3).

 

 

2.   베드로의 놀라운 순종 (4~7)

 

시몬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4)

 

조금 전 부른 찬양곡 가사가 깊은 곳에 그물 던져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착안하여 지은 가사입니다. 이렇게 명령하시니까 시몬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

 

이게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냥 읽으면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지만,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하며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아주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나오는 4절과 시몬의 순종이 나오는 5절 사이는 한 절밖에 안 되지만, 거기에 아주 많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그는 , , 알겠습니다.’ 하며 금방 아무 주저함 없이 순종했던 겁니까?

 

 

1)  육신의 피로를 극복한 순종

 

시몬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이 순간 큰 허탈감과 피곤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치는 일이 당시 갈릴리에서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동안 시몬은 세마포 그물을 깨끗이 씻어서 다 말렸고, 이제 집에 돌아가 지난밤의 실패는 다 잊어버리고 술 한잔 걸친 후에 두 다리 쭉 뻗고 늘어지게 잘 생각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극도의 허탈감과 피곤함이 겹친 그 순간, 다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니, 그렇게 명령하려면 그물을 씻기 전에 할 것이지, 그물을 다 씻어서 말려놓았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고 이제야 명령하는 건 뭡니까? 아니, 그물 씻는 것을 계속 보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럼 잠깐! 그물을 씻지 말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이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씻을 때까지 다 본 다음 그물을 말리는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고 하니, 얼마나 열받는 일입니까? 그런 말을 하려면 좀 진즉 하지, 이때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게다가 시몬은 다시 호수 중앙의 깊은 데까지 노를 저어서 갈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밤새 몇 시간을 일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또 나갈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은 쉬며 잠을 잘 시간이지, 또 가서 일할 시간이 아닙니다. 잠을 자야 그날 밤에 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호수 중앙까지 몇 시간에 걸쳐 노를 젓고 그물을 내린 다음 다시 호숫가로 돌아오면 이미 해가 높은 곳에 있고 하루가 다 지나가게 됩니다.

 

시몬은 오랜 시간 동안 낮과 밤이 바뀐 올빼미형 인간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생체 리듬이 그렇게 맞춰져 있는 시몬에게는 이 시간이 가장 피곤한 시간이었고 휴식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처럼 극심한 피로와 허탈감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이걸 보면, 상황이 좋고 건강이 좋고 힘이 있을 때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같이 좀 일합시다.’라고 하면 내가 능력이 없어서’, ‘내가 아직 시간이 없어서’, ‘내가 요즘 좀 아파서등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이게 다 해결되면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고 피곤할 때도 주님이 원하시니까 하는 것, 이것이 진짜 순종입니다.

 

 

2)  경험과 상식을 넘어서는 순종

 

예수님이 다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한 시간은 아침입니다. 이미 해가 뜨고 나면 세마포 그물을 내려 보았자 물고기들이 그물 안으로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갈릴리에서 20년 이상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 시몬에게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피곤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깊은 데까지 가보았자 물고기가 걸려들 리가 없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밤도 아니고 지금 이 아침에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여 년의 경험과 상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린 것이 시몬이 행한 순종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 경험과 상식 안에서 말이 되는 것만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님을 또한 알게 됩니다. 내 경험과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라 해도 주님의 말씀이면 순종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내 생각에는 말이 안 되고, 내 생각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비록 내 상식과 경험에는 맞지 않아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해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순종임을 배우게 됩니다.

 

 

3)  자존심을 꺾은 순종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 물고기 잡는 데 전문가입니다. 다른 분야에서라면 몰라도 물고기 잡는 데서만큼은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전문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갈릴리 어부 베드로에게 물고기 잡는 것에 대해서 문외한인 목수 예수님이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해 허탈하고 피곤한 시몬에게 코치를 하는 상황입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있는데 자존심까지 상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요즘 많이 하는 말 중 선을 넘네.’라는 게 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사실 선을 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목수가 어부에게 물고기 잡는 것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습니까?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인데, 만약에 예수님도 안 믿는 VIP 저에게 와서 설교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설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설교학에 의하면 어쩌고저쩌고...’라고 하면 제가 속으로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저에게 벌어졌습니다. 저희 큰외삼촌이 예수님을 안 믿는데, 어릴 때 교회를 다녔지만 오랫동안 예수님을 안 믿고 있습니다. 요즘도 교회는 가끔 나가고 하고 설교도 많이 듣는다고 말은 합니다.

 

제가 돌아가신 아버지 유골 안장식 때문에 1년 반 전 한국에 나갔을 때 거기 삼촌도 와서 만났습니다. “, 네 설교를 내가 좀 들어봤어.”라고 하셔서 그러시냐고 하니까, “, 너 설교를 그렇게 하면 안 돼.” 제가 속으로 웃겨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했더니 그다음은 말을 못했습니다. “하여간에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했는데, 뭐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 말을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당연히 안 들었습니다. 설교에 대한 VIP의 말을 어떻게 듣겠습니까?

 

여기 세탁소 운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목사인 제가 가서 세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하면 이게 얼마나 웃깁니까? 또 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키는 교수에게 초신자가 와서 신약성경은 이런 겁니다.’라고 설명하면 그것도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컴퓨터 전문가에게 타일 전문가가 와서 컴퓨터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고 하면 그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고, 또 타일 전문가가 일하고 있는데 잘 모르는 컴퓨터 전문가가 와서 타일은 그렇게 붙이는 게 아니라고 하면 그게 또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예수님은 목수이자 랍비셨으니까 집을 짓는 일이나 말씀을 가르치는 분야라면 베드로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 일만큼은 베드로를 코치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몬의 자존심을 직접 건드리는 일이 됩니다. 그럼에도 시몬은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따릅니다.

 

어떻게 물고기 잡는 데 전문가인 어부가, 어업에는 문외한인 전직 목수이자 현직 선생인 예수의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따르겠다고 합니까? 밤을 새서 일하고 나니까 정신이 혼미해서 그런 겁니까?

 

5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점에 대한 해답은 거기에 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단순한 선생이 아닙니다. , teacher가 아니라 Master(주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에피스타테스(epistates)’대장, 관원, 시장, 대학 총장등 의미가 있는데, 모두 권위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능력의 주님이 가지신 권위에 복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3절에는 예수님이 시몬에게 호숫가에서 배를 조금 띄어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배를 움직여 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시몬입니다. 자기 배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배를 움직이려면 어디서 해야 합니까? 배 안으로 들어가 노를 저어서 호수 쪽으로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동안에 시몬은 배 안에 함께 있으면서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했든지, 아니면 배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거기 있던 사람 중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더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가장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고, 또 가만 듣다 보니까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놀라운 능력과 권세가 있는 말씀임을 확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분은 다른 랍비(선생)들과는 다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시몬은 예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시몬은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능력의 사건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4장에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들린 것을 예수님이 능력으로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4:38-39).

 

어떤 학자는 시몬 즉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것이 사실은 화병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데릴사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장모 집에 같이 살던 사람인데, 자기 딸과 가정을 잘 돌보기보다 자꾸 예수를 따라다니는 방향으로 나가니까 장모가 화가 나서 화병에 걸려 누워 있다가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나오는 베드로와 만남 사건이 시몬의 장모가 들렸던 열병을 고쳐준 사건 이전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그냥 이 순서대로 그 후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사건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에 대해서도 들어 알고 있었거나, 직접 보았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경험 또한 시몬이 예수님을 신뢰하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시몬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명령 속에 담긴 그분의 권세를 느낄 수 있었고, 뭔가 일어날 것 같다는 확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냥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왜냐하면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6-7)

 

시몬이 예수님을 신뢰해서 순종하니까,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난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실제 귀로 듣는 것만 아니라, 이렇게 설교도 듣고, 스스로 성경도 읽으며 통독하고, 큐티하고, 삶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적을 베풀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아니면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몬이 두 배에 가득 실은 물고기의 양은 당시 배의 크기를 기준으로 보면 2주 동안 잡을 만큼의 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엄청난 양입니다. 이것은 시몬 베드로의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대박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이 순간 대박!’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힘겨운 어부 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수 있도록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으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분과 동업해서 날마다 이렇게 잡으면 정말 대박 나는 겁니다. 갈릴리 수산업계를 평정할 날이 머지않게 된 것입니다.

 

 

3.   갑자기 자기가 죄인이라 고백한 베드로 (8~11)

 

그런데 시몬은 만선의 축복으로 인한 흥분과 기쁨이 넘쳤을 것이지만, 예수님과 동업해서 얻을 부와 명예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느꼈던 절망감을 이제 최고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 분, 바로 그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8)

 

그토록 많은 물고기를 잡은 베드로가 왜 갑자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까? 지금 예수님과 동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자기를 떠나달라고 요청합니까? 붙잡아도 부족한데 왜 떠나달라고 합니까?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면 물고기를 많이 잡고 마음속에 일어난 탐욕에 대한 죄를 회개한 겁니까?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부들의 생활은 바다를 주관하는 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비록 거기가 호수이지만, 지형 때문에 바람이 강하게 불고 폭풍도 부는 곳이기에 그는 거친 뱃사람이었습니다. 각 나라와 문화마다 고유한 바다의 신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의 신은 포세이돈이고, 로마 신화에서는 바다의 신이 넵튠입니다. 한국에도 용왕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바다의 신으로 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그런 미신적인 요소가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어부들은 출항하기 전에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갔습니다. 바다의 신을 기쁘게 해야 고기들을 많이 몰아주고, 바다의 신이 노하면 풍랑을 일게 해서 배를 뒤집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화가 난 바다의 신을 달래기 위해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에 자신을 팔아 바다에 몸을 던진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요나도 그런 이유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활동하던 갈릴리 호수는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곳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밤이 새도록 수고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은 상황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것은 물고기가 너무 많은 갈릴리에서 거의 있을 수 없는, 아주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밤새 그물을 내려두었는데 한 마리의 물고기도 걸리지 않은 것은 베드로의 어부 경력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정말로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이른 아침 예수님이 호숫가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옆에서 그물을 씻던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 자기에게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일 때문에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을 겁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말로 바다의 신이 있어서 나에게 노한 것인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물고기가 잘 잡혔는데 어떻게 갑자기 한 마리도 못 잡았겠습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혹시 저분이 못 잡게 만드신 게 아닌가?’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말 예수님이 능력으로 갈릴리에서 그토록 잘 잡히는 물고기를 잠시 안 잡히게 하셨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게 기적입니다. 시몬을 부르시기 위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바로 옆에서 그물을 씻으며 자기 배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의 그 말씀은 정말이지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권위로 말씀을 전하던 랍비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깊은 곳으로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물고기를 많이 잡아봤지만 이렇게 많이 잡아본 것은 처음입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던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많이 잡은 것도 처음입니다. 물고기 떼가 막 자기 그물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이건 자기가 물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물고기가 나 잡아주세요하고 막 들어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 시간은 물고기가 잡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베드로를 놀랍고 두렵게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바다의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저분이 바다의 신이 아닌가? 혹시 지난번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 치게 한 게 저분의 힘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니까, 이제는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 앞에 자기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며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으니까 그분 앞에 와서 손을 붙잡고 선생님, 우리 동업합시다.’라고 할 것 같은데, 지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두 번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두려워졌습니다. 그런 일을 일으킨 저분이 두려워졌습니다. 그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겁니까? ‘이 정도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면 내가 그제 지은 죄도 다 아시겠다.’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명령하신 예수님을 신과 같은 존재, 최소한 신이 보낸 대리자로 깨달았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분과 계속 같이 있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떠나 달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는다는 것이 구약 때부터 내려온 생각인데, 그도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이 일 때문에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 상식을 뛰어넘은 사건 때문에 놀랐습니다.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9-11)

 

여기에서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0절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이 시몬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데, 11절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외에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또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7절에 나오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이 바로 이들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방금 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증인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육지에 있어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돌아온 겁니다. 그것도 고기가 안 잡히는 시간에 그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시몬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결단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하니까, 그의 그러한 결정으로 인하여 그의 동료들도 역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순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한 번에 완전히 변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다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과 동행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베드로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많은 실수도 하며 또 여러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는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부인하며 배신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돌아와서 끝까지 거기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 받고 변화되어 놀라운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을 믿습니다. 천국 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영생을 얻었다. 기쁘다.’라고 하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정말 만났고 정말 믿었으면, 그때부터 예수님과 쭉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리가 영적으로 떨어질 때도 있고 올라갈 때도 있습니다. 잘할 때도 있지만 잘못할 때도 있고, 예수님을 떠나서 살 때도 있고, 제대로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나가는 말]

 

한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게 된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신실한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주님을 확실히 만나야 하고 그다음에 꾸준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 하나가 잘한다고 뭐가 되나?’ , 됩니다. 나 하나만 주님 앞에서 제대로 살아도 뭔가 일이 일어납니다. 특히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주님을 신실하게 따를 때, 내 주변 사람들도 주님을 따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당장 다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닙니다. 계속 주님과 동행할 때 그렇게 변화되어 쓰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갈릴리의 어부들의 순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이 구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도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가운데, 혹시 주님의 뜻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때라도 주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결코 실수하지를 않으십니다. 분명히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해야 합니다.

 

무엇을 순종해야 합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함께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삶, 바로 그것입니다. 늘 거기에 순종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주님 앞에 자기 모습을 항상 비춰보며 무릎을 꿇으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각자도 예배를 드려야 하고, 이렇게 같이 모여서도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를 통해 놀라운 주님의 복, 하늘 복이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는 복의 근원인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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