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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3일 주일예배

예수님의 비유 8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마태복음 2128~32)

 

[들어가는 말]

 

오래전 시애틀에서 청소년 사역을 할 때, 여름에 멕시코로 단기선교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20여 명의 학생들에게서 신청서와 참가비를 받고 비행기표도 다 예약해 놓았는데, 날짜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한 학생이 갑자기 못 가겠다고 하며 자기가 낸 돈을 도로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당황스럽기도 하고 실망도 되고 또 은근히 화도 났습니다. ‘아니, 못 가면 진작 못 간다고 해야지, 시간이 다 된 이제 와서 못 간다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하고 짜증이 났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회에서 물어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같이 단기선교를 가자고 권유했을 때 처음에는 못 가겠다고 했던 다른 학생이 안 가게 된 그 학생 대신 자기가 가겠다고 했을 때 정말 고맙고 기뻤습니다.

 

그런 식으로 뭔가를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할 시간이 다 되어서 못 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 대해 실망감과 더불어 화가 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 이것 좀 해놓아라.”라고 하니까 “Okay!” 했는데, 얼마 후에 와서 보니 하기는커녕 게임만 하고 있으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반대로 “No!”라고 했는데, 다녀와서 보니 다 해놓았다면 얼마나 기특하고 기쁘겠습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소위 두 아들 비유인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시는지를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질문과 비유 (28~30)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8)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질문을 하면서 이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앞의 본문을 보면 너희라는 것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는 두 아들 비유라고 했는데, 이 비유를 잘 이해하려면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비유라는 것은 예수님이 갑자기 꺼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상황이 진행되다가 그것을 잘 이해시키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예로 드시는 것이 비유입니다.

 

21장 맨 앞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지고 돌아가시기 위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 후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그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네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가 허락해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느냐? 성전은 우리 영역인데 왜 네가 감히 마음대로 가르치느냐?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느냐?’ 하며 따집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한 가지를 질문하십니다. “내가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너희가 이것을 대답하면 나도 너희 말에 대답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

 

이때 종교 지도자들은 그 질문에 당황하면서,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는 백성이 항의하며 들고 일어설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인 줄 알면서도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비유를 봐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는 먼저 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그는 아버지로서의 권한으로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고 명령합니다(28). 그러자 그 아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9)

 

, 아버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가지 않습니다. 그는 말로는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며 가겠다고 고백했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명령합니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0)

 

저희 집도 원래 남자가 둘인데 제가 맏아들이고 제 남동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정이 이민 온 후 아버지가 여기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이 있으니까 가서 이것 좀 해라.”라고 하시면 제가 알았어요.”라고 해놓고서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대학생 때로 어릴 때였는데, 제가 안 하면 그 당시 고등학생이던 동생한테 또 시키십니다. “, 형이 안 하니까 네가 가서 해.” 그럼 또 제 동생도 비슷하게 알았어요.” 하고서는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 이 두 아들 비유에 사본이 여러 개가 있어서, 새번역에는 이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맏아들은 안 가겠다고 해놓고 나중에 뉘우치고 가고,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해놓고 안 갑니다. 우리가 예배 때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은 어떤 한 사본을 따른 것이고, 새번역이나 영어 성경은 다른 사본을 사용해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한 행동이 서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하거나 말을 안 들으면 개역 성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너는 성경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그럴 거냐?”라고 하시고, 제 동생이 말을 안 들으면 다른 번역을 가지시고 너는 그 성경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그렇게 할 거냐?”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그는 가기 싫습니다.”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뉘우치고 마음을 바꿔서 포도원으로 갑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자기가 아버지에게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뉘우치고, 마음을 바꾸어서 일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는 말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내가 이러면 안 되지하며 그것을 뉘우치고 이제는 행동으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2.   예수님의 평가와 적용 (31~32)

 

예수님께서 이 짧고 단순한 비유를 통해 지적하고자 하시는 내용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바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23).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로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자랑하며 치켜세웠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자부심(사실은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순종이란 자기 방식대로, 자기가 편한 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고 계시는 놀랍고도 새로운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너무 잘 믿고 섬긴다면서 스스로 흡족해하면서 종교 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너무나 악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녀, 또 그 밖에 사회에서 버림받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부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싫습니다.”라고 거부하는 둘째 아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따진다면, 절대로 못 들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용서받기에는 죄가 너무 크고, 너무 악하고, 아무 쓸모가 없는 인간쓰레기라고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보며 저것들은 인간쓰레기다.’라고 무시하며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왔을 때 그들은 그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함으로 삶이 변화되어,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죄가 많아서...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읽지도 않고 예배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 그래서 좀 자신이 없다.”라고 하며 자신 없어 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아직도 그런 분이 여기에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죄가 아무리 크고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천국에는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리 착하더라도 다 죄가 하나 이상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천국은 죄가 한 개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입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가 뭔가를 잘해서나 자격증을 땄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오래전 신학석사를 할 때 기독교교육을 전공했습니다. 그때 공부했던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제임스 로더(James Loder) 교수님이 계셨는데, 오래전 돌아가셨지만 기독교 교육계에서 아주 세계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배우기 위해 학생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분은 학회에 나가면 아주 앞서가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지도교수이기도 하셨는데, 지금은 오래 되어서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손가락이 하나가 없으셨습니다. 잘려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오래전 자동차 사고로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수업 때마다 자신이 그런 사고를 통해서 회심하여 정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믿게 됐던 그때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항상 OOOOOO일이라고 이야기하시면서 눈물을 글썽하시며 그때 체험한 주님의 은혜를 수업 시작할 때쯤 간증하셨습니다.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대학자가 항상 “OOOOOO일에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를 체험했다.”라고 항상 이야기하시니까 참 놀라웠습니다.

 

그분의 말씀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achievement-oriented 되어 있다는 겁니다. , 너무나 성공 지향적으로만 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오직 성공을 추구하는 성공지상주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갈수록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은혜이므로, 그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 비해서 자기는 너무나 의롭고 잘났다고 으스대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을 하십니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1)

 

무슨 뜻입니까?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으로 인정을 받던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의 쓰레기와도 같이 여겨지던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31절을 잘 보면 먼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먼저 들어가지만, 너희도 나중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라고 문을 열어놓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못되게 하고 나를 막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운 사람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그런 사람은 초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대적하고 반역하는 사람을 초대해주십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33:11,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새번역)

 

우리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사람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의 길,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은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가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이 구원을 못 받도록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인 줄 모르고 나는 그런 것 필요 없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모른 채 자기가 다 옳다고 하며 다른 사람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크게 보면 사람은 두 종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두 종류의 죄인으로 나뉘는 겁니다. 첫째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인정하는 죄인이고, 둘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으로 나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을 아느냐 모르냐의 차이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면서 그것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이 의인인 줄 알고 우쭐대면서, 세리나 창기들을 향해 더러운 것들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정죄했습니다.

 

이란의 테헤란에 가면 골레스탄 궁전(Golestan Palace)라는 아주 굉장히 멋진 궁전이 있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궁전 안에는 벽이 아주 밝은 수천 개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유리 궁전과 방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보는 사람들은 너무 감탄하면서 그 조각들이 다이아몬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수천 개의 작은 거울 조각들입니다. 거울 조각들이 빛을 반사해서 엄청난 빛을 내기 때문에 너무나 황홀하며 멋지다고 합니다.

 

16세기에 이 궁전을 처음 지을 때 건축가들은 원래 궁전 입구 벽을 거울로 장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문한 거울들이 도착해서 하나씩 열어보니까 전부 다 깨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분노하면서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어진 거울 조각들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막 버리려고 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아주 기발한 생각을 하고는 외쳤습니다. “잠깐만요. 이 거울 조각들은 깨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다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완전히 깨지지 않은 거울들까지 다 깨버린 다음, 모든 조각들을 다 모아서 궁전 입구 벽과 방들에 붙였다고 합니다. 사진을 보니까 그냥 막 붙인 게 아니라 예술적으로 잘 붙였습니다. 그 결과 골레스탄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바로 이렇게 깨져서 아무 쓸모 없는 조각들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서 회개하고 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을 때, 깨졌던 그들의 삶이 하나씩 같이 붙여지고 회복되어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32)

 

이것을 보면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의의 도즉 옳은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온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러한 요한을 믿지 않고 배척했던 반면, 세리와 창녀들과 죄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것이 마땅한 종교 지도자들 아닙니까? 그들은 구약 성경도 잘 알고 모든 종교 규례들을 다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고, 죄인으로 손가락질받던 사람들은 오히려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도 처음에는 둘째 아들처럼(30)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거부했지만,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그들은 뉘우쳤고’(30) 결국 하나님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그것을 전하던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일 수가 없다고 지적하십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도 깨어진 거울인 줄 모르고, 자기들은 완전한 거울이라고 착각하면서 깨져서 조각이 된 다른 죄인들을 손가락질하며 정죄했습니다. 자기들이야말로 아무 쓸데 없는 유리이고 사실은 반쯤 부서진 거울인 줄 모르고, 자기들은 누구보다 잘났다고 여기며 날뛰었습니다. 자기는 깨졌는데 조금 붙어 있으니까 괜찮고 저들은 다 깨졌으니 틀렸다고 한 것입니다.

 

오히려 완전히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야만 주님의 궁전을 위한 장식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자기들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실 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것을 거부한 채 완전히 깨지지 않은 것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깨진 거울을 보셨습니까? 그것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런 상태인데 자기들은 온전하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들이 깨져있어서 붙여져야 한다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다른 사람을 찌르고 베면서 상처를 주며 살았던 것입니다. 깨져서 함께 붙여질 때는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지만, 반쯤 깨진 채 있으면 그 자체로 위험하기도 하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정죄하시면서, 미움과 물질주의과 정욕 같은 죄는 괜찮고 살인과 간음과 안식일 규정 위반과 같은 죄는 용서하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이분법적 신앙을 지적하십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쪽은 나름대로 괜찮은 죄, 즉 그냥 좀 범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죄로, 다른 쪽은 안 괜찮은 죄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독한 죄만 짓지 않으면 그런대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며 만족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악독한 죄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자꾸 바뀐다는 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기를 쳤을 때 저런, 저런, 저런 나쁜 인간이 있나?’ 하고서 마구 정죄합니다. 물론 그런 것은 당연히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기와 연관이 되어서 나도 사기꾼 쪽으로 본의 아니게 속하게 되면 ,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합니다. 정말로 못된 죄였는데, 그럴 수도 있는 죄로 바뀌는 겁니다. 기준이 자기 마음에 따라 계속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 대해 전혀 다르게 접근하셨습니다. 중대한 죄와 덜 중대한 죄로 나누신 게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기에,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긍휼히 봐주시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만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얼마나 심각하게 깨지고 망가진 존재인지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회복될 수 있다는 것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우리 중에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이 계신데, 비즈니스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몇 년 전 집에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Home Depot에 페인트를 사러 갔습니다. 뭘 살까 하고 보는데, 그냥 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종류도 너무 많고 색깔도 너무 많아서 뭘 사서 어떻게 칠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점원이 와서 뭘 도와 드릴까요?” 하기에, 우리의 필요가 이러저러하다고 했더니,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하면서 척척 우리 부부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그 사람의 전문성과 우리의 필요가 만나니까 아주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딱 맞는 페인트를 골라 사서 와서 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비즈니스라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나의 전문성으로 남의 필요를 채워주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전문성을 잘 사용해서 그 필요를 가진 손님을 돕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야 사업이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사업은 당연히 가능하고 돈도 벌 수 있겠지만, 아주 탁월한 사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미래학자이자 신학교수이기도 한 레너드 스위트(Leonard Sweet)의 책에, 어느 망한 식당 이야기가 나옵니다. 맛있어 보이는 카페를 어렵게 찾아갔는데 입구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점심 먹으러 외출 중. 130분에 돌아오겠음.” 지금 장사를 하는 사람이 손님은 안 맏고 자기가 점심 먹겠다고 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 밑에 또 이런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For Sale. 목이 좋아 전망 있음.” 그러니까 망했다는 말입니다. 이 가게가 왜 망했습니까? 손님의 필요를 채우기보다 자기부터 먹고 자기 배부터 채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손님의 필요가 아니라 자기 필요를 먼저 채우려 하다가 망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점점 믿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한국은 아주 심각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비신자의 필요는 신경 쓰지 않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만 채우려고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오래전부터 이야기했는데, 지금 실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뭔가를 결정할 때 얼마나 초신자나 교회 밖의 비신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망하는 곳은 다 망하는 이유가 있는데, 앞으로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감 없이, 사랑을 베푸는 사명감 없이, 그저 우리끼리만 즐겁게 지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보를 펴 보시면 우리 교회 비전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성도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 밑에 있습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듦으로가능합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도가 행복해집니다. 그럼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밑에 있습니다.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선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다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모른 채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교제는 왜 합니까? 그냥 밥 먹으며 안녕하세요? 잘 지내세요?” “, 잘 지냅니다.” 하고 끝내며 헤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게 불가능합니다.

 

양육(훈련)은 왜 합니까? 열정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먼저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훈련합니다. 스스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훈련합니다. 그렇게 될 때 봉사와 사역을 감당하게 되고, 더 나아가 전도와 선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여기서 우리끼리만 잘 지내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며 우리끼리만 즐겁게 지내려고 자꾸 안으로만 들어가면, 그것은 쇠락의 길로 가는 일입니다. 자꾸 파를 만들고 끼리끼리 모이는 것, 자기와 다른 사람은 제외하고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여서 노는 것, 편을 나누고 규율을 만들어 어떤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는 것, 자기가 정해 놓은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정죄하는 것, 이런 것이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저지른 잘못이고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항상 물어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누구의 필요를 채우고 있는가?’ 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곳에 가 계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죄인의 구원의 필요에 응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남의 필요를 채울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 것만 챙길 때는 조금 좋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남의 필요를 채울 때, 진정한 성장이 있습니다. 남의 필요를 채울 때 넓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걸으신 길이며, 주님께서 우리가 걷기를 원하시는 길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치 깨어진 거울과도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도 다 깨어졌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붙여져서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을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내가 왜 깨진 조각이냐? 난 아니다. 난 완전하다. 난 잘났다.’라고 주장한다면, 결코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 주변에서, 우리 교회에서 언제 문제가 일어납니까? 언제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까? 깨졌었다가 도로 붙여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위로 솟아 삐져나와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사람들이 찔리거나 배어서 피가 나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라도 다른 조각들과 함께 평평하게 뉘어져서 접착제로 붙여져 하나가 된다면, 모두가 함께 하나 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 두 가지 사이의 선택입니다.

 

나 혼자 꼿꼿이 서서 알아서 하겠다고 그러며 다른 사람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러고 살 것인가? 삐져나와 있으니까 탁 쳐서 부러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삶을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같이 평평하게 누워 서로 함께 붙여져서 함께 주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낼 것인가?

 

이 두 가지 사에서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자기가 원래 심하게 망가지고 깨어졌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졌다가 다시 붙여진 존재임을 알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에, 그것에 감격하며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감격을 가진 사람은 그 신앙생활이 결코 형식적인 종교 생활일 수가 없습니다. 아주 최소한만 하는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깨어졌다 붙여진 것도 감사한데, 게다가 그 찬란하고 엄청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지난주에도 불렀던 찬송가 3043절 가사를 제가 굉장히 좋아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성경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갚을 길이 없을 정도로 뜨겁게 사랑해 주셨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도 사랑을 베풀 때 가능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깨졌다 붙여졌으니까 다른 깨어진 사람들을 초청하는 겁니다. 깨진 거울 조각은 혼자만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위험합니다. 그러나 비록 깨어진 조각이라도 수많은 조각이 함께 어울려 붙여질 때 엄청나고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깨진 채 아파하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리로 오세요. 우리 함께 붙여져서 찬란한 빛을 같이 비춥시다.”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은혜를 잊지 않으며 그 찬란한 은혜의 빛을 함께 비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교회, 또 모두가 함께 붙여져서 주님의 찬란한 은혜의 빛을 함께 비추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공동체로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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