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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QaflqMK3bdU?si=b4Psx-4BcDmph_YO&t=138

 

 

2024331일 주일예배

부활절 메시지

울고 있나요

(요한복음 2011~18)

 

성금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여 장사 지냈는데, 그 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또 다른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즉 지금의 주일 새벽에 일찍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서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 했는데, 가보니까 무덤이 비어 있는 겁니다(1). 너무나 놀란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2).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너무 허황되게 들려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6-8). 그렇지만 그들은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10).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랐지만, 특히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람은 항상 요한의 형 야고보와 같이 예수님이 12명 중에서 따로 데리고 많이 훈련시켜주신 자들이었지만, 주님의 시신이 사라진 이 엄청난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도 부활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다시 갑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상, 그녀는 그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막달라의 비천한 창녀로 귀신에 들렸던 자기를 찾아와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비록 그분의 시신은 사라졌지만 무덤을 다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덤으로 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1-12)

 

빈 무덤에서 마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울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그저 조금 울먹이거나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크게 소리 내며 통곡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른 새벽부터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항유를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귀합니까? 정말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오후 늦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에, 장사 지내고 무덤에 안치하면서 안식일로 들어가게 되어 미처 유대인의 풍습대로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발라 드리려고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이때 얼마나 마음이 슬프고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통곡하며 운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이것은 통곡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이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거기 그대로 있어서 자기가 향품과 향유를 발라 드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랬더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이토록 슬퍼하며 통곡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계획한 대로 향품과 향유를 예수님의 시신에 정성스럽게 발라 드리고 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목표한 것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진짜로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날 아침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슬퍼하며 통곡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 대신 마리아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은 결코 주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신이 없어졌다고 통곡하며 울었지만, 만약 그때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시고 그대로 죽은 채로 계셨다면,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영원히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3)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녀에게 물으십니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4-15)

 

아무리 천사들이 묻고 예수님이 물으셔도, 마리아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나는 그분의 시체에 향품과 향유를 발라 드리기를 원하는데,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척 슬프고 힘들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이라는 틀에 완전히 갇혀서 다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 통곡하며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만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전에 예수님이 계속해서 고난받고 죽임을 당한 후 3일 만에 살아날 거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서 그것 때문에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영원히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니 단순히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죽음의 장소인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제 마리아의 울음은 웃음으로 변할 수 있게 되었고 통곡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5에 보면, 천사들이 근심하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며 시체가 없어졌다고 통곡합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 시신이 사라졌기 때문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났고, 그 주님으로부터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자기 생각에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사실은 그 때문에 나중에 웃을 수 있게 됩니다.

 

혹시라도 그 새벽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발라 드리고서 이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라고 하며 만족했다면, 결국은 영원히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 소망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때 막달라 마리아가 통곡하게 된 것이 사실은 아주 좋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정말 기쁜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어려움을 당해서 불안해하고 계십니까?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 앞에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듯이, 인생의 어려움이 닥쳐와서 염려와 불안으로 괴로워하며 답답하고 안 풀리는 현실 때문에 울고 계십니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6)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동산지기가 아니라 마리아를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마리아 대신 자기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준원아.” 지금 내가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며 나는 왜 이렇게 안 풀릴까?’라고 하는데 얘야하며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내가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불안해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나를 향해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OO.”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왜 자꾸 죽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슬퍼하며 근심합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왜 자꾸 시체를 찾아다니며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괴로워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눈으로 지금의 상황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너무 힘들어서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히려 아주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의 미래를 위해 기쁜 일일 수 있습니다. 지금 웃으면 나중에 울 수 있고, 지금 울기 때문에 나중에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이건 굉장히 힘든 일이고 어려운 일이고 문제입니다. 또 좋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그 자체가 아예 안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을 내가 어떻게 보느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나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내가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두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완전히 낙심하고 근심하고 통곡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거기서 오히려 힘을 내서 내가 이 문제와 맞서 싸우겠다.’라고 하며 나아갑니다. 무엇이 차이를 가져옵니까? 보는 눈입니다. 해석입니다. 일어난 일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모든 것은 나의 결정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도해주셔서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오래전 인터넷에 떠돌았던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을 읽고 크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오늘 제 삶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어요?”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무슨 말이니?”

 

오늘 저는 직장에 가야 하는데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왜 오늘 제가 늦잠을 자도록 그냥 두셨어요? 게다가 오늘따라 자동차 시동도 걸리지 않더군요. 점심시간에는 직원이 제가 주문한 샌드위치를 잘못 만들어서 한참 기다려야 했습니다. 퇴근길에 전화가 와서 받는 순간 바로 전화기 배터리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집에 돌아오는 대로 너무 피곤해서 최근에 구입한 발 마사지 기계에 피곤한 발을 마사지 받으며 편안하게 쉬려고 했는데 작동하지를 않는 겁니다. 오늘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솔직히 말해서 정말 재수가 없었다고요! 하나님, 저에게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저를 사랑하기는 하시나요?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시나요?”

 

그래 말해주지. 오늘 아침 악한 영이 너의 침대 곁에 있기에 내가 천사를 보내서 너의 생명을 지켜주도록 싸우게 했다. 그래서 네가 계속 잠을 자게 한 거다. 네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은 것은, 네가 바로 그 시간에 운전하고 길에 나갔으면 그때 음주 운전자가 오고 있었기에 네 차를 받아서 네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오늘 너의 점심 샌드위치를 만들었던 직원이 사실은 아팠는데, 그 사람에게 있는 균이 너에게 옮으면 네가 아파서 일을 가지 못하게 되니까, 네 점심을 그 사람이 못 만들게 하고 다른 사람이 만들게 하느라 늦어진 거란다. 또 네 전화기 배터리가 그 순간 죽어 버린 것은, 너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너와 통화하며 네가 말하는 것을 녹음해서 나중에 교묘하게 편집하여 다른 사람 앞에 그것을 틀면서 거짓말로 너에게 해를 끼치려 했기 때문에, 아예 네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막은 거야. 발 마사지 기계는 그것이 작동할 때 전력 소모가 너무 커서 네 집의 전기가 나가 버리게 될 건데, 그러면 너는 캄캄한 데 오래 있어야 하고 그것은 너에게 너무나 불편한 일이잖니.”

 

여러분, 지금 나에게 어떤 일이 안 풀려서 왜 나는 이런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라고 혹시 생각하십니까? 내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내가 잘하면 더 사랑하시고 내가 잘못하면 덜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완벽한 사랑입니다. 더 사랑하실 수도 없고 덜 사랑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런 완벽한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로 지금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일도 인도해 주시고 삶의 작은 순간도 인도해 주십니다. 일이 잘 안 풀린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은 뭔가 뜻이 있으셔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지금 당장만 보면서 슬퍼하기도 하고 또 기뻐하기도 합니다. 잘 안 풀리면 슬퍼하거나 짜증을 내고, 일이 잘되는 것 같으면 좋아합니다.

 

제 나이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위의 분들은 1980년대 포크송 가수이자 음유시인으로 불렸던 가수 조동진을 아실 겁니다. 2017년에 7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장 유명한 곡이 <행복한 사람>인데, 저도 중학교 대 처음 기타를 배울 때부터 이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1.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2.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울고 있나요? 울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아직도 남은 별을 찾을 수 있는 두 눈이 있다는 말이니까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외로운가요? 외로워서 힘들어한다면, 아직도 바람결을 느낄 수 있는 마음 즉 감정이 있는 것이니까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대중가요이기는 하지만 참 마음에 와닿는 가사 아닙니까? 가요도 그런 시각을 가지는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왜 그렇게 좁은 시야 안에 갇혀서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며 슬퍼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삶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면서 슬퍼하고 통곡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일이 잘 풀린다고 그것이 반드시 나에게 유익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또 지금 당장 일이 잘 안 풀린다고 그것이 반드시 나에게 나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데도 일이 잘되고 돈도 잘 벌고 자녀도 공부 잘하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면, 그것이 정말 축복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앙이며 저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하는데도 하는 일마다 망하고, 건강도 나빠지고, 사고가 일어나고, 자녀도 문제가 생기고, 일이 잘 안 풀린다면, 그것이 꼭 저주입니까? 아닙니다. 나를 더 크게 쓰시려고 단련하시는 주님의 손길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조금만 인내하며 기다리면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대로 죽은 채로 무덤에 누워 있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 주님을 의지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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