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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8일 주일예배
✦ 예수님의 비유 14 ✦
“회개하고 열매 맺는 삶”
(누가복음 13장 1~9절)
[들어가는 말]
오래전 제가 미국에 이민 와서 대학에 편입하여 다닐 때, 그 근처에 한인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지금도 있습니다). 그때 장로님들을 많이 세웠는데, 놀랍게도 그분들 중 다수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분들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당시 대여섯 명 정도를 세웠습니다. 그중 한 분이 40세쯤 된 분으로 택시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운전하다 강도에게 총을 맞아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분에게는 어린 자녀 둘이 있었고 그 외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비극이었습니다.
장례식에 갔더니 뒤쪽에 있던 어떤 사람들이 서로 조용히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습니다. 그 장로님이 당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고, 교회 봉사도 잘 안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게 사실이라면 교회 일을 제대로 안 할 때마다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럼 그 장로님보다 신앙생활을 더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오래전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교회 내에 일어난 큰 분쟁으로 결국 교회를 사임하고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쯤 그분의 사위가 강도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명문 대학의 박사 과정 학생이었는데, 강도의 총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 목사님이 교회 분열을 일으키더니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 신학생이던 저는 ‘목사가 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동시에 그 목사님보다 더 이상한 목회자들도 많은데 왜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와 비슷한 시절 제가 어느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섬길 때 부흥회가 있었는데, 강사 목사님이 오셔서 많은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중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었는데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살려주셨다고 간증하시며,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집회가 너무나 은혜로웠는데, 집회 후 밖에 나가 보니까 한 여자 집사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황하며 왜 그러시냐고 위로하면서 물었더니, 몇 년 전에 그 집사님의 남편이 강사 목사님과 똑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왜 하나님이 저 목사님은 살려주시고, 우리 아이들도 어렸는데 남편은 데려가셨냐? 너무 서운하다.” 하면서 울먹이는 것을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왜 저 목사님은 살려 주시고 왜 그 남편 집사님은 죽게 하셨나? 목사님 믿음이 더 좋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 집사님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가?’
이처럼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한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거나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성경의 책이 욥기입니다. 욥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엄청난 비극을 당했습니다. 그때 세 친구가 찾아와서 ‘네가 뭔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된 거다. 빨리 회개해라.’ 하고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때 욥은 ‘나는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하고 계속 항변합니다. 그 내용이 욥기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렇게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지난 2001년 9월 11일, 미국이 동시다발적으로 테러 공격을 받아서 미국에 엄청난 재난이 닥쳤을 때, 여러 사람이 미국이 타락하고 죄를 많이 지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재난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가끔 듣다 보면, 뭔가 일이 잘 풀릴 때는 자기가 굉장히 잘해서 된 것처럼 생각하고, 일이 안 풀리거나 꼬이거나 자꾸 막히는 일이 자기에게 벌어지면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저 사람은 뭔가 하나님과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말들을 종종 듣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1. 고난과 죄의 상관관계 (1~5절)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개의 다른 재난 사건이 등장합니다. 첫째로, 제사를 드리는 중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1절)
역사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AD 26년에서 36년 사이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바로 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고 고백합니다. 또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평소에 유대인들을 깔보고 그들의 종교의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전 총독들은 유대 종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인 로마의 깃발을 들고 예루살렘에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런 것을 무시하고 로마 깃발을 들고 예루살렘에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에 빌라도는 그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지만, 유대인들은 죽이려면 죽이라는 아주 비장하고 강경한 자세로 나왔습니다. 결국 그들의 비장한 태도를 확인한 빌라도는, 시저의 형상이 그려진 로마 깃발들을 모두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로 철수시키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새로운 물 공급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서 상수도 시설을 만드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이 필요한데, 가만히 보니까 성전 금고에 돈이 많이 쌓여 있고 쓰지도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돈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바친 거룩한 예물을 그런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며 빌라도가 벌이려던 공사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빌라도가 성전의 돈을 건드리려고 하면서, 유대인들은 당시 실로암 연못을 확장하는 일이 자기들에게 꼭 필요한 공사라는 걸 알면서도 빌라도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로암 공사 도중 쌓았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큰 사고가 터지자, 화가 난 유대인들은 성전의 돈을 강제로 가져다가 그 돈으로 벌이는 이 공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 중 비교적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북쪽의 갈릴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빌라도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비밀리에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빌라도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빌라도에게는 스파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파이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빌라도는 시위를 막기 위해 로마 군인들을 변장시켜서 보통 사람인 것처럼 성전으로 들여보냈고, 결국 그 군인들은 시위 주동자인 갈릴리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주동자들의 피를 성전의 희생 제물로 쓰는 동물들의 피와 섞는 아주 잔인하고도 끔찍한 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그냥 봐도 잔인한 일이고 또한 종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절에 나오는 사건의 배경입니다. 이런 걸 모르고 그냥 읽으면 뭐 그런가 보다 하는데 알고 이것을 보면 실감이 납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3장은 이렇게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사회의 혼란 중에 예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시고 또 기적을 베푸시니까 ‘그 시대는 그냥 평안했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그 당시는 이렇게 사회적인 격변기였습니다. 지금 우리만 사회가 복잡하고 어지러운 게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때도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으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언뜻 보면 실로암 망대가 붕괴한 사건과 뒤에 나오는 무화과나무 비유의 말씀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내용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피가 섞인 일과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뒷부분인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실제 예로 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실 한 가지 교훈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에 이어 계속해서 두 번째 사건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그것은 방금 언급한 대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그 아래 열여덟 명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4). 이 사건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기에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십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2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4절)
예수님은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저 죽은 사람들이 너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답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
3절과 5절 내용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이런 재난들을 접하면서 예수님이 가르치기를 원하신 사실은, 비극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더 악한 죄인이라서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 즉 재난을 당하는 것, 비극을 겪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어버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나 보다. 죄를 지었나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분명히 이 재난과 죄가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고, 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저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저런 것이다.’라고 그 사람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단순히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재난을 당한다고 하는 생각이 옳다면, 뭔가 죄가 있고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이 꼬이지 않거나 더 나아가 비극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옳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큰 고난과 핍박을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또 신약의 사도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또 무엇보다 그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죽임당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예수님이 남들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벌을 받아 그렇게 십자가 형을 당하여 죽으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수많은 비극이 일어납니다. 테러 공격이 있고 전쟁도 있습니다. 미국도 언제 어디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일도 일어납니다. 지난주 뉴스에 보니까, 테네시 주에서는 테네시 주 상원과 하원이 모두 교사들도 총기를 가질 수 있게 하자는 법이 통과됐습니다. 그러니까 교사들이 총을 가지고 있으면 누군가 함부로 학교에 들어와서 총을 못 쏠 것이라는 논리인데 여기에도 허점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지금 총기 난사 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또 자동차 사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또 비행기가 추락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암에 걸리거나 심장마비가 일어나거나 AIDS도 있고, 허리케인과 토네이도와 지진 같은 것이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에 시리아와 터키(튀르키예)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또 모로코와 리비아와 같은 데서는 큰 홍수가 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우리는 멀쩡하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피해를 당한 것입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서 자기가 당하면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저런 벌을 받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이 전부 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은 아닙니다. 가끔은 그럴 수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3, 5). 그 생각은 틀렸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유명한 사건이 나오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질문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렇게 나면서부터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나 어떤 병에 걸려 태어나 난 사람, 또 장애인 같은 사람을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죄이든지 부모의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눈을 뜨지 못했으니까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닌가 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뭔가 영광스러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셨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이런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고난과 재앙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저 사람들에게 일어날까?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그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분명히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냥 알려진 사실만 보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그 뒤에 너무나 많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재난이 닥치는 것을 볼 때 해야 할 질문은 ‘왜 저 사람에게 저런 비극이 일어났는가? 뭔가 죄를 지었나?’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도 똑같은 죄인인데 왜 저런 재난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가? 어쩌면 내 죄가 더 많을 수도 있는데 왜 나는 아닌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저 사람 뭔가 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야?’가 아니라, ‘나도 똑같은 인간이거나 어쩌면 내가 더 악한 죄인인데, 나에게는 왜 저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가?’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고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범하는 죄에 대해 하나하나 모두 벌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내가 남에 대해 험담하는 이야기를 하나 할 때마다 입이 쫙 찢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아마도 지금 입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안 벌어지니까 멀쩡한 줄 아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가 잘못된 걸 봤을 때 눈이 갑자기 안 보이고, 손으로 뭔가 나쁜 짓을 했을 때 손이 갑자기 확 꺾이거나 손목이 잘려버리는 식으로 되면 남아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곳에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에스겔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악인이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내가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 (겔 18:23)
악인이 그냥 죽는 걸 원하시는 게 아니라, 회개하고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죄를 고백하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2.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6~9절)
그런데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오래 지속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심판의 날이 옵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지만, 언젠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6~9절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6절)
구약 레위기 19장에 보면, 새로 나무를 심을 때 심은 지 3년 동안은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되어 있고, 4년째 나는 소산은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후 5년째에는 그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무화과나무를 심으면 첫 4년 동안은 아무 열매도 거두어서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7절)
3년 동안 주인은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레위기에서 3년 동안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그 3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3년이 지나고 또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그 4년째까지 지나고 그다음 3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도합 7년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하심과 인내를 보여 줍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기다리며 참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40년 정도를 더 기다려 주셨지만, 그들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결국 로마 군대에 의해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거룩하게 여기던 예루살렘 성과 그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고 완전히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40년 동안 교회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 믿는 사람도 나왔지만 대다수는 거부했고, 그래서 무화과나무는 아무 열매도 못 맺은 채 결국 찍힘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그 결과를 알고 나서 내리는 해석이고, 본문의 비유는 아무 결론도 맺지 않은 채 끝납니다. 이 나무가 열매를 맺었습니까? 특별히 포도원지기가 돌보아 주니까 뭔가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겁니까? 이 나무가 계속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찍힘을 당했다는 겁니까?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8-9절)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무 결론을 내리지 않고 비유를 마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언젠가 찍힘을 당하게 되므로,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 결단하고 선택할 일임을 강조하십니다.
어느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교수가 있었는데, 목사가 되려고 들어온 신학대학원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을 학기를 시작하면서 이 교수님은 학생마다 세 개의 페이퍼를 내라고 했습니다. 각각 9월 말, 10월 말, 11월 말까지 제출하고 했습니다.
9월 말이 되자 250명의 학생 중에서 225명이 제출했습니다. 그러니까 25명이 내지 못했습니다. 그 25명은 교수님에게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교수님, 제발 우리를 한 번만 봐주십시오.” 그러자 교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생각하고 과제물을 제출하기만 하면 F 학점을 주지는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과제물을 내야 하는 10월 말에는 50명의 학생이 제출하지 않았고, 11월 말이 되었을 때는 100명의 학생이 세 번째 과제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과제물을 내지 못한 학생들을 떨면서 와서 말미를 좀 더 주시면 내겠다고 사정했습니다. 그래서 첫 두 번은 내고 세 번째 못 낸 학생들이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을 계속해서 내지 않은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교수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지금 쓰고 있습니다. 다 쓰는 대로 낼게요. 아셨죠?” 그러나 교수님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들에게 이미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지. 그러므로 이제 자네들은 F 학점일세.”
그러자 학생들이 화를 내면서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교수님, 그건 불공평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공정하게 약속대로 처리해 주셔야지요!” “뭐? 이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그러면 아주 공정하고도 정의롭게 하지. 진작 그렇게 했으면, 자네들은 이미 9월 말로 F 학점이 확정된 거야. 나는 자네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지만, 자네들은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 참 이와 비슷합니다. 아니면 더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할 때, 처음에는 그것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죄 때문에 벌벌 떱니다. ‘아유,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어 어떡하지?’ 그런데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까 ‘어, 이거 봐라? 괜찮네. 죄를 지어도 되나 보다.’라고 하며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인내를 계속 시험합니다. 죄짓는 것을 아주 즐겨하면서 습관적으로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영적으로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도 않고, 사랑하라 하셨는데 미워하고, 그렇게 사는데 아무 일이 안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참고 있으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아무 재난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슬쩍 넘어가 주시거나 내가 지은 죄를 모르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게 회개할 기회를 지금 연장해 주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계시지만, 벌을 내리시기 전에 참고, 참고, 또 참으시다가, 그사이에 그래도 마음을 돌이켜서 회개하며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까? 불공평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십니다. 공평하게 다 죽이셨어야 하는데,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 불공평하게 사랑으로 누구나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법대로 하면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살려놓고 계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만일 우리 죄가 공평하게 처리되었다면, 끝장이 나도 한참 전에 끝장났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의롭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에 대해서 아주 공평하게 형벌을 내리시는 대신, 너무나 불공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벌을 받아야 할 것을 예수가 대신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3. 열매 맺는 인생을 살라
오늘 본문 1~5절 사이의 중심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회개’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또한 6~9절 사이에서는 중심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열매’입니다. 즉, 회개와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무화과나무의 주인은 나무로부터 열매를 얻기를 원합니다. 만일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것은 땅만 버리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7).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기회가 지금 주어졌습니다. 아직도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까?
성경에서 대표적인 열매가 몇 가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눅 3:8) 하고 선포했습니다. 정말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했다면, 정말 회개했다면 회개한 사람답게 삶에서 그 열매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것에 따르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회개했다고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살지?’라고 하면 진짜 회개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야, 회개하니까 저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유명한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데, ‘열매’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온유하긴 한데 절제는 못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절제하게 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오래 참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삶에서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입니다.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은 재난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거나 티브이 뉴스를 보십시오. 온갖 재난과 비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매일 아침 전쟁으로 어제 몇 명이 죽었다, 먹을 게 없어서 몇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얼마 전 토네이도로 또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들이 나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죽거나 해를 당한 것입니까? 나는 그들보다 의롭고 선하기 때문에 지금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5).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를 많이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신뢰한다면, 그들을 향한 주님의 선한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난을 당해서 지금 죽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불행하다고 평가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불행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이 그 일을 당한 사람에게 오히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 왜 그런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을 놓고 볼 때, 재난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열매를 맺으라는 경고가 됩니다. 그러므로 뉴스나 인터넷 신문 등에서 이런 재난 뉴스를 접하실 때 ‘아이고, 안 됐네.’ 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나는 왜 저렇게 되지 않을까? 빨리 회개해야겠구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고 스스로 깨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는데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은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출발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굉장히 맞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회가 많이 주어졌는데도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에 대해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누구의 열매입니까? 어떤 열매입니까? 매일 삶 속에서 항상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